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지는 사람들 -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
셰리 터클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난 스미노 히카게 중학교 2학년 존재감이 제로인 여자애...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다. 촌스러운 외모와 성격으로 초등학교에선 이름조차 외워준 사람이 없었고 중학교 입학을 하면서 심기일전하려고 했는데 (차에 치이려는 고양이를 구하려다 오토바이에 치었다) '고양이 밖에 안보였다' 오토바이 남자의 말. 존재감 없는 게 화근이 되어 전치 2개월짜리 부상을 입었다. 다들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고 왕따를 시키는 것도 아니니 아무렇지 않..지만... (토야마 에마)

 

'나 여기에 있어'란 만화의 설정이다. 왕따, 등교거부, 니트족 등의 문제를 다룬 만화이다. 인기를 끌었던 너에게 닿기를과 마찬가지로 이 만화의 주인공 설정은 현실적이지는 않다. 존재감이 없다고 교통사고가 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나 "2년동안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한테 졸업식 날 '너 이름이 뭐였지?'란 말을 들었던 난 꽤나 음침도가 높았던 것 같아요. 힘들어요. 리액션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때때로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만화입니다."란 작가의 말처럼 "새까만 어둠의 세계에서 날 찾아주는 사람을" 원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녀는 묻는다. 계속 이대로일까?

 

그렇지 않아! 해바라기라면 계기가 있으면 바로 친구를 사귈 수 있어! 매일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런 해바라기를 봐주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야(^^)" 그 대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다.  내 취미는 블로그에서 '해바라기'라는 닉네임으로 하루 한 번 찍은 사진이나 생각한 걸 적어 인터넷 일기에 공개하고 있다. 블로그는 봐주는 사람이 덧글을 주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주고 받을 수가 있다. (블로그에 달리는 덧글은) '나'를 꾸준히 지켜봐주는 소중한 마음의 지주이다." (토야마 에마)

 

그러나 그 지주는 진짜가 될 수는 없다. "현실세계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 동네 애듫이 숨바꼭질에 끼워줘서 이런 식으로 술래를 기다렸지. 계속 계속 기다렸어...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주질 않아서 울면서 집에 갔다. 그때랑... 똑같잖아... 기억 못하는 애는 찾지도 않지... 찾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외로워... 누군가... 누군가 날... 알아차려줘." (토야마 에마)

 

"조금 용기를 내면 세상은 변할 거야" 이 만화는 그 누군가를 찾으려는 히카케의 용기를 이야기한다.

 

이책에서 저자가 그리는 네트웤의 세계는 블로그의 댓글을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 히카케(일어로 그늘)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히카게가 그랬듯 자신을 알아차려줄 누군가를 찾아 네트웤에 로그인한다. 그러나 그 누군가를 진짜 찾아나설 작은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어주는 동시에 관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에 시선을 돌린다. 이런 현상은 문자 메시지의 홍수를 헤쳐나갈 때도 일어날 수 있으며 로봇과 상호작용을 이룰 때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전에 없던 염려로 무생물들에게 열중한다. 같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실망과 위험을 두려워한다. 테크놀로지로부터는 더 많은 걸 기대하고 우리끼리는 서로 덜 기대한다. 테크놀로지는 친밀성의 설계자를 자처한다. 오늘날, 그것은 실제를 도망가게 만드는 대체물들을 제안한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인간적 약점과 만날 때 매력적이다. 우리는 정말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외로움을 타면서도 친밀해지는 건 두려워한다.

 

"아무도 진짜 나한테는 관심없어. 다들 스타 연기자 모리카와 토모미에 대해서만 궁금해해 제멋대로에다 거짓말쟁이인 (15살짜리) 천재 소녀 토모미 말야. 진짜 모습 따윈 필요도 없어. 말해봤자 소용없다구 모두의 머리 속에서 다시 만들어지니까. 배우는 사람의 기억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얘기 있어. 가끔 생각해. 내가 죽는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 하고 아무도 내 짐짜 모습을 모르는 채 거짓말 그대로 거짓말쟁이인 채 잊혀져 버리게 될까 하고 나, (세상과 벽을 쌓고 사는 은둔형 외톨이인) 카요가 되고 싶었어. 카요는 나 같았으니까. 약간이나마 진짜 내 모습을 기억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지 않음 내가 사라질 것 같았어. 사실 난 어디에도 없고 제멋대로에다 거짓말쟁이인 배우 토모미라는 딴 애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 바보같지?" (카와하라 유미코)

 

토모미가 하루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닮은 카요란 캐릭터를 창조한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루는 자신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에게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식으로 해답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상처입었을까? 상처입은 소녀. 거짓말과 제멋대로 구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는 소녀. '비현실'속에서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던 소녀는 '현실'을 의식한 순간 혼란에 빠지고 말았는지 모른다. 하루 탓이야. 비린내나고 기분 나쁜 현실을 그래도 그녀는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했다. 그 한가지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억지로 명랑하게 행동하고 연기하고." 사랑하고.

 

그러나 사랑이 구원일까? 시나리오대로의 사랑 밖에 모르는 토모미는 현실의 사랑도 구원일지 의심한다. "난 모르겠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지금까지의 자신을 모두 버릴 수 있어? 사랑 얘기는 다 그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달라져 사랑이라는 계기 하나로 그 때까지 자신이 지켜온 모든 걸 전부 버리고 말지 그렇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인양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라도 되는 듯. 하루는 그런 것 믿을 수 있어?" 그러나 누구나 믿을 수 없으면서 믿고 싶은 것이 그런 것이다. "하루가 믿게 해줘."(카와하라 유미코)

 

그러나 그 믿음이란게 얼마나 견고할 수 있을까?

 

"엄마에게 왜 그러셨어요? 혹시 엄마를 의심하셨어요? 그래서?"

"아니 네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모르겠다."

"전 들어야 해요. 저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둘러대려는게 아니고 정말 모르겠어. 어떤 말을 사용하든 다 그럴듯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어떤 말도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모르겠다. 사랑이었다. 모든 것이 그랫다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시점까지는 분명히 사랑이었다. 그것마저 부정한다면 내 인생은 너무도 황폐해진다. 내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실수한적이 없는 인생이었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서로 사과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노력해도 사과는 서로를 더 고개들지 못하게 만들뿐이고 노력은 펼쳐진 현실으 어떤 부분도 바꾸지 못했고 위로도 격려도 내뱉는 즉시 온기를 잃고 사라졌다. 그래 사랑했었지 좀 더 많이 보고 싶고 좀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나지막한 이야기들이 즐거워서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사랑했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에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것도 가슴까지 와 닿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십 년간 조금씩 바라 온 기억의 흔적, 애정의 잔해. 하지만 그 순간에는 잘 몰랐다. 한 번 두번... 조금씩 확실해졌지 이제 어떤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아니 움직일 마음 자체가 없어진 것같다."

"그렇다면 왜?"

"네 엄마에게 쏟아낸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랬다.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 후회? 죄책감의 비뚤어진 표현? 전부 그럴듯하지. 참 이해하기 쉬워,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건가보다 싶어지지. 하지만 그것으로 전부냐 하면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사람을 부수고 망가뜨릴 정도의 감정 자체가 남아있질 않았는데 왜? 네 엄마에게 퍼붓고 덮어씌운 것은 그 사라지고 남은 모든 감정의 부스러기나 흔적 같은 것들 아닐까 싶다." (윤지운)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묻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진짜 같은 환상을 만든다. 디지털 연결망과 사교 로봇은 친구 맺기를 요구하지 않는 교류라는 환상을 제공한다. 우리의 네트워크화된 삶에는 서로 묶여 있는 순간에도 서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대화보다도 문자 메시지가 선호된다. 로봇이 우리를 보살펴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자기와 상호작용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 사람에 의해 성격이 형성되는 가상 인간 마일로를 공개했다. 마일로를 세상에 소개하는 비디오는 강렬하게도 한 젊은이가 가상 정원에서 마일로와 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시연이 끝날 때쯤엔 분위기가 무르익어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은 젊은이가 마일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기계와 나누는 새로운 친밀감을 통해 우리 자신 및 관계가 재창조된다.

 

그러나 그런 친밀감은 진짜일까? 나에게 진정성이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는 능력, 인간적 경험-태어나고, 가족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현실과 상실감을 아는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컴퓨터와 로봇에게는 함께 공유할 그런 경험들이 없다. 사람들이 그런 환상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정교한 일본산 로봇이 소위 돌봄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남자 친구와 맞바꿀 의향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만일 로봇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누군가 정말로 나와 함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겠어요. 앤이 찾는 것은 외로움을 가시게 해줄 위험 없는 관계였다. 각본대로 행동하는 것일뿐이더라도 즉각 반응을 보이는 로봇이 까탈스런 남자친구보다 더 나아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가짜는 외로움을 없애지 못한다. 미리엄은 다른 어떤 존재와 친밀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은 혼자엿다.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나고 로봇한테 의지하는 동안 나는 우리 역시 그녀를 버린 거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편견없이 무생물에 애착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문득 기술적 문란이란 말이 생각난다. 이 시대의 배경이 궁금해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람들과 부대까며 사는 어려움과 피로의 소리를 접한다. 우리는 인간적 취약성이 드러나는 대목마다 로봇을 대입한다. 사람은 요구가 너무 많지만 로봇의 요구는 좀더 감당이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지만 로봇은 그러지 앟을 것이다.

 

스크린의 채팅도 다를 것이 없다. 본질적으로 그것 역시 가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온라인에서의) 그러한 정체성 연기들은 정체성 그 자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로봇공학과 네트워크한 삶이 처음 교차하는 지점이다. 온라인 연기는 방향감각의 상실을 불러올 수 있다. 당신은 보상을 얻고픈 마음에서 온라인 삶을 시작했을지 모른다. 외롭고 고독했다면 아무것도 안 하느니 그거라도 하는 편이 나아 보였을 테니

 

그러나 저녁 나절, 네트워크 게임에서 아바타 대 아바타 대화를 하고 나면 잠시 온전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 젖다가 그 다음에는 낯선 이들과의 허약한 연대 속에서 묘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페이스북이나 마이스페이스에서 팔로잉을 하면서 팔로워들이 어느 정도까지 친구인가를 궁금해한다. 온라인 페르소나로 자신을 재창조하여 새 몸과 새 집, 새 직업, 새 로맨스를 부여하는데 가상 커뮤니티의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어느 순간 철저하게 혼자라는 느낌이 엄습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퍼뜨려나갈수록 스스로 버림을 받게 될수도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몇 시간을 접속하고 나서도 소통했다는 감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잇지 않을 때 친밀한 기분을 느낀다.

 

열세살짜지 소녀는 내게 말했다. 전화는 너무 싫어요. 음성 메일은 듣지도 않고요. 문자 메시지는 적당한 접속시간, 적당한 조종시간만을 젝5ㅗㅇ한다. 그 소녀는 현대판 골디락스다. 그 애에게 문자 메시지는 사람들을 너무 가깝게도 너무 멀게도 아닌, 딱 적당한 거리에 두는 수단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가 친밀성을 획책하는 경우엔 인간관계가 단순한 연결 수준으로 떨어질 수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손쉬운 연결이 친교로 재정립되낟. 다시 말해 사이버 친교가 서서히 사이버 고독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은 로봇에 프로그래밍된 하는 연기와 구분이 되지 않게 된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혜민이는 신비에게 자기 자신을 제외한 '세계'와 마찬가지니까. 누군가를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면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간단해 원하는 것을 모조리 채워주면 되잖아. 어디로도 갈 수 없도록 고립시켜 버리는 것, 타인과 접촉하기 위한 통로, 건너가지 위한 길목. 아주 세심하게 없애버렸지. 싫든 좋든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내가 처음 혜민이를 봤을 때 그 앤 그냥 말주변이 부족하고 낯을 가리는 평범한 아이였어. 괴로운 일을 당하면 슬퍼하고 자신의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울었지 하지만 점점 그 앤 울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게 되고 고개를 들고 싫은 말은 무시할 줄 알게 되고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까딱하지 않게 되었어. 강해진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애는. 신비가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어온 거야. 잘못한 것은 네가 아니다. 뒤틀린 것은 세상일뿐이다. 그러니까 너는 먼저 손을 내밀 필요가 없어.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속삭여 주면서. 잘 알고 있었거든 신비는. 옳다 그르다라는 것은 살아가는데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그애가 인간에게 무지하다는 것을. 고개 돌리고 있는 사람까지 챙기려들만큼 세상은 친절하지 않고 하물며 적의를 보이는 애야 말 할것도 없지.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 애에게 가혹해지고 또 그럴수록 그 애는 번거로운 일에서는 눈을 돌려버렸어. 그런 악순환을 철저히 준비해왔어. 신비에게가 아니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도록 ." (윤지운)

 

시니컬 오렌지의 일부이다. 재혼으로 혜민과 남매가 된 신비는 혜민과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없다. 이미 부모가 이혼해 남남이 된지 오래되었는데 법은 그런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혜민을 곁에 둘 수 잇는 방법은 그녀에세 에덴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 만든 테크놀로지의 세계는 신비가 혜민에게 만들어준 에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저자는 묻는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정서적 삶의 지형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영위하고 싶은 삶을 제공하는가? 저자의 답은 부정적이다.

 

"안에 들어가도 돼?"

"... 안 돼. 이 방엔 죽은 거랑 죽어가는 것밖에 못들어가. 그러니까 하루는 들어갈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나 현실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하루가 유령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나 살아있는 게 무서워. 배우가 아니면 봐줄만한데도 없는데 스튜디오가 무섭고 사람이 무서워. '살아 있어' '살고 싶어'라고 여러가지 것들이 얘기 해. 공기 속에 여러 생명이 섞여 냄새나고 무서워서 나 질식할 것같아. 그래서 난 죽은 방에서 죽는 꿈을 꿔. 영화나 책에서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해피엔드는 해피엔드니까 좋겠구나 생각했어. 그래서 꿈을 꿔. 내가 행복한 주인공이 된 꿈. 자물쇠를 걸고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꼭꼭 잠근 후에 죽은 것들에 파묻혀. 언제나 변하지 않아. 언제나 행복한 세계. 그리고 결국엔 죽은 것들과 닮아가. 꿈도 나도. 그치만 하루 때문에 많이 망가졌어. 더 이상 망가뜨리지 마!!"

"그렇담 더욱더 들여보애 줘야 해. 토모미는 살아 있어. 죽은 것들은 널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 영화랑 책을 만든 건 현실의 인간이야. 난 아직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지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살아있는 자들만이 알아. 이 녀석들보다 훨씬 나. 종이나 필름을 살아 있는 세상과 바꿔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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