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번역 불가한 한국 말들에 대한 외국인의 시각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한이다. 번역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아일랜드인들이 가진 민족적 정서와 비슷하다는 말이었다. 한때 아일랜드 기근도 생각나고, 오랜 영국의 식민상태와 부패한 모습에서 우리나라 서민들이 느끼는 '한'을 찾을 수 있다니 이거 참. 내가 살면서 아일랜드 사람을 알았던 적이 있는데, 영국에서 다니던 직장에서였다. 나이 많은 그 분은 회사에서 우편물을 담당하고 이런 저런 자잘한 손이 가는 보이지 않는 일들을 맡아 하고 있었는데, 직장 내 모든 사람들이 가장 푸근하고 따뜻한 분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퇴직이 다가오고 있는 나이였는데 퇴직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B&B(아침주는 민박?)를 운영하는 게 꿈이라고 했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에서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다. 동상을 비롯해서 박물관, 제임스조이스 거리, 술집까지 더블린 시내 곳곳에는 제임스 조이스와 관련된 상징물과 문화 컨텐츠들이 가득하다. 영미 작가로는 세익스피어에 비견될만큼 위대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20세기 영어권 문학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그나마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쉬운 편이라고 말하는 더블린 사람들을 몇 달에 걸쳐 읽었다. 잘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읽거나 번역본을 바꿔가며 읽었고, 심지어 영문판까지 들쳐보았는데, 오래전에 정규 라디오 방송에서 다루고, 팟캐스트로도 파일이 남아있는 영미문학관에서 30여회에 걸쳐서 방송한 팟캐스트 방송과 펭귄 클래식의 해설이 도움이 되었다. 


더블린사람들을 이해하려면 일단 제임스 조이스가 애증어린 마음으로 그려나간 더블린을 수도로 가진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당시 처해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정치지도자 파넬의 죽음으로 카톨릭 민족주의자들이 품고 있던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산산조각난 현실 앞에 식민통치의 그늘과 만성적 부조리의 상징이 된 카톨릭 종교, 그리고 열뜬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환멸을 제임스 조이스는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담았다. 


조이스는 이 작품집을 개별 작품의 연속으로 읽지 말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읽어줄 것을 바랐다. 얼핏 보면 단편집 같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제임스 조이스 스스로가 '마비'라고 명칭한 커다란 주제로 모아져, 일관된 지향점을 갖는다. 18세기 초만 해도 베네치아와 견줄 수 있을만큼 명물 도시로 자리매김했던 더블린은 연방법의 적용을 받아 그 위치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과 식민적 약탈적 통치로 인해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 가족의 쇠퇴와 맞물리면서, 작품과 시대와 개인을 연결시킨다. 그가 말하고 있는 더블린의 마비란 무엇인가. 궁핍과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타락하고 무능한 사람들의 마비된 양심, 마비된 진실, 마비된 존엄성, 결국은 마비된 아일랜드 정신이기도 하다. 


첫 작품인 <자매>에 이어, <어떤만남>과 <에러비>로 이어지면서 주인공이었던 유년기 소년은 <이블린> <경주가 끝난 후> <두 건달> 등을 거치며 차차 청년기의 소년 소녀로 바뀌고,  마지막 <죽은 사람들>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성격이 바뀌면서 주인공들은 더블린 사회의 여러 층에 포진된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어떤 위치의 다른 삶을 통해서도  한결같이 더블린의 만성적인 무능과 타락을 보여준다. 만나고, 허세를 부리고, 술마시고, 그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무료하고 단순한 일상의 지속은 조이스가 보여주고자했던,  닦아내고 윤내지 않은 진실 그대로의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열린 결말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다. 독자로서 우리는 <자매>의 죽은 신부가 왜 마비되었는지, 무엇을 괴로워했는지, 그것이 혹시 매독이라든가, 혹은 어떤 성적 타락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로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타락한 노인은 음흉하고 저질적인 모습으로 다시 소년들의 일탈을 그린 <어떤 만남>에서 나타나, 아이들에게 섬뜩하게 성적 희롱을 하고 위협한다. <에러비>를 짝사랑한 소년은 무관심한 어른들에 의해 소녀와 가까와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아마도).  그렇게 도시의 모퉁이를 돌면 재회하게 되는 인물들의 더블린 내에서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타락한 인간 본성의 내밀한 속내를 들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작은 일상들, 동전 한 잎, 술 한잔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 이것은 200년전 더블린의 모습이지만은 않다. 선거를 앞둔 한 지역 사무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다룬 <위원실의 담쟁이 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회사원이 윗사람에게 당한 수모를 시계까지 팔아 술집에서 허세를 부리며 팔다가 망신을 당한 후 집에 와서 자는 아이를 깨워 화풀이를 하는 아버지를 다룬 <짝패들>, 보잘것 없던 친구가 도시(런던)에서 성공해서 돌아오자 자괴감을 느끼는 <작은 구름>, 직업도 없이, 돈도 없이 술을 얻어 빌어먹는 다니는 건달 둘과 하녀와의 약탈적 관계를 다룬 <두 건달들>, 찬 딸을 결혼시킬 목적으로 은밀한 계략을 읽을 수 <하숙집>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 배경만 바꾸어 그대로 플레이해도 다를 바가 없을, 쌍둥이 같은 자화상이다. 


그렇다, <위원실의 담쟁이달>에서처럼 선거철이 되면 얼마 안되는 푼돈을 벌기 위해 표를 모으러 다니고, 무용하고 무의미한 정치적 대화를 하는 사람들, 자기보다는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 팔자를 조금 고쳐보려고 악을 쓰고 다니는 부모들, 출세한 친구와 출세하지 못한 친구와의 재회 속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갭,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처럼 서로 등처먹고 사기치는 세상, 바로 어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왜곡된 거울에 비쳐 미화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더블린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음산하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쳐보는 거울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궁핍하고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한푼의 동전과 한 잔의 술에 팔아버리고 마비시켜버리는 모든 것들을 얘기하고 싶어했다. 


조너선 스위프트・오스카 와일드・브람 스토커 등도 아일랜드에서 창작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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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레시피 - 전국 화제의 맛집 비법을 담은, KBS 2TV 생생정보
KBS <2TV 생생정보-황금레시피> 제작팀 엮음 / 이밥차(그리고책)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드디어 나왔군요. 이거 하나면 집반찬, 찌개, 맛집 요리 만사 O.K. 반찬이 없는 게 흠. 집반찬 편으로 2탄 기대해요. 뭐 하나 할 때마다 황금레시피 찾느라 휴대폰에 반찬 죄 묻히고.. 이제 이 책으로 요리 레서피 천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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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사랑은 언젠가 빛과 열이 약해져서 서서히 꺼지는 순간이 있겠지만, 약속이 실현되면 인연은 계속된다. 그러나 때로, 약속이 실현되기 전에, 약속을 만들기도 전에 인연은 끝난다. 짧고 긴 만남이 끝나고 끝과 끝 사이에 남아있는 물건들, 만져지는 것들, 망막이 초점을 맺으면 그 물건에서 반사되는 빛을 뇌신경 회로에서 처리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만남을 회상시켜준다. 어리석었던 첫 끌림과 바보같았던 사랑과 또 그렇게 수순을 밟고 지나간 언쟁들과 싸움들을 기억한다. 기억과 결합해 과거를 과거 속에 버려두지 않고 자꾸 현재에 끌고 오는, 그리하여 잊고 싶은, 잊어야 하는, 과거의 시간을 붙잡아주는 물건들이 있다. 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할까. 그것은 또다른 나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혹은 또다른 너 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너와 내가 박제된 과거 속에서 아득한 망각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자꾸 떠올라 자맥질할 때 우리는 안다. 이제 그 물건이 떠나야 함을. 떠난 사람은 이미 떠난 것이고, 떠났지만 내가 보내지 못한 것들은 버림이라는 의식을 통해 기어코 외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라리오 박물관은 제주에도 있다. 제주에 있는 뮤지엄은 탑동모텔, 탑동 자전거샵, 탑동 시네마로 구성되어 있다. 낡고 오래된 근대식 건물을 완전히 허물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스란히 남겨놓은 것도 아닌 상태로 반쯤 부수고 반쯤 남겨놓았다. 과거의 흔적은 그렇게 지워진 것도 아니고 남아있는 것도 아닌 채 하지만 앙상한 뼈대와 세월이 짓이겨놓은 때국물 자국으로  남겨졌다. 탑동모텔의  오래된 객실 내, 타일로 만들어진 네모나고 깊은 욕실이 인상적이었다. 때궁물과 낙서와 바랜 흔적들로 남겨진 더러운 침대와 바닥의 일부와 문짝들은 다시 작품이 되어 전시되었다. 스스로의 목적과 이별하고, 실연당해 남겨진 낡고 더러운 건물의 잔해들이 새로운 목적이 된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어 스스로를 기념한다.  이렇게 돌고 돌다보면 무엇이 남겨지고 무엇이 떠날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까.


떠나보내면 잊혀질까. 버리면 기억조차 사라질까. 수많은 견딜 수 없는 나날 속에서 보낸 시간들이 견딜 수 있는 시간으로 변했다면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뮤지엄이 한쌍씩 두 개 있는데 입장료가 따로따로 만원가량. 시네마와 자전거샵만을 보고 말 작정이었다. 책을 읽었으므로, (입장료도 비싸고 해서) 탑동 모텔에 있는 실연 박물관을 굳이 가보고 싶지 않았다. 근데 실연 박물관을 전시중인 탑동 모텔은 입장료에 커피값이 포함되었다. 커피나 마시기로 했다. 커피는 극적으로 맛있었다. 그 지극히 개인적인 헤어짐의 사연들은 책으로도 충분했다. 어떤 가족의 아빠가 즐겨타던 오프로드 지프차가 하나 있었는데... 그걸 기증한 가족들은 아빠에게 남편에게 쓴 편지를 함께 기증했다. 그게 인쇄되었던 페이지가 생각났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로비의 커피샵에서 커피마시며 인적 없는 제주의 탑동 거리에 잡아먹을 듯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의 열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닫을 시간이 다가오길래 한칸씩 올라가서 대충 돌아보았다. 


이북으로 구매했던 책이라, 책을 펼쳐서, 오프로드 차에 관한 사연을 남편에게 읽어주었다. 늙어서 눈이 안보인다나 어쩐다나. 나는 뭐 젊은가. 몇줄 읽다가 목이 메어서.. 그냥 덮고 말았다. 개인의 실연이 박물관에 박제되다. 멋진가? 슬픈가? 개인의 실연이 인쇄된 책 속에 담기다. 슬픈가? 멋진가?



* 박대리가 나가서 탑동 모텔에서 하는 실연박물관은 사진에 담아내지 못했다. 사진들은 먼저 구경했던 바이크 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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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인간의 대결에서 기계에 지고도 인간이 할 말은 많다. 그 중에서 인간이 기계에게 가장 우월한 점은 기계는 주어진 어떤 한 가지만을 잘하지만 인간은 만능이라는 점이다. 모든 기계들은 인간의 특정 능력을 모방할 때 각각의 기능은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총체로서 인간 개체 하나를 능가하는 기계는 아직 없다. 인간의 손 인간의 발 인간의 눈 인간의 코 그 각각의 감각 기관을 흉내내는 각종 센서들로 움직이는 기계는 그 센서들이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지만 인간의 아주 작은 어떤 특정한 지적, 신체적 능력의 아주 일부 기능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고 있다.


체스 기계(알고리즘)가 체스 시합에서 인간을 이긴다. 바둑  기계가 이제 바둑 시합에서 인간을 이긴다. 기계가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린다.  기계가 제퍼디의 우승자를이긴다. 들쑥날쑥하게 자연상태로 주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를 가진 일련의 이야기를  기계가 만들어내고 그것을 쓰는 속도가 인간보다 수백배나 빠르고 문법적 오류가 전혀 없다.  기계가 한 사람의 뇌 용량에 갇힌 경험과 기억의 감옥에서 탈옥한 무한한 지식의 바다에서 의사가 되어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기계가 무한에 가까운 자원과 용량을 지불해 자연과학의 법칙을 발견한다. 아인슈타인의 통찰보다 무작위의  시도와 우연적 발견이 만날때까지 반복해서 알아낸 자연법칙이 뛰어나다면 인간은 더 이상 천재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인공지능 분야는 20세기 초 이래로 여러 번 가장 과대평가되어왔고 또 과소평가되어 온 분야이기도 하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현재 너무나 광범위한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기술마저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반면 당연히 현재 시간쯤이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리라 생각했던 부분은 어떤 바틀넥 같은 상황에 막혀 한 세기전에서 단 한발작도 나가지 못하기도 했다.


1930년데쯤 쓰여진 SF 단편들 중 로봇과 관련된 소설 몇 개를 읽어보았다. 그 때 미래였지만 지금은 현재 혹은 과거가 된 시점에서 혹은 먼 미래에서 가까운 미래가 된 시점에서 오래전에 상상한 로봇은 실제 모습과 많이 다르다. SF에서 로봇은 대개 다정다감하거나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복종하지만 자주 섬뜩한 반전을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해낸 로봇이 인간의 지적 능력 이상으로 진화해가면서 더 이상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고 상상가능한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완전한 다른 곳이 될 것이라는 믿음(혹은 이론)이 특이점이다  이 특이점은 때로 새로운 종교처럼 받아들여져 많은 추종자들과 이색적 동교 의식을 낳기도 하고 사이비 과학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지만 IT의 거물들 중에는 이를 믿는 사람이 많다  콕 찝어서 삼사십년 이내에 그 특이점이 올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서부터 그것에 대한 교육과정이 탄생되기도 했다. 


특이점이 언제 올지, 혹은 오지 않을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모른다는 점 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일반인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차들이 스스로 운전한다면 레알자동차라고 불러야 할까. 그 무어라 부르던 그런 시대가 오면 운전이라는 고강도의 노동은 필요없어지고 운전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던 많은 직업적 운전사들이 뭔가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기계가 인간을 대신함으로서 사라진 수많은 일자리들을 차고 넘치게 보아왔다. 대체로 사라진 일자리들은 새로운 일자리가 그 사라진 일자리들의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자동화에 따른 자동생산에 따라 사람들은 풍족해졌고, 이제 물건을 만들던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을 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서비스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단연코 서비스 제공 인간이 서비스 수혜자 즉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없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그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적 자격증 같은 것들이 있을 때이다. 변호사, 교수, 의사, 작가, 예술가 등등. 그런 직업이 늘어나고, 점점 더 전문화된 분야에 지식을 쌓은 사람들이 더욱 전문화된 서비스를 종사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로봇이나 자동화기기에 일자리를 빼앗길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은 IT의 다른 분야에 비해 지지부진 했고 매번 벽에 부딪혔고, 특히나 인간의 뇌나 뭐 그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로봇이 고작 흉내내는 것은 인간의 뇌의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그것 역시 인간에 의해 프로그램되어야 한다고 믿어졌다. 그리고 여러 번의 침체기 끝에서 바라보니 참으로 많은 것이 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인공지능은 IBM의 왓슨이 퀴즈 프로그램 제퍼디에서 우승한 이후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형국이다. 


의사는 의료지식이라는 아주 오랜 기간의 시간 투자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왓슨은 단순히 이제까지 인간이 이룩하고 쌓아놓은 모든 지식에 단순히 접속함으로써, 단번 및 의사 보조자가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들쑥날쑥한 데이터베이스에서 문맥을 찾아 환자의 증상과 맞는 병명을 찾아내고, 가장 적당한 의료 행위를 추천하고, 약을 처방한다. 이렇게 되면 한 사람의 의사에게 갇혀있던 경험과 지식이라는 한계에서 숱한 실수와 경험 부족에 의한 실수들은 사라지고, 지구상의 모든 의사들에게서 나온 지식에 접속해서 가장 근접한 병명을 알아내어 가장 적당한 치료법을 알려주는 한편 용량과 부작용에 따른 인적 의료사고는 거의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는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시술 수술과 같은 물리적 의료행위들은 이미 로봇에게서 많은 자리를 내어주고 있으므로 의사들의 역할은 줄어들 것이고 시간이 많이 필요로되는 환자 면담과 같은 일들은 의사 자격이 없고 월급이 적은 단순히 컴퓨터 조작만을 함으로써 로봇에 의한 진료가 가능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격진료와 같은 형태로 이미 도서지역 등지에서 시행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상상하는 SF 소설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 상황을 두 가지 다른 시점이에서 성찰할 수 있다. 과거에 예견된 미래가 이미 도래했거나 지나갔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던 비관적 상상이었기에 안심하거나 아직 닥치지 않은 먼 미래의 일이기에 상상력의 차원에서만 체험하는 일이어서 걱정 역시 허구가 되거나다. 로봇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걱정은 오래전부터 해 왔지만 여전히 사람이 필요한 곳은 있었고 서비스업은 더욱 세분화되어왔다. 그래서 그러는 동안, 응 로봇은 바보야. 단순 노동 밖에는 할 수 없거든 한가지 기능말고는 행 수 없거든. 사람을 대신해주지는 않을거야. 이렇게 믿는 사이에 로봇의 기능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로봇의 기능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었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길건가 인간지능 이세돌이 이길거냐의 문제가 주는 알레고리는 인류의 미래에 적신호를 주고 있는걸까. 예상을 깬 로봇의 승리는 앞으로 벌어질 인간과 로봇의 대결에서 로봇의 승리라는 상징성을 예고하는 것일까. 완전한 승리 대신 허를 보인 한번의 패배가 완전한 인간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이 대결은 인간과 로봇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두 책은 IT 기술과 경제 라는 두 가지 면을 동시에 매우 심도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로봇시대,인간의 일>이 <로봇의 부상>보다 훨씬 잘 읽힌다. 그리고 국내 상황을 반영한다. 국내 저자의 책이 질적으로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글로벌 책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구본승 저자의 책이 더 좋은 면이 있는데, 더 중립적이고, 좀 더 사색적이라는 점이다. 로봇의 부상이 미래의 직업에 대해 비관적이라면 로봇시대 역시 비관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기술문명의 폭발적이고도 혁명적 발전에 수반되는 윤리적 사회변화에 대해 더욱 통찰력있는 자신의 시각을 제시한다. <로봇의 부상>을 읽고, 아 어떻게하나 우리의 예쁜 아들 딸들은 미래에 뭘 해먹고 살건가 라는 걱정 밖에 안드는데, <로봇의 시대, 인간의 일>은 그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흥미로운 현상들을 생각해보는 유익한 시간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차가 스스로 운전하는 것은 멋진 신세계다. 그 멋진 신세계가 실현되는 동안, 세계의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 모든 운전자들은 모두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사실을 마지막에 섬뜩하게 제시하는 <로봇의 부상>에 비해 <로봇시대, 인간의 일>은 그와 더불어 그러한 자동차가 스스로 데리러 와서 데려다 주는 동안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러한 신세계가 가져올 위협, 원격 해킹으로  인한 차량 통제권 상실 혹은 서버의 오류로 인한 대형 사고, 사고에 대한 책임 소재의 문제, 무엇보다도 위험한 상황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 등과 같이 우리가 미처 생각지 않고 무턱대고 좋은 기술을 받아들였을 때 생기게 되는 문제점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가장 큰 차이는, 빠른 로봇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데이터가 국내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으므로 더욱 현실성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을 알면, 곧 한국을 알게되겠지만, 디지털 정보의 독점화가 가져오게될 가속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역시 한국이 미국보다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도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사회 구조가 다르고, 서비스 산업의 양상이 다르고, 아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르다. 한국 사회를 보려면 국내 책을 선도하는 미국을 통해 글로발한 양상을 보려면 미국책을. 하지만 둘 다 다보는 것도 좋다.


 IT 기술이 가져올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해 말할 때, IT 기술 자체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는 경우는 드문데, 두 저자들은 여러가지 분야의 인공지능들이 어떤 원리로 동작하고 있는지 그 기술적 동작 방식에 대해서도 상세히 말함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었다. 대개 인공지능이 미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장미빛 전망을 하는 것과 달리 두 책 모두 매우 어둡게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IT 분야 단독으로만 보면 장미빛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경제와 실업, 일자리 같은 부분과 함께 통찰될 때, 기술이 가져올 어둡고 두려운 전망이 도사린다. 


자동화된 생산 설비로 척척 차가 만들어지는 장면을 보고 포드사의 사장 포드가 노조 위원장에게 거만하게 말한다. 이 로봇들은 월급을 줄 필요도 없고, 파업도 하지 않을 거라고, 노조위원장은 말한다. 이 차들을 이 로봇들에게 팔 수 있을 거 같나교. 소비가 가능한 사람들의 집단이 있어야 경제가 돌아가는데, 현재의 거대 자본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은채 로봇과 인공지능 알고리즘들에게 일을 시키게 된다.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전세계의 일자리는 수십년동안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실업률은 높아가고, 또한 가계 소득 역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부자들의 부의 편중 현상이 심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장미빛으로 다가오는 이 모든 자동화, 로봇, 인공지능이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거대 자본이 이 아름다운 알고리즘과 인공지능과 로봇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그리 달갑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구본승은 <정보의 유효기간이 단축되는 지식반감기>라는 멋진 소제목의 챕터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살아가게될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의 수용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제시한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계속 학습하지 않으면 이내 낡은 지식과 권위에 의존하는 구세대가 된다. 이는 우리의 아재 세대들을 통해 이미 학습된 터이다. 모든 정보는 절대지식이 될 수 없고 유효기간과 반감기를 지닌 가변적 지식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직업에 관련해서, 오래전 이미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없어졌지만, 로봇이 약사, 변호사, 의사 등의 전문가의 일까지 대체하기에 최적화된 시대에 한 분야의 지식을 십여년간 교육받아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평생 직업이라는 개념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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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박도봉의 현장 인문학
김종록.박도봉 지음 / 김영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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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일손이 모자라는 곳이 있다. 중소기업이 그렇고, 제조업이 그렇다. 먼저 제조업을 생각해보자. 제조업 인력은 해외에서 조달한다. 공장을 밖에다가 세우기도 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기도 한다. 이것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이 일하러 오는건가. 아니다. 기업이 기대하는 '저렴한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측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수출 위주의 국가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춘 가격으로 물건을 팔려면 국내의 청년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 이 불균형에 대해, 고성장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기득층은 '편한 일만 찾으려는 요즘 젊은이들' 탓만 한다.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비록 쉽게 공무원이 되었지만 어찌되었던 시간만 무사히 보내면 성과에 관계없이 근속년수에 비례해서 차곡차곡 월급이 오르던 공무원들이, 공기업 직원들이, 교수들이, 그 기득층들이 직접 물건 만드는 곳에서 땀흘려 보았느냐 말이다.

 

좋은 시절 만나, 걱정 없이 젊음을 마감하고 은퇴해 고액의 연금을 받는 사람들은 이런 논의에서 시대를 잘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고 그냥 조용히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 그들의 그 안정된 수입이 왕족처럼 떠받들던 70년대 우상의 딸에게서 나온거라고 여겨지더라도 그냥 그걸 속으로 생각하고 있길 바란다. 그들의 잣대를 현대의 청춘에게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 그들도 딸이 있고 아들이 있고, 딸들의 딸이 있고 딸들의 아들 아들의 딸 아들의 아들이 있으므로 그 아이들의 미래가 남 얘기가 아니지 않은가. 20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으로 갔다고 치자. 그들 세대의 평균 나이는 90이 넘을 터인데, 공장에서 몸을 혹사당하면서 남은 인생을 거기에 걸 수 있을까. 국제적 경쟁 구조가 바뀌어 버리면 쌓아놓은 기술이 무용지물이 된다. 망하고 흥하고는 시간이 결정한다. 그렇기에 골수만 빼먹고 버려지는 제조업 현장이라는 이미지가 부당하기만 한 건 아니다.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제조업 자체가 비전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근거없는 비관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제조업 근무 경험이 어른들은 일자리가 넘쳐나는데 편한 일만 찾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해보자. 제조업 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제조업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이런 시대에 제조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주목해볼 만 하다. 70년대라면, 80년대라면 모를까, 아직까지 제조업으로 성공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가 비록 흑수저로 태어나 지방대를 졸업한 그저 그런 청춘의 시작이 80년대였다 할지라도 IMF를 이겨내고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값싼 중국 제조업 홍수를 경험하고, 그대로 제조업으로 세계 속에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는 하는 목소리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무일푼 기름밥 열처리공에서 1조매출 흑자 기업을 일군 알루코그룹 CEO 박도봉. 그는 말한다. 현장으로 가라. 현장에 답이 있다고.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열정과 노하우를 응축시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조금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희망의 목소리를 주려면 성공한 사람의 자기자랑식의 자기계발서는 답이 아니다. 이 책은 학자이자, 작가인 김종록이 알루코 회장(?) 박도봉에게 질문하고 답하면서 그 치열한 삶의 족적들을 따라가며 가치와 의미를 담아내었다. 김종록 작가의 이름이 눈에 익어 이력을 살펴보니 얼마 전에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저서를 썼던 작가이다. 그 이전에 쓴 <소설풍수>는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데, 나는 읽어보지 못했다. 때로 질문에 답이 있는 경우가 있다. 뭔가가 몹시 혼동흐러울 때, 잘 모를 때 내가 가끔 쓰는 방법은 질문해보는 것이다. 대상은 누구가 되어도 좋다. 누구에게 묻는다면 그 물음 자체가 답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묻는 과정 속에는 목적이 포함되고, 그 목적이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서 답이 생길 수도 있다. 누군가가 없다면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하면서 답을 구하다보면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 김종록 작가가 묻는데 그 물음은 간단하지 않고 삶을 관통하는 철학, 역사, 예술, 정치, 사회 등 다양한 지식들이 함께 있다. 대답하는 사람은 질문을 통해 돌아온 삶을 정리하고, 중요한 것이, 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도봉 회장은 일단 와이프를 잘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자기 집 식구들 동전 한 푼 안보태주고 반대할 때, 아내의 뚝심있는 결단과 지지는 그에게 가장 힘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직접 아이를 키우면서 직원들 밥을 해주고,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사업자금을 구하러 다니면서 사업을 함께 일구었다. 이런 일은 절대적인 신뢰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아내의 직장 경력이 그러한 용기 있는 가치 형성에 도움이 되었을 듯 싶다. 어쨌든 신뢰한 건 막연한 기대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보여주는 행동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조업이라고 하면, 지는 해가 연상되지만, 박도봉 회장의 성공담은 우리나라 제조업이 나아갈 길, 더 나아가 길잃은 청춘들에게 제시하는 작은 희망의 등불이기도 하다. 세상은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 기술은 계속 정교하고 복잡하고 발전하고 있는데, 그 발전을 주도하게 된다면 시장은 세계 전체가 되고,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다소 뻔한 이야기 같지만, 막상 부딪히고 깨달은 디테일한 경험담들은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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