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의 탄생 - 뇌과학, 진화심리학이 들려주는 성격의 모든 것
대니얼 네틀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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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인가 양육인가(nature or nuture)? 오랜 논쟁이다. 전공이 전공이라 본성보다는 양육이 결정적이라 배웠다. 인간은 문화 때문에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형편없는 인간이 동물들의 위에 군림하는 이유는 문화에 맞춰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유연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때는 인간은 인간 스스로 만든 환경이 결정한다는 환경결정론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진화론과 유전학의 영향력이 인간을 다루는 분야, 특히 심리학으로 확장되면서 환경결정론은 구닥다리 헛소리가 되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심리학에선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심리학자들은 환경이 성격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환경이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는 근거도 부족하고 검증도 부족한 어려운 분야다. 그리고 이런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동유전학자들이었다. 행동유전학자들은 유전적 요인이 성격 형성에 약 50%의 영향을 준다고 결론 내렸다.

환경이 같을 때 일란성 쌍둥이들의 성격이 이란성 쌍둥이들보다 비슷하다는 것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동일한 유전자 변형체를 50%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유전적 요인이 적어도 50%는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이 정도라면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다. 쌍둥이는 더 비슷하게 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환경이 달라도 일란성 쌍둥이가 닮은 정도는 같다는 것이다.

“입양등으로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의 성격은 함께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만큼이나 비슷했고, 떨어져 자란 이란성 쌍둥이들의 성격은 떨어져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보다 더 달랐다. 또 쌍둥이가 아닌 형제로서 각자 다른 가정에 입양된 형제들은 거의 또는 전혀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닮았고 같은 가정에 입양되엇지만 생물학적 부모가 다른 형제들과는 타인만큼이나 성격이 달랐다.”

물론 유전자가 성격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 행동유전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성격의차이는 50% 정도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도 성격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쌍둥이 끼리도 달라지는 것은 나머지는 환경이 만들 것이라는 예상은 직관적이고 옳다. 문제는 그 환경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최소한 가정환경은 아니다. 다른 가정에서 키워진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가정에서 키워진 일란성 쌍둥이가 성격이 다른 정도는 동일하고 “생물학적 부모가 서로 다른 입양 형제들 간의 성격 유사성은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혼한 부모의 자녀들도 성인이 된후 이혼할 가능성이 높고 어린 시절 부모의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자라서 더 폭력적이 된다는 연구결과는 어찌된 것인가? 이런 연구들도 유전적 영향으로 설명된다. 신경질적인 사람은 우울증과 이론의 가능성이 다른 사람보다 높고 그들 자녀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은 자녀들이 부모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애당초 부모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 유전형질을 자녀들이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성격 형성에 환경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환경이 무엇인지는 애매하다. 가정환경은 적어도 아니다. 다른 환경요인들은 “예컨데 아이가 동년배 집단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성격 형성에 미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전적 영향보다 더 강한 설명력을 갖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유전된다는 것인가? 저자는 유전적으로 성격이 결정되는 것은 뇌구조와 뇌기능의 차이 때문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차이에 따라 5대 성격특성(Five Factor Model, 스눕을 보았으면 이 모델을 알 것이다)의 값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5대 특성 중 외향성부터 보자.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보통 사교적이고 활동적이란 이미지가 떠오른다. “융이 묘사한 외향적인 사람은 외부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사색보다 활동을 좋아하고 자신의 생각에 빠지기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고 움직인다.”

그러면 외향적인 사람은 사교적인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향성이 좋은 인간관계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향성은 파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사교활동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지 새 친구를 얼마나 쉽게 사귀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기는 하지만 그런 인간관계를 얼마나 잘 유지하는지 알려주는 지표는 아니다. 외향적인 파티에 가서 신나게 취하고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 대판 싸움을 벌이는 부류드,ㄹ이다.” 대부분의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이 그렇듯이 (뒤에서 볼) 친화성이 낮은 외향적인 사람들은 “아무런 가책 없이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친구를 무시하기도 하며 이런 행위를 통해 뭔가 얻는 것이 있으면 그런 행동을 즐기기도 한다.”

저자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람 자체를 만나기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 얻을 ‘보상’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무엇인가 가치 잇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보상추구성이 외향성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야망을 가진 경우가 많고 높은 지위와 사회적 관심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여가활동도 좋아하지만 명예와 돈을 좇아 열심히 일할 준비도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목표를 추구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융이 외향적인 사람을 외부에 관심이 있다고 정의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보상이, 자극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 흥분 등 긍정적인 감정을 즐긴다. 물론 누구나 같은 것을 원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외향적인 사람은 “더 큰 기쁨과 자극을” 느낀다.

융이 말한 “내향적인 사람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만 몰두하며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고 고독과 평화롭게 사색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외향적인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끌리긴 하지만 “그런 일에서 느끼는 흥분은 상대적으로 적다. 약간 더 많은 돈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여유시간을 쓰는 일, 파티에 가려고 시내를 가로질러 차를 몰고 가는 일, 또는 새로운 섹스를 시도하기 위해 현재의 결혼생활을 포기하는 일을 시도할 가능성이 적다.”

저자는 외향성과 내향성을 나누는 것은 도파민이 말한다. “도파민 관련 뇌 영역에서 반응성이 높은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이다. 이런 뇌 영역은 보상을 기대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동기를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외향성 수치가 낮은 사람은 이 부분의 반응성이 낮고 따라서 보상을 찾아 나서는 일이 적다.” (구체적으로 이 뇌구조를 결정하는 유전자를 D4DR이라고 한다)

“외향성이 긍정적인 감정과 관련 있는 것처럼 신경성은 부정적인 감정과 관련 있다. 부정적인 감정이란 무엇인가? 공포, 걱정, 모욕감, 죄책감, 혐오, 슬픔 등의 감정이다. 긍정적인 감정이 존재하는 이유(설계특징)가 좋은 것을 추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면 부정적인 감정이 만들어진 목적은 먼 조상 때부터 나빴던 것을 피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신경성 수치가 지나치게 높을 때이다. 표현하는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분류되는, 보통 쓸데 없는 걱정이란 말로 가리키는 감정은 누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쓸데없는 걱정의 비율이 80%라면 신경성 수치가 놓은 그룹은 99%다. 신경성 수치가 높은 사람들은 정말 사소한 걱정거리를 아주 오랫동안 고민한다. 예컨데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안 좋았어’ ‘저 사람들은 틀렸어’ ‘다음엔 더 잘될 거야’하는 식으로 반응하기 보다 ‘그건 다 내 탓이야’ ‘모두 나를 싫어해’ ‘나는 절대 성공 못할 것야’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신경성에 관계하는 유전자는 세로토닌 전달유전자이다. 이 유전자가 짧으면 “긴 유전자를 가진 사람보다 신경성 수치가 높다.”

성실성은 충동을 통제하는 능력을 말한다. “술과 약물에 굴복하는 정도는 외향성 정도에 따라 다르다. 외향성은 스릴 넘치는 자극에 대한 뇌 보상시스템의 반응성으로 측정되는데 술, 약물, 도박은 모두 스릴 넘치는 자극이다. 그러나 중독을 유발하는 것은 외향성이 아니라 성실성 수치와 관련이 있다.”

충동으로 무엇을 시작할 수 있다. 성실성은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 멈추는 것과 관련된다. “많은 중독자들의 경우 마약주사로 얻는 쾌감은 사실상 없다. 뇌가 이미 마약에 아주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담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끊지 못하는 것은 쾌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버릇을 끊을 통제 메커니즘이 약하기 때문이다.”

성실성과 관련된 뇌의 회로는 전에 금연 서적 리뷰에서 언급한 G0-NOGO를 관장하는 영역이다. “충동성은 성실성의 반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목표나 원칙을 위해 즉각적인 반응을 억제하는 전두엽 뇌 메커니즘의 반응성(활성화)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성실성이 다소 낮으면 일에도 영향을 준다. 성실성 수치를 가지고 전반적으로 직업적 성공을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성실성 수치가 높을수록 일을 더 잘한다.” 스눕에서도 언급하듯이 문제는 애석하게도 면접으로는 성실성을 체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실성은 겪어봐야 알 수 있는 특성이다. “일하는 사람에게 많은 자율성이 부여될 경우 이러한 성실성의 혜택은 더욱 두드러진다. 성실성이 내적으로 설정된 목표나 계획을 추구하는 능력이라면 어떤 누구도 개입하지 않을 때 성실성은 더 빛을 발한다. 그러나 성실성 수치가 낮은 사람은 목표를 실행하지 않는 방편으로 일을 미루고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마음이론(theory of mind)’은 마음읽기와 공감하기 두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마음읽기를 잘하면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그러나 꼭 공감할 필요는 없다. 마음읽기와 공감하기는 서로 연관되지만 다른 것이다.

“공감하기도 역시 타인의 마음상태를 읽는 것이지만 그중 특히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다. 공감하기는 마음읽기에 관여하는 뇌 영역 일부 그리고 관련된 감정을 느끼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뇌 영역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두 기능은 중첩된 작용이다. 그러나 두가지 기능은 별개로 작동한다.

친화성은 두 기능에서 공감하기를 가리킨다. “친화성 수치가 높은 사람은 협조적이고 사람을 잘 믿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반면 친화성 수치가 낮은 사람은 차갑고 적대적이며 온순하지 않다. 친화성 수치가 높다는 것은 타인의 마음상태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강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적으로 낮은 친화성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사이코패스다. 사이코패스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죄책감이 없고 부정직하며 사랑할 줄 모르고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친화성만 낮다고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코패스가 되려면 친화성과 함게 성실성, 신경성도 낮아야 한다. “친화성이 낮은 사람은 공감이 부족하다. 그러나 사려나 공포가 있으면 반사회적 행동을 억제할 수 잇다.” 3가지 특성이 모두 낮아 심리적 구속이 없어야 “심각하고 냉혹하며 잔인한 사이코패스적 행동이 나온다.”

친화성이 높은 사람은 누구나 환영한다. 친화성이 높아는 것은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성향이 높다는 것이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러면 친화성은 높을수록 좋은가?

“좋은 사회 및 인관관계 차원에서는 친화성이 높은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공의 차원에서는 불리하다. 40대의 기어 임원 4,000명의 성격과 경력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친화성이 높을수록 수입, 승진, 그리고 CEO가 되는 데 불리하다.” 친화성은 성공과만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과도 반비례한다. “창조적인 일에서 실제로 성공한 ㄴ 사람은 친화성이 낮은 사람들이었다. 왜 그런가? 성공하려면 냉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로 냉철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감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해 여성들은 문화와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친철함과 공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도 상당히 중시한다. 그러나 친절함과 공감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충돌한다. 여성들이 이 두개의 서로 엇갈리는 가치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다. 여성에게 화려한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개방성은 “가장 신비로우며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흔히 개방성을 지능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지능과 개방성은 별개라고 말한다. 개방성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은 시인이나 예술가들이다. 그러나 예술적 감성과 지능은 상관성이 높지 않다.

개방성은 독창성 또는 창조성과 관련된다. 개방성이 그런 효과를 낳는 이유는 개방성이 ‘확산적 사고’이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모든 개념과 지각된 내용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연상을 하면 독특한 믿음을 가질 수 도 있다. 생각을 청각으로 연상하면 환청이 되고 우발적인 사건을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텔레파시를 느끼거나 신비한 관념을 갖게 된다. 본질적으로 개방성이 낮은 사람의 마음혹에서는 각각 분리되어 존재하는 서로 다른 의미영역과 의미처리 과정이 개방성이 높은 사람의 마음속에선 활발하게 상호작용하고 서로 관련된 것으로 인식된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환청, 환영, 그리고 비과학적인(다시 말해 비상식적인) 믿음은 모두 이런 광범위한 연상에 따른 부작용이다. 언어를 독특하고 은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영역에 속한 의미들을 서로 관련시키고 비언어적 사례를 통해 유사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시의 본질”이며 개방성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개방성의 심리적 기초가 뭐냐고 묻는다면 의미영역과 의미처리 네트웤 간의 광범위한 상호작용 즉 광범위한 연상이다.”

그러면 개방성이 높을수록 좋은가? 꼭 그렇지가 않다. 광범위한 연상이란 비용이 높다. ‘뇌의 분리된 회로들 간의 상호작용이 증가하면 회로들 각각의 전문영역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독특한 경험 수치와 지능이 약간 반비례하고 개방성 수치가 노ㅠ은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산란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개방성 수치가 낮은 사람이 개방성 수치가 높은 사람보다 실용적이고 실제적 문제 심지어 아주 어려운 문제도 더 잘 푼다. ‘전구 하나를 바꿔 끼우는데 얼마나 많은 시인이 필요한가’란 ㄴ 농담을 해도 될 정도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방성이 증가할수록 서로 멀리 떨어진 인식영역들이 더 많이 얽히고 그러다 보면 점점 이상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ㅓ. 미학적인 것과 신비주의적인 관념이 얽히고 신비주의적 관념은 비과학적인 관념이 되고 비과학적인 관념은 서서히 망상이 된다.” 그러므로 “개방성이 증가하면 예술가적 명성이 높아질 가능성은 있지만 정신병적 장애를 겪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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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도 잘 풀리는 사람의 금연 기술
구보타 기소 지음, 홍성민 옮김, 서홍관 해제 / 황금부엉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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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에 대한 책은 많다. 그러나 저자는 제대로 된 금연책은 드물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책들이 인내하라고 말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금연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뇌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이유는 뇌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뇌가 원하는 것을 담배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신해 주면 된다는 것이 이책의 기본 아이디어이다.

“담배를 피우면 체내에 들어간 니코틴이 아세틸콜린 리셉터에 달라붙고 아세틸콜린 리셉터가 전기신호를 일으켜 도파민이 나온다. 그러면 쾌감행동 시스템에 자용하여 쾌감이 생긴다. 니코틴이 뇌에 도달하는 단 7초만에 사람이 담배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담배는 마약이나 알코올과 달리 중독성은 없다. 단지 니코틴이 자극하는 쾌감 시스템 때문에 뇌가 니코틴을 원하는 의존증일 뿐이다. 그 의존증은 도박과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경마를 예로 들어보자. 우선 마권을 사고 그 마권이 맞으면 보상이 따라온다. 보상심리가 행동과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기회가 생기면 같은 행동을 하려고 한다. 질 때가 많아도 한번 당첨되면 쾌감행동 시스템이 강화되기 때문에 결국 도박을 그만둘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다.” 도박은 물론 물리적인 중독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도박에 중독되는 것은 니코틴과 마찬가지 메커니즘에 따르며 담배와 마찬가지로 뇌가 의존증에 걸린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메커니즘을 극복할 것인가? 쉽지 않다.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의지력이니 인내니 하는 말로 금연에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흡연은 이처럼 쾌감을 동반한 반복 행동이라 끊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담배를 치우지 않는다’는 새로운 행동의 뇌내 네트웤을 만드는 것이 현명하다. 이미 구축된 행동 네트웤을 파괴하지 말고 새로운 네트웤을 만들어 금연하라.”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쾌감 시스템을 만들어줄 긍정적인 의존증을 새로 만들라 저자는 말한다. “우선 NOGO 금연법을 시작함녀서 동시에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취미를 갖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봤던 또는 해보고 싶었던 운동이 잇을 것이다. 할 만한 취미가 없다면 우선 달리기라도 하자.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처럼 보이지만 하면 할수록 매력적인 운동이다. 습관이 되면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매일 운동화를 신은 채 일한다. 운동화를 신고 있으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20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기를 했다. 날씨가 나빠 달릴 수 없는 날은 기분이 불쾌해진다. 무사히 달리기를 하고 나면 오늘도 이만큼 달렸구나 싶어 저절로 만족감이 든다. 이것도 쾌감행동 시스템에 따른 일종의 의존증이다.

빨리 달리려면 담배를 끊어 심폐기능을 높여야 한다. 따라서 금연을 지속할 좋은 동기가 생긴다. 뭐든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 금연의 괴로움을 이길 목표가 명확해진다. 그것이 요령이다.” 폐활량을 요구하는 노래부르기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담배를 끊어야 더 잘하게 된다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 갱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동기가 충분해지면 이제 금연 자체의 쾌감행동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시스템은 행동에 대한 개념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금연에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인내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뇌에게는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지면 멈추고 파란불이 켜지면 걸어가는 행위가 그렇다. 이때 GO/NOGO의 판단이 뇌안에서 이루어진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받을 것인가 그대로 있을 것인가? 바빠도 점심을 먹으로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뇌 안을 보면 이 GO/NOGO의 행동을 관장하는 부분이 있다. 주목할 점은 이 부분은 행동을 할 때뿐만 아니라 행동하지 않을 때에도 신경세포 네트웤가 강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대개는 행동할 때만 명령을 내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다르다. 행동할 때나 행동하지 않을 때나 뇌의 사령탑에서 행동 명령을 내린다.”

그렇다면 금연을 ‘담배 피우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담배 피우지 않는 행동’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무런 보상없이 하고 싶은 것을 참는다면 그것은 인내가 아니라 오기다. 그런 인내는 이내 하기 싫어지고 억지로 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러면 소극적인 행동밖에 못한다.”

저자는 인내를 적극적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렇게 정의하면 금연은 “다른 쾌감을 준비해 NOGO 명령을 강화하는 트레이닝”이라 재정의된다. 이런 전략은 금연 뿐 아니라 금주, 다이어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담배 피우지 않는다’는 목표를 제대로 실행했다면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보상을 하자. 새로운 취미를 장려핶던 것은 이 보상에 관련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취미에 필요한 도구를 ‘사흘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일주일 동안 해내면’ ‘열흘 성공하면’ 하는 식으로 기간을 정해서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상으로 주는 것이다. 고령자에게 금연을 권할 경우 ‘담배를 피우면 손자와 놀지 마라’는 말이 효과적이다. 손자와 노는 것이 보상이 돼 금연을 할 수 잇다.” 정년퇴직하신 분이 실제 그렇게 금연에 성공한 경우를 보았다.

“참기만 하는 금연은 누구나 실패한다. 뇌를 트레이닝한다는 생각을 갖고 적극적으로 보상을 준비해”야 극복할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뇌 안에서 행동하지 않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똑같이 ‘명령’으로 결정된다. GO 명령을 방해할 것이 아니라 적극저긍로 NOGO 명령을 내리자. 소극적인 방어자세가 아니라 앞으로 나가는 공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선 보상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금연에 쉽게 실패했던 이유는 조작적 조건화 팽동으로서 보상과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건강에 좋ㅇ른 것이지만 확실한 강화인자가 없다. 그 때문에 담배를 피웠을 때 도파민이 일으키는 쾌감의 강화인자 쪽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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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행복할 것 - 1년 열두 달, 내 인생을 긍정하는 48가지 방법
그레첸 루빈 지음, 전행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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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 40을 바라보는 시기를 제2의 사춘기라 한다. 정신없이 살다 문듯 정신을 차리는 시기란 뜻이다. 그 나이가 되면 그때까지 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성공한 인생이었는지 알 수 있는 때이며 남은 생애가 어떠할지 보이는 때이다. 그런 때이기에 흔들리는 사람도 많다. 한 사람 몫을 하기 위해 제 몫을 찾기 위해 아둥바둥해오다 그때까지 해온 것을 돌아보고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나 자신에게 묻는 때이니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다.

저자가 이책을 쓴 이유도 그렇다. 이책을 쓰기 전까지 저자는 잘 나가는 법조인의 경력을 쌓아가고 잇었다. 그러나 과연 앞으로 남은 시간도 그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자신이 그려지지 않는다. 저자는 남은 삶을 모두 쏟아부을 수 잇는 일로 작가를 선택한다. 이제 인생의 반환점에 이른 나이에 큰 모험이다.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이책은 그런 저자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그때까지 별 신경을 쓰지 않던 당연한 것들, 습관대로 해오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며 쓴 일기라 보면 된다.

이책의 구성은 잡다하다. 연초면 누구나 해보기 마련인 올해의 결심들을 항목별로 나열한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결심을 실천했다는 것이 다르다. 이책은 그 결심들을 어떻게 실천해나갔는가를 저자의 일기 형식으로 써나간 것이라 보면 된다.

잡다하긴 정말 잡다하다. 남편에게 잔소리 하지 않기, 운동하는 습관들이기, 불면증 고치기, 떠넘기기 하지 않기, 사랑한다고 말로 표현하기, 가족에게 노래로 아침을 알리기 등등

어리둥절할지 모르겠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책으로 낼만한 것인가? 낼만하다. 저자가 그런 연초의 결심을 한 것은 사소한 그런 것들이 행복의 기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사실 실천하기는 힘들다. 행복이란 말은 거창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사소한 것에서 만들어진다. 행복하기 어려운 이유가 그런 사소한 것들이 지키기 어렵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책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하기 위해 저자가 어떻게 해나가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책의 매력은 바로 그 구체성이다. 읽다보면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이 어렵구나, 이렇게도 사는군, 흠 나라면 어떻게 할까, 그런 의미가 있었나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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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뇌 -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뇌졸중 체험기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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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저자의 뇌졸증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뇌졸증은 드문 것도 아니고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뇌졸증을 겪은 뇌과학자라니, 얼마나 기막힌 처지인지.” 바로 그 기막힌 처지 때문에 이책은 특별하다. “내가 알기로 신경해부학자가 직접 중증 뇌출혉을 겪었다가 나은 사연을 기록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사연은 뇌를 다룬 개론서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뇌졸증으로 좌뇌가 망가진 저자는 언어능력을 잃어버리고 계산능력도 시간감각도 자아정체성도 잃어버린다. 끔찍한 일이다. 한 때 잘 나가는 하버드대의 학자가 세상과 소통할 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기만도 못하게 되다니.

“여러분의 타고난 능력이 체계적으로 하나씩 의식에서 사자져 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라.

먼저 여러분의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분간하는 능력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소리가 혼돈스러운 소음으로 들리는 것뿐이다. 둘째로 눈앞의 대상의 명확한 형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워보자. 눈이 먼 게 아니라 3차원으로 보거나 색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움직이는 대상을 따라가거나 대상들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구분하는 능력 또한 사라진다. 게다가 보통 때라면 그냥 지나칠 만한 냄새가 증폭되어 여러분을 압도하기 때문에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진다.”

“읽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전에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S를 보여주며 ‘이것은 S야’라고 말햇던 기억이 난다. ‘아니야, 엄마, 그건 그냥 꼬불꼬불 쓴 거잖아.’ 그러자 엄마는 ‘이 꼬불꼬불한 글자가 S야. 스으으라고 소리나지’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꼬불꼬불한 그림일 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앗다.”

“깨끗한 접시를 선반에 차곡차곡 정렬하려면 놀랍게도 계산 능력이 필요했다. 나는 접시를 깨끗이 씻는 일은 해냈다. 그러나 다 씻은 접시들을 작은 선반에 말끔하게 집어넣으려고 계산을 시작하자 아찔하리만큼 머릿속이 복잡해졋다. 그 방법을 알아내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글자를 타이핑하고 나서(우뇌) 방금 쓴 것을 읽지 못한다는 점(좌뇌)이엇다.”

“사람들이 내 박사학위를 빼앗아갈까? 해부학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이후 예전처럼 회복되기까지 저자는 8년을 소비해야 했다. 뇌출혈로 죽은 뉴럼은 거의 없었다. 단지 뉴런들의 네트웤이 교란된 상태엿고 다시 네트웤을 잇기 위해 자극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말은 간단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유아기로 돌아가 사실상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할 판이었다. 나는 완전히 기본으로 돌아갔다. 걷는 법, 말하는 법, 읽는 법, 쓰는 법, 퍼즐을 맞추는 법을 배웠다. 신체의 회복 과정은 정상적인 발달 단계와 비슷했다. 각각의 단계를 익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엇다.”

8년 동안 저자는 하나씩 예전 기억들과 능력들을 되살릴 수 있었고 다시 유능한 학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나고 나서도 수리능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뇌출혈로 수리를 담당하는 뇌세포들이 파괴된 것이다. “4년째에 접어들자 뇌가 덧셈에 다시 반응을 보였다. 6개월 정도 더 지나자 뺄셈과 곱셈이 가능해졌다. 나눗셈은 5년차가 될 때까지도 힘들었다.”

그러나 저자는 좌뇌가 망가진 끔찍한 상황에서도 예전처럼 돌아가야 하는지 망설여 졌다고 말한다. “회복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인지적 결단이었다. 나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긴채 더 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누군들 안 그랫겠는가? 그곳은 아름다웠다.. 내 영혼이 자유롭고 거대하고 평화롭게 빛났다. 나를 집어삼킨 희열에 빠져 회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질문해야 했다.”

거의 예전으로 회복되었을 때 “마침내 내 몸에 대한 자각이 유동체에서 고체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 자신이 유동체로 지각되던 때가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유동체여서 좋았다. 내 영혼이 우주와 하나이며 주위의 모든 것과 함게 흘러가는 것이 황홀햇다.”

저자가 느낀 황홀함을 요가학파들은 ‘자나(황홀경)’라 부른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만큼 내적인 영성을 철저하게 추구한 경우는 없었다. “축의 시대의 중요한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성스러움’이 단순히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바닥에 내재한다는 것이었다.”(카렌 암스트롱) 이러한 깨달음은 브라만과 아트만이 같다는 ‘범아일여’로 정식화된다.

그러나 범아일여를 깨닫기 위해선 폭력이 필요햇다. 저자가 뇌출혈로 좌뇌가 마비된 것과 비교될 만한 폭력이. 범아일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것과 자기를 보호하려는 의식적인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깨야 했다. “거룩한 존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끔 문명화된 개인의 정상적인 반응을 부정하고 세속적인 자아에 폭력을 휘둘러야 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정상적인 사고 과정을 파괴하고 사고와 감정을 없애소 깨달음에 저항하며 버티는 무의식적인 바사나를 제거할 때에만 ‘자아’가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카렌 암스트롱)

우리가 아는 요가는 건강체조에 가깝다. 그러나 요가의 목적은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고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부수기 위한 기술로 개발된 것이다.

요가 수행의 초기단계에서 “수행자는 음악, 특히 스스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웅장하고 고아대하며 차분하면서도 고상한 영역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을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이 아마도 저자의 좌뇌가 무너졌을 때 느낌일 것이다.

요가 수행 최고의 경지는 이렇게 묘사된다. “수행자가 정말로 능숙하면 자나의 단계들을 넘어서 네 개의 아야타나(四空處)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상태는 매우 강렬해서 초기의 요가 수행자들은 자신이 신들이 사는 영역에 들어왔다고 느꼈다. 요가 수행자는 네 개의 정신 상태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존재의 새로운 양식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무한에 대한 느낌(空無邊處)이다. 두 번째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의식(識無邊處)이다. 세 번째는 부재에 대한 인식(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이것은 역설적으로 풍요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오직 재능이 뛰어난 요가 수행자만이 이 세 번째 아야타나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단계는 ‘무(또는 空)’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세속적으로 경험하는 존재의 형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나 개념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무’라고 부른 ㄴ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방 안에 걸어들어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묘사한다. 그럴 때 우리는 공허, 공간, 자유를 느끼게 된다.

일신교에서도 신을 경험하는 일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햇다.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의식에서 거룩한 것의 가장 고양된 방출상태를 ‘무’라고 했다. 신은 단지 또 다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나 거룩함과 마주치는 것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경험이기 때문에 언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신비주의자들은 그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런 종류의 부정적 용어법을 채택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그들의 존재의 핵심에 자리잡고 잇는 무한한 ‘자아’를 마침내 경험하게 되었다고 상상했을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저자가 느낀 평화와 기쁨, 행복, 우주와의 일체감은 영적 체험의 느낌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저자가 요가의 최고 경지를 느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경험은 영적 체험이 신경학적인 근거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체험은 뇌과학 서적에서 종교적 체험을 설명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종교적 혹은 영적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신경해부 구조가 확인되었다. 우리가 개인의 존재에서 벗어나 우주(신, 열반, 극도의 행복감)와 하나가 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 뇌의 어느 부위가 관여하는지 확인된 것이다.

티벳 수도승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녀들을 불러 SPECT 기계 안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올리게 햇다. 이어 명상이 절정에 달하거나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순간, 실을 잡아당시도록 했다. 이 실럼을 통해 뇌의 특정 부위의 신경 활동이 달라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좌뇌의 언어중추와 공간지각, 자아중추가 침묵한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저자의 좌뇌가 마비되고 우뇌가 의식을 지배할 때와 비슷한 상태이다. 저자가 “몸을 고체가 아니라 유동체로 지각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낀 것”이 신경학적으로 설명 가능해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세상 모든 번뇌로부터의 해방감”이라 말하며 “열반과 같은 느낌일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책에서 자신의 체험을 종교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의 체험을 삶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뇌졸증 경험으로 축복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누구든 언제라도 깊은 마음의 평화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열반과도 같은 경험이 우뇌의 의식 속에 존재하며 언제라도 스스로 뇌의 그 부분에 접속할 수 있다고 믿는다.”

“뇌졸증이 나에게 가르쳐준 최고의 것은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기쁨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평화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그러나 좌뇌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예전의 감정이 돌아왔다. “판단은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분노, 좌절, 공포 같은 감정이 몸 안에 차오르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감정 프로그램을 되찾고 싶고 어떤 감정 프로그램(조바심, 비난, 불친절)에 발언권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지 무척 까다롭게 골랐다. 뇌졸증은 내가 세상에서 누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게 해준 놀라운 선물이었다. 사고 이후 나는 내게 선택의 권리가 있다는 걸 실감한 것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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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전 - 당신의 운명을 바꿔줄 위대한 질문 100
좌우명연구회 지음, 박혜령 옮김 / 토네이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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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민학교 다닐 때 교문을 들어서면 수위실 옆 공터에 신문팔이들이 앉아있엇다. 요즘은 나오지 않는 소년신문을 팔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 신문을 사서 본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러나 집에서 꽤 오랫동안 소년동아일보(제호가 맞는지는 모르겠다)를 구독햇었다.

당시 그 신문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여러가지가 실려 있었는데 즐겨 봤었던 것은 연재만화와 과학상식이라든가 역사상식 등이었던 것같다. 애들용답게 삽화가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외에도 챙겨봤던 것이 오늘의 명언 (제목이 아마 맞을 것이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날 그날 짧막한 명언들이나 속담 또는 4자성어등이 실렸는데 영어원문이 같이 실리는 것이 기본 포맷이었다. 그때 외었던 것으로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Everybody’s business is nobody’s business 정도이다.

그 당시는 명언을 모아 편집하는 책들도 상당히 많았다. 지금도 집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백과사전 크기에 1000 페이지가 세계명언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왜 그런 기획이 당시에 많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사이 소리소문 없이 그런 기획이 사라진 이유도 모르겠다.

글쎄 왜일까?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진 것이 아닐까? 명언 같은 짧은 말은 내용을 담기에는 너무 가볍다. 가벼운 말이기에 내용이 있으려면 무게를 읽는 사람이 채워넣어야 한다. 그러기엔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나부터가 뜬 구름잡는 듯한 아포리즘 형식은 읽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의 명언을 읽던 어릴 때를 지나면서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소화불량과 연관된 것이었다. 최대한 많이 우겨넣고 소화되지 않는 것은 그냥 흘려버리는 식이었다. 아포리즘 같이 되새김질을 하면서 소화될 때까지 씹는 것은 논외의 일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소화불량이 걸린다. 정보는 늘지만 정보로 받아들일 지식이 지혜가 없는 말은 그냥 배설되어 잊혀지는 것이다. 읽어도 읽어도 현명해지는 것과는 성장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조금만 느리게 살 때가 된 것일까.

막상 느리게 살려고 해도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막막하다. 생각을 느리게 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보통 시간에 대해 과서는 뒤에, 현재는 지금, 미래는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데스산맥에 살고 있는 인디언 부족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아이마라족은 과거의 위치를 물으면 시야의 앞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과거의 사건들은 이미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볼 수 있는 앞쪽에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래의 사건들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등 뒤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개념은 아이마라족의 생활에 깊숙이 배어 있다. 그들에게 ‘내일’은 ‘사람 등 뒤의 어느 날’이다. 오랜 조상은 앞쪽 멀리 있고, 미래 세대는 어깨 뒤 저편에 있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조상들의 지혜에서 인생을 배우고 깨닫는다.”

‘시간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란 챕터에 실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앞에는 10여개의 아포리즘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역류하지 않고 흘러가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책은 이야기와 아포리즘들을 편집한 책이다. 예전에 많이 나오던 책들과 달리 아포리즘만 담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도 같이 편집한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아포리즘에 해설이 없듯이 이야기에도 해설은 없다. 이야기가 위에서 보듯이 아포리즘과 내용적으로 연관은 있지만 딱히 해설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포리즘을 나열하듯이 이야기도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행간을 읽으면서 메워넣으라는 말이 된다. 목차를 보면 주제별로 아포리즘을 편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놓은 아포리즘들은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엉성한 편집이다. 그러나 엉성하기에 이책은 가치가 있다. 엉성하게 짜인 사이 사이를 띄엄 띄엄 천천히 읽어가면서 의미를 메워넣다보면 그 가치를 알게 된다.

느리게 읽어갈 수 밖에 없기에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을 하면서 여유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책읽기의 명상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을 덮고 나면 여전히 바쁠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스스로에게 느리게 느리게를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점이 이책의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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