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시
바바라 오코너 지음, 이은선 옮김 / 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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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로서는 두번째 읽은 바바라 오코너의 소설이다. 감각적으로는 프레드릭 베크만 엉뚱함과 따스함을 품고 있는 류의 소설인데, 살짝 더 낮은 연령층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살짝 심심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어른들도 볼만 하다.  고작 두 권 읽고 작가의 작품 세계를 논하는 게 온전히 맞는 말 아니겠지만 전작인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과 함께 놓고 보면 바바라 오코너의 작품에 몇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아버지의 가출로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나와 차에서 생활하게 된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는 부재중이고, 아이는 집을 나와 다른 곳에서 생활한다. 차에서 지내는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전작처럼 집이 아닌 이모집에서의 생활에서도 조금씩 적응해 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머니의 역할인데 전작에서 엄마는 억척같이 일을 해서 돈을 모아 아이와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하는 반면, 이 작품에서 엄마는 쌈닭 아빠와 싸우다 싸우다 정신이 나가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오누이는 헤어져서 한 사람은 친구집에 또 한사람은 먼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콜비라는 시골 이모집에서 임시로 지내게 된다. 


그런 콩가루 집안마저도 어린 아이가 있을 환경이 되지 않아, 아동국에서는 아이의 양육을 이모에게 맡기는데, 갑자기 시골 구석으로 이사와 '촌닭'들이 투명인간처럼 무시하는 학교에 다니는 찰리는 우스꽝스러운 신데렐라 베개 커버를 베고 피클병들이 잔뜩 한쪽 선반을 장식하고 옷장에는 이모 가족의 옷들이 가득한 방에서 지낸다. 


찰리는 언제고 어디서고 기회만 있으면 소원을 빈다. 생일날 촛불을 끄면서 소원을 비는 건 가끔 봤는데, 서구에서는 어떤 희귀한 현상을 보거나 생기면 그곳에다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그녀는 11시 11분이라는 시간적 우연 앞에서 소원을 빌고, 네잎 클로바를 발견했을 때도 따지 않고 아껴두며 소원을 빌며, 찌르레기 깃털을 발견했을 때에도 그 깃털을 땅에 꽂으며 소원을 빌며, 세 마리의 새가 함께 앉아 있어도 소원을 빈다. 그녀의 소원은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지만 그렇게 바라고 또 바란 것들은 다른 형태로 이루어진다. 고민거리를 주렁주렁 빨래줄에 걸어놓아도 좀처럼 마를 사이가 없는 찰리에게 소원이 얼마나 많겠는가. 헤어진 친구들은 자신을 잊었고, 정신이 나간 엄마는 전화도 편지도 한통 없고, 교도소에 있는 쌈닭은 언제나 나오게 될지도 모르고 친구도 없는 이 촌구석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까칠하기로는 오베보다도 더한 찰리는 이 낯선 곳에서 이모부 부부인 버서와 거스의 친절함과 다리를 절룩거리지만 찰리에게 파인애플 요법을 알려주는 하워드와 그의 가난하고 착하고 북적북적한 가족, 그리고 떠돌이 개였다가 자신의 개가 된 위시본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그 세상의 질서에 적응해가고, 어느덧 자신이 비는 소원이 진실로 자신이 바라는 것인지 혼동스럽지만, 끝내 엄마가 나아졌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새로운 질서를 떠나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참을 성이 없이 성질을 폭발하고 마는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자신이 하워드의 소원이었고, 버서와 거스의 햇살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아이를 갖고 싶었으나 갖지 못했던 찰리는 '우울한 날의 부부에게 끝에 비친 햇살'이라는 걸 알았을 때, 하워드의 파인애플로도 통하지 않던 쌈닭 기질마저도 누그러진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거다. 자신이 모르고 있던 어느 옛날, 엄마가 자신과 가족을 모두 버리고 떠났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아무리 소원을 빈다고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정신이 나가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엄마는 계속해서 아이들을 돌보지 않을 것이고,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쌈닭 아빠 역시 다른 희망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아주 어릴 적에 엄마가 자신과 가족을 모두 버리고 새출발을 하러 이곳에 몇달간이나 왔었다는 것. 그리고 엄마의 걱정거리 빨래줄에는 더이상 자신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어떤 수용 속에는 새로운 미래가 때로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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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1-27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봤어요ㅎ 설연휴 잘보내세요^^

CREBBP 2017-01-27 21:2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고양이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책이 들려주는 양, 이야기의 크기에 압도되었다. 페이지마다 꽉 들어찬, 넘쳐나는 서사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인내와 시간, 그리고 집중이 필요하다. 밀도 높은 이야기에서 깊이를 가는하고 의미를 촘촘하게 짚어가며 개별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붙잡고 싶다면 훨씬 더 오래 붙들고 있어야 했을 책이다. 김중혁 작가는 고통스럽다고 했다. 심지어 추천하지 않겠다고까지 했다(나중에 읽어야 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내 경우, 고통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읽지는 않았으며, 재미있었고 내 경우, 누구에게라도 읽어보라고, 후회없을 거라고 말하며 추천하고 싶다. 고통에 있어서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간다>나 <태백산맥> 같은 베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이야기, 사람의 아들이 태어나고 살고, 또다시 죽는 이야기, 그렇게 한 가문이, 또 한 마을이 태어나서 살아내고 멸망해가는 이야기다.








콜롬비아의 국민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으로 출간되자 마자 대박을 터뜨리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전세계에 남미 문학의 위상을 단번에 끌어올리며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역시 그의 성공한 대표작 중 하나다. 그의 문학을 사실적 마술주의라는 상반되는 두 단어의 조합으로 흔히들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 말을 누가 발명했는지 처음 몇 페이지만 넘겨도 그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없을 정도의 강한 공감을 경험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말도 안되는 마술과 환상과 과장 같은 것들은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조화롭게 배치된 치밀한 현실 세계에서 마치 홀리듯 빨려들어간다.  <작가란 무엇인가 1>의 파리리뷰 인터뷰에서 작가가 했던 말 중 저널리즘과 소설은 큰 차이가 없다는 말,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을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생각나서 다시 찾아보았다. 확실히 그는 카프카의 소설에서 최초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냈다. '이런 것을 쓰도록 허락받은 작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 등이다. 현대의 많은 소설이 카프카의 소설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 작품은 그레고리 잠자가 아침에 일어나 벌레로 변해 있는 있을 수  없는 일이 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는 세계를 묘사했던 것처럼 실제로 가능할 법 하지 않은 수많은 신화적, 환상적, 마법적 요소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양이 많기에 <백년의 고독> 전체 내용을 요약하기는 오히려 쉽다. 100년 7대에 걸친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이자, 마꼰도 마을의 생성과 수난과 번영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속에는 콜롬비아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가 함축된 의미와 상징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인류 혹은 우주 전체에 대한 은유로도 읽힐 수 있다. 예언의 실현과 구성원들의 되풀이되는 운명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발견해내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해가 뜨고 아침을 밝히면 다시 서쪽하늘을 물들이며 하루를 마감하며 지듯 , 달이 차면 기울듯, 꽃이 피면 열매 맺고 지듯, 생명이 태어나고 살아내고 죽듯, 모든 태어나는 것들은 끝을 예감하고 있으며 수 많은 반복과 순환이 이루어내는 변화 속에서, 그것을 있게 하는 더 큰 또다른 세계가 피고 다시 진다. 이러한 우주적 이치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며, 우리의 가문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며, 미래의 어느 날에는 세상이 혹은 종말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생명이, 우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마콘도 마을의 탄생은 금기시된 근친과 살인이라는 원죄로부터 시작된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대령과 우르술라는 사촌 관계인데 근친을 하면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탄생한다는 두려움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을 따르는 21명의 마을 남자들과 함께 살던 마을을 떠나 배를 타기를 원했으나, 바다를 찾지 못하고 마꼰도라는 마을에 정착한다.  소설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 마을의 지리적 위치는 콜롬비아의 해안 지역과 지리적으로 흡사하다. 서쪽으로는 고원지대이고 나머지는 저지대와 해안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아득히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고립된 위치에 있다. 그들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지휘 아래 평등하고 공평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 100여년이 흐르면서 이 공동체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맡겨져 한 때는 엄청나게 흥하기도 하고 또 엄청난 시련을 겪기도 하면서 더이상 고립되지 않고 큰 도시로 성장한다. 뱃길이 열리고, 열차가 다니고, 대형 자본이 밀어 닥치고 바나나 농장이 세워지고 부가 넘쳐나다가 이 모든 것들이 꿈결이었었던 것처럼 어느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반복과 순환은 백년의 고독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이다. 모든 것은 반복하며, 모든 것은 순환한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대령의 집안의 후손들은 크게 아르카디오 계열과 아우렐리아노 계열로 나뉜다. 가문 속 남성들은  세대가 계속 바뀌면서 두 개의 같은 이름을 갖는다.  1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이름에서 2대의 첫아들인 호세 아르카디오가 탄생되고, 2대 둘째 아들인 아우렐리아노 대령이 태어난다. 이 두 개의 이름은 두 아들의 후손들의 이름에 계속해서 쓰이는데, 그 이름은 성격을 결정한다. 아르카디오 계열의 남성들은 대개 남성적이고 호색적인데 비해 아우렐리아노 계열은 말이 없고 영특하다. 단지 쌍둥이로 태어나 서로를 바꿔치기 하는 장난을 즐겼던 4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이름이 바뀐 채로 살아가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실제로 애초에 이름지었던 그들이 서로가 바뀌어졌기 때문에 이름 지어졌던 순간의 운명을 살아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긴 여정의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근친 또한 순환은 고리를 계속해서 이어간다. 카드 점을 보는 예언자 필라르 떼르넬라는 2대째의 두 아들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 대령과 각각 혼외 관계를 갖는데, 문란하다는 이유로 결혼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들의 정부인들이 일찍 죽거나 혹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부엔디아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은 삘라르가 낳은 두 아들들이다. 첫아들 아르카디오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부엔디아 가문에 들어와 함께 큰 인척 관계의 레베카와 결혼함으로써 첫번째 근친을 이어간다. 레베카와 결혼하기 전 아르카디오는 필라르와 혼외 정사로 태어난 3대 아르카디오는 필라르가 친모임을 모른 채 모자 사이의 근친의 욕망에 빠지게 된다.  아마란타는 1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딸인데,  한편 결혼 전 1대 아우렐리아노 대령과의 혼외 정사로 태어난 아우렐리아노 호세는 고모 뻘인 아마란타에게 연정을 품는다. 근친의 욕망을 느꼈으나 이루지는 못한 3대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는 일찍 죽고, (어쩌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근친이 성립되지 않았을 수도) 결국은 삘라르가 낳은 아르카디오가 산타 소피아와의 결혼으로 태어난 쌍동이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아우렐리아노 세군도, 그리고 미녀 레메디오스가 4대에서 번성을 이루지만, 그 중 실제로는 아르카디오라고 여겨지는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결혼한 페르난다가 낳은 딸 레메가  미혼인 상태로 수녀원에서 낳은 아들을 집에 데려와 차마 죽이지 못해 천덕꾸러기로 숨겨 키우는 동안 늦둥이로 낳아 함께 자란 친딸 아마란따 우루술라가 둘 사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관계맺고 결국은 태초의 예언대로 돼지꼬리가 달린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근친상간의 저주가 완성된다. 

곳곳에 흐르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유기적으로 여러 요소들과 한데 조화를 이루며 주제를 반복하는데, 태초 마을이 설립되었을 당시 1대의 이주민들이 살았던 고립된 공간 마꼰도에  주기적으로 방문했던 집시 노인 말키아데스가 남긴 양피지에 쓰인 해독 불가의 예언이 풀리는 동시에, 충격적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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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이라고 하면 완전 믿고 보는 작가인데, 세익스피어 순례는 다소 얇다(종이책으로 224쪽). 작년에 셰익스피어 400주년이라고 해서 세익스피러 읽기 계획를 거창하게 세웠었는데 계획은 계획으로만 따로 있고 실행에는 언제나 핑계와 사정이 있는 법 . 무슨 400주년이라는 건지 몰라 위키에 찾아보니 돌아가신 지 400주년 되시었다 (1564년 4월 26일 탄생, 1616년 4월 23일 사망).









햄릿을 시작으로 셰익스피어 읽기를 일찌감치 시작했는데 리뷰 한 줄 남기지 못했다. 애초에 이것이 희곡이라는 생각을 하고 감정을 잘 살려서(?) 읽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일반 소설책의 대사처럼 읽어나갔더니, 뭔가 극적이어야 할 곳에서 극적인 감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나중에 몇분 공개된 우리들의 컴버배치가 공연한 햄릿의 한 장면을 보니, 아 저런 식으로 상상을 해야 하는구나 뒤늦게 깨닫고 다시 읽기로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셰익스피어 권위자 스티브 그린블랫이 쓴 세계를 향한 의지 역시 읽겠다고 몇달째 리스트에 올려놓고 진도가 안나가 슬그머니 내려놓았는데 빌브라이슨의 세익스피어 순례는 다행히 이북으로 구매해서 언제 어디서나 펼쳐볼 수 있었던 관계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담없는 문체와 얇은 페이지로 인해 완독이 가능했다.스티븐 그린블랫의 <세계를 향한 의지>과 약간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뭐야 혹시 그린블렛의 책을 요약한 거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의심을 했지만, 그건 아닌것 같았고, 그 겹치는 부분이라는 것은,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이 영국 뿐만 아니라 지구상 곳곳에서 400년이 지난 후에도 읽히고 공연되는 이렇게나 불멸의 존재가 사실은 그 삶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도 없어서 우리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은 추측에서 나온 것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어 그래?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록이 없다면 책은 셰익스피어의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불멸의 존재가 그 삶의 흔적을 기록으로 많이 남기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 부재의 크기만큼 풍부한 상상력으로 채운다. 빌 브라이슨은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찾기도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찾고 이야기를 만들어낸 셰익스피어 매니아들, 셰익스
피어 연구가들을 쫓기도 한다. 셰익스피어라가 공식적으로 흔적을 남긴 건, 집을 사고 세금을 내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출생신고를 할 때, 주어진 양식의 문서에 달랑 이름 한 자 서명한 것이 거의 전부이다. 그리고, 어찌어찌 겨우 남아 있는 당시 연극의 브로셔 등에 인쇄된 그의 이름 등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이들 전기에 만일 셰익스피어의 성격이 어땠고 이런 말을 했고 저런 말을 했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셰익스피어가 불멸인 이유는 그의 정신이 작품속에서 불멸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 원인을 따지고 본다면 작품 때문인 것은 맞지만, 그를 연구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수만 해도 헤아릴 수 없게 많고 심지어는 그를 연구한 사람들을 연구하는 사람들까지 엄청난 규모일 정도고, 그가 쓴 희곡 대사 중의 아포리즘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언어의 일상적 표현이 되었다. 저 윗줄 쓸 때 스티브 그린블랫의 책 이름이 기억이 안나서 인터넷 서점 셰익스피어를 키워드로 검색하니, 국내 도서만 1천7백여건이 나올 정도이다. 그런 그가 그렇게 위대한 작품들만을 남기고, 또 후세마저도 끊긴 채로(딸이 후세를 남기지 못했..) 사라졌으니,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지 않았다는 이런 이색주장을 지지했던 사람 중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래서 신뢰할지도 모를) 헨리 제임스나 마크 트웨인이 끼어 있었는데, 그들이 지지한 주장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 희곡의 진짜 작가라는 거다. 빌 브라이슨은 이 주장의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는데, 이게 진짜 웃긴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성이 같은 어떤 여자가 영국으로 가서 4년동안 머물며 이 사실을 연구했는데, 그녀의 연구 방법이라는 것이 기상천외하게도, 베이컨이 시간을 보내던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조용히 ˝분위기를 흡힙˝한 게 다였다는 것이다. 그후 그녀는 빽빽하게 인쇄된 엉터리같은 책 <밝혀진 셰익스피어 희곡의 철학>이라는 ‘모든 면에서 괴상한‘ 책을 한 권냈는데 호손이(맞다 그 호선, 나다니얼 호손) 서문을 썼다. 후에 호손은 자신이 책을 읽지 않고 서문을 썼음을 인정했고, 다시는 선의의 친절을 베풀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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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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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도란도란 둘러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듣곤 했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기억나지는 않지만, 둘러앉은 그룹에는 누군가 무서운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 있고, 또 간이 콩알만해져서 조금만 무서워도 소리를 꽥꽥 지르며 놀라는 아이가 있고, 긴장이 한창 고조될 때 일부러 괴상한 소리를 갑자기 내서 단체로 사람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짖꿎은 아이도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무서운 이야기들이 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시간들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에서도 사람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돌아가며 각자의 이야기를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말하고, 듣는 사람들은 믿어야 할 지 말아야할 지 모르게 오싹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두런두런 공포 이야기의 시간을 갖던 것과 같은 부류다. 밤의 이야기꾼들은 깜깜한 밤 폐가에 모이는데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각자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돌아가면서 말한다. 그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긴장을 고조시키고 가뜩이나 믿어지지 않는 괴상하고 오싹한 스토리들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는 목적이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끔찍한 범죄에 연루되었거나, 믿을 수 없는 사실 때문에 익명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진실을 전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 수 있겠고, 또한 이러한 오밤의 스토리텔링 시간이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완결된 별개의 스토리라는 점에서 단편집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인물들이 같은 공간 상에서 서로 대화하고, 또 전체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 주인공이 등장하므로 장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액자의 맨 앞 프레임의 프롤로그에서 한 소년이 가족과 캠핑갔다가 갑자기 물이 불어 가족을 잃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도란도란 둘러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즐기던 그 어린 시절 그 시간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그게 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 때문이었던 것처럼, 밍밍하게 말하면 강가에 캠핑갔다가 비와서 부모가 죽었다 라고 아무 감흥도 없이 말해서는 무서운 이야기는 커녕 별 주목도 받지 못할 널리고 널린 사건 사고 소식에 불과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말하는 방식, 말과 말 사이의 간격, 단어의 선택, 등등 긴장감있게 풀어내는 말재주꾼이 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 밤의 집중 호우와, 혀를 넘름거리며 사람을 잡아먹을 듯 세차게 요동치는 강물을 헤치며 아슬아슬 아이를 데리고 강건너 피난처로 향하는 장면을 너무나도 긴장감있게 묘사한 덕에 처음부터 독자를 끌어들여 금새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밤의 이야기꾼들은 무엇이냐. 취업난 속에 어렵게 입사한 잡지사에서 취재가서 만나게 된 이야기꾼들로, 자신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괴이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요즘도 가끔 괴상한 누가 무얼 어떻게 했다는 둥 하는 끔찍하고 이상한 루머가 돌기도 하고 그러는데 대체적으로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처음부터 그 이상한 잡지사에 별 애정도 없던 주인공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도 혼란스러워한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신고해야 할지. 거기에는 화자가 생각하기에 살인자라 판단되는 사람도 있고 정신병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취재차 온 화자에게로 관심이 쏠리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그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때 그 폭풍우 속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이제껏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그 어둡고 무서웠던 밤, 그리고 죽은 엄마와 아빠가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까지도..피비린내가 물씬 풍기기도 하고, 먹먹하고 슬픈 이야기도 있고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야기도 있다.

모든 이야기들에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실감나게 무섭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능있는 이야기꾼의 생명이 살아있고, 엄청난 흡입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각자의 이야기 하나 하나도 모두 개성있고 재미있었지만 전체를 하나로 이어가는 화자의 역할도 훌륭했다. 끝까지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부정하지만 결국은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마는데, 그로써 우리 모두는 각자 부서져가는 폐가의 깊은 어둠속에서만 밝힐 수 있는 믿기지 않는 혹은 숨겨진 기이하고 잔혹한 스토리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잠재해 있어서 깨닫지 못하는 동안 뇌 속 어디엔가 숨어있다가 폐가에 들어가 이야기꾼들을 만나면 술술 벗겨져 나오고, 그것이 다시 또 이야기가 된다면 이 세상에는 정말로 기이한 이야기들의 천국이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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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다.  내 삶은 내가 만드는 이야기지만, 책 속에는 내가 되지 못한, 혹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인, 하지만 내가 이 짧은 생애 동안 현실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내가 있다. 현실의 나는 나를 현실화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숨쉬고 살아있게 하기 위해, 나를 더 축소시키도록 지시한다. 내가 물고 태어난 숫가락의 재질과,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아주 작은 영역의 사람들을 떠나면 나의 생은 위태로와진다.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아주 작디 작은 세계에서 생을 보내는 일이 생을 지키는 일이지만, 그 작은 세계에 난 세계 문학이라는 창은 제약도 없는 시공간을 넘는 거대한 세계 속에 서 생을 더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것 역시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인생은 짧지만, 읽고 싶은 책을 다 못읽고 죽는 것이 억울한 것 못지 않게, 짧은 인생 그 자체의 리얼한 세계를 사는 일도 중요하다. 스스로 경험하고 살이 닿고 표정의 미묘한 변화와 웃음소리에 반응하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몸을 움직여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잠잘 것을 그러한 노동을 하는 것, 그런 현실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읽고 싶은 책을 살 수는 있다.  읽지 못해도 꽂아만 두어도 괜찮겠다, 언젠가는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바깥으로 난 창을 활짝 열어두기 때문이다.  꽂아만 두어도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위안이 되겠다 라고 생각하려면 누군가가 권위 있는 사람이 그렇다 라고 말해주면 더욱 위안이 되겠다.


책을 구매하는 행위는 다만 서점 주인들과 저자들을 ¸ 먹여 살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책을 소유하는 일(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그 자신의 기쁨과 그 자신의 윤리 규범을 갖는 일이다. 예를 들면, 주머니 사정이 지극히 빠듯한 상황에서도 가장 저렴한 보급판들을 이용하고, 많은 도서 목록들을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온갖 어려움들을 무릅쓰고 영리하고 끈질기며 재치있게 점차 작고 아름다운 도서관을 만드는 일은 하나의 기쁨이고 매혹적인...


그렇다. 내가 먹는 것보다 읽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면, 냉장고에서 뭔가가 자꾸 쌓여가는 것보다는 책장에 뭔가가 쌓이는 게 더 좋다면 그 기쁨을 가져다 주는 서점 주인과 저자들을 좀 먹여살리는 일도 나의 기쁨 아니겠는가. 이제껏 비싸네 어쩌네 불평불판만 많았는데, 이렇게 생각을 전환할 수도 있다. 무슨 책을 꽂아둘까. 언제라도 읽을 수 있게, 또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리스트를 만들고 그 책을 하나씩 사들이는 일. 그것을 헤세와 함께 해보자. 이 책은 헤세가 '나만의 도서관'에 꽂아놓을 책들의 목록을 만든다. 나만의 도서관에서 빠질 수 없는 책, 꼭 반드시 꽂아놓아야 할 책들을 태고적 신화에서부터 시작해서 19세기 해세가 살던 동시대 이전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오면서 목록을 작성한다.  






























헤세와 함께 만드는 나만의 도서관에 반드시 꽂아놓을 책들은 시대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가로지른다. 인도 신화와 장자 싯다르타를 비롯한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  에코가 <책의 우주>에서 문학이 특히 풍부한 나라로 프랑스, 러시아, 또 하나는 영국이었던가 독일이었던가 아무튼 또 한나라를 뽑았는데, 독일이야 헤세가 자국 사람이니까 많이 언급했을테지만 역시 프랑스와 러시아 쪽에서 리스트가 많다.  고대 희극에서 비롯해서 중세를 빼뜨리지 않고 동서양의 문물을 교차시키며 어머 이건 꼭 사야돼과의  많은 작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빠르게 열거해가는 책이기에, 여기에 일일히 열거할 수는 없지만, 최근 읽은 작가 중 볼테르와 발자크 등도 언급했고, 특히 최고의 찬사가 함께 한 작가와 작품으로 신랄한 풍자와 냉소로 빚어낸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웅장하고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작품의 하나로서' 고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기억에 남는다.  걸리버에 대해서는 '아일랜드의 천부적 시인'이며 '위대한 정신, 신랄하고 통렬한 유모, 고독한 천재성은 그의 온갖 변덕스러운 기행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으며, 톨스토이에 대해서는 '왕왕 설교조와 개혁정신으로 인하여 잊혀지기도' 했지만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 민화집은 리스트에서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도 그런 언급을 했던 것 같은데 특히 안나 카레리나는 가장 아름다운 러시아어 장편소설이라고 했다.


이렇게 목록을 작성해 나가다가 독일 문학 쪽으로 가서 다소 길어지는데, 그러다가 헤세는 이렇게 완성해 놓은 목록들을 되풀이 관찰하고 조사해보니 리스트가 주관적이며,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보석함과 같으며 훌륭한 작품이 누락되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시대의 주옥같은 작품이 망라되어 있고, 그 작품들의 훌륭함과 객관적 가치면에서 이 수집물들을 크게 능가하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길은 얼마든지 있다. 각자가 책을 읽기 시작하고 이곳까지 인도한 그 길을 따라, 각자의 도서관(목록)을 만들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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