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 세계적인 뇌과학자가 우울한 현대인에게 보내는 감동과 희열의 메시지
게랄트 휘터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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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뇌가 유죄입니다얼마전 미국의 법정에서 나온 말이다. 피고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뇌가 살인을 했다는 말이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 말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뇌과학의 설명에 따르면 피고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유전자를 타고 났고 그 유전자가 살인을 꺼리지 않는 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피고의 살인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유전이며 뇌란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묻는다.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생물학적 조건이 우리 안에서 무엇이 일어날지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생멸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생물이 살아온 역사에 좌우된다. 즉 생명 체계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매개에체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생물학적 결정론을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잘못이다.” 인간은 타고난 한계 내에서만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인간이 무엇이 될지는 그 한계 위에서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이 주제는 철학과 사회과학에선 구조와 헹위자란 이분법으로 반복된다. 그 이분법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정리했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유의지 또는 결정론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는 닥치는 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 배운다. 이때 어린아이 또는 노인으로서 누군가 무엇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에 관심을 갖고 그리하여 그리하여 열광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이다.”

 

우리가 누구 누구는 어떤 사람이라 말할 때, 나는 어떤 사람이라 말할 때 그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뇌의 뉴런들이다.

 

외향성/내향성, 신경성, 성실성, 친화성, 개방성, 5 factor model의 변수들이다. 최근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이런 변수들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며 유전으로 결정되는 것은 뇌의 호르몬 시스템이라 한다. 성격은 유전이란 말이 된다.

 

물론 5가지 변수로 모든 사람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변수를 타고 났더라도 그 변수의 결정도와 그 변수가 발현되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전으로 타고난 것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는 뇌의 건설현장에 달려있다.

 

인간의 뇌가 개인별로 고유한 특징을 띠며 형성되는 기본 원리는 실상 아주 간단하다. 애초에 뇌 안에는 언젠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다. 출생 전 이미 과다한 신경세포가 만들어지는데 이 중 어떤 식으로든 기능적인 연결망에 편입되는 것만이 마지막에 만고 나머지는 없어진다. 평균 1/3이 사라진다.” 그리고 무엇이 살아남을지는 환경에 달려 있고 그 환경은 처음에는 가족이며 후에는 친구, 선생님 등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성장기의 인간에게 영향을 주면서 복잡한 뉴런 연결과 시냅스 회로의 형태로 뇌안에 자리를 잡는 가장 중요한 경험은 다른 아닌 타인과의 생생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디른 동물의 뇌와 구별되는 뇌 부위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형성되고 구조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뇌는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뇌는 사회적 기관이다.”

 

Nature or Nuture, 본성이냐 양육이냐란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자유의지냐 환경이냐의 논쟁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맑스의 말마따나 인간은 자신을 만들기 때문이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자신은 그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 인간 자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아이의 일상 세계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아이의 뇌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아이가 삶의 과제를 헤쳐 나가는데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즉 아이 자신이 열광하는 것들만이 영향을 준다. 아이들에게 이는 우선적으로 자기 몸의 기능과 동작을 조절하는 일이고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애착 대상과 관계를 맺어 가는 일, 그리고 점점 복잡해지는 일상 세계를 하나하나 발견하고 새로이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이가 열광하는 것,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바로 긴밀한 유대의 경험, 그리고 성장하고 자기만의 능력을 습득해가는 경험이다. 이 두가지는 기본 욕구로 자리잡으면서 장차 아이의 기대치를 좌우하게 되낟. 그리하여 사람은 평생 동안 유대감과 자유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한다. 두 기본 욕구 중 어느 하나가 채워지지 않으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결핍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찾는데 실패한 사람은 일단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도 얻으려 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리만족이라 불리는 것인데 이제부터 그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사람이 원래 지녔던 열린 자세, 관계를 맺는 능력,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창조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TV 시청이나 채팅, 쇼핑, 아니면 남태평양 바다에서 보낼 다음 휴가 여행처럼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쉽사리 중요성이 부여된다.”

 

저자는 유대감과 자유를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두 가지 기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하나는 유대관계를 맺고 친밀해지고자 하는 욕구 다른 하나는 성장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다. 다시 말해 남들과 함께 자기 가진을 뛰어넘어 성장할수 잇을 때 인간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 행복을 결정하는 두가지 욕구는 서로 모순은 아니더라도 긴장관계에 있다. 남과 유대감을 갖고 소속감을 갖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이들은 타인들 또 그들의 행동방식, 확신, 의견, 생각 등에 점점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아이 뇌 안에 생기는 새로운 회로 패턴들은 아이 몸의 경험과 지각을 통해 형성된 이전의 뉴런 연결망과 불화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 이를테면 몸을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처벌이나 심지어 어른들의 본보기만으로도 제약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멋대로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는 아이를 생각해보라. “유아의 역우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몸 전체를 사용하려는 충동이 아직 남아잇지만 이 역시 나중에는 억제되기 마련이다. 불안과 고통 지나친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들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점점 통제를 받게 된다. 이 같은 적응과정을 거치면서 어릴 적 자신의 사고, 감정, 행동에 주로 영향을 끼쳤던 것, 곧 자기 고유의 몸 체험, 감각 체험으로부터 차츰 멀어진다. 또 그때까지 자아를 이루던 아주 자연스럽고도 근원적인 요소들을 일제히 억누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간다. 몸 자체를 포함해 몸에서 비롯되는 욕구들은 소속감, 인정받기, 정체성 발달, 자아 개발 등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걸림돌로 여겨지면서 억압되고 분리된다. 어쨌거나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지성과 감정, 두뇌와 몸을 분리시키는 그 같은 기이한 순응과정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 순응의 과정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결과는 똑같다. 태어난 후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쌓은 그리하여 뇌안에 자리잡게 된 경험들은 이전의 몸 체험, 감각 체험과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성경 속 이미지는 대다수 사람들이 사회화 과정에서 체험한 내용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과 부딫히면서 아이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관심에 따라 자신의 뇌를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며 자신의 뇌를 만들어간다. “그 초기 경험이 그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뇌를 사용할지 뇌 안에서 어떤 연결 패턴이 형성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지를 결정한다. 이때 그들의 뇌 안에서 활성화된 회로들은 점점 효율적으로 연결되고 미끈한 길로 변하면서 처음의 좁은 신경 길이 서서히 단단한 도로가 되고 결국에는 널찍한 고속도로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고속도로는 익숙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이후 그 사람의 사고와 감정, 행동을 규정한다. 자연히 그것은 기존에 획득한 능력의 유용함을 입2증할 수 있는 여건을 자꾸만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려 애쓸 것이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이유는 뇌의 고속도로 때문이다. 일단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그 도로가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새 도로를 내기는 무척 어려워진다.

 

우리 삶의 경험들은 특정한 뉴럼 회로 패턴으로 뇌 안에 자리를 잡는다. 자주 하는 중요한 경험들은 뇌에 익숙한 자취를 남기고 우리의 지각과 사고, 감정, 행동을 좌우함녀서 계속해서 일방적인 방식으로 뇌를 사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나 달달 외운 명제들, 닳도록 읽은 안내 책자며 교과서 따위가 아니라뇌에 뉴런의 네트웍으로 이루어진 고속도록 즉 각자가 품고 다니는 표상, 내적 확신, 세계 및 인간상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현하고자 애쓰고 따르고 또 스스로 묶어 놓은 사슬처럼 거기에 매달려 있다. 그렇다. 스스로 묶어 놓은 것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느니 어떻게 하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어떻게 타인을 대하고 또 옷은 어떻게 입고 집은 어떻게 짓고 방은 어떻게 꾸며야 한다는 것에 관해 정해진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맑스의 말마따나 이념은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 없는 풀려나기 힘든 쇠사슬과도 같다.” “이러한 표상이 가슴과 긴밀히 이어져 있어 가슴이 찢어지지않고서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게 사실이라면 결국 이들 표상은 감정과 결부되어 있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고통스럽고 화가 나고 슬프고 심지어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뇌 안의 고속도로는 사용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 넓고 더 튼튼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완고해지고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면 인간은 늙어가면서 정신적으로 추해지고 무력해져야만하는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어릴 적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미녀서 느꼈던 기분들이 아직도 생각나는가? 믿기 힘들 정도로 만사에 활짝 열려 있었고 창조적 욕구에 불탔고 뭔가를 새로이 발견할 때마다 기뻐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 대해 열광했고 눈앞에 지천으로 놓여 있던 발견거리와 창조의 재료들에 열광했다. 어린이들은 하루에도 20번에서 50번까지 이런 상태를 맛보는데 그때마다 뇌 안의 정서 충추가 활성화된다. 이런 열광의 상태는 어김없이 뇌 안에 거름뿌리개를 작동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뉴런 연결망의 성장과 재족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거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이이다.

 

놀란 표정으로 아이가 묻는다.
'
엄마 저 소리가 뭐야?' 
'
종이 울리는 소리란다'
 
'
아 그게 어디있는데?'

흥분한 아이가 묻는다. 난감해진 엄마는 이렇게 얼버무린다.
'
저 멀리서 들려오는 거란다.'
'
그럼 '멀리'를 보여줘 '멀리'가 어디 있는데?'
'............'
아이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
그럼 엄마 종 만들 수 있어?'” (조앤 에릭슨)

흔히 볼 수 있는 부모와 아이의 대화이다. 부모를 난처하게 만드는 아이들의 이런 질문 공세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떻게 열광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세상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이이기 때문이다. 조앤 에릭슨(에릭 에릭슨의 아내)은 아인슈타인이 세기의 천재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감각의 경이를 기억하고 그 경이감을 잊지 않으면서 감각에 따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지진아였다. 말문이 늦게 트이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느렸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관찰을 강조하는 페스탈로치 학교에 들어간 후 그의 재능이 꽃피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일곱살까지 어떤 단어를 가르쳐주면 그 단어를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고 다른 사람이 그 단어를 발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배웠다. 그러니 말을 늦게 배울 수 밖에 없었다. 기하학이나 대수학, 연산법도 종이 위에 기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구체적인 물체나 형태, 비율로 접근했다. 천재란, 창조성이란 경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조앤 에릭슨은 말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최초의 감각이 주었던 경이를 잊어버리고 '어 종소리'네 하고 무심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감각의 구체성을 잃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열광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해지고 무심해지면서 창조력을 잃는다. 

 

어린아이에게는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 하는 일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아면서 일상에 적응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훌륭히 익혀 나갈수록 이 세상의 발견거리 창조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중요성을 잃게 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고 주변 환경을ㅇ 의도대로 꾸며 가는 가운데 익숙하고 정해진 틀에 안주하게 되고 뇌가 녹슬 위험도 덩달아 커진다.” 녹스는 것은 뇌만이 아니라 삶 자체이다. “삶은 매력을 상실해버렸다.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해졌거나 똑같이 무의미해진 가운데 최적의 상태로 삶을 통제하게 되엇다. 어른들은 내면의 잠재력을 발휘하겠다는 의욕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따라서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한지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나섰던 우리가길을 잃었는가? 저자는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며 우리가 만든 사회를 말한다. “성과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갈수록 절감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바로 다람쥐 쳇바퀴다. 흥미로운 점은 바퀴 속에 갇힌 사람만이 아니라 바퀼르 돌리던 장본인들도 어느덧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가 자신을 이 길로 보냈는지 누구로부터 이런 생각을 받아들엿는지 더 이상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완벽하게 기능하기를 원할 따름이다. Eoansdp 그는 최적으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도달한 것 즉 거기서 얻은 성과물을 삶의 진정한 가치이자 핵심으로 여기게 된다. 도달할 목표가 사라질 때까지 그는 줄곧 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 목표가 없어지면 삶의 의미도 잃는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머릿속에 든 다람쥐 쳇바퀴를 보완하고 더욱 강화하는 것이 바로 분업 사회가 발전시킨 수많은 조직 및 관리 구조다. 조직으로 편성되고 관리 대상이 되는 경험을 자주 할수록 고유한 가능성을 찾고 고유한 삶을 창조해가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체험할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더욱이 이런 일이 일찍부터 집중적으로 벌어질수록 당사자는 그런 능력을 스스로 발달시키는 일에 훨씬 어려움을 겪는다. 그 결과 조직 및 관리 구조라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사회적 쳇바퀴 속에서 일생동안 갇혀 지내게 된다.” 우리 자신이 만든 쳇바퀴에서 우리는 일상 세계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며 느끼는 즐거움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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