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각, 틱낫한, 달라이 라마.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로부터 이책의 질문은 시작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인이 아니면서 한국어를 쓰는 스님들보다 한국에서 더 알려졌고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하버드대 출신이라서? 프랑스에서 활동하기에? 세계의 지도자라서?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언어가 근본적인 이유라 저자는 말하낟. “그들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이유는 이런 배경 탓이 아니다. 비밀은 그들이 쓰는 언어에 있다. 한문고전을 읽혀보면 학생들이 도무지 번역본을 읽을 수 없다고 불평이다. 유교 경전이든 불경이든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일어, 중국어, 영어 번역본을 던져주면 학생들은 영어 번역본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영어 번역본을 통해 해당 문장의 의미를 적어도 애매한 구석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영어권 동양학자들의 실력이 좋긴 하지만 중국은 모르겠지만 일본학자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 그럴까?

 

영어가 한문이나 중국어보다 더 우리말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19세기 후반에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이전의 한자어나 우리 고유어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로 창안한 번안어들과 거기 걸맞는 어법을 주축으로 한다.” 사실이다. ‘술 권하는 사회란 단편을 보면 일본유학씩이나 한 남편이 돌아와서는 술주정뱅이가 된 이유를 물으니 사회가 술을 마시게 한다는 말을 듣고 주인공의 아내는 나쁜 놈이라 욕을 한다. 사회란 말을 처음들어본 것이다. “우리는 한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전통 한자가 아닌 근대적 신조어로 말한다. 이런 말들은 거의 의미 손실 없이 서구어로 대체할 수 있다. 이방인 포교사들의 성공신화, 그 비결은 그들이 쓰는 언어의 프리미엄에 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쓰는 말에 가까운 영어를 쓰고 있고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일상의 체험 위에서 정직하게 설파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작년부터 인기를 끈 코이케 류노스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알기 쉬운 구어로 일상을 통해 불교를 설명한다. 그러나 코이케 류노스케의 책을 불교서적으로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교교리이다. 단지 그것을 쉽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말할 뿐이다. 그가 말하는 생각버리기(번뇌귾기), 화내지 않기, 침묵 등등은 모두 불교 수행에 언급되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그의 책은 자기계발서로 읽히지 불교서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한국에서 불교는 무슨 의미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말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생각이 달라졌단 말이며 그 생각의 맥락인 사회도 달라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전통을 버렸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전통은 반 세기 이상을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유교나 불교는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물으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그 질문을 불교는 철학이냐 종교냐로 이해한다.  유교도 그렇지만 불교가 철학이냐 종교냐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답이 애매한 것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불교도 유교도 서양철학과 같은 논리학, 존재론, 인식론의 체계가 없다. 그런 체계는 서구의 전통에서 유의미한 것이고 서구와 다른 문제의식을 가졌던 불교와 유교에게 그런 체계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물론 풍우란이 처음 중국철학사를 썼을 때 보여주려 했던 것처럼 억지로 끼워맞추려면 또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양철학과 같은 질문을 가지지 않았던 지식체계가 동일한 틀을 갖는가 묻는 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러면 종교인가?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이었을 뿐 종교냐 아니냐를 묻지 않았다. 철학이 필로소피의 번역어로 성립한 것처럼 종교 또한 번역어일 뿐이다.” 종교냐 아니냐의 기준 역시 당연히 그들의 기준이고 그 기준은 유일신을 핵심으로 한다. 그런 신은 당연히 불교엔 없다. 그래서 불교는 무신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불교가 기독교와 맞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선전한 전략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루돌프 오토의 기준처럼 종교의 핵심을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전향한다면 불교나 유교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최종적 관심으로 돌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깊이 종교이다. 또한 인식론의 복잡성이나 논리적 엄밀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원래 그리스와 로마에서 그랬듯, 삶의 길을 계시하는 지혜에 대한 갈망과 추구로 규정한다면 불교와 유교만큼 철학적인 것 다시 없다.”

 

철학과 종교의 새 이름이 등장하면서 유구한 전통의 불교와 유교는 때아니게 정체성을 의심받고 정당성을 도전받았다. 그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모든 질문은 권력적이다. 누가 묻는가의 주도권을 서구가 거머쥠으로써 질문에 당황한 불교와 유교는 혹은 부끄러워하고 변명하고 저만큼 피해갔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햇다. ‘너희들 기준으로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유교도 철학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가르침이고 배움이면 족하지 않은가.’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물을 수 있었어야 했다. ‘예수는 과연 깨달은 사람이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해탈을 위한 적절한 지혜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불교의 구원과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무아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Good News(복음)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새로이 알 수는 없다. 만일 안다면 그것은 마군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상대방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 가르침이란 내속에 있던 어떤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는, 선가의 말을 빌리면 지시일 뿐이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햇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이기에 줄 수 없는 것, 그것을 불성이라 햇다. 그렇기에 저자는 불성을 보는 견성, “돈오는 쉬운데 정말 점수가 어렵다고 한다. 지눌은 돈오란 다름 아니라 마음의 실상에 대한 지적 이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되 그 이치를 진정 믿기가 어렵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가 어렵다.” “돈교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 너머에, 깨달음이니, 구원이니, 법계니, 정토니가 결코 없다는 사자후이다. 돈교는 지금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이 바로 절대임을 그토록 간절히 친절하게 일깨워주려 한다. 그래서 입만 열면 깨달을 바도, 얻을 바도, 설할 바도 없다고 했다. 다만 눈을 들어 쳐다보라고만 했다.”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데 보지 못하니 만공은 몰락한 상궁 나인들이 찾아와 법문을 청할 때 이렇게 말했다: “저 산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도 뚫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단순한 비유만은 아니라 저자는 말한다. “불성이란 바로 지금 역력한 생명의 불가사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삶의 목표는 쾌락이 아니다.” 아무리 욕망을 채워도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이다.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더라도 그 내면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럽다.” 탐욕은 좋은 것이라며 욕망을 무제한으로 채워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기욕구라는 환상속에 있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것이란 생명의 자연적 발현이 아닌 것 모두를 뜻하낟.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욕구와 충동은 이미 심각하게오염되었다. 그래서 늘 넘쳐난다이 진단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지?’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다.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이다. ‘내가 그동안 오염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내 이제 그 실상을 투명하게 알겠다는 발견이 곧 깨달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사람이나 세속적 성취욕이 강한 사람, 그리고 사회적 교제와 정치적 성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유형들은 불교를 가까이하기 어렵다. ‘나 이렇게 살다 갈래하면 대책이 없다. 불교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 오히려 한사코 뺏으려 한다.

 

무아와 공은 동의어이다. 나는 없다 나는 비었다는 말이다. “()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보자.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욕망이 눈을 만들었고 들으려는의지가 귀를 만들었다고 한다.보려는 욕망이 없으면 사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책 제목처럼 세계는 의지의 표상이며 의지의 산물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법(, 객관적 실제)이 아니라 상(, 주관적 세계) 즉 오로지 식(唯識)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 세상을 혼란시키고 비참을 증폭시키는 원흉이다. 언어는 그 첨병이다. 언어는 실재를 드러내기보다 감추며 비추기보다 왜곡한다. 그래서 불교는 언어에 대한 불신을 선명히 드러낸다. 어떤 불교학자는 불교의 이런 인식을 언어혐오증이라 부르기도 한다.”

 

욕망이 가린 것을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는 타자로 말하고 적는 기술이다. 이 전략은 나의 개입이나 오염이 배제된 순수객관적 사태들 즉 다르마들(諸法)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가령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냈다를 아비달마는 매우 부정확하고 들뜬 문장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고친다: 1. 두 물체가 있다. 그리고 2. 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이 있다. 3. 눈문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한다. 4.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이 있다. 5. 이 사건을 의식()하는 과정이 있다. 아비달마의 이 오래된 분석은 무아를 각인하고 그것을 삶 속에 구현하려는 지혜의 방편이다. 나에게 속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남의 것이엇다는 것, 아니 세계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보여주기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을 자기 비우기라 하며 공이라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도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기에 실제 고승들은 어떤 일의 충격이 잔류하는 기간이 아주 짧고 후유증이 거의 증폭이 안된다고 한다.”

 

불교의 지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격과 자아를 오온의 객관()으로 해체하는 작업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8정도의 하나인 정념, 위빠사나는 내 몸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차갑게 주시하고 관찰하는 일이다.” 방법 자체는 쉽다. 그러나 하기는 쉽지 않다. “1분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반쯤 도통했다는 소리가 나온다. 느닷없이 끼어드는 차에 대고 바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것을 회광반조, ‘아하 내가 지금 마음 속에 화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구나하기는 어렵다. 어구나 그것이 일어나고 축적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생주이멸의 과정을 남의 일처럼차갑게 관찰해나가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은 무아를 들여다보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무아란 네 자아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너무 많은 자아가 있어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란 뜻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정념으로 들여다보면 우리 각자 천의 얼굴을가지고 있다. “ 그 무상한 변화는 누가 일으키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 정립하는 주체가 아니고 타자에 의해 상황에 의해 세워지는 허수아비요 물거품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얼굴로서의 주체 혹은 자아는 없다. 이것이 무아의 뜻이다. 달마와 혜능뿐 아니라 셰익스피어도 이렇게 곤혹스럽게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왜 문제인가? 상은 법의 굴절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두 나의 이미지()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다만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람을 만난다. 불교는 그 좁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고 거기서 독수리처럼 세상을 보라는 조감(鳥瞰)의 권고이다.

 

우리는 사람과 만난 적이 없다. 비즈니스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가깝다는 가족이나 친구도 까마득히 멀어보인다. ‘안아도 안아도 아드간 아내의 허리’ (고은). 그는 나를 좋아거나 싫어라며 나를 찬양했거나 모욕했고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스타일에 내가 좋아거나 싫어하는 인상에 습관에 또 내가 존경하는 지식 혹은 내가 경멸하는 지적 수준에그런 이미지를 통해서만 상대와 나는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우리가 늘 불행한 이유이다. 우리가 염려, 근심 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우리는 황혼의 저녁이나 뜰에 핀 꽃, 아내의 젖은 손이나 남편의 어깨 위에 앉은 비듬을 볼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 조건을 바로 이 염려(sorge)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이 불안의 중심을 통찰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ㅣㅇㅆ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적 삶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다른 사람과의 의미 있는 만남을 놓치고 만다.”

 

그것과 무아가 무슨 상관인가? 상관이 있다 그것도 근본적인. 상을 만드는 렌즈가 자아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테일러의 말을 빌리자면 자아폭발이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자아폭발과 타락 개념에 대해선 해당 리뷰 참고)

 

인도 현인들은 타락한 정신이 하는 거짓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자아가 고립되었으며 자기 이외의 우주는 저기 밖에 있는데 자기만은 머릿속에 갇혀 있으며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외계에 살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인식. 그들은 직접적으로 타락한 정신을 해체했다. 그들은 예리해진 자아인식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거짓된 인식을 주는 일종의 가면현상임도 깨달았다. 우리는 오도된 정체성으로 고통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자아들이라고 믿지만 자아들이 사라져야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두가지의 다른 자신들을 갖는다고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거짓의, 피상적인 자아자신과 우리의 진정한 자신인 아트만이다.” (스티브 테일러)

 

우파니샤드의 전통에서 요가철학이 태어났다. 붓다가 위빠사나로 정리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요가의 목표는 거짓된 자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해체해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개발되었다. 붓다가 한 때 수행했던 고행도 마찬가지 목표를 가졌다.

 

그러나 붓다는 두가지 모두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고 선언했고 자신의 방법을 제시했다. “붓다가 타락한 정신을 초월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이 반항은 훨씬 더 강력해졌다. 우파니샤드는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서술적이다. 우파니샤드는 이것이 사물의 실체이다. 이것이 세상이 실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진실된 상태이다라고 외치는 거대한 모닝콜 같다. 반면에 불교는 완전히 반대이다. 불교는 사물의 궁극적인 사실에 대하여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 토론은 시4간과 에너지 낭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타락한 정신이 어떻게 고통을 낳았는지에 대해 심오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매우 상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불교는 모든 면에서 타락의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이해된다. 붓다가 말하는 갈망은 자아폭발로 생겨난 권력, , 재산, 향락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분리된 자아인식이 존재하는 한 갈망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갈망을 극복하는 것은 (세계와) 분리된 자아인식을 극복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해탈에 도달했을 때 정확히 일어나는 것이다.” (스티브 테일러)

 

붓다가 요가의 방법론을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했다고 스티브 테일러는 말한다. 요가의 명상법은 자아폭발로 비대해진 자아의식을 죽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기에 도가 역시 독자적으로 비슷한 방법을 개발했다고 그는 말한다. “명상의 전체적인 목적은 자아폭발의 결과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필립 노박은 강력하게 발달한 자아가 어떻게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독점하는가-자아는 (사하라시아인들이 등장하기 전 조상들이 그러햇고 지금도 남아있는 수렵채집인들의 의식이 그러하듯이)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며 현재중심적인 인지의 기쁨으로 나타나게될 수 있는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를 설명할 때, 명상을 수행하는 것이 어떻게 이 과정을 역전하는가도 함께 지적한다. 의식구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지속적으로 주의력이 공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명상할 때처럼 현재에 주의를 집중하면 의식구조는 주의력이라는 자양분을 박탈당하여 약화되기 시작하고 사라져 버린다. 결과적으로 노박의 말대로 마음은 욕망과 걱정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데 (즉 생각하는 데)보다 적은 에어지를 쓴 새로운 습관을 얻게 되고현재의 사실을 인식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명상 수행은 에너지 재분배의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하면 타락과 동시에 발생했던 재분배의 역전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지각하는 데로 돌아간다. 그 결과 당신은 세계 안에 있는 의식의 힘을 인시할 수 있게 되고 원시인들이 알고 있는 강력한 현존과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명상이 자아폭발의 효과들을 제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가 주위 환경과 분리되었다는 인식을 약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인식은 자아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수다로 유지된다. 자아가 조용해지면 그것들의 경계들도 덜 분명해진다. 그리고 자아가 완전히 조용해지면 모든 경계 인식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우파니샤드가 설명한 우주와의 일체감을 인식하는 체험을 한다.” (스티브 테일러)

 

붓다의 체험을 예로 들어보자. 붓다는 라마풋다 선인에게 非想非非想處란 경지를 배웠다. “이 경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로서 가장 높은 차원인 滅盡定의 바로 앞 단계이다. 숫타니파타(874)는 이 경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소멸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이해한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아마 거친 의식들은 생각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가 어떤 것인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무의 차별을 넘어선 경지일거라고 상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카무라 하지메)

 

좀 더 말로 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신비주의 철학자 스테이스는 명상의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하나가 됨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존재의 현시였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을 통하여 한줄기 광채가 빛났다. 모든 문제들이 사라졌다, 아니 그보다는 문제들이 없었다. 죽음도 없었고 나라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절대적 황홀의 느낌이었다. 내가 차츰 세상 속으로 돌아오자 이것에 이은 도취감이 뒤따랐다. 참으로 커다란 행복이었다.” (스티브 테일러에서 재인용)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는 붓다의 말은 이것을 말한다. “깨달음의 순간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생존욕의 중심이 완전히 부수어진 것이다. 자기의 중심을 쳐부순다면 그때까지 고뇌하던 자기는 소멸한다. 자기가 소멸하면 세계는 허구로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괴멸해버린다. 그러면 오직 있는 그대로의 세계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카무라 하지메) 항상 차나 한잔 들지라 말했던 조주 선사의 평상심도 이것을 말한다. “도가 무엇입니까?”란 물음에 조주가 차 한 잔 들게(끽다(喫茶去)’라 한 것은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으면 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쉬운 것 같아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이지 차 한 잔 마시기가 어렵다. 내 분노와 슬픔을 타서 차를 마시지 않을 때가 드물고 내 에고와 권위를 타서 차를 권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차를 빈 마음으로 우려 빈 마음으로 권할 때 거기 모든 것이 있다. ()이라, 무심(無心)은 당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내가 내 마음의 불순물로 탁하게 오염시킨 차를 뻔뻔스럽게 내놓고 있다는 파렴치를 알기만 하면 차 맛은 훨신 좋아진다.” 조주의 평상심은 그런 것이다. 그 평상심이 깨달음의 내용이고 돈오의 내용이다. 도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란 한 것도 평상심으로 잣나무를 보는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

 

어느 선사에게 누가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잠잘 때 잠은 안 자고 이런저런 걱정에 시달리지.”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밥을 잘 먹는 것이다. “몸이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나는 마음을 비워주어야 한다. 마음이 차 있다면 음식 맛을 느낄 수 없다. 김치를 밥이나 대학에도 그런 경구가 있다. ‘우리 모두 음식을 먹지만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음식 맛을 느낄 수 있으면 도는 멀지 않다. 불교가 노리는 최상승의 경지를 나는 이곳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인류의 오랜 환상을 떠나 삶의 실제와 만나는 것이므로.

 

밥맛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기에 혜능은 서방정토가 지금 여기 있으니 내가 지금 보여주랴고 했고 화엄은 사바와 법계가 둘이 아니며 그래서 벗어나야 할 사바도 없고 들어서야 할 법계도 달리 없다고 말한다. 화엄은 세상이 이미 완전하고 우리가 이룰 것은 더 이상 없다’”고 선언한다. “화엄은 과격하게도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다만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네가 이 세상과 다투는 것을 그치면 세상은 고요해질 것이니 그때 진정 세상이 이미, 우리가 손댈 필요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타락한 자아가 깨어지고 깨어져 나가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이다. 시냇물은 흘러가고 창밖에 차소리는 들리며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또 들으며 화를 내고 웃는 이 인간만사의 세상일들이 그대로 여여하게 들리는 것이다.”

 

돈오란 깨달음이란 사건이 문득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화엄이 말하듯 깨달음이란 원래 오고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찾거나 이루거나 하는 시간과 점차()로 더듬지 말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선의 실질적 창시자인 혜능은 몸은 보리수도 아니고 마음 또한 거울이 아니다라 했다. 그리고 그곳은 어디 먼지 앉거나 때가 끼는 곳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미 완전하기에 우리는 더 이상 닦으 것도 찾을 것도 없다. 그것이 돈오이다. 돈오란 깨달음이 이미 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은 즉심즉불, ‘네가 곧 부처이니 어디 딴 데서 찾을 생각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왜 다시 수행이 필요하지? 이미 깨달아 있으면서깨달음에 대한 지적 통찰은 그것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살아나가는 일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노력을 우리는 점수라 부른다. 돈오는 쉬운데 점수가 어렵다. 돈오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이다. 그것은 끝이 없는 심화와 지속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돈오란 깨달음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이른바 깨달음이란 것을 얻고 나서는 한바탕 배꼽을 잡으며 소 위에 타고 앉아 소를 찾았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깨달음 이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불법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실제(實際)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이다.. 진리한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다.”

 

마조는 이렇게 말한다: ‘도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생사를 의식하여 조작하고 선택하는 일체가 그것이다. 도와 곧바로 만나고 싶은가.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인위적 조작과 주관적 가치판단이 없고, 의도적 선택이 없는 것, 사물에 대한 고착이나 방기가 없고 진리에 대한 환상도 없는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경전에 말하지 않던가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인의 행도 아닌 것, 그것이 보살행이라고. 다만 이렇게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 상황에 따라 응접해나가는 것이 바로 도이고 그 셰게가 바로 법계이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리자야 우리는 사물과 세계를 두고 태어난다거나 사라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곳은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인간적 흔적을 덧붙일 수도 없고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는 세속적 득실도 운위할 수 없다. 자아의 개입이 근원적으로 차단된 곳이기에 거기 사람과 자연은 구분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 또한 분리될 수 없고 바라보는 시선과 거기 잡히는 풍경도 둘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에게는 원초적 무지가 있다는 생뚱맞고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권유도 쓸데없다. 늙고 죽음의 개념도 없으니 그 늙고 죽음을 초월할 수도 없지 않은가. 생로병사가 도무지 없는 판에 붓다가 초월과 해방의 방법으로 가르친 네가지 성스런 진리 또한 뜬금없는 소리이다. 기억하라. 요컨대 깨달음이란 것도 농담이니, 더구나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황당하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붓다, 그 삶과 사상 붓다, 그 삶과 사상 1
나카무라 하지메 외 지음, 이미령 옮김 / 무우수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수받사여 나는 29세에 오로지 을 찾아 출가햇다. 수밧다여, 나는 출가하고서 50여년을 지내왔으며 바른 이치와 법의 영역만을 걸어왔다. 나 이외에는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하파리닙바나경)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토해낸 붓다의 말이다. 여기에서 붓다는 자신이 불교를 창시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오직 진리를 체득한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생각하고 있다.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바로 이 말 속에 붓다의 일생이 집약되어 있다. 붓다의 말을 토해 우리는 붓다가 평생 무엇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살아왔는지 알 수있다 법의 길을 걸었다는 것. 진실의 길을 걸었다는 것. 바로 그 걷는다고 하는 실천을 설했다. 붓다는 언제나 실천을 중시했다. 동시대 다른 사상가들은 논쟁으로 세월을 보냈으나 붓다는 그런 희론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앗다.”

 

크샤트리야 출신인 붓다는 자신을 바라문으로 이해했다. 그가 생각하는 바라문은 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 길을 걷는자는 누구나 바라문이라 불릴 수 있었다.

 

붓다는 결코 바라문교의 전부를 부정하거나 무시하고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 하지 않았다. ‘우파니샤드가 설하는 업, 윤회, 해탈과 같은 사상의 틀을 봇다는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참다운 바라문이란 무엇인가를 설한 내용만을 놓고 보면 붓다야말로 참다운 바라문교의 포교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붓다는 29세에 깨달았다. 그러나 진리의 길은 깨달음이란 한번의 사건으로 끝이나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깨달음 후에도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 경전에 나오는 악마는 붓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번뇌를 상징한다. “본래 붓다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서 고요히 안으로 안으로 사색하기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붓다는 결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연하고 기품있고 연약했다고 전한다. 붓다는 일생동안 내면적인 성찰을 한 사람이엇는데 그런 성품은 어릴때부터 지녀왔던 것 같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고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나서서 즐기는 그ㄹㄴ 유형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번뇌는 자연스럽고 깨달음 이전이라면 그런 악마가 나타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악마는 깨달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까지도 악마가 자주 나타났다면 깨달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붓다는 그런 악마를 정화해 가면서 일생을 걸어간 자이다. 진리의 길을 걷는 일은 말하자면 번뇌와 미혹과의 긴장관계에 놓이는 일이라 할 수있다. 일단 개달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이 아니다. 붓다란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의미이다. 그런 사람을 계속하여 깨달아 가게 하는 것, 계속 붓다이게 하는 것은 바로 청정행의 실천이었다. 훗날 이런 경지를 수행과 증득(깨달음)은 한 몸이라는 의미에서 수증불이라고 불렀다.”

 

붓다가 출가한 이유는 생노병사를 넘어선 불사의 길을 얻기 위해서 엿다고 한다. 그러면 붓다는 그 길을 얻었는가? “깨달음의 순간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생존욕의 중심이 완전히 부수어진 것이다. 자기의 중심을 쳐부순다면 그때까지 고뇌하던 자기는 소멸한다. 자기가 소멸하면 세계는 허구로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괴멸해버린다. 그러면 오직 있는 그대로의 세계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있다든가 없다라고 분별한 세계가 없기 때문에 자신과 세계는 시원하게 통하게 된다. ‘는 무한한 존재가 된다. ‘내가 있다거만한 마음을 부순다면 거짓으로 세워진 세계도 무너져 다르마의 세계(法界) 한 가운데 홀로 우뚝 존재하게 된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이러한 나는 다르마의 나이다. 다르마의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는 자기는 한정되지 않은 존재 그 차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태어남도 없다.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늙고 죽음도 없다. 유체나 마음을 나의 것이라 생각하여 집착하면 늙음이 실체화되고 죽음이 존재하게 된다. 나가 없어지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도 없어지면 내가 없기 때문에 늙거나 죽는 일은 없다. 이것이 붓다가 깨달은 불사의 법칙이다. 훗날에는 이것을 不生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불사의 길이라 햇다. 언뜻 말로는 그럴듯한데 와닿지는 않는 괘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붓다가 깨달은 직후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하기 주저한 이유이다. 붓다가 깨달은 것은 무아이다. 무아는 말로 보여줄 수 없다. 스스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게 개발된 방법이 요가였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이미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요가는 우리의 세계관을 왜곡하고 우리의 영적 진보를 가로막는 아집을 체계적으로 벗겨내는 것이다.” 건강체조와 별다를 것이 없는 우리가 아는 요가와 달리 원래의 요가 수행자들은 더 좋은 기분을 얻거나 더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 길을 갔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정상적인 상태를 없애고 싶어했으며 세속적 자아를 지워버리려 했다. 고타마와 마찬가지로 갠지스 평원의 많은 수도자들 역시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방법으로 담마를 명상해서는 해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가 훈련은 깨달음의 무의식적 장애물들을 부수고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조건들을 없애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에덴의 평화, 이 샬롬, 이 닙바나를 머리로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붓다는 요기이기를 포기했다. 그가 요가로 얻은 경지는, “그가 얻은 의식의 고양상태는 닙바나일 수가없었다. 이 황홀경에서 빠져나오면 여전히 정열과 욕망과 갈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여전히 세속적 자아는 거기 잇엇다. “닙바나는 일시적인 것일 수 없었다.” (카렌 암스트롱)

 

붓다는 고행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고행의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대담한 공격 뒤에 얻은 것은 튀어나온 갈비뼈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약해진 몸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한계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대신, 스스로 더 큰 괴로움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카렌 암스트롱) “붓다는 이렇게 고행을 실천해도 이 길이 열반을 향한 길이 될 수 없을 깨달았다. 몸은 깨달음의 토대이기 때문에 몸을 괴롭히는 고행으로는 평온한 경지인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고타마에게는 이런 방법들이 모두 소용없었다. 그의 세속적 자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욕망에 시달렸으며 여전히 의식의 싸움들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우선 명상의 전 단계로 깨어 있는 마음(사티)’이라 부르는 훈련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매순간 자신의 행동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는 의식의 파동과 더불어 감정과 감각의 들고남에 주목햇다. 고타마는 깨어 있는 마음을 훈련하는 과정에서 괴로움과 그것을 일으키는 욕망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엇다. 그의 의식에 몰려드는 그 모든 사고와 갈망은 아주 짧은 시간만 지속되었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었다(아닉카), 갈망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곧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람의 이런 덧없음이 괴로움(둑카)의 주된 원인의 하나였다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질 것임을 알고 잇다.” (카렌 암스트롱) “어떤 사람도 괴로움과 무관할 수는 없다. 즉 괴로움이란 본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결같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붓다는 그 힘이 이성이나 지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거무칙칙한 욕망이라 보았다.마치 오염된 강가에 쌓인 폐수 찌꺼기와도 같이 얼마나 심하게 오염되었고 끈적이며 서로 엉켜있는지 붓다는 이것을 욕망의 더러운 늪이라 표현했다. 붓다는 이것을 無明이라 불렀다. 무명은 내면의 깊은 사유와 선정에 의해서 파악된 인간존재의 근본을 표현한 말이다.” “이런 마음 상태들은 서툴다’.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

 

고타마는 일반적인 추론적 방법으로 이런 진리들을 사유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요가의 기술을 통해 그런 진리들에 접근했으며 그 결과 이 진리들은 일반적인 추론을 통해 얻은 어떤 결론보다 더 생생하고 직접적이었다. 훗날 고타마는 자신이 창안한 새로운 요가 방법을 통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 즉 갈망이나 욕심이나 아집에 지배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고타마가 보디나무 아래에서 닙바나를 성취했던 순간, ‘나는 해방되었다!’가 아니라 그것이 해방되었다!’고 외쳣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카렌 암스트롱)

 

명상은 깨달음에 불가결했다. 수행자가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자신의 마음과 몸을 붓다의 요가적 현미경 밑에 갖다놓지 않으면 담마를 현실로 만들거나 직접이해할 수 없었다. 수행ㅈ는 명상을 통해 담마를 실현할 수 잇었다. 빅쿠들은 요가를 통하여 그 교리가 표현하려 했던 진리들과 일체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새로운 인간은 무아의 인간이다. 그러나 무아라고 해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 나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유가의 말로 하자면 붓다가 말하는 진리의 길은 爲己之學, 나를 위하는 길이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원수처럼 행동한다.’ (상윳타 니카야)

 

크든 작든 간에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한답시고

자기의 참다운 이익을 소홀히 하지 마라.

자기의 참다운 이익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으면

최선의 노력으로 그것을 성취하라.’ (담마파다 166)

 

자기에게나 남에게 이롭지 않은

악한 일은 하기 쉽다

자기도 위하고 남도 위하는 착한 일은 실로 하기 어렵다’ (담마파다 163)

 

자기를 보호하는 사람은 다른 자기까지도 보호한다. 그런 까닭에 자기를 보호하라. 그러면 그는 언제나 손해를 입지 않을 것이요 그가 바로 현자이다.’ (앙굿타라 니카야)

 

자기에 대한 이런 설법만을 듣고 있자면 이런 가르침이 도저히 무아를 설한 사람의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이것이 무아설의 진정한 뜻이요 내용이다. 즉 아집의 중심을 부수고 계속 과감히 나아간다면 당연히 그 사람의 정신은 크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것은 나다, 저것은 나다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리릉ㄹ 알게 된다. 인간은 분별심이 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며 그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 세계라 착각한다. 배가 고플 때는 돌맹이도 먹을 것으로 보이는 이치이다. 그러다 차츰 사물이 올바르게 보여지면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게 되고 자비심이 깊어진다. 아집이 무어지면 바깥의 사물이나 타인과 소통하게 되고 자연히 세계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기적인 자기를 꺾으면 자기의 독자성이 없어질까 걱정하는 사람도 잇을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이기라는 이름에는 본래 독자성(identity)의 색깔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습관만이 있을 뿐이다.”

 

무아란 꼭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우리가 가끔씩 습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당신이 아주 열심히 서류나 책에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잇다 하자. 당신은 지금 완전히 삼매에 들어 있다. 들어 있다. 거기에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다. 서류도 책도 없다. 오직 일이 있을 뿐이다. 시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주변 세상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이런 삼매의 상태, 당신이 일 그자체가 되어버린 상태를 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무의식 중에라도 내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또 이 심신을 있다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죽음을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잇는 한 죽음에 대한 생각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해진다. 공의 경지에 머무는 일은 내가 있다는 생각의 소멸을 의미한다. 붓다는 결코 어려운 것을 가르치려하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계속 힘써 노력하는 일이다

 

붓다는 어디까지나 현세에서 당하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그러므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일까, 자기의 본성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등의 실체를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사색에는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붓다의 법을 받아들인다면 윤회전생을 믿을 필요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
베르너 지퍼.크리스티안 베버 지음, 전은경 옮김, 손영숙 감수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혜능 스님에게 남악회양이라는 스님이 찾아왔다.

 

어디에서 왔는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

 

이 질문에 남악 스님은 답하지 못했다. 그 후 대답을 찾기 위해 8년 동안 뼈를 깍는 수행에 전념했다 한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이 질문에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 분명히 이렇게 찾아온 자는 남악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얼핏 보아선 제대로 답한 것처럼 보여도 정답은 아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 나는 누군가?’라는 질문이 나올 것이었다.

 

남악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데 8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답을 꺼냈다. ‘한 물건이라도 들어서 설명한다면 그 순간 진실에서 멀어지고 만다.’” (나카무라 하지메)

 

이책의 질문 역시 혜능 조사가 물었을 는 누군가?’이다. 얼핏 그 답은 자명한 것같다. 눈 앞에 있는 바로 사람이지 않은가? 그러나 과연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책은 그 답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장황하게 보여준다. 먼저 이책은 뇌손상으로 정체성이 산산이 부서진 예들을 보여주면서 사람의 자아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지부터 시작한다.

 

뇌량 손상 때문에 일어나는 외계인 손 증후군은 기이하기 그지 없다. 한 환자는 난폭한 왼손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그 환자가 한번은 왼손으로 아내를 난폭하게 흔들었는데 그동안 오른손은 공격하는 왼손을 잡고 아내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지요.’ 또 다른 사례는 다른 환자의 집 뒤뜰에서 던지기 놀이를 할 때 벌어졌다. , 환자가 왼손으로 벽에 세워진 도끼를 잡은 것이다. ‘공격적인 우반구가 주도권을 잡은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나는 살그머니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이 사회가 뇌의 어느 쪽 반구를 처벌하거나 없애려하는지 알아보는 시험 케이스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이런 질환을 겪는 환자들이 사지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외계인 손 증후군은 교량이 손상, 또는 절단되면서 좌반구와 우반구가 분리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 증후군을 앓는 사람을 이전의 그와 같은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 그 사람을 한 몸에 두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뇌의 작은 손상 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런 경우들을 보여주면서 저자들은 불교의 무아론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의 란 선천적인 핵심이 없으며, 언제나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깨지기 쉬운 구조이다. 정신병원이나 신경과에는 인간의 파괴될 수 없는 인력의 중심이 라는 직관적인 가정과는 달리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복잡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증명하는 환자들과 서류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자신을 경험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경험으로 얻은 고유의 생각과 느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는 뇌에 있는 다양한 네트웤 때문이다. 특정한 뉴런들이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을 때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다고 인식하게 하며 우리의 에 대해 생각할 가능성을 준다. 기억은 한정된 뇌 영역에 저장됐다가 자서전적인 나를 구성하는데 이런 자서전적인 나에게서 기억을 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된다. 우리가 균현잡힌 몸으로 살고 있고 그 몸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육체적인 나라는 느낌 또한 노의 활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파괴될 수 있다.”

 

정신분열증 초기에 나타나는 자아 인식 장애를 보자. “계약직으로 일하는 21세의 로버트는 발병하기 전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더 이상 온전하게 살아 잇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또한 자기 내부의 사람을 자신이 바깥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1년 넘게 받았다. ‘일인칭이던 내 삶이 사라지고 삼인칭 인물의 삶이 시작됐어요. 난 이제 내 몸에 없어요. 다른 사람이에요.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말소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 것 같아요. 난 기계처럼 움직여요. 움직이고 말하고 펜으로 뭔가 쓰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환자는 의 육체적 경계는 어디인지 궁금해 하고 나와 세상 사이의 유동적인 통로에 대해 생각한다. 정신분열증이 되기 전 단계의 사람들은 점차 자기 자신의 생각도 잃어버린다. 환자는 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생각을 하는가? 내가 생각한다고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이 여기 전혀 없으므로 나는 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이들은 라는 의식을 점차 잃어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낀다. 일반적으로 자아의 일부분으로만 인식되던 현상들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객관화되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기 인식이 약해지면 정신분열증 증세가 확실하게 나타난다. ‘의 구조에 대한 깊은 성찰이 사람들을 정신착란으로 이끈다는 경악할만한 가설이다. 이성의 각성은 괴물을 낳는다.’

 

그러면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는 왜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진화론적 이유가 타당할 것이다. “사냥할 때 다양한 역할을 나누어 맡았을 원시인들은 분명히 분화된 의사소통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런 사냥 집단은 적어도 사냥감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할 전략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고 개별적인 구성원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에게 다양한 의무를 지워줄 수 있어야 한다. 사냥이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집단은 그 정보도 알아야 한다. 이때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가리킬 생각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가정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도구를 제작하고 사냥하고 계획하고 싸우고 속이고 화해하고 자신의 종말을 걱정하는 원시인들의 머릿속에 퍼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가 언제 출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시작하는지는 말할 수 있다. 18-24개월부터 사람은 란 개념을 갖기 시작한다. “22-24개월이 된-많은 아이들이 거울에서 자기를 알아본지 한 달쯤 지난 뒤부터- 아이들은 나, 나한테, 나를, , 가지 이름 등 가기와 관련된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서전적 기억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로써 아동기 기억상실 단계가 끝난다.” ‘란 느낌, 자의식은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고 남도 나와 같은 의도와 동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며 동정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8개월 정도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장난감이 고장 나면 도와주려 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하거나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이 시기의 아이득ㄹ은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생각할 수 있다. 예를들어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생후 몇 개월부터 등장한 는 평생 만들어져 간다. “심리학자와 교육학자들은 최근까지도 사람의 성격이 늦어도 세 살 때까지는 완전히 확립되고 사춘기에 이르면 본질적인 것은 미이 모두 지나갔다고 믿었다. 성격이 두 살이나 세살에 이미 형성된다는 프로이트와 그 계승자들의 주장이 심리학에 널리 파고들었다.” 그러나 성격은 평균적으로 쉰살이 되어야 안정적이 된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발혀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슈폰티의 일원이었던 요쉬카 피셔가 탁월한 외무장관으로 재사회화된 일은 성격 단절 없이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야릇한 모습이었던 미국 가수 프린스가 얼마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집집마다 다니며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전도활동을 하거나 예전에 무대에서 박쥐의 머리를 뜯은 충격적인 록 가수였던 오지 오스본이 이제는 고루한 미국 가정의 가부장으로서 꽃무의 소파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은?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예전에 슈타이어마르크에서 포즈를 취해9ㅆ던 근육질의 남자와 동일한 사람인가?”

 

자아의 가변성은 뇌의 가소성 때문이다. 뇌는 평생 새로 조직될 수 있으며 성격은 뇌의 재조직화에 따라 바뀐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가 될 수 있는가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건설현장이다.”

 

심리학계에선 그 변화를 5대 특성으로 기술한다.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바탕이 있게 마련이고 그 바탕은 뇌의 구조이며 그 뇌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감정저긍로 더 안정되고 믿을만하며 더 편안한 성격이 되지만 새로운 경험을 향한 개방성은 서서히 줄어든다. 평균적으로 볼 때 외향성에서만 별 움직임이 없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 언제나 그런 성격으로 머문다는 뜻은 아니다. 조사대상의 절반이 사는 동안 자기 성격을 바꾸었다. 다른 50%가 변하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게 그 사람들이 변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바뀌는 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짐 모리슨은 1969년 마이애미 무대에서 즐겁게 들떠 있는 관중 앞에서 성기를 꺼내 자위를 잠깐 하고 그 결과 한동안 검찰에게 쫓기게 된 자신의 행위를 의 진정한 표현으로 보았다 60년대와 70년대의 고전적 로큰롤과 팝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정성이 중요햇다. 음악가들은 사운드와 스타일의 변화를 고통스러운 자기 발견 과정이라고 말했는데 이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마약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그 진정한 는 있는 것일까? 오히려 진정한 는 처녀, 창녀, 디스코 여왕, 스트립쇼 무희, 에비타를 연기하는 진지한 음악가로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마돈나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서구에서 역설적으로 개인주의의 발전을 촉진했고 그 발전은 극적으로 빠르게 진전되었다. “’라는 기준은 특히 교회의 감독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며 등장한 인문주의자들과 학자들의 명확한 성격이 되었다. 그러나 지위가 낮은 계층 역시 자아를 발견하기까지는 수백년이 더 걸렸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때도 인쇄기술의 극적인 발전과 같은 새로운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게 확산된 개인주의의 물결은 문학작품을 통해 보편화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당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난파를 당한 개인이 자기 계층의 질서와 종교와 국가와 가족에서 해방되어 카리브해의 섬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이 세계 안에서 삶을 잘 꾸려나간다.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책들은 실생활에서도 생활방식이 개인화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 개인주의가 찾으려는 개인은 뜬구름과 같다. “패션이든 세계관이든 전공이든 배우자 선택이든 모든 결정에 늘 존재하는 변경 가능성은 현대 개인주의의 본질에 속한다.” 나란, 자아란 별 것 아니다. 하루 하루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자아이고 나이다. 그러나 쉴새 없이 변해가는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수천년 동안 억압받던 가 오랜 투쟁을 거쳐 스스로를 해방하고 자아를 찾다가 그 자아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이는 역사의 희비극이자 포스트모던한 정체성의 딜레마이다. 전통이 더 이상 구속력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강압이 사람들에게 자리를 지시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실현의 기회는 오히려 노력을 필요로 하는 힘든 의무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강박적으로 찾아 헤매고 실현하려는 자아는 무엇인가?

 

자아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시간은 뇌의 산물이다. “기억은 윤곽뿐인 끝없는 강물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정리하고 한 사람의 행위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눈다. 기억은 우리에게 가 이런 모든 경험을 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이 현상은 뇌의 처지에서 그렇게 간단한 임무가 아니다. 스키 여행을 다녀온 걸과 운전을 한 것과 TV앞에 앉아 있던 것이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행한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가 그것도 같은 사람인 가 한 행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적인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비인간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듯 기억은 그리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 기억은 감정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분 속에 존재한다. “감정에 의해 분비되는 행복한 호르몬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기억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쁜 일들은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신체 고유의 마취제를, 부정적인 사건들은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분비한다. 극단적인 양쪽 감정의 결과는 똑같다. 호르몬 분비는 뇌가 경험한 인상들을 뚜렷하게 기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별히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일들을 기억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감정은 뉴런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을 하면서 끝없이 흘러오는 정보의 강물 속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기억해야 할 것과 가치가 없어 지나치는 정류장의 구별기준을 만들게 한다.” 그 기준을 만드는 것은 감정이며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관심(sorge 영어로는 care)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감정 또는 관심을 통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감정이 만드는 기억을 통제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그 기억의 내용은 변한다. 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기억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그 불러내진 기억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학자들은 이 현상에 재공고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미 완성된 기억의 내용을 불러내는 일은 이를 새로 저장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예전에 이미 확고하게 저장된 정보를 불러내는 과정은 이 정보를 다시 사용하게 할 뿐 아니라 다시 녹인다어떤 사실이 머릿속의 극장에서 새로 상영되듯이 정보는 반죽되고 달라질 수 있다. 기억이란 금방 만들어진 새로운 경험과 똑같이 불안정하고 영향을 받기 휩다. 기억은 이루 말 할 수없이 역동적이다.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자아의 이야기를 우리가 반복해 꺼내면 실제 연대기적 진실과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점차 농후해진다.”

 

미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유아기 가족에 의한 성학대 신드롬이나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기억은 그런 경우이다. 상담사와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의 기억이 변한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이 어릴 때 성적으로 자신을 학대했다며 갑자기 부모들을 고발했는데 이런 성적학대는 치료가 시작되기 전에는 본인들도 모르던 일이었다.”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은 외계인과 밤에 만났던 일을 직접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납치를 당했었다는 기분 나쁜 느낌으로 잠에서 깬다. 그런 다음 심리상담사의 암시적인 질문을 받으면 외계인에 의한 유명한납치 야기를 기억해내는데 아마 다른 문화적 조건 아래서는 마녀나 유령 또는 사탄에게 납치당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코니, 인생 전체가 기억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네가 거의 느낄 수 없는, 현재라는 순간을 제외하고 말이야, 정말 모든 것은 기억이야 하지만 지금 막 지가나는 그 순간은 아니지’ (테네시 윌리엄스) ‘나는 나야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기억이다. 이 기억은 사람을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에 고정시키고 그에게 스스로를 의식하는 지식, 예를 들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있었다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기억하는 것을 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기억이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딜레마 하나가 얼른 떠오른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때 어떤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경험한 인생? 아니면 기억된 전기? 자서전적 기억의임무는 우리의 모든 과거가 지금 기억을 하고 있는 나의 현재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바꾸고 배열하는 것이다. 진화는 과거에 대해 숙고하라고 우리에게 기억을 준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풀라고 주었다. 기억은 의 위대한 쇼다. 기억은 교정하고 검열하고 자르고 희석하며 머물러 있는 모든 것들을 과거가 의미를 지니도록 새로 연결한다. 기억되는 전기는 나라는 무대에서 언제나 새롭게 펼쳐지는 연극이다.”

 

그러면 나라는 느낌 즉 자아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내용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에 집중하고 에서 출발하는 관점을 지녔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의식 영역의 중심이 언제나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중추 안에 잇는 모든 상황은 경험상 자신의 상황이다. 나의 세계에는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은 나 자신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세계상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직관적인 의 관점을 지구와 우제에 투영한것일 뿐이다.

 

단한가지 큰 문제는 우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아또는 주관과 같은 개념을 정의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 개념과 관계가 있을법한 대상이 이 세상에서 관찰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라는 현상은 나에게는 확고부동한 현실이다. 정신분열증 환자에겐 그렇지 않겠지만 대다수에게 Cogitio ergo sum은 증명이 불필요한 공리이다. 그러나 그 증명이 불필요한 현실에는 물리적 근거가 없다.

 

삼인칭 시점은 뇌의 전기적인 활동에서 어떻게 주관적인 인식이 생기는지 검증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직면해있다. 뇌는 붉은 색을 보는 게 아니라 눈에 있는 감각세포의 신호에 의해 자극을 받아서 붉은색을 위한 신경패턴을 활성화한다. 뇌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듣게 아니라 음악과 함께 오는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경패턴을 활성화한다. 뇌가 이날 에게 통증을 의미하는 신경패턴이 통증을 느끼고 뇌가 아니라 행복을 담당하는 신경패턴이 행복을 안다.” 뇌가 통증을 우선 지각해야 통증이 생긴다. 그러나 통증에 대한 주관적 느낌이 없다면 통증도 없다. 통증은 척수의 신경신호나 뇌에서 전달이 연결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이 의식에 떠오름으로써 생긴다.” 그렇다면 통증은 다시 말해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일인칭 시점에서 한 가지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지금 나는 매 순간 실제의 전체를 경험한다. 데카르트가 인식했듯이 우리는 의식을 하나의 통일체로 경험한다. 그런데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적했듯이 감각자료는 제각각으로 제멋대로 뇌에 입성한다. 사과를 보는 아주 단순한 인식을 생각해보자. 빨갛다, 둥글다, 만지면 딱딱하다, 향기가 난다 맛을 보면 시면서 단 맛이 난다. 이런 데이터는 제각각이다. 그런데 그 제각각의 정보들이 사과라는 하나의 물건에 속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의식(칸트가 통각이라 부른)이 사과하는 통일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데이터에서 어떻게 하나의 사과라는 통일체가 나타나는가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통일체로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뇌는 전체 조직에 널리 퍼져 있는 중추들에서 이 모든 물리적인 정보를 분리하여 분석한다. 모든 분류가 흘러들어가고 이들이 다시 통일된 형태로 완성되는 최고사령부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물체 자체가 여러 분석으로 나누어지리라는 인상을 전혀 받지 않는다. 표면이 없는 윤곽만 춤을 추지도 않고 형태보다 앞서서 색깔만 뛰어다니지도 않는다. 신경생물학은 의식이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아니면 아직이란 말을 넣는 것이 좋을까?”

 

우리가 아무리 주관적으로 확실하게 의식의 단일선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뇌가 라는 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일하는 많은 부분들이 의식에 기여한다. 우리의 뇌는 왕이 없는 제국이다. 세상에는 자아와 비슷한 그 무엇인가는 없다. 자아는 삭제할 수 없는 진실의 기본 구성요소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경험한 라는 느낌, 그리고 지속적으로 바뀌는 다양한 자의식의 내용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현상적 자아라 부른다. 이 말은 자아라는 구상이 해체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뇌는 실제나 실제 속에 있는 자아가 아니라 그것의 모델과 함께 일을 한다. 이 모델은 뉴런의 복합적인 활성화 패턴과 이들의 일시적이고 역동적인 연합으로 만들어지낟. 이 모델은 육제 및 육체 움직임의 상이 있는 공간적인 영역, 우리가 느/낌을 의식하고 이를 행위의 기본으로 삼는 감정적인 영역, 문화 및 함께 사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ㅅ최적 영역이라는 다양한 소단위로 분류된다. 이 모델들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하고 의견을 전하게 하며 우리 자신을 향한 관심과 생각을 통일된 하나로 조종하게 한다. 자아라는 느낌은 신체 내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내부 감지기들이 전달하는 전류에서 싹이 튼다. 자아 모델은 내부에서 발행한 입력이라는 부단한 원천을 통해 뇌에 고정된 유일한 표현적 구조이다.”

 

는 뇌와 같은 지각 장치가 자신의 모델을 더 이상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을 ?대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다시 말해 모델들의 시스템은 의미론적으로 투명하다. “이들이 자기가 모델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스템은 자신의 표상적인 구조를 통과해서 본다. 우리는 자신의 뇌에 의해 활성화된 자아 모델의 내용과 자신을 끝없이 혼동한다. 이런 끝없는 혼동을 통해서 그 누구도 아닌 존재는 비로소 어떤 존재가 된다. 혼동을 텅해서 비로소 우리가 우리 자신-자신의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깊게 생각하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며 어쩌면 죽은 다음에도 피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하는 이야기가 사실이 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우리에게는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핵심이 없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아트만은 없다.

 

그러나 아트만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순진하고 연실적인 자아의 오해라는 조건 아래에서 작업한다. 우리의 순진함은 우리가 마치 자신과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접촉을 하는 듯한 경험을 하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사고 기관에는 일단 기본적인 라는 느낌, 해당되는 시스템이 없는 현상적 자아가 생긴다.” 현상학에선 이를 지향성이라 말한다.

 

가상적인 자아는 그저 되도록 의미 있는 생각을 하고 부딪치지 않게 움직이며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지각한다., 이를 가능한 한 사용자에게 편리한 외관을 제공하여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한 진화의 기교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내용들을 컴퓨터 OS에 비유한다. 인터페이스에 나타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실제가 아니라 그 실제의 상징을 뿐이다. 하드 디스크 어디에도 폴더는 없다. 그것은 그저 다루기 쉽게 만든 상징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색갈과 물결의 속삭임은 그저 상징일 뿐이고 던져준 막대기 뒤를 쫒아가는 개도 역동적인 상징이며 바람 대문에 얼굴에 와 부딪치는 머리카락도 생선 굽는 냄새도 상징이다. 그 아래는 복잡한 뉴런의 흥분 패턴이 숨어 있다.” 우리는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매트릭스의 레오가 그랬듯 이런 결론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가 거대한 우주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우리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로 세상에 왔다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로 죽으며 그 사이에는 포괄적인 혼동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누군가로 착각한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인간을 경멸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불교에선 그 느낌 너머로 나아갈 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의 절반 구하기 - 왜 서구의 원조와 군사 개입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
윌리엄 R. 이스털리 지음, 황규득 옮김 / 미지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험물리학자와 이론물리학자 그리고 수학자가 같은 감옥에 갇혔다. 세 사람은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다 나흘째 마침내 통조림을 공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통조림을 따는 도구가 없었다.

실험물리학자는 통조림을 감방 벽에 집어던지고 발로 짓밟기를 거듭한 끝에 통조림을 열 수 있었다.

이론물리학자는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통조림의 모서리를 벽에 긁었다. 이윽고 통조림에 작은 구멍이 났다. 이론물리학자는 그것을 벽에 집어던져 단번에 통조림을 열었다.

사람들이 수학자의 감방을 들여다보았을 때 수학자는 통조림을 앞에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만일 통조림을 열었다고 가정해보았을 때….”

물론 화장실 유머일 뿐이지만 책상물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절학무우란 말이 나오는 노자의 장을 보면 ‘뭘 좀 안다는 놈들이 설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나온다. 통조림을 열고 배를 채우기 보다는 통조림에 대한 가정을 세우고 논리를 건설하는 것이 우선인 수학자들을 너무 많이 보았고 그 수학자들이 세상을 위한다면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문제는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똘똘이 스머프들은 멸종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멀리 갈 것없이 한국 사회과학계를 보면 똘똘이 스머프들이 사는 법을 질리게 볼 수 있다.

"한국 사회과학계는 맑스주의의 가짜비급을 익히다 주화입마에 빠졌다." 어느 정치학자의 글에 나오는 말이다.

가짜비급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정치학자의 말대로 주화입마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맑스주의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때문이다.

다양한 분파가 있고 다양한 접근이 있기 때문에 뭉뜽그려 말할 수는 없지만 맑스주의의 기본논리는 'Stupid, It’s economy! 바보야 경제가 문제야'로 정리된다. 경제적 소유에 따른 계급이란 개념으로 사회의 모든 문제가 설명된다는 환원론 내지는 결정론이다.

오만잡다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없는 문제를 변수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다니 이 아니 기쁠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매력은 바로 그 한계이다. 그리고 그 치명적 매력에 넘어간 한국의 사회과학계는 주화입마에 빠져 현실을 보는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들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가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논리에 맞아들어가는 것이니까. 수학자의 통조림 따는 법은 언제나 그러했다.

재미있는 것은 맑스주의가 속류 또는 부르조아들의 가짜 학문이라 부르며 증오해마지 않는 주류경제학 역시 마찬가지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Economics as Religion'이란 제목의 책이 기억난다. 밀튼 프리드먼의 시카고 학파를 공격하는 이책은 주류경제학을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 비판했다.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 경제학은 학문으로서도 졸업생의 취직에서도 여왕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경제학이 그런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는 돈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학이 학계에서도 여왕인 이유는 방법론에 있다.

고등학생 시절 경제학과를 갈까 생각하다 다른 과를 택했었다. 이유는 수학을 못했기 때문이다. 수학자보다 수학을 더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경제학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 논문을 보면 왠만한 수학지식으로는 이해는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경제학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경제학 논문은 다른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썰'로 승부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한계효용이론과 함께 경제학이 수학화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계효용이론은 경제학의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한계효용이론과 함께 경제학이 수학화되면서 경제학은 인문학이 꿈에도 바라마지 않는 '과학'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인간사회를 자연세계처럼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학의 수학화가 가능했던 것은 한계효용이론의 인간에 대한 가정 때문이다. 적어도 시장에서는 인간행위가 특정한 형식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손익의 결과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최소한 시장에서 거래할 때의 인간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손익의 결과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은 시장에서 조차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계산기처럼 손익관계만 생각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경제학의 모든 오류가 태어났다.

새삼스러울 것 없지 않은가? 경제학에 대한 다른 사회과학자들의 공격은 항상 그런 전제를 깔고 있었고 경제학 내에서도 행동경제학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태어난 접근법이다. 이미 번역된 행동경제학 서적만도 많고 많고 그렇게 쌓인 세월도 많고도 많다. 그러나 언제나 강단의 경제학자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말은 맞겠지 그래서 뭔데(So what?)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숫자로 쌓아올린 모델이지 그 모델이 현실과 맞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학자의 통조림 따는 법은 언제나 그렇다.

문제는 그 수학자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덤빌 때이다. 그때 세상의 비극은 현실의 지옥이된다. 러시아는 그 지옥을 한 세기에 두번이나 겪어야 했던 억세게 운수 사나운 나라였다.

혁명은 역사의 예외이므로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혁명에 관한 책은 많고도 많다. 크레인 브린튼의 ‘혁명의 해부’는 그 많은 책 중에 고전으로 꼽힌다. 혁명은 언제나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다.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처음부터 혁명을 꿈꾸지는 않는다. 문제해결의 시작은 온건파의 개혁이다. 혁명은 온건파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난다. 극단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이상에 현실을 두드려 맞추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이 관념에 맞아들어가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현실을 관념에 맞춰 재단해야 하고 혁명은 독재와 테러로 추락한다. 결국 혁명은 반혁명을 낳을 수 밖에 없다. 혁명의 테러는 테르미도르(혁명 이후의 안정)으로 이행한다. 브린튼이 말한 혁명의 예로 러시아 혁명은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20세기를 혁명으로 시작해 혁명으로 끝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내전과 공포정치가 아니더라도 혁명은 언제나 끔찍한 고통과 함께 온다. 혁명이 부정한 체제가 무너지면서 혼란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세기초에 그랬듯 세기말에도 극단주의자들의 관념론은 고통의 무게를 늘리는데 탁월했다.

“러시아는 1992년 1월 1일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했다. 러시아인들이 오만한 서구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가격통제를 철폐하고 곧이어 국영기업을 민영화했을 때 서구는 러시아가 최소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했음을 인정했다.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1992년에 쓴 중요한 글에서 ‘몇 년 내에 러시아의 평균생활수준이 대폭 높아질 것’이라고 러시아인들에게 약속했다. 1991년 12월에는 그렇게 말했던 바로 그 경제학자가 러시아식 ‘충격요법’ 계획을 두고 ‘시장경제로의 신속한 전환을 위한 모든 필수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기말에 일어난 러시아의 혁명은 충격요법이라 알려진 자본주의 혁명이었다. 브린튼의 정의에 따르면 이 혁명은 혁명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체제의 부정, 부정 후의 카오스, 카오스 이후(혁명의 부정으로서의) 안정 등 이 혁명은 브린튼이 말한 혁명의 단계를 모두 밟아갔다.

문제는 그것이 의도되지 않은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그 혁명을 기안한 하버드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경제를 개혁한다고 생각했지 혁명을 ‘계획’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시장이란 것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러시아가 미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충격요법의 거대한 실패는 어처구니 없는 것이라 ‘화폐전쟁’의 저자는 러시아를 재기불능으로 만들려는 로스차일드와 록펠러가의 음모였다고 까지 말한다.

쇼크 테라피의 쇼크로 러시아 경제가 쇼크사 한 후 어떻게 시장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시장이 존재하게 되고 하루 아침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바뀔 수 있으며 미국 같은 번영을 누릴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처구니 없어 할 뿐이다. 그 똑똑한 하버드 교수들이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 없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는지… 음모론이 유력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음모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는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을 설명하는데 음모론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당시 세계은행에서 일했던 저자는 그 혁명모의에 참여했고 그 실패를 경험햇다,. “당시 나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장의 하향식 강요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10여년이나 걸리는 실패를 감수해야 했다. 1990~1995년까지 세계은행과 함께 러시아 문제를 연구해왔던 나 역시 충격요법을 신봉했다. 러시아를 미국과 같은 모습으로 재구성하려는 공식적 개혁 운동이 시작된지 13년 후 환자와 같은 러시아는 아직도 투병 중이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충격요법이란 세계은행과 IMF가 말하는 ‘구조조정’이라는 방식을 러시아에 적용한 것이었다. 우리와 같은 충격요법 전문가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모든 개혁은 부분적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한번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모든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정책 결정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은행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는 세계은행(그리고 IMF와 서방선진국들의 원조기구들)의 접근법은 모두 충격요법의 일종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러시아 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그 충격요법은 실패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단지 러시아라는 사이즈 때문에 그 실패가 거대해 보일 뿐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충격요법은 언제나 실패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구 세계가 지난 50년간 대외 원조로 2조3000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말라리아 치사율을 절반으로 감소시키기 위한 12센트에 불과한 약품을 어린이들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가난한 가정에 4달러짜리 모기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달러를 지출했지만 500만건의 어린이 사망을 예방할 수 있는 3달러를 초보엄마 들에게 지급하지 못하고 잇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달러를 지출했지만 아마레치는 여전히 나무를 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선의의 동정심을 가지고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단순했다. 저자의 러시아 경험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나는 모스크바에 몰려들던 다른 많은 서구 경제학자들처럼 러시아의 제도와 역사에 대한 가장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저자는 시장이 기능하려면 단지 시장을 선포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장에 대한 찬사와 관련된 문제는 바로 시장이 잘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상향식 탐색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제도와 규범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들 중 한 가지는 시장 참여자가 보통 ‘사기’로 알려진 ‘기회주의적 행동’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은 개인의 이익 추구를 사회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이는 당사자 간의 상호 유익한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규범이 있을 경우에만 사실이 된다. 탐욕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부족은 시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경제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시장은 사회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폴라니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에 embedding되었기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는 경제는 언제나 시장이 돌아가게 하는 사회가 있다. 러시아에서 충격요법이 실패한 것은 시장을 떠받칠, 다시 말해 시장이 embedding될 사회가 러시아엔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조 3000억 달러가 낭비된 이유 역시 그 돈이 의도한 ‘계획’이 받아들여질 사회가 정치가 피원조국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원조는 “시장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선의의 법률과 훌륭한 제도를 창안하기 위해 빈국들을 대신해 포괄적 개혁을 고안해낼 수는 없다. 시장이 잘 작동하도록 하는 규칙들은 사회규범, 관계망, 그리고 가장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 공식법률과 제도에 대한 복잡다단한 상향식 탐색을 반영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로한 규범, 네트웤, 제도는 변화된 환경과 그들 자신의 과거사에 호응하면서 변화해간다. 버크, 포퍼, 하이에크는 이러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너무 복잡한 나머지 모든 규칙을 단번에 바꾸려 했던 하향식 개혁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기보다 나브게 만들 것이라는 기본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혁명은 실패했고 실패할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그 실패를 ‘계획가’들의 실패라 말한다. 집을 지으려면 지형과 환경을 살피고 그에 맞춰 땅을 다지고 하나씩 하나씩 벽돌을 쌓아올려야만 한다. 저자가 모든 개혁은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고, 점진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세계은행을 떠나 대학으로 물러난 지금와 생각했을 때 저자는 자신이 ‘계획가’가 아니라 ‘탐색가’였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탐색가보다는 계획가가 되려한다. 그것이 거창해보이고 더 멋있어 보이니까. 더군다나 땅을 딛고 손을 더럽히며 티도 안나는 허드렛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이 지어질 땅에는 가보지 않고 표준설계도만 하청업자에게 줘어준 다음 집이 지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정치도 경제도 ‘헤쳐나가는 과학(science of muddling through)’이다. 부유한 나라의 경제와 정치는 시행착오와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탐색과정 없이 부유한 경제와 민주주의를 만들 설계도 따위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유일한 대계획은 대계획을 중지하는 것이다. 유일한 대해답은 대해답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은행에서 러시아의 대실패를 겪고 다른 많은 원조가 실패하는 것을 신물나게 경험한 후에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실패는 훌륭한 교사이다. 똘똘이 스머프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를 경험한 패자의 자리를 언제나 그런 설계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똘똘이 스머프들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50년동안 실패가 반복된 이유이다. 그러나 저자는 희망을 본다. 원조기구들도 조직 차원의 학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은 공룡도 배우게 한다. 
 

평점 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 생체 리듬을 무시하고 사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
틸 뢰네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책의 성격은 입문서이다. 구체적으로는 시계생물학에 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 이책이 무슨 내용을 다루는지 짐작할 사람은 많지 않다. 시계생물학이란 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계생물학이란 말 대신 바이오리듬이라 한다면 쉽게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바이오리듬이라면 쉽게 누구나 아는 말이 되었지만 그 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말을 다루는 분야인 시계생물학의 역사 자체가 짧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2차대전 직후가 이 분야의 탄생시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점을 뒤져보면 수면, 바이오리듬에 대한 책은 꽤 있지만 학문적인 기초개념으로서 바이오리듬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책은 드물다. 역사도 짧고 그 분야의 학자도 적은 마이너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그 드문 책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지레 겁이 날지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생물학, 과학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책은 과학책이다. 그러나 겁낼 필요는 없다. 학부생을 위한 교과서나 전문가 동료들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교양서적이라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책이 다루는 내용은 사실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점심 후 노곤할 때마다 누구나 경험하는 것들이다. 이책을 읽고 나면 왜 누구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누구는 반대인가, 왜 밤을 새면 피곤이 몇배가 되는가, 규칙적으로 자고 식사하는 것이 왜 건강에 (최소한 컨디션에) 좋은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 경험적으로 그렇더라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어떻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답을 할 수 있다.

이책의 구성 역시 교과서처럼 기본개념을 설명하고 학설을 소개하는 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실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보자. 가장 일찍 일어나는 직업군을 들자면 학생과 교사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시간표가 바람직한가? 저자는 아니라 말한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 인간에게 맞지 않는 시간표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청소년기에는 올빼미형이 대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뭔가 하고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그 나이 때이다. 학교의 시간표는 올빼미들에게 종달새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란 말이다. 저자는 오전수업은 시간낭비라 말한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시간에 억지로 책상에 붙들어 놔봐야 졸기만 한다.

저자는 학교시간표처럼 생물학적 인간의 리듬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강요된 리듬이 차이가 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사회적 시차증이라 말한다.

사회적 시차증의 다른 예는 섬머타임이다. 섬머타임은 강제로 생물학적 리듬을 교란하는 것으로 제트기를 타고 다른 시간대로 간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이책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언제 자고 언제 먹을 것인가 언제 쉴 것인가 최상의 컨디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생활에서 누구나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이책은 그런 결정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기본원칙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드물면서 재미있고 유용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