21세기 중국 정치 - '성공의 역설'과 중국적 사회주의의 미래
서진영 지음 / 폴리테이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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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질문은 중국의 민주화는 어떻게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이다. 답은 뻔하다. 외국의 학자들도 심지어는 공산당 간부들도 내심으로는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데 이론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중국에서 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가를 답해야 하고 그 답을 하려면 중국의 정치사를 따라가면서 중국의 특수성을 알아봐야 한다.

먼저 저자는 1989년 사회주의가 동시에 붕괴하던 때 왜 중국의 사회주의는 붕괴하지 않았는가? 란 질문을 던진다. 저자의 답은 문화혁명 때문이다.

중국은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스탈린주의 모델에 따른 국가건설을 시작햇다. 스탈린주의는 경제적 특징을 요약하면 국가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자본가 계급 대신 국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면서 자본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자본가가 되면서 당과 국가의 관료는 특권계급이 되고 강력한 기득권을 갖게 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바로 이 기득권의 저항때문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정치개혁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사회주의권의 문제는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으로 경제가 실패했다는 것이었고 고르바초프의 관심 역시 경제에 있었다.

그러나 경제를 개혁하려고 하니 기존의 정치체제에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저항했고 고르바초프의 경제개혁은 좌절한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경제개혁을 하려면 정치개혁을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의 개혁은 기득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에서도 스탈린주의의 결과로 소련과 같은 특권층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특권층은 문화혁명으로 약화된다. 문화혁명의 목표가 그들을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개혁을 시작했을 때 목표 역시 사회주의 경제의 무능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그 개혁에 저항할 당과 국가의 관료들은 문화혁명 때문에 약화되어 있었고 그의 개혁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화혁명의 유산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바꾸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공산당의 근본이념을 무너트리는 일이다. 그러나 문화혁명은 그 이념에 대한 신뢰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광란의 시절을 겪어야 햇던 중국인들은 공산주의는 물론 어떤 이념에 대해서도 냉소적이 되어 있었다. 이를 중국에선 ‘신심의 위기’라 부른다.

이념에 냉소적이 된 것은 당관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화혁명의 타깃이 되어 숙청당해야 햇던 그들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문혁 4인방을 정점으로한 당내 좌파들에 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했고 반좌파연합을 만든다. 당시 당에서 덩샤오핑만한 연륜과 인망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반좌파연합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마오의 유산이 마냥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78년 개혁개방 이후 30년 동안 중국의 경제성장 속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성장이 가능햇던 것은 마오의 유산 덕분이었다.

52년 이후 마오는 스탈린식 계획경제로 선회한다. 스탈린주의 경제정책의 특징은 도시화와 산업화이다. 특히 중공업에 올인하는 것이 특징이다. 소련도 혁명 당시 후진국이었고 후진국에서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경제의 기초가 되는 중공업 인프라에 집중했다. 중국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마오 시절 중국의 경제성장은 당시 개도국에선 대단히 빠른 속도였다. 물론 그런 속도는 모든 자원을 중공업 육성에 몰아넣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덕분에 마오 시절에 기초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기초 위에서 덩샤오핑 이후 30년의 고속성장이 가능햇다.

그러나 마오 시절의 문제는 중공업에 올인했다는 것이다. 중공업은 산업의 특성상 스탈린주의의 계획경제와 잘 맞았다. 그 결과 소련과 마찬가지로 농업과 소비재를 만드는 경공업이 희생되었고 가용자원을 중공업에 몰아넣기 위해 내핍을 강요했기에 중국인의 생활수준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경제성장률은 올라가도 ‘빈곤의 평등’이 강요될 수 밖에 없었다.

문화혁명이 낳은 ‘신심의 위기’와 ‘빈곤의 평등’은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무너트리는 것이었고 체제위기를 낳았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개혁의 방법이었다. 덩샤오핑의 지지기반인 반좌파연합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마오주의에 대한 반감이었고 마오가 낳은 정당성 위기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위기를 해소하려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고 비효율적인 계획경제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햇다. 그러나 개혁이 필요하다는 총론에는 이의가 없지만 개혁의 범위에 대한 각론에선 보수와 개혁파가 당내에서 끊임없이 충돌했고 그들의 논쟁과 권력투쟁은 89년 천안문 사태까지 끊이지 않는다.

개혁파는 시장경제를 도입해 고도성장을 이끌어내어 경제개혁에 관해선 보수파의 입을 다물게 한다. 물론 경제개혁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국가체제 다시 말해 스탈린 체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고 개혁은 체제의 핵심인 도시와 국영산업이 아니라 농촌과 주변부에서부터 조금씩 진행된다. 그 성과가 눈에 보이면 실적을 근거로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개혁이엇다. 개혁은 정당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공산당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내 급진파는 경제개혁을 위해서도 정치개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문화혁명이 낳은 신심의 위기가 낳은 현상이었다. 보수파는 당연히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86년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나면서 학생들의 명분인 민주화에 동조적인 조자양을 보수파가 공격해 물러나게 한다.

그 뒤를 이어 총서기가 된 후야오방은 보수파와 개혁파의 절충을 시도한다. 그의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후에 자오쯔양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과 3대 대표론으로 발전한다. 이후 당내 주류 개혁파의 논리를 제공한 후야오방의 이론적 근거는 신권위주의론이다.

신권위주의의 역사적 경험은 한국을 포함한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경험이엇다. 권위주의 국가가 정치적 안정을 제공하고 그 안정 위에서 경제발전이 가능햇다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공산당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보수파와 타협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신권위주의는 30년동안 중국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나 한국의 유신체제에서도 그랫듯이 신권위주의는 위태로운 묘기에 가깝다. 신권위주의 체제의 정당성은 결과에 의존한다. 경제가 발전하면 만사가 잘 돌아간다. 보통 서구의 학자들은 이런 정치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속 앞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그랫듯이 신권위주의의 성공은 신권우주의의 무덤을 판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성공의 역설이다.

역설은 두가지이다. 첫째 개혁개방 이후 고도성장이 가능햇던 것은 마오주의의 족쇄에서 풀려났기 때문이다. 마오주의의 족쇄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당국가의 전체주의에서 지방을 풀어주고 개인을 풀어주어 시장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덕분에 경제는 경이적인 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비싼 것이었다.

경제발전에 비용을 대기 위해 중국정부는 무료로 보편적으로 국가가 제공하던 교육과 의료, 연금과 같은 혜택을 줄였다. 불평등의 조건을 만든 것이며 이후 덩샤오핑의 선부론(먼저 부자가 될 수 있는 있으면 되게 해야 한다)은 부의 풀평등을 심각한 수준으로 늘렸다. 상하이, 베이징과 내륙의 소득격차는 10배에 달하며 불평등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경고수준인 4.2를 넘어 빠르게 높아지고 잇다(지니계수가 5이면 혁명이 일어날 충분한 조건이라 본다) 후진타오의 조화사회란 말은 바로 이런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는 불평등만이 아니다. 경제성장으로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경제성장으로 혜택으로 입어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은 신권위주의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본다.

현재 그들은 당연히 신권위주의의 지지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한국, 대만에서 그랫듯이 그들도 권위주의의 해체를 원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은 현재로선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현체제를 지지한다. 그리고 그들이 현체제에 도전할 힘도 없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와 같은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저자는 본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이 미약했고 지배 엘리트들이 체제를 지키려는 의지가 확고했기에 천안문 사태는 위기로 비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한국에서 그랬듯이 이전까지 국가만 있던 곳에서 실질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민사회가 태어나 자라고 잇다는 것이다.

후진타오나 원자바오의 말을 보면 내심으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당내 주류인 개혁파들은 공산주의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공통된 생각은 어느 당간부 저서의 제목처럼 ‘민주는 좋은 것’이다는 것이다. 시민사회 역시 자신들의 필요를 더 잘 만족시켜줄 체제로 민주주의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의 길은 그리 순탄한 것이 아니다. 공산당을 대신할 세력은 중국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당국가체제를 해체하는 것은 소련 붕괴 후의 혼란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의 체제에 도전할 시민사회의 힘도 자라날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저자는 권위주의에서 민주화가 일어난 사례들을 강한/약한 국가 X 강한/약한 시민사회 의 도식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한다. 그에 따라 4가지 시나리오 중에서 저자는 중국 역시 민주화의 길로 가는 이행기에 접어들었지만 그 경로는 긴 여정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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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단 노자 - 왕필(王弼)·소자유(蘇子由) 등 선비들의 <노자>풀이
초횡 엮고 씀 . 이현주 옮기고 씀 / 두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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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시절 중국학 분야의 기본 서적은 이러했다. 당시 서클이 사서강독을 하던 곳이었는데 그 서클의 기본 텍스트는 이러햇다.

한문 자전으로는 보통 민중서림에서 나온 두꺼운 ‘한문대자전’을 사용했다. 개인적으로는 들고다니기 좋은 사이즈로 나온 금성출판사의 자전을 사용했었다. 그걸 보고 선배가 민중서림의 것을 쓰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보던 기억이 난다. 민중서림의 자전은 지금은 가죽장정에 인디언 페이퍼를 사용하지만 그 당시는 판지장정이었기 때문에 선배들 자전을 보면 너무 자주 펴보다보니 장정이 헤어진 경우가 많았다.

중국학 분야에선 전공이 어떻든 꼭 보아야 하게 마련인 것이 사서였다. 사서의 기본 텍스트는 당연히 주자의 사서집주였는데 강독에 사용하는 판본은 성대에서 사서집주대전을 영인한 것을 사용했다. 종이질은 그리 좋지 않아 갱지였었는데 본문에 더 작은 글씨로 주자가 달리고 그 주자주에 대한 세주가 한칸에 두줄로 달려있었다. 강독을 하려면 여러가지 구할 수 있는 모든 주석을 다 참고해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세주까지 보아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더듬더듬 해석해야 했던 세주를 논어만이지만 번역한 책이 나온 것을 보니(‘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 세월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날개를 단 노자’란 이상한 제목으로 나온 이책은 그런 서적의 하나이다.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과 마찬가지로 노자를 읽을 때 볼 수 밖에 없는 기본서적을 번역한 것이다.

보통 제자백가의 기본판본으로 유통되는 것은 19세기 일본에서 완성된 ‘한문대계’ 판본이 기본 텍스트이다. 학부 다닐 때 학교에 외서 영인본을 팔러오는 양복 입은 아저씨들을 통해 보통 구입했었는데 시중에선 대만에서 복각한 것으로 명동에 가면 국제우체국 옆에 대만정부가 운영하는 대한문화예술공사에서 낱권으로 싸게 구할 수 있다.

한문대계는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과 함께 19세기 일본 중국학의 위업 가운데 하나이다. 서클에선 강독을 사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학 중엔 사기열전, 고문진보를 햇기 때문에 자전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대한화사전을 펴보아야 하는데 판형이 백과사전만한 13권짜리 사전으로 동아백과사전보다 글씨는 더 작고 페이지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만큼 되는 인디언 페이퍼에, 영어사전 정도의 글씨로 다단 편집된 엄청난 분량이었다. 한자의 의미를 거의 다 정리했고 그 의미마다 중국고전의 용례들을 찾아 달아놓은 대작이다. 콜린스의 영어사전의 용례를 생각하면 된다. 아직도 이 사전을 넘어서는 것은 나오지 않았고 나올 것같지도 않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한문대계는 한문전통에서 기본서적으로 간주되는 서적들을 선정하고 기본이 될 주석본을 골라 전집으로 묶어 인쇄한 것이다. 이 전집이 세기의 업적이 된 것은 그냥 선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두점을 찍고 일본식 토를 달았다는 데 있다. 텍스트의 기본적인 의미를 확정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중국학의 캐논을 확정하고 그 캐논의 기본 해석이 될 주석서를 선정하면서 그 의미까지 정립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일본 중국학의 업적을 모두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정작 중국학의 본고장이 되어야 할 중국에서 한화대사전과 같은 사전은 나온 일이 없다. 한문대계와 같은 작업은 20세기 들어 진행되긴 했지만 한문대계의 규모로 진행된 것은 없다. 그와 비견될만한 작업으로는 중국정부 차원에서 진행한 25사의 편찬작업이 있었다. 80년대에 완료된 것으로 아는 이 작업의 내용은 사기에서 시작해 청사로 끝나는 중국의 정사에 구두점을 찍는 것이엇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책은 한문대계에 노자의 텍스트로 선정되어 있는 老子翼에 대한 번역이다. 대한문화예술공사에서 보통 주석서가 아니라 노자만 달랑 사면 기본 텍스트에 왕필주가 달린 것을 준다. 사서에서 주자주가 그렇듯이 노자는 왕필주가 기본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90년대에 왕필주를 번역한 것이 나왔었고 그후에도 다른 번역이 나왔었다. 그러나 한문대계에 선정되어 있기 때문에 노자의 기본서적으로 통용되는 노자익은 어쨌든 알아서 보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건 전문가의 기본일 뿐이고 그런 사람은 당연히 한문이야 기본능력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보아야 했던, 각자 알아서 능력껏 해석해보던 그 텍스트를 번역했다는 것이 이책의 의의이다.

한문대계의 텍스트가 다 그렇듯이 노자익 역시 그때까지 전해오는 주석서들의 종합이다.

노자익의 성격을 보자면 노자익은 그러나 사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보통 기본주석으로 생각되는 것을 중심으로 보지 않는 주석서들이 선정되었다. 사서의 경우 주자주가 부기되기는 하지만 앞에는 다른 주석들이 채택된다. 노자익도 왕주를 포함하긴 하지만 첫머리에 오는 주석은 대개 소자유의 것이고 왕주는 뒤로 배치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선 사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주를 아예 빼버린 경우도 있다. 주자학을 정통으로 보지 않았고 대륙의 학풍에서도 자유로웠던 일본의 학풍을 반영한 편집이랄 수 있다.

그러면 노자익의 번역인 이책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무난하다. 그러나 어차피 한문대계의 원본 없이 이책만 보기는 그리 권할 만하지는 않다. 번역자 역시 이책만으로 보기 보다는 한문대계의 보조로서 원문을 같이 볼 것을 생각한 것인지 직역 위주이며 주석의 원문을 빠져 있다.

말하자면 대중적인, 교양서로 읽힐 책이 아닌 것이고 시장성이 별로 없는 서적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책이 나오기 시작햇다는 것이(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도 그렇고) 놀라운 일이다. 이런 책이 나올 수 잇다는 것이 그만큼 한국의 수준이 올라가고 잇다는 증거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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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세계 10대 문명 6
프란체스카 로마나 로마니 지음, 이유경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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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리뷰에서 이 시리즈의 인도와 그리스를 다루었었다. 이슬람 문명을 다루는 이책 역시 앞에서 소개한 책들과 성격을 같이 한다. 그 문명의 역사에 대한 개요를 다루고 그 시기에 해당하는 미술과 건축을 큰 도판으로 같이 배치하는 구성으로 되어 잇다.

그러나 이책은 이탈리아에서 유럽권 또는 미국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의 경우는 이미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다고 가정하고 미술과 건축사의 흐름을 중심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인도나 이슬람과 같이 사전지식이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문명의 경우는 정치사의 흐름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여 문명의 역사에 대한 개요를 파악하도록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는 미술사와 건축사가 정치사와 함께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이슬람을 다루는 이책의 경우는 정치사를 다룰 때 미술, 건축에 대해선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인도에 비해서도 이슬람에 대해선 사전지식이 더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동원되는 도판도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삽화 위주로 편집되어 잇고 나머지는 그 시기에 지어진 주요건축물에 집중된다.

그외에도 이책의 특징은 예술사로 쓰여지기 보다는 이슬람 문명 자체에 대한 입문으로 쓰여졋기 때문에 이슬람 종교에 대한 서술과 과학, 철학, 문학과 같은 문화에 많은 지면이 할당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책은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달리 이슬람 문명 자체를 이해하는데 더 큰 비중이 두어져 있다. 그리고 도판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보조수단으로 활용되는 면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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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 트로이 전쟁에서 마케도니아의 정복까지
김진경 지음 / 안티쿠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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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대로 이책은 고대그리스사 입문서이다. 이책은 전문가나 전공자를 위한 서적이 아니다. 일반인을 위한 교양역사로서 쓰여진 책이다. 그러나 저자는 서문에서 이책의 목적을 말하면서 ‘이야기 ~사’와 같은 류와 같은 책은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책들은 깊이가 부족하다. 다시 말하자면 읽고 나서 남는 것이 없다. 너무 쉽게 쓰려다 보니 감각적이 되기 쉽고 그러다 보니 조금만 어려운 내용도 적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읽고 나서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다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피상적인 책이 되지 않으면서 그 시대에 대한 그림을 그려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자신이 대학에서 수십년간 해온 강의를 그대로 책으로 옮기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다는 푸념을 책의 서문에 적고 있다.

강의에서 하듯이 이야기를 섞어 쉽게 다가오도록 한다는 뜻이다. 실제 이책을 트로이를 발굴한 슐리히만이 실은 떠벌리기 좋아하는 허풍선이에 사기꾼이었다는 일화 같은, 강의실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기억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해 겹들이는 양념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식 강의 스타일은 일화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기록이 남아있는 역사시대를 다루는 부분에선 주로 그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가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런 정책을 썼는지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등을 다루는데 많은 지면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원전의 기록이 상이할 때는 헤로도투스의 역사에는,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는,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는 어떻게 소개되어 있는가 등도 소개한다.

이야기식 스타일은 학설을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학설들이 대립되는 부분에선 여러 학설들을 짧고 정연하게 정리하면서도 왜 학설들이 대립하게 되었는지를 중심으로 실제 논쟁을 보듯이 논리를 재구성한다. 그러면서 그 학설 중에 자신은 이것이 더 설득력있다는 평결을 내리는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학설을 나열만 하고 판단은 알아서 하라는 식과는 다르다.

이 정도면 이책이 어떤 종류의 책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학부에서 고대그리스사 전공 강의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재미없고 지루한 강의가 아니라 명강의로 유명한 강의를 신청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책의 스타일은 알았다. 재미있다는 말이군. 그러면 이책의 내용은 어떠한가? 이책의 내용은 한정적이다. 고대그리스사 입문이라면 다룰 수 밖에 없는 레퍼토리가 잇다.

그리스의 지리적 특성, 미노아 문명, 미케네 문명, 암흑시대, 폴리스의 성립, 페르시아 전쟁, 펠레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더 제국, 헬레니즘. 고대 그리스사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주제이다. 상당히 방대하는 것을 알 수 잇다.

저자는 그 방대한 주제를 모두 자세히 다루기에는 시간의 제약이 있다고 느낀다. 이야기식 강의라는 것이 시간을 많이 소모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방대한 주제를 다루려면 취사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주로 정치사에 국한하는 것으로 타협한다. 이야기 거리도 많고 우선 정치사를 파악해야 경제, 문화, 사상과 같은 다른 주제들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책에선 알렉산더의 죽음으로 책의 내용이 끝난다. 그의 사후 제국의 분열이라든가 헬레니즘 시기를 다루지는 않는다. 분량상의 제한 때문이라 생각된다.

요약하자면 이책은 초심자가 고대그리스사를 재미있고 쉽게 접하면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그런 목적은 일단 이책에서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공을 위해 이책에서 다룰 수 없었던 내용들도 많다. 그러므로 이책은 이후 다른 책들을 읽어나갈 발판으로 간주해야지 이책 한권으로 고대그리스사의 개요를 잡을 수 있는 성격으로 쓰여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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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 정치지리의 세계사 책과함께 아틀라스 1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지음, 김희균 옮김 / 책과함께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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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KBS 1에서 9시 뉴스가 끝나면 10분 짜리 시사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편성된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 이름이 ‘세계는 지금’으로 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영어공부 하느라 들었던 ABC의 나이트라인이나 경영대 로비에 무료로 나눠주던 아시아판 월스트리트 저널과 다루는 폭이나 분석의 깊이에서 그리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관점이 주류인 영미권의 관점에서 그리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변방의 국가가 그런 프로그램을 매일 10분짜리로 장기간 편성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엇다. 물론 시청자들의 관심이 그리 많지 않았는지 몇 년이 지나더니 시간이 뉴스라인이 끝난 시간으로 넘겨지더니 슬그머니 없어졌었다. 그러나 그런 기획 자체를 할 의욕을 가졌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유럽방송국의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마 이책의 번역본 편집자도 ‘세계는 지금’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번역서의 제목을 붙인 것같다.

이책은 바로 유럽판 ‘세계는 지금’을 책으로 낸 것이다. 이책은 독일과 프랑스가 합작으로 만든 프랑스의 아르테 방송국이 1990년부터 편성한 ‘지도의 이면’이란 다큐멘터리 시리즈이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맡아 진행하고 있는 저자는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말한다. “”’지도의 이면’은 역사와 지리라는 무기를 들고 세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냉전체제의 몰락,. 소련의 해체, 독일의 통일, 유고슬라비아의 분열, 지구 온난화 등 이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정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지리학으로도 부족하다. 세상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잇다. 지도의 이면은 그런 말을 하고 싶어한다.”

이책의 목차를 보면 시사를 주제로 한다. 왜 체첸분쟁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가? 유럽연합은 왜 계속 확장되는가? 브라질의 역동성과 문제는 무엇인가? 아프리카의 문제는 무엇인가? 송유관의 지정학은? 등과 같은 주제들로 어느 정도 수준있는 언론이라면 다루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책에 편집된 ‘지도의 이면’이란 프로그램은 그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프로그램의 책임자는 지리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에는 지도가 주인공이고 지도를 설명하면서 현재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지정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이 지정학적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시리즈의 원고를 쓰는데 아날학파의 거두로 유명한 조르즈 뒤비와 독일 역사학자인 아르노 페터스가 참여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책의 내용은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언론의 보도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이책은 그 배경의 논리에 더 초점이 가있는 것이다.

이책의 성격이 짐작이 갈 것이다. 물론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그리 깊이 있게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략적인 감을 잡는데는 충분하다.

이책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이런 프로그램이 정규방송으로 20년이 넘도록 진행되고 잇다는잇다는 것이었다. KBS 1에서 비슷한 시기에 기획했던 ‘세계는 지금’은 시청자의 무관심 때문에 표류해야 햇지만 지구 반대쪽에선 장수하면서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반대쪽으로 번역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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