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재에 마가렛 애트우드의 원서 Testaments가 종종 떠서 무슨 일인가 봤더니, 시녀이야기 2탄이라는 부제들이 딸려다닌다. 원서를 찾아서 읽는 독자가 많을 정도로 애트우드의 위상이 한국에서 이토록 높은 지는 알지 못했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지목되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녀이야기 자체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가 높기도 하려니와, 패미니즘적 정서를 높은 수준의 독특한 SF 적 상상력으로 담아 내고 있어서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내 경우 흥미롭게 읽히기는 하는데 원초적인 자극을 지향하는 느낌이어서 그닥 내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책을 들으면 계속 궁금하게 끝까지 읽게 하는 다이나믹한 서사의 힘을 강하게 분출하는 작가라 언제라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책을 많이 샀다는 뜻)









이 쯤해서 시녀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자. 조지 오웰적 디스토피아에 여성의 인권이 사라진 시대를 그렸다. 사실 주제의식이 너무 선명한 작품은 식상할 것 같고 오웰적 디스토피아라면 읽기 힘들 거 같아서 책을 사두고도 오랫동안 펼치지 않고 미루어 두었다. 읽은 소감을 거칠게 정리하자면《1984》에 《안나의 일기》를 섞어놓은 느낌이다. 애트우드 특유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엽기적 장면을 배합한 수작다. 유명 작품은 유명한 이유가 있다.


오웰의 《1984》가 상상의 사회이기는 하나 누구라도 스탈린 통치의 소비에트 연방을 모델로 했다는 점을 알수 있게, 그 사회와 유사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이 작품을 보면 무슬림 근본주의가 장악한 아랍권의 어느 나라들을 떠오른다. 암울한 어떤 미래를 그린 것이 아니라 소설의 출간 시점인 1985년에서 근미래 혹은 현재 역사를 바꾸고 상상의 사회로 대체한 듯 하다. 동시에 해당 서사의 액자 바깥의 에필로그에서 150년 후 미래의 관찰자들을 두어 대체 역사가 이어진 이후의 만 미래가 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점까지 입체적 시각을 보여준다.

에필로그에서 드러나는 이 이상한 계급 사회의 이름은 길리아드이고,  소설의 이야기 전체는 길리아드가 해체된 후 한 여성이 카세트 테이프의 음악 사이에 남긴 기록으로 밝혀진다. 기록이 발견되어 심포지엄이 열린 시기는 2195년으로, 이 기록의 발견은 길리아드 시대에 핍박받은 여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의미있는 역사 기록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기록물의 진위 여부 또한 확실치 않다. 만일 조작되었다면 은폐된 시대를 조명하는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의 필요성 만큼이나, 조작 자체가 내포하는 20세기 말의 역사적 시대적 의미를 대변한다. 에필로그가 전체 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본문이 고통받는 한 개인을 그렸다면 에필로그는 본문의 화자가 겪은 사회가 전체 인류 역사에서 갖는 인과 관계를  다룬다. 그러므로 에필로그가 비록 짧고 뜬금없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처했던 짧은 길리어드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우리가 안나의 일기에서 갖는 감정은 단순하다. 피상적으로만 들리는 홀로코스트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한 개인이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옥죄어오던 삶 속에서 느끼던 공포와 불안의 나날의 생생한 기록은 바로 감정이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본문의 화자(오브프레드 OfFred) 역시 길리어드로 가는 전조 증상에 무감각하게 노출되지만, 본인이 직접 그 사회의 희생양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매일 뉴스에 폭력과 공포가 보도되는 불안한 사회 속에서 그 무엇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평화로운 듯 일상을 살고 있다. 그것은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왔고 끓기 얼마 전까지도 무지로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시하며 살았다. 무시한다는 건 무지와 달리,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즉시 변화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자기도 모르게 끓는 물에 익어 죽어 버리는 거다. 물론 신문에는 많은 뉴스가 있었다. 도랑이나 숲에서 발견된 시체들, 둔기에 맞아죽거나 사지가 절단되거나, 속된 말로 성폭행당한 시체들. 하지만 그런 건 다 다른 여자들 이야기였고, 그런 짓을 하는 남자들도 다 다른 남자들이었다. 그 누구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신문에 나는 이야기들은 우리에겐 꿈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꾸는 악몽처럼. 진짜 끔찍하지 않니 하고 우린 말하곤 했고 실제로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끔찍하다는 게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신파조여서 우리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만 같았다. 우리는 신문에 이름이 오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신문 가장자리의 여백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훨씬 더 자유로웠다. 우리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간격 속에서 살았다.”(본문 인용)

하지만 신문 속 이야기들은 간격을 점점 좁혀오고 결국 그녀와 모이라가 신문에서 나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끔찍한 이야기.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공포 속의 주인공.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이제껏 모아온 계좌 속의 돈이 더이상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가게에서 카드 결재를 시도할 때 깨닫게 된다. 직장에서 당신들은 해산되었음을, 더이상 직업을 가질 수 없음을 알려준다. 대통령이 사라지고 국회가 해산되고 계엄군이 정치적 주최가 되었을 때까지, 그건 나의 일이 아니니까 상관없었던 일들이, 계좌가 동결되고 여성이 인간의 자리에서 밀려나 어떤 다른 무언가가 도구인지 소유물인지 알지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그에 따라 어느날 갑자기 법적으로 재산은 물론 직업조차 가질 수 없게 된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 모든 전조들이 결국은 나의 이야기였음을 이해한다. 


그렇다. 방관하면 그 방관의 대상이 어느 새 나의 이야기가 되어도 더이상 그 이야기를 들어줄, 저항의 공간이 사라진다. 망명 계획은 허술했고, 함께 도망치던 남편은 생사조차 모르고 아이는 빼앗겼고 자신은 정신 교정을 받고 어느 사령관의 집에 보내진다. 사령관의 집에서 사령관의 시녀가 되었다는 의미는 단순하다.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다. 자궁일 뿐 한 인간이 출산 이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聖杯)다.”(본문 인용)

핵전쟁과 환경 파괴 환경 오염 성병 등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이렇다. 불임이 늘고 인구가 줄자 사회는 불안해지고 폭력이 만연하는데 패미니즘의 영행으로 여겅의 인권이 신장되고 직업과 재산을 가진 여성들이 늘자 사회 불안을 ‘성경’에 반하는 여권 신장으로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에 따라 여성의 인권, 재산, 직업, 아이까지 강탈한 후 임신 가능한 여성들을 불임 가정에 보낸다.이런 씨받이들의 사회적 구분은 시녀라고 불리는 계급이고 만일 출산에 성공하지 못하면 콜로니로 유배되어 방사선이 노출된 채 핵폐기물을 치우며 폐기된다.

자신의 이름조차 잃고 주인의 소속으로 오브 주인이름의 형태로 불리는 시녀들은 의복의 색깔이 결정하는 신분이 요구하는 역할 즉 출산 이외에는 아무 존재 의미가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빈궁이라 불리는 불임의 아내들이다. 워낙 인구가 줄고 있어 성공적인 출산이 진급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시녀의 역할은 필요악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은 이 씨받이 시녀들에게 경멸감을 숨기지 않는다. 여기에서 근원적 모순을 본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구조적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계층을 얼마나 경멸하고 멸시했던가. 필요해서 가두고 남편과 섹스를 강제하면서도 그 행위에 의한 혜택은 자신과 남편이 공유하게 될 것이면서 마치 시녀들의 태생이 더럽다는 듯이 자기 남자를 유혹해서 빼앗는 사람을 대하듯 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출산을 의한 섹스에 은밀한 공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터코스에 매뉴얼이 있는 건지 의식이 치러지는 날은 무슨 종교 의식처럼 경건함을 추종한다.

쓰리섬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형식적이고 엽기적이다. 시녀와 몸을 포갠 아내들은 숨죽여 울며 아이를 만드는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출산은 더더욱 엽기적이다. 그것은 구역의 축제다. 고대 이교도들의 새디스트적 봉헌 의식에 가깝다. 모든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출산의 고통을 맞는 시녀와 그것을 지켜보며 정신적으로 고취되어 그의 고통을 경험하는 분위기가 그렇다. 해당 아내가 두 개의 출산 의자 중 윗 의자에 앉아 출산자와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케어를 받고 소리까지 지른다. 그렇게 하면 시녀가 낳은 아기가 마치 자신의 아기라도 된다는 듯이.

나치가 그러했듯이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수많은 죽음이 전시된다. 공포는 단기간 내에 정권을 확립하는 데 효과가 있다. 한 마디 말이 한 발자국의 어긋난 경로가 혹은 나도 모르게 비어져 나온 웃음이, 참고 참아도 통제할 수 없어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자신에게 하얀 올가미를 씌우고 바람에 휘날리는 빨래처럼 목매달 수 있다는 걸 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오늘을 살며 오늘을 믿을 수 없는 오브프레드는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을까.

“그렇게 믿을 필요가 있다.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심지어 아무도 없더라도 말이다.”(본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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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인간의 육신이란 풀잎 같아. 자기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리디아 ‘아주머니’는 말했다. 하느님이 남자들을 그렇게 만드셨지만, 여러분들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어. 여자들은 다르게 만드셨지. 선을 긋는 건 여러분에게 달린 거야. 그러면 훗날 그들이 여러분에게 고마워할 거야.

행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끔 이렇게 문득 비치는 정상적 삶의 흔적이 매복하고 있던 병사처럼 옆에서 나를 덮칠 때가 있다. 평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 세찬 발길질처럼 과거를 환기시키는 것들. 문맥에서 떨어져 나온 행주 한 장을 보며 나는 그만 헉 하고 숨을 멈춘다.어떤 사람들에겐, 어떤 면에선, 세상이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게 아닌 것이다.

“누가 목욕을 시키지? 나는 이 닭을 보들보들 연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리타였다. 내가 아니라 코라한테 한 말이다. “내가 나중에 할게요. 먼지 털고 나서.” 코라가 말한다. “그럼 되겠네.” 리타가 말한다. 두 사람은 내가 귀머거리인 양 말한다. 그들에게 나는 집안일, 그것도 숱한 일거리 중에 하나일 뿐이다.



나 또한 메마르고 하얗고 딱딱한 과립형 분말이 되어 있다. 마치 그릇 가득 담긴 말린 쌀 속에 손을 담그고 휘젓는 느낌이다. 꼭 눈송이 같다. 어쩐지 죽은 듯한, 버려진 듯한 느낌이 감돈다. 나는 마치, 한때는 갖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나 이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방 같다. 창 밖에서 자라는 잡초의 꽃가루가 바람에 날아 들어와 마룻바닥에 먼지처럼 쌓일 뿐.

너희처럼 젊은 사람들은 고마운 줄을 몰라. 너희에게 이런 세상을 만들어 주려고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야. 저 친구 좀 봐, 당근을 썰고 있잖아. 바로 저걸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몸을 탱크가 밀고 지나갔는지 모르는 거냐?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말이란 결코 정확할 수 없으며 언제나 뭔가 빠뜨리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너무 많은 단편들이 있고, 관점들이 있고, 반목들이 있으며, 뉘앙스가 있다. 이런 의미도 저런 의미도 될 수 있는 몸짓들이 너무 많고, 말로는 절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길 없는 형상들도 너무 많으며, 허공에 떠다니거나 혀끝에 감도는 향(香)도 수없이 많고, 어중간한 색채들도 한없이 많다.



나는 그 여자에게서 뭔가를 빼앗고 있었다. 좀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빼앗은 것은 그녀가 전혀 원하지 않았고, 그녀에게는 쓸모도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거부한 것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여전히 그건 그녀 것이었고,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 신비스런 ‘그것’을 내가 빼앗아 버린다면, (사령관이 내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극단적인 감정이라고 여기는 것을 나는

출생률이 다시 일정 수준을 회복하면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지 않아도 될 테지. 인력이 많아질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애정의 유대가 생겨날 거야.

나는 기억한다. 혀가자미, 대구, 황새치, 가리비, 참치, 속을 채워 구운 가재, 분홍빛 통통한 살을 지글지글 구운 연어 스테이크. 그것들이 전부 고래처럼 멸종되어 버렸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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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프라임에서 방영되는 일렉트림드림 은 필립 K. 딕의 단편 소설들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로, 각 에피소드 별로 독립된 스토리를 갖는다. 넷플릭스의 블랙미러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매력은 필립 K. 딕의 팬으로서 원작을 함께 읽을 수 있다는 데 있다. 197년대의 텍스트적 상상력이 21세기에 가능한 기술로 구현된 시각적 이미지 뿐만 아니라 원작 에서 받은 영감이 어떻게 다른 상상력을 낳았는지를 보는 재미도 있다. 사실 원작을 그대로 드라마로 만든 것을 기대했지만, 드라마는 원작에서 핵심 아이디어만 차용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썼다. 에피소드마다 감독 및 제작사도 다르다. 시대가 변했고, 1950 년대에 상상한 미래가 21세기에도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필립K. 딕은 인물의 심리적 묘사가 드물고 건조해서 시청자가 몰두할 수 있는 드라마적 캐릭터를 창조해 내야 했을 것이다. 

시즌 1은 2017년에 영국의 공중파인 채널4에서 반영되기 시작해서 총 10 회 제작되었고, VOD는 아마존의 프라임 비디오로 시청 가능하다. 이걸 원작과 함께 보려고 넷플릭스 구독을 중지하고 프라임비디오로 갈아탔는데, 원작 번역본이 없는 에피소드가 많아서 느려지고 있다. 대신 드라마와 같은제목의 책 일렉트릭 드림을 발견했는데, 프라임 비디오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의 극본 스크립트가 아니라 필립 k딜 원작의 단편 모음집이었다. 전자책도 다른 버전은 안보이고 킨들 에디션만 보인다. 각 에피소드 별로 작품 감독 소개와, 감독의 서문이 실려 있다. 

첫 에피소드인 Real Life는 원작과 제목이 달라 삽질을 좀 했는데, 진즉에 이 책을 알았다면 쓸데 없는 고생이 없었을 것이다. Exhibit piece 가 원제이다. 제목이 달라진 것만큼 내용도 크게 변주되었는데, 둘 다 좋지만, 원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이 거의 상황 묘사 만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비해, 드라마는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감정에 세심한 디테일을 담아내었다. 필립 K.딕의 가장 큰불만이라면 여성 캐릭터의 부재를 들 수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주요인물과 주인공에 여성 주도적 인물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두 개의 세계를 오간다는 것이다. 하나는 현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환상이다. 드라마에서, 23 세기의 미래에서 시작한다. 이마에 작은 단추같은 걸 붙이고 스위치를 누르면 자신이 지닌 욕망과 판타지 같은 잠재의식의 세계가 만들어 내는 VR 세계로 휴가를 간다. 반면 원작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나니아 연대기 처럼 전통적인 기법으로 세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특정 공간에 다른 세계로 빠지는 구멍이 있는 것이다. 필립 K 딕의 원작에서는 20세기를 재현한 전시 박물관이다. 사상과 행동의 자유가 제약된 디스토피아적 우울한 미래에 20세기기 전시관을 마련했는데, 이 세기를 담당한 밀러가 그 세기의 문화에 푹 빠진 오타쿠라, 의상도 말도 당대의 말을 쓰며 다니다가 20세기 전시관의 문턱을 넘자 실제로 20세기로 가는 이야기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 그렇게 해서 양쪽의 두 주인공 모두 어떤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갔는데 그 세계가 너무 실제같다. 그래서 두 개의 세계 모두 자신에게 실제하는 세계라고 믿게 되는데, 양쪽 세계 사람들 모두 반대쪽 세계가 환영이고, 자꾸 거기를 진짜라고 믿으면 실제 세계로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 세계를 버리고 돌아오라고 말한다. 결국 두 세계중 진짜를 골라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생생하고 진짜같은 두 세계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할때 무엇이 진짜인지 어떻게 알까. 23세기를 드라마의 주인공 폴라는 1년전 어떤 대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이 일 때문에 트라우머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경찰관이지만 집에는 아름답고 섹시한 와이프 캐롤이 있다. 그녀는 그토록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가 자신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자신은 그렇게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1년전 대학살 사건에 대한 기억과 범인검거에 대한 중압감으로 스트레스를 받자 레즈비언 아내의 권고로 VR 세계로 휴가를 간다. 그녀가 머리에 붙인 작은 단추는 그녀의 잠재의식 속의 세계를 재현한다. 이것은 마치 꿈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듯한데, 꿈과 다르다면, 세계가 논리정연하고 일관적이면서 동시에 현실과 구분하기 어렵게 생생하고 게다가 기억까지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잠재의식 속의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아내, 행복 등에 대해 죄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죄의식이 만들어낸 세상은 자신이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상실된 세계이다. 

21 세기 세상에서 성이 남성으로 바뀐 폴라는 조지라는 이름의 성공한 비지니스맨으로 백만장자의 게임 회사의 오너다. 그 곳 세상에서 이성애자인 그는 뒤바뀐 세계에서도 여전히 사랑한 아름다운 케이티를 사랑하여 결혼했지만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조지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납치범에게 유괴되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후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가 납치될때 그는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 죄책감과 상실로 인한 슬픔으로 선택적 기억 상실이라는 심리학적 설명이 불완전하고 군데군데 끊긴 듯한 21 세기 조지의 삶을 정당화하고, 더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아내를 잃은 현실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설득에 그는 고민한다. 완벽한 기억을 가지고 차들이 하늘을 달고, 아름다운 아내가 자신을 여전히 기다리고 사랑하고, 잔혹한 학살범들을 쉽게 잡아들인 그곳. 23세기의 삶은 너무나 SF 소설처럼 멋진 곳이고 자신에게 과분한 곳이다. 거긴 너무 완벽해. 그렇게 완벽한 곳이 현실일 리 없어. 아내가 죽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통없는 판타지를 만들고 거기 머물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위의 설득에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반대로 원작인 필립 K.딕의 Exhibit Pieces 가 제시한 23 세기는 디스토피아적이다. 23세기를 살고 있는 밀러는 자신의 직장인 역사 재현 전시장에서 20 세기 문화와 복장에 푹 빠진 오타쿠 연구자로, 당대에 보기에 우 스꽝스런 1950 년대 복장과 가죽 수트케이스를 들고 등장한다. 이런저런 일로 동료와 말다툼을 하고는 20세기 주택 전시관에 가서 진입금지 안전바를 넘어 들어갔는데, 자신이 그곳에서 살고 있는거다. 결혼해서 아들도 들이 나 있고 와이프가 그를 재촉하고 있다. 이곳 세상에 들어가는 순간 그 곳에서의 세계 역시 일관성있고 논리정연한 부분적인 기억을 보유하게 된다. 자신이 23 세기에서 왔지만 여기 일도기억한다는7 그래서 아무튼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상담의와 상담하다가 자신이 왔던 그곳으로 가면 다시 미래로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찾아가는데, 과연 그곳에 공기의 흐름이 다르다. 안전 바른 사이에 두고 회사의 매니저와 직원들이 그를 부르고 있다. 그 전시관은 곧 파괴할 거니까 어서 돌아오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경험한, 그러니까 문지방을 넘지 않으면 계속될 20세기의 가족이 있고, 자유가 있고,성공한 비지니스맨인 그 곳에 머물고 싶다. 드라마와는 다른 필립 K. 딕 다운 반전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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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를 넷플릭스에서 프라임 비디오로 갈아탔다. 넷플릭스를 처음 접했을 땐, 이게 웬 신세계인가 했는데 장기 시즌의 시리즈 몇 개를 징하게 밤을 패며 몇 번 봤더니 언젠가부터 재밌는 거 취향에 맞는 거 찾아서 이것 저것 조금조금씩 맛보기 하느라 정작 보는 거는 없고 시간만 낭비, 이게 마치 수백개 채널 채널만 돌리다가 정작 아무 것도 못보는 케이블 티브이 시청(?)이랑 다를 바가 없게 되고, 요즘엔 그마저도 거의 안보게 되더라고. 아님말고 거짓정보로 가득찬 뉴스 채널 안보이는 청정 지역은 유튜브로 정착이 되어가는 중인데. 아 그 이유가 있다. 얼마전 바꾼지 얼마 안되는 SKB 수신기를  교체했는데, 그 이유는 수신기에 유튜브 앱이 내장되어 있어서였다. 리머컨에 마이크가 있어서 음성인식도 잘 먹는다. 구글 어시스턴트까지 있어서 날씨나 환율 이런 루틴한 거 물어보면 잘도 대답해준다. 어쨌든 유튜브만 보다 보니 넷플릭스에 매달 1만 5천원씩 내는 돈을 유튜브 프리미어에 내고 넷플릭스를 끊는게 낫겠다 싶었는데... 어쩐지 이게 용기가 필요하더라구.. 그러니까 넷플릭스를 끊는데 웬 용기가 필요한가.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구독해제 해야지 해야지 몇달씩 벼르면서도 그걸 실행하기가 참으로 힘들더라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대략 이렇다. 갑자기 넷플릭스의 컨텐츠가 보고 싶어지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인 빅뱅이론은 가족이 별로 즐기는 거 같지 않아 혼자 있을 때만 봐야 해서, 못본 에피소드도 많고 또 좋아하는 컨텐츠니 아껴 두었다가 봐야지 이런 생각. 예전에 아주아주 재밌게 봤는데 나중에 또 봐야지 하면서 흐뭇해 하고 있던 드라마들 예를 들어 '프랜즈' 같은 것들이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 등등이다. 게다가 얼터드 카본 시즌 2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먼저 읽으려고 못보고 있었던거다.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구독해제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라임 비디오였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는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부터 닐 게이먼의 <멋진 징조들>과 <아메리칸 갓>, 제임스 쿄리의 <익스팬스> 등 몇몇 선호하는 작가들의 원작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 시리즈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필립 K 딕의 단편들을 원작으로 한 <일렉트릭 드림>은 프라임 비디오를 구독하는 첫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넷플릭스에서 가장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꼽자면 <블랙 미러>와 <러브 데스+로봇>인데 일찌감치 다 봐버리고 새시즌을 기껏 기다렸더니 고작 4에피소드 밖에 안돼서 실망했는데, 원작까지 있는 <일렉트릭 드림> 10편은 원작 영문=>번역본=>드라마 순서로 아껴아껴 보면 아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넷플릭스처럼 1달 무료 정책은 아니지만 첫 6달까지는 매우 저렴하다. 얼만지 생각 안나는데 커피 한 잔 값이다. 막상 구독을 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컨텐츠가 넷플릭스에 비하면 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몇 개 안되고 미미하다. 괜찮다. 이제 구독을 갈아타는 용기를 내는 법을 알았으니 언제든 넷플릭스로 돌아가거나 왓차 혹은 디즈니에서 서비스 계획이라는 것도 출시되면 그걸로 갈아탈 수 있으니까.


고대하던 일렉트릭 드림을 손에 넣고, 국내에서 출간된 필립 K 딕의 책은 다 있으니 이제 원작을 찾기만 하면 되는데, 없는 게 많다. 5권의 영문 원작 단편집에도 안보이는 게 많다. 특히 드라마의 첫 에피소드 Real Life부터 꽉 막혔다. 출간 목록을 뒤져도 그런 책이 없는 거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목을 바꾸었던 거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일렉트릭 드림이라는 동일 제목의 필립 K 딕 컬렉션이 이미 출간되었더라는 거다. 약삭빠른 출판사들이 원작이 있는 걸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하나 하나 찾아다니도록 놔둘 리가 없다. 목차와 리뷰들을 뒤져보니고야 작품 Real Life는 제목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영문판 위키를 먼저 찾아봤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일렉트릭 드림에서 차용한 PKD의 원작품들은  컬렉션 도서는 국내 폴라북스에서 출간된 몇몇 개의 단편집에 일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게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에서 우선 맞춰볼 작정이다. 도서 컬렉션인 일렉트릭드림의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고, 영문판 역시 크레마 판으로는 구하기 힘들고, 구글 도서에도 없지만, 아마존에서 킨들 에디션을 구할 수 있으며, 오더블 오디오북으로도 들을 수 있다.가격은 9.99 정도이다. 오더블도 멤버쉽으로 듣는 거 같으니까 오디오북 20불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드라마는 영국의 채널4에서 2017년부터 송출하기 시작해서 2018년에 10편의 에피소드로 종료했다. 시즌이 더 나오면 좋을텐데.. 


물론, 20세기에 쓴 미래 소설을 21세기에서 상상 가능한 미래로 바꾸려면 원작의 내용이 시대를 잘 반영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10개 에피소드 중 일부만 원작 및 번역본과 비교해 봤는데, 어떤 소설의 원작을 영화화했다기 보다는,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다.  단편 원작과 드라마를 맞춰보자.


 Script title 원작 타이틀번역 타이틀/ 번역서 타이틀(출판사) 
 1) Real Life Exhibit piece   
 2) The Commuter 동일 통근자 / 마이너러티 리포트(폴라북스) 
 3) The Impossible Planet 동일  
 4) The Hanging Stranger Kill All Other 
 5) Crazy Diamond Sales Pitch 자가 광고 / 마이너리티 리포트(폴라북스)
 6) The Father thing  동일  
 7) The Hood Maker 동일 머리띠 제작자/진흙발의 오르페우스
 8) Safe & Sound Foster, You're Dead 포스터 넌 죽었어 / 마이너리티 리포트 
 9) Human is 동일  
 10) Autofac Autofac  


역시 폴라북스 번역본 3권에 포함되지 않은 게 많다. 위즈덤 커넥트에서 나온 짧은 이북들도 대충 훑어봤는데 없는 거 같다. 원작도 여러 컬렉션에서 섞여있는 것 같고, 대표작 컬렉션에 없는 작품도 있는 것 같으니, 굳이 이 시리즈를 작품과 같이 읽고 싶다면 시리즈 컬렉션 도서인 <일렉트릭 드림> 을 구해서 (사전 찾아가며) 읽는 게 답이다. 


프라임비디오 구독을 시작하자 마자 가장 먼저 본 에피소드는 The commuter다.  내 경우, 여름에 필립 K 딕의 폴라북스 작품집에서 통근자를 이미 읽어서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안나더라. 그래서 다시 읽었다. Hood maker도 머리띠 제작자라고 번역본이 눈에 띄어서 읽으면서 봤다. 실은 먼저 책을 읽고 비디오를 보면 딱 좋은데, 그렇게 하려고 작정을 하고 먼저 책을 읽다가 보면 다 읽기도 전에 비디오를 보게 된다. 이해가 잘 안가거나 시각적 상상력이 부족해서 문맥 파악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두 편을 각각 책과 비디오로 본 인상은 두 작품은 크게 다르다라는 점이다. 작품의 제작자들도 에피소드별로 달라서 분위기나 작품의 색상, 작품적 질도 다양한 거 같다. 책을 읽고 비디오를 보는 것의 가장 큰 재미는 이 내용을 어떻게 변주하고 해석했느냐를 비교하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에 떠오르는 인물 배경 및 작품 전체의 이미지는 독자들의 머리속에서 독자들의 경험과 감성에 크게 의존하지만, 이게 드라마가 되었을 때에는 제작자들이 해석한 인물의 성격, 행동 풍경과 이미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생각은 책에서 하고 행동은 화면에서 한다. 전반적으로 마초적인 PKD의 소설들에 여성 인물들을 부각시킨 점, 20세기적 과학적 상상력을 21세기의 새로운 기술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조한 점 등 전반적으로 에피소드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블랙미러와 매우 비슷하지만 블랙미러의 새로운 테크놀러지 위주의 환하고 빛나는 화면에 비교하면 디스토피아적인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레트로하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러티 리포트> 등 주옥같은 명불허전의 영화들이 필립 K 딕의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고, 드라마 계에서도 다른 어떤 작가보다 필립 K 딕의 작품이 특히 많이 제작되었고 있다. 필립 K 딕의 무엇이 그렇게 만든걸까. 게다가 쓰여진지도 한참이나 지나 과학적 상상력의 디테일이 시대에 한참 뒤떨어져있을 수 있는데. 다른 작가들도 많은데.. . 내 짧은 견해로 보면, 그의 모든 단편들은 매우 압축적이다. 짧은데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이야기의 종류가 많은 것이다. 그를 작가들의 작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상상력이 부족한 현대의 드라마 영화 작가들은 물론 상상력이 풍부한 SF 소설가들에게조차 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은 작품의 상상력의 영감이 된다. 심지어 르귄의 <하늘의 물레>는 필립 K 딕이 쓰지 않은 필립 K딕의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출처 토머스 M 디시 -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서문 중, 폴러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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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책을 읽은 이유는, 책 속의 어떤 이상화된 가상의 인물과의 만남이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영원히 삶을 지배할 것 같은 학업이라는 억압과 굴레 속을 지나가고 있을 때, 문득 문득 불빛처럼 책 속의 인물들과 교감하고 있었다. 창조된 인간의 내면과 상상적 교감이 기성 세대가 기대하는 ‘꿈’과 ‘미래’에 어떤 부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른이 보기에는 달갑지 않은 책읽는 모습과 공부하는 모습이 겉으로는 거의 비슷해 보인다는 점 때문에, 공부하지 않으면서 압력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외우지 않아 받은 불이익은 곧바로 성적표에 나타났지만, 읽는 대신 외웠다면 한없이 더 궁핍했을 가장 활발할 나이의 정신적 활동을 책이라는 매체가 풍요롭게 해준 건 분명했다.


최근에 책을 읽는 이유는 좀 다르다. 아마도 예전에 받았던 그런 느낌, 책 한 권을 끝내고 나서도 인물들은 계속해서 마음속에 살아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돌아다니고, 말을 걸고 하던 무엇인가가 가슴을 가득 메우고 풍부했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책 속의 인물이 너무나 생생해서 책을 덮고도 한동안 나를 떠나지 않는 인물이 만든 책. 모스크바의 신사 로스토브 백작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한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서론이 길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을 뺀다면 내용은 크게 설명할 게 없다. 2천만명이라고 했던가 2백만명이라고 했던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수의 목숨이 스탈린 치하에서 전쟁과 숙청으로 학살 되고 있을 때 구시대 인물(귀족)의 자택감금은, 그 이후 백작의 수십년간 감금 기간 백작의 지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비하면 오히려 사치에 가까운 처벌이었다. 그의 대저택은 이미 인민의 이름으로 접수했을 테고, 4년째 스위트룸에 묶고 있던 백작의 거처는 종탑의 작은 다락방으로 옮겨진다. 다행인건가. 그가 묵던 메트로폴 호텔은 모스크바 최고의 호화 호텔로, 최고급 식당과 대중적 식당, 바, 세탁소 상점 등의 편의 시설들이 입점해 있어 남의 도움이 없어도 생활에 그닥 어려움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호텔 문을 한 발작만 나가도 그는 바로 총살된다.


소설의 제목에 신사라는 말이 쓰였는데, 신사와 영국신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신사라는 이미지가 속을 알 수 없는 이중적 모습이 연상되었지만 로스토프 백작의 신사다운 면모는 신사의 정의를 새롭게 원위치시킨다. (자신도 동의했던) 시대의 요구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러시아와 시대의 배반을 종신구금형이라는 결과로 받아들이는 태도만으로도 소설의 도입은 독자를 로스토프 백작의 정신세계로 깊이 이입시킨다.


니나와의 만남과 자연스런 이별, 우연히 돕게 된 여배우와의 하룻밤 정사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재회와 사랑, 최고급 식당의 웨이터로 일하게 되고, 식당 삼총사들과 맺는 작고 충직한 관계들, 재봉사를 비롯한 호텔 직원들과의 자잘한 관계들. 이런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일생 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 생긴다. 호텔 감금이 시작된 초창기에 열세살 소녀였던 니나가 청년당원을 만나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 남편이 체포되어 행방을 찾기 위해, 6살 소피아를 잠시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는 점이다. 조용하고 착한 아이지만, 아이는 아이. 가뜩이나 좁은 방에 어린 아이 한 명이 차지하는 공간은 예상을 넘어서고, 그동안 만들었던 고요한 생활의 질서는 깨어지고, 아이를 다룰 줄 모르는 백작은 쩔쩔맨다. 한 달 후에 찾으러 온다던 니나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감금 초기 그를 늘 찾아던 둘도 없는 친구 미시카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몰래 그를 만나러 오는데, 그가 하는 말이 가슴을 친다. 알고 보니 자네가 가장 운이 좋았다는 것.


잔잔하게 이어지지만 지루할 새 없이 자잘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미시카의 죽음과 함께 밝혀지는 비밀이 있고, 백작에게 사실상 딸이 되어 훌륭히 자란 소피아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과정, 오랜 시간 감금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듯했던 백작이 드디어, 딸의 장래를 위해 위험하고도 대담한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장면 등의 클라이맥스와 안도감으로 맺는 결말이 찾아온다.


몇몇 장면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혹은 현실에서 만난 것처럼 생생하고 또 몇몇 장면은 잊지 못할만큼 감동적이다. 니나가 마스터 키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던 장면, 백작이 처음으로 자신의 낡은 바지를 세탁소에 가져가 재봉사에게 바느질을 배우면서 둘이 주고받는 정겨운 대화들, 자살하려고 종탑 지붕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직원과의 해프닝, 두 마리 개를 컨트롤 하지 못해 쩔쩔매는 여배우와를 돕던 첫 만남, 그렇지만 백작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은 니나가 아이를 데려와 맡기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러시아의 설원에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여준 서구 영화, <닥터지바고>적 비애를 연상시킨다.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공산당원으로 성장한 니나는, 당에 충성하고 열성적인 모습으로 비처지는데, 결과는 결국 남편의 숙청으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니시카의 말이 옳았다. 백작이 살아남은 것은 스탈린의 광기가 아닉 광범위한 처형과 학살을 낳기 전 단계에서 감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금이 처형이 아닌 감금으로 끝난 데에는 더욱 아이러니한 진실이 숨어져 있다. (이것은 스포라 여기까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 들어 읽은 소설 몇 개가 마음 속을 걸어다니고 있는데, 언제까지 머물지는 모르겠다. 지난 달쯤 알라딘에서 기획으로 열 몇 개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이라는 제목으로 소설 여러권을 골라서 세트에 묶어 전자책 3개월 대여로 판매했는데, 이미 구매한 책들과 많이 겹쳤지만, 벼르다 사지도 읽지도 못한 책들과, 내겐 생소한 책들이 섞여 있어서 대여했다. 지금 여러권 읽었는데 한 마디로 주옥같다.


무엇보다도, 기획세트 대여의 가장 큰 동기가 된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은 마케팅도 많이 해서 잘 알려져있긴 하지만 끝까지 이토록 생소하고 낯선 먼 이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을 독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느낌으로는 100명도 넘을만한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정독할만한 독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내 경우 종이책으로 읽으라고 했다면 끝까지 못읽었을테지만, 없는 난독증도 일으킬 듯한 생소한 라틴어 이름들과 지명들을 읽어주는나 대신 이북의 읽어주기 기능 덕분에 끝까지 듣는 데는 성공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끝까지 읽으면 험난한 길을 끝내고 목표지점에 다달을 때같은 성취감을 주는 책이다. 쌍동이같이 똑같은 두 사람이 추구한 문학과 삶은 앞에 언급한 모스크바의 신사와 비교할 때 한 마디로 시궁창같지만, 무기력한 시대의 문학에 저항하고 끝없이 비루하고 구차한 삶을 헤치며 살아간 두 사람 역시 내 머리속에서 한동안 살아있을 듯하다.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반해버려, 그의 다른 소설 <칠레의 밤>을 읽었고 <2666>도 읽고 있는데, 사실 그의 소설이 캐릭터가 살아나올듯 생생하기 보다는 뭔가를 캐는 듯한 탐정적 문법을 따르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열어주지 않은 인물들의 마음 그 꽉닫힌 미지의 마음을 통하는 온갈래의 길에서 서성이게 된다. 이런 책들은 일단 번역에 감사함























개구지고 말썽꾸러기 소년이지만 수줍고 다정하게 다가와 머리속을 배회하는 착한 소년이 있다. 

 작가 심윤경을 겨우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해보았지만, 난독증에 걸린 소년의 일대기에 1979년과 1980년에 일어났던 역사적 비극과 개인적 비극을 통해 한 가족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슬프고 아름답고 짠했다. 콩가루 같은 한 가정의 갈등과 문제는 시대가 안고 있던 시대의 표상과 다름없었고, 갈등과 아귀다툼만이 지배하던 가정에 희망을 비추고 서로를 이어주던 것(스포 때문에 ..)의 상실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부의 종식과 더불어 잠시나마 살랑살랑 불어왔던 민주화에 대한 봄바람이 군부 구테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수천의 양민이 학살되었던 시대의 비극과  완전하게 일치한다. 희망이 사라진 후, 우리는 남겨진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비극의 끝에서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난독증 소년이 보여준 해법을 갈등의 시대에 어떻게 해석해야 각자의 몫이겠지만, 소년의 맑은 마음이 그리고 그가 떠나보내야 했던 그토록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오래도록 여운처럼 맴도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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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2015년 김보영의 소설을 번역 출간한 적 있는 SF 잡지 클락스월드에 2019년은 많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9개의 단편을 번역하고 그 첫번째 소설을 출간했던 4월호 이슈 155에서 편집자 닐 클락스는 길거리 혹은 세상 반대편  어느 곳에서든 최고의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중국의 SF가 세상에 빛을 보고 그 어느 때보다도 호황기를 맞이했던 건 우리나라에서는 <종이 동물원>과 <제국의 위엄>이 출간된 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가 처음으로 자신이 번역한 중국 단편들을 보내 그것을 2011년에 싣기 시작하면서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켄리우를 몇년 동안 꾸준하게 출간한 중국 SF 소설이 몇 년 이상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출판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작가들이 있는 잉여적 상황에서, 단지 영어권에 전달되지 못해서 묻히는 훌륭한 작품이 많다는 것을 잊기 쉽다고, 그래서 변방의 언어로 적힌 소설들에 관심을 갖고 출간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클락스월드 매가진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2019년 총 9개의 작품을 게제하기로 하였고, 이미 배명훈, 김보영, 듀나, 복거일, 정소연 등의 작품이 한회 혹은 두회에 걸쳐 게제되어 있다. 가장 최근 호가 8월호인데 지난 달에 이어 2회째로 듀나의 <The Second Nanny>가 게재되어 있다. 




가끔 가장 최신의 따끈따끈한 과학소설이 땡길 때는 클락스월드에 들어가보곤 하는데 재밌게 읽은 봇 소설이 하나 있어서 소개한다. 웰스의 살인봇 일기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읽게 된 건데 살인봇 일기와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2017년도에 나왔고 아마도 휴고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거나 혹은 단편상까지 받았거나 그런 작품이다. 과월호까지 모두 온라인에 출판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일부 작품은 읽어주기까지 한다.  길지 않고 온라인이라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은 우리의 구세주 파파고님이나 구글번역가님께 부탁해서 읽으면 된다. 

SF 중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 라고 불리는 범주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넓고 깜깜한 우주에서 우주선에 탄 채로 떠다니면서 할 게 쌈질 밖에 할 게 더 있나.  게다가 중세시대의 이야기를 우주로 옮겨운 것일 뿐인 듯한 비슷비슷한 설정의 클리쉐가 많은 분야가 또 이 분야이기도 하다. 로봇이 주인공이 되면 좀 달라진다. 예를 들어 murder bot diaries의 경우 먼 미래, 먼 공간 속 행성이 배경이지만, 장르적 크리쉐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최소한으로 줄였고, 고집불통 착한 로봇의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1인칭 시점으로 끌어가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작년인가 재작년 휴고상 목록에서 제목에 이끌려서 찾아 읽었다. 


우주선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기에, 자잘한 액션 묘사에 쓰인 어휘가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궁금증은 풀릴 정도였다. 예전의 로봇 주연 소설들이 대개 반란을 일으켜 인간과 전쟁을 주로 한다면 요즘 소설 속 로봇들의 주제는 의식을 가진 봇의 다양한 캐릭터의 특성이 잔재미를 준다라고나 할까. 어느날 잠에서 깨어난 다용도 로봇은 자기가 비활성화된 동안 엄청난 시간이 흘렀으며, 그 엄청난 시간 속에서 봇들의 세계 역시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알게 된다. 봇들은 전문화되었고, 봇넷이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그 봇넷 커뮤니들을 통해 모두들 알고 있던 거였다. 수세대 만에 깨어난 봇9은 보다 근사하고 멋진 일을 수행하고 싶었지만, 우주선으로부터 해충을 퇴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우주선 역시 봇의 일종으로 휘하에 모든 종류의 봇들을 거느리고 조정하고 있다. 


이 전문화된 봇들은 크기가 매우 작고, 종류도 청소봇, 함체봇, 식크봇 등 다양한데, 알고 보면 우주선을 움직이고 관리하는 자동화된 부품의 업그레이드된 버전 정도로 보인다. 봇들의 명칭은 숫자로 된 시리얼로 되어 있다보니, 4030이니 123456이니 하는 봇들이 볼 때 봇9이란 까마득한 전설의 봇이다.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막 깨어나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을 때,  자신은 그 개념조차도 알 길이 없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그렇게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숲속의 공주와 봇9의 다른 점은 그는 인간이고 그것은 기계라는 점이다. 이 구형 멀티봇이 처음에 봇넷을 알게 되었을 때 봇넷의 존재 필요성을 의심한다. 태생 자체가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봇들은 애초에 시스템으로부터 받는 탑다운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이 존재 목적이 아니었던가. 자기들끼리의 상호 대화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존재 목적에 어긋나지 않은가. 하지만 봇들이 쉬는 시간에 봇넷의 액세스를 허용한 것은 그들의 최고 책임자인 우주선(역시 봇임) 자체다. 정보의 공유는 봇들의 효율성과 능률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는 걸 알아챌 만큼 우주선은 똑똑하다.




봇9은 Incidental이라 불리는 해충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 하면서, 잠들어 있던 수세대간의 문화적 기술적 갭을 업그레이드 하지만, 그동안 인간들은 인류를 파멸하기 위해 지구를 향해 가고 있는 외계인들의 우주선과 사투를 벌인다. 지구와 충돌을 막기 위해 우주선체 자체와 충돌하여 장렬히 희생하자는 인간적 인간들과, 똑똑한 머리와 엄청난 개체수로 인간과, 지구, 그리고 자신들까지 모두를 구출하고자 하는 봇들이 만들어내는 유쾌하고 귀여운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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