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같이 걸어도 나 혼자
데라치 하루나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평점 :
살다 보면 좋은 이웃을 만나는 행운이 생기기도 한다. 좋은 이웃이란 무얼까. 핵가족 시대의 좋은 이웃이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한다. 유미코와 카에데는 40대 여성으로 낡은 아파트를 마주보는 이웃이다. 두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처음엔 책이 간질간질한 에세이처럼 생겨서 유미코의 첫번째 챕터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인줄 알았다. 시점이 바뀌고서야 이 책이 소설이란 걸 알았는데 알고 나서도 마치 잔잔한 자기 고백적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나갔다.
유미코의 이사날 슬쩍 스쳐간 인연은 어느 날 발코니에서 서로를 알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고 요리를 좋아하는 유미코는 카에데를 자주 집으로 부르게 되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첫 이야기에서 유미코의 들려준 그간의 사정은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에게서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자주 집을 비우고 밤을 지내고 들어오는 일이 많아지면서 생긴 갈등과 별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이다. 딸은 사춘기로 보이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이때부터 남편의 태도가 달라지고 전가족과의 사이에서 생긴일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다가 결국 이혼을 결심하는데 쿨한 시어머니가별거부터 해보라는 식으로 말하고는 집값이 저렴한 자신이 사는 동네의 낡은 아파트 메종 드 리버라를 소개해준다.
절임 회사에 서무직으로 근무하는 카에데는 눈에 띄는 미인에 옷차림도 과감한 직장녀지만 사장이 추근덕거려 고민하다가 다른 직원에게 상담을 하니 구럴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등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직원들의 눈초리를 받고 결국 사퇴하기에 이른다. 요리나 가사일에는 관심이 없고 화장과 몸을 가꾸는 데에는 신경을 쓰는 카에테는 남친도 가볍게 사귀며 자주 바뀌는 편이지만 얼마 전 쿨하게 헤어진 전남친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이 있었음을 깨닫는 중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중년이 된 두 여성이 서로를 처음 만났늘 때 첫인상은 그들이 얼마나 다른 지를 말해준다. 카에테가 본 유미코의 첫인상이다.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 뭐랄까, 전혀 기름지지 않아 놀랐다. 선선했다. 교태나 애교가 전혀 담기지 않았다. 어쩌면 본인은 담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도가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발성법이었다. 무뚝뚝하거나 붙임성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눈썹을 대충 그렸다. ‘귀찮지만 화장을 하는 게 규칙이니까 일단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의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화장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막 옆집 주민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화장은 대충하지만 뜨게질과 수예 같은 걸 즐기는 따스하고 가정적인 유미코. 그건 이해가 가겠는데 목소리에 교태나 애교가 없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럼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디폴트로 교태와 애교가 장착되어 있다는 건지. 일본 사람들의 여성상은 알다가도 모르겠ㅋ. 반면 유미코의 눈에 카에데의 차림새는 와 대단하다 정도였고 이후 함께 밥을 먹으면서 카에데에 대해 처음 느낀 감정은 호감으로 결론이 나는 분위기다.
"생김새가 단정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위압감이 느껴지는데, 사귀어보니 이른바 고양잇과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간섭하려는 사람에게서는 필사적으로 멀어지려고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하면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느 날 유미코의 별거 중인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과 그 이후 고향 섬에서 본 사람이 있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전해듣고 싱숭생숭하던 중 카에데는 전회장에게서 매우 심각한 스토킹의 위협을 받아 경찰을 부르는 소동까지 생기고 둘은 직장을 구하는 일과 편의점 알바 등을 전전하며 중년 여성이 겪는 소외감과 사회적 편견, 젊은이들의 불편한 시선 등을 경험한다.
특히 재취업이 잘 안돼서 슈퍼마켓의 시식코너에서 젊은 여성과 알바를 하며 겪은 일은 중년 여성 아줌마라 불리는 사회적 계층에 대한 젊은층의 곱지 않은 시선이 가차없이 드러나지만 카에테의 거침없는 대응으로 속시원히 처리하는 대목이 성격 묘사를 생생하게 잘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솜털 하나하나도 빛나 보이는 젊은 여성이 씩씩하게 시식 알바를 잘 하는 걸 보고 귀엽다는 생각에 쉬는 시간에 칭찬을 해주었는데 뒤늦게 들어온 슈퍼마켓 정직원이 카에테가 화장실을 간 틈을 타 이 젊은 여성에게 괜찮냐고 정말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야?라고 다그치듯 묻고 있었다. 젊은 여성은 극구 아니라고 부인하는데도 말이다.
"괴롭히는 주체가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오타의 바짝 긴장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얘, 괜찮니?”
초콜릿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 사람이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어?”
이렇게 가볍게 비꼬며 넘어가려고 했더니 나름 변명이라고 내놓는 말이 더 가관이다.
‘아줌마’는 다른 아줌마 아르바이트들을 말하는 거고요, 시마다 씨는 아직 젊으니까 당연히 괜찮지요.”
아줌마를 폄하하는 이같은 말에 카에테는 뚜껑이 열린다.
이봐요, ‘아줌마’란 단순히 ‘중년기 이후의 여성에 대한 호칭, 혹은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야. 사전을 보면 그렇게 적혀 있어요. ‘아줌마’를 욕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쪽이 젊지 않은 여자에게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잖아요? 댁이 사귈 여자를 고를 때라면 그래도 상관없어요. 나이든 뭐든 댁이 좋아하는 기준에 따라 마음껏 고르라고요. 하지만 나는 여기에 그냥 일하러 왔어요. 당신의 그 웃기지도 않은 성적 대상 선정의 장에 나를 멋대로 끌어들여서는 아줌마는 안 되겠다느니 뭐니 생각한다면 불쾌하고 불편하니까 그만둘래요? ‘당연히 괜찮지요’라니 뭐가 괜찮아? 그게 위로랍시고 하는 소리야?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래, 나는 아직 괜찮구나. 다행이다’ 하고 기뻐할 줄 알았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당신이 나를 감정해줄 필요 없어요.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정하니까.”
카에테와 유미코는 함께 유미코의 남편을 찾으러 섬으로 떠난다. 민박을 정해 함께 지내면서 둘은 서로가 나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자잘한 일에서부터 깨닫기 시작한다. 지저분한 식당에서 누님 누님하는 남성과 만나 바로 호텔로 향하는 카에테가 못마땅한 유미코 게다가 그 남자에게 지갑까지 털리고 무인여관에서 나오지 못해 데리러 가야 한 유미코. 이런 해프닝에 전남편의 그림자는 섬 어딘가에서 어른거리는데..
잔잔하며 유쾌한 면도 있는 소설로 일상을 소재로 하다 보니 다소 가볍다는 느낌도 들지만 중년 여성들의 우정과 삶이 짊어져야 하는 고독의 무게와 우정이 감내해야 하는 서로에 대한 차이. 전통적 사회의 눈으로 바라보눈 핵가족 시대의 홀로 선 여성들. 거기에 여성에 대한 가차없는 편견과 기울어진 성도덕 등을 잔잔하고 친숙한 기법으로 잘 버무려놓았다. 중편 정도의 길이로 1~2시간이면 읽을 양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잘읽힌다. 가독성은 만점. 개성도 만점. 일본체 닭살 대화 없음. 인물만 수십여명에 돌고래 침팬치등 여러 종류의 외계종족들이 등장하는 복잡한 SF 읽다가 팽개치고 이거 읽으니 힐링된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