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 현대사회의 딜레마들에 불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데이비드 로이 지음, 허우성 옮김 / 불광출판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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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향한 진군은 우리 이웃, 사회, 나라와의 따스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유대감을 만들어냈고 소외와 혼란이라는 불편한 암류를 완전히 제거했다. 전쟁의 매력은 이것이다. 전쟁은 그 파괴와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에서 갈망하는 것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목적, 의미, 삶의 이유를 준다. 전장에 있으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는 피상성과 권태가 뚜렷해진다. 전쟁은 우리를 고귀하게 해준다.”

 

9/11 사태 때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몰고 돌진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때문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영적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난민촌에서 미래에 대한 별 희망도 없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나 TV 채널 서핑에 빠져 있거나 상점에서 쇼핑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의기양양한 대안인가? 영적 투쟁은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영웅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위험하고 혼란스럽고 격렬한 바다(현대사회)에서 종교는 형안의 항구에 내린 닻이다. 깊고도 거의 초월적인 의식수준에서 그들(종교 테러리스트)은 자신들의 삶이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감지한다. 그리고는 그 혼란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느끼면서도 자신들 역시 그 혼란의 희생자라 생각한다. 그런 세계에서 종교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종교적, 인종적, 국가적 공동체보다는 위험에 처한 자신의 개인적 자아에 주로 관심을 쏟는다.”

 

그들이 느끼는 무의미함은 성()의 차원이 세속화된 이 세계에서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저 폭력적인 종교운동에도 일리는 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그들과 공유하는 기본 문제는 다른 종교들이 제기하는 위협이 아니라 이데돌로기가 아닌 체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세속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인데도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세계인 것처럼 가장ㄴ다는 점이다.”

 

세속주의는 아주 독특하고 특이한 현상이다. 성과 속이란 대립개념은 성의 증발 때문에 태어났다. “성속의 구별은 우리의 결핍감을 달래기 위한 더욱 개인적인 길이었다. 루터는 신앙을 내면화하고 신의 거룩한 영역을 세속의 저 높은 곳에 투사함으로써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서로 연속한다는 중세의 세계관은 무너졌다. , 둘 사이에서 새롭게 해방된 공간은 새로운 것, 곧 세속적인 것을 창조햇다.” 왜 이것이 문제인가? “세속세계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세속세계에는 우리의 결핍감을 이해하고 해소할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영적 문제이다.”

 

그 결핍감을 기독교에선 원죄란 말로 설명했고 여러 종교들이 그것을 설명하고 처리할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그런 처리는 가능하지 않다. “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많은 사람을 오래 살게 하고 때로는 죽음을 육체적으로 덜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잇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공허에 대한 해답은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 줌심의 바닥없는 구멍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가 갈망하는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방식은 우리의 삶의 잘못되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의 개인적인 결핍을 묶어서 그것을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는 단순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근본적인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저자는 방법을 불교가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런 결핍감, 뭔가 없다는 느낌, 내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우리의 잘못된 자아 감각이 갖는 어두운 면으로 본다.” 즉 고(dukka)이다.

 

고의 요점은 돈이 많고 건강한 사람들조차도 근원적인 불만, 곧 부단히 괴로운 불편(dis-ease)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전통에서 고란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요가도 자이나교도 그외 수많은 (불교의 입장에서) 외도들 모두 고의 문제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고를 자아감각과 연결시킨 것이 불교의 진정한 업적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아가 바로 고이다

 

연기란 말은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구성된다는 말이다. 자아감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아에 대한 나의느낌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런 무상한 과정들은 다른 과정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로부터 분리된 자아감각을 발생시킨다. 만일 그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을 모두 제거한다면 그것은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마지막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중심에 나 있는 텅빈 구멍은 우리를 매우 괴롭힌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우리 자신과] 일치시킬 것도 매달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즉 내가 라는 건 구성된 느낌으로서의 자아가 근거 없는 것이고 그 근거 없는 자아가 비실재성과 불안전성(insecurity)이라는 근본적인 느낌의 출몰로 괴로움을 겪는단 말이다. 자아감각은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 그것은 안정적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無我란 말의 요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실재감을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으로 경험한다.” 문제가 있다는 그 느낌, 그 불편함이 바로 고의 내용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억압하려 한다.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불편함, 자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느낌,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 뭔가에 매달리려 한다. 그 뭔가가 전쟁이 되고 돈이 되며 명성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란 결핍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돈은 우리가 그것으로 어떤 것이든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집단 속에서 우리가 실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명성 역시 비슷하다. 만일 내가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면 그만큼 나는 정말로 더 실재한다. 그러나아무리 돈이 많아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다 해도 우리의 결핍감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욕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권력이 우리 실재의 가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을 갈망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지배햇다. 르거나 그들은 실제로 안전하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을 통제하지는 못햇다. 권력을 가장 많이 요구하는 자는 가장 지독한 편집광이 되고 만다.”

 

내가 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우리는 不善하게 된다. 불교가 말하는 三毒, “탐욕, 악의, 망상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아주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 있는 동기들이다.” 그것을 불교에선 이라 말했다. “나의 자아감각이 내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면 업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중요한 건 내 존재를 바꿈으로써 곧 내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재구성함으로써 내 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업을 바꾸어야 하는가? “내가 만일 탐욕, 악의, 망상에 따라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을 조종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나 역시 그들로부터 더욱 분리된 존재라고 느끼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의 자아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방어하고 띄우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잘못된 자아 감각을 강화한다. 내가 (삼독의 반대인) 관대함과 자비로 움직일 때 나는 여유를 갖고 마음을 열며 덜 방어적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모두를 위해 고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불교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텅 비어 잇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방식이 문제를 키운다.” 무아의 요점은 자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아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제거는 불가능하다.”

 

고는 일반적으로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기본적인 불편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낫다. 고란 무언가를 성가셔하는 깨닫지 못한 마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장 근본으로 불교에서 강조하는 바는 고와 자아 사이에 연관관계가 잇다는 통찰이다. 내가 살아가고 잇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잇다고 자아가 느끼는 것, 바로 여기에서 가장 깊은 좌절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런 분리감은 환상이며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망상이다.”

 

그러나 불교의 통찰은 새로운 질문으로 바꿀 필요가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지옥에 좌선만 하는 사람을 위한 특별 장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지옥으로 치닫는 바깥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자신에게만 빠져서 방석에 앉아 좌선을 한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삼독 역시 집단적으로 작동하는가? 집단자아가 있다는 말은 집단적인 탐욕, 집단적인 악의, 집단적인 망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이런식으로 질문을 던지면 답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현재 경제제도는 탐욕을 제도화하고 군사주의는 악의를 제도화하며 기업화된 대중매체는 망상을 제도화한다. 이와 같은 제도화된 삼독의 본성을 깨닫는 일을 우리가 영적 수행의 결과로 얻은 개인적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하다. 실제로 방석 위에서 좌선하여 얻는 개인적 깨달음은 그러한 사회적 깨달음으로 보완될 때까지는 불완전하다. 보통 개인 차원에서 달성하는 확장된 의식을 수행의 목표로 떠올리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집단 망상을 걷어내어 사회, 경제, 생태에 관한 이분범에 감춰진 실체를 폭넓게 이애해야 한다. 개인의 고와 집단의 고가 같이 간다면 오늘의 거대한 사회, 경제, 생태적인 위기는 동시에 영적인 도전이며 그러하므로 그에 요구되는 대응에도 영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불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 저자는 본다.

 

내면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무임을 본다. 그것이 지혜이다.

바깥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모든 것임일 안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 둘 사이에서 내 인생은 맴돈다.

나사르가다타 마하라지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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