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토마스만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주말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를 읽었다. 두 권 모두 중편인데 전자책으로 모아놓은 세트에 겹치기로 중복되어 있어서 골라가며 읽을 수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가 들어 있는 전자책은 세 권으로, 문예출판사 버전은 <토니오 크뢰거>를 표제작으로 환멸, 트리스탄, 마리오와 미술사까지 총 네 개의 중단편이 들어있다. 열린책들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표제작으로 글라디우스 다이(1902) , 트리스탄(1902) , 굶주리는 사람들(1902), 토니오 크뢰거(1902), 신동(1903), 힘든 시간(1905), 벨중족의 혈통(190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12) 까지 총 7편이 들어있고, 마지막으로 현대문학에서 나온 토마스만 단편집 여기서 언급된 것 외에도 키 작은 프리데만 씨 행복에의 의지,타락,죽음,어릿광대,루이센,토비아스 민더니켈이 더 들어있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판으로 민음사의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등도 더 언급할 수 있겠다.




























전부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았는데 못읽고 있다가 우연히 펼쳤더니 중단편 분량이라 얼씨구나 시작했는데, 처음 읽는 토마스만이 뭔가 잡아끄는 듯한 힘이 있어서 <<토니어 크뢰거>>를 읽게 되었다. 특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경우는 더 그런데, 두 권 읽고 작가의 전체를 언급하는 건 무리지만 두 권 모두 스토리상으로만 보면 사실 크게 드라마틱한 내용이 없이, 주인공의 자아가 일으키는 내적 상태와 욕망 갈등을 산문처럼 쓰고 있다. 따라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있는 작가일 거 같다. 내 경우, 먼저 읽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계기로 그 작가의 뭘 읽어도 후회 않을 안심 작가 목록 같은 거에 자동 등록되었다. 헤르만 헤세같이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을 받는 독일 작가도 많은데, 토마스만을 굳이 찾아읽게 되지 않았는데, 그 유명한 헤세도 제대로 읽은 게 없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사실 단편 소설에서 어떤 대단한 스토리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100~200페이지 분량의 중편이라서, 나름 지지부진하게나마 스토리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결정적인 반전이 사소한 외부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의 내면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스토리는 사건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가 만들어낸다. 읽기에 집중이 요구되었다. 100년전의 소설 답게 내면 묘사는 세세한 풍경 묘사와 더불어 이루어진다. 주인공은 주로 여행중이어서 이국적 혹은 낯익거나 낯선 풍경에 내면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은 토니오 크뢰거의 14세 16세 그리고 중년의 현재로 시간이 쪼개져있으며 단막단막 쪼개져서 공간적 배경이 바뀐다. 14세 소년 남국적 외모와 이름을 지닌 토니오 크뢰거는 금발 소년 한스를 사랑한다. 16세가 되어 사랑한 잉게는  이성이지만 한센과 마찬가지로 금발에 강철빛 눈을 가진 밝은 세계, 의심하고 고뇌하지 않는 밝고 쾌활한 세계에 속해있다.크뢰거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뮌헨은 남국이라 부르고, 유럽의 북쪽과 출생에서 소년 시절까지를 보낸 덴마크와의 국경 도시 루벡을 북국이라 부른다. 이러한 분류는 애초에 토니오 크뢰거가 사랑했던 대상들이 푸른눈과 금발, 이성, 쾌활함, 상냥함 등으로 자주 분류되는 북쪽을 상징하고 남쪽은 그 반대의 대척점으로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속에서는 소시민과 예술인을 남북으로 가르고, 이성과 열정, 쾌활함과 우울함, 냉정함과 광기 등의 속성을 심는다.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우울한 예술가 성향의 크뢰거지만 정작 자신이 동경하는 것은 금발머리의 환하고 순정적이고 착한(?)것들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어쩌면 자신이 반쪽은 혈통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속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을 그 세계와는 정반대쪽의 세계에 속해있으며, 이제 그 속된 세계가 자신이 속한 예술가의 세계에서는  때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안다. 


시를 쓰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크뢰거는 조금씩 그 대단하던 가문이 쇠락하면서, 자신 역시 그 금발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가서 이제 대단한 문학가가 되어 있고, 그의 옆에는 연인인지 지인인지 애매한 관계의 예술가가 예술가들의 세계와 대화의 창이 되고 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고뇌하고, 슬퍼하고, 밝은 빛 아래 어둠을 보고, 그것들을 열정적으로 표현해 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정신적 고통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제 그 세계에서 인정받았고, 자신이 미운오리새끼처럼 따돌려졌던 푸른눈의 금발의 세계는 이제 잊어도 좋을 위치에 있다.  그럴까.


이제 그는 여행을 하고 있다. 자신이 떠나온 도시로 돌아가 자신을 알아보지만 존재감이 없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그 도시 주변을 맴돌며,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자신이 떠나온 도시에서 이방인이 되어 경찰에 잡혀갈 뻔한 상황을 떫떠름하게 여기며 발트해를 여행하는 크뢰거는 고독하다. 예술가에게 고독은 형벌처럼 따라다니는 짐일까. 어쩌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도 그렇고, 아마도 내게 이 두 소설이 꽂힌 이유는 작가의 고독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화에서조차 그는 소통하다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침잠해서 스스로의 생각을 꺼내놓는 창구일 뿐이다.  대화에서조차 타인의 말은 자신의 말에 대한 반향으로 읽힌다. 그는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북쪽 출신의 대단한 가문의 아버지와 그가 닮았다고 생각하는 남쪽 출신의 정렬적인 예술가 기질의 어머니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간다.


처음에 열린책들 버전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나와 문예버전을 읽다가 또다시 이해가 안되는 버전이 나와 현대문학 버전을 읽다가 했는데, 비교를 해보려고 퍼온 부분을 공개해보면 이렇다. (스포에 해당되기 때문에 주의).


내 그대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스스로 반문했다. 천만에,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스, 너도 그렇거니와 금발의 잉게, 너 역시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일을 했던 것은 그대들 두 사람 때문이었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을 때, 너희들이 그 속에 섞여 있지나 않을까 남 몰래 돌아보곤 했다……. 네가 네 집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약속했던 《돈 카를로스》를 이제 읽어보았느냐? 한스 한젠, 그런..고독해서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시(詩)와 우울을 넋 잃고 들여다보다 네 맑은 눈을 흐리거나 꿈꾸듯 몽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해서 너와 같이 자라나고, 마음을 곧고 즐겁게, 그리고 순박하고, 올바르고, 질서 있게, 신(神)과 사람들과도 뜻이 맞아 순진하고 행복한 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리고 잉게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한스 한젠 너 같은 아들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인식(認識)과 창조의 고뇌라는 저주를 벗어나 복된 평범함 속에 살고, 사랑하고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문예출판사 /강두식역)


내가 너희를 잊었을까? 토니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한스 너도, 금발의 잉게 너도! 내가 글을 쓴 것도 너희 때문이야. 나는 박수갈채를 받을 때면 혹시 너희가 그 자리에 없는지 몰래 주위를 살피곤 했어. 한스, 예전에 너희 집 정원 문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돈 카를로스』를 읽었어? 읽지 마외로워 눈물을 흘리는 왕이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어? 너는 시와 멜랑콜리 같은 것으로 눈을 흐리고, 바보 같은 꿈에 젖을 필요가 없어…… 아, 너처럼 되고 싶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너처럼 자라고 싶어. 너처럼 성실하고 쾌활하고 소박하고 올바르고, 질서에 잘 따르고, 신이나 세상과도 아무 갈등이 없고, 천진하고 행복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잉게 너를 아내로 맞아 한스 너 같은 아들을 낳고 싶어. 인식의 저주와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나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랑하고 찬양하고 싶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세계문학 단편선 03 토마스 만> (토마스 만 저, 박종대 역) 중에서

내가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물어보았다. 아니, 한 번도 없었어! 한스, 너도, 금발의 잉에, 너도 결코 잊은 적이 없었어! 그래, 내가 작품을 쓴 것은 바로 너희들 때문이었지. 그리고 박수갈채를 받을 때면 몰래 주위를 둘러보면서 너희들이 있는지 살펴보았지…. 한스 한젠, 넌 너의 정원 문에서 나에게 약속했던 대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읽지 말거라! 네가 그걸 읽기를 더는 요구하지 않아.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니? 넌 우울한 시 따위를 보느라 밝은 눈을 흐리게 하거나 어리석은 꿈에 잠겨서는 안 돼…. 너처럼 되고 싶구나! 다시 한 번 시작하여, 너처럼 올바르고 즐거우며 소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신과 세상 사람들의 동의를 받으며 자라나, 아무런 악의가 없고 행복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구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열린책들 세계문학 020> (홍성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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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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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오는 영화는 21 세기에 만든 영화로, 당대의 화려한 귀족적 모습을 세련되게 구현하였지만, 책에서 보는 내용과 차이가 종종 보인다. 톨스토이는 깨알같은 심리묘사, 일상의 묘사가 특징인데 가령 사람들이 추운 겨울 무명옷을 입고 어쩌구 하는 부분을 보면 영화가 표현한 극도의 화려한 의복들은 (물론 고증이 충분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시각적 만족을 위해 화려함과 세련됨에 방점을 찍었을 뿐이고, 현재의 기준으로 봤을 때 당대의 낙후된 모습들을 캡쳐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생각해낸 것이 아마도 러시아에서 자국민들이 즐겨 보았을 영화다. 유튜브에서 러시아어로 안나 카레리나(Анна карелина) 라고 타입해 보았더니 2시간짜리 영화가 나온다. 러시아어로 말하기에 오 여기 있었군 했는데, 알고보니 1997년 소피 마르소가 연기했던 버전에 러시아어 더빙을 입힌 것으로, 아마도 러시아어 더빙이고 저작권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아 유튜브에 버젓이 풀버전이 돌아다니는 듯했다. 말을 못알아먹어 어렵긴 했지만 중요한 몇몇 키티에게 레빈이 구혼하는 장면, 기차에서 안나와 브론스키가 만나는 장면, 연회장에서 춤추는 장면 등등을 골라 보았는데 역시 키이라 나이틀리 버전에서 안나의 욕망을 제대로 표현했다. 특히 연회 씬은 압권이다. 엉뚱한 얘기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는데, 그래서 결론은 러시아 버전의 안나 카레리나를 드디어 찾아서, 보다가 잠들었다는 얘기. 컬러판이기는 하지만 굉장히 오래되었고, 의복이니, 건물의 인테리어니 기타 등등 21세기 버전에 비하면 훨씬 궁색해 보인다. 아마도 그런 모습이 더 실제 당대와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1편 읽은지 한참 되었는데 오랜 만에 계속 읽으려고 2편을 들었는데 어디까지 읽었는지 몰라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다시 읽으면 읽었다는 건 알겠는데, 다시 읽기 전에는 뭔 내용이었더라로 가서. 떠올려보기로. 안나의 오빠 스티바는 가정교사랑 바람피다가 걸려서 호되게 와이프 에게 질책을 당하고 아내를 설득시킬 목적으로 안나를 부른다. 기차에서 브론스키 백작의 엄마와 동행하게 된 안나는 역에서 브론스키 백작을 만나고 서로 안면을 트는데, 안나는 이 때까지만 해도 브론스키 백작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한편 레빈이라는 작가 톨스토이의 페르소나로 생각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키티에게 구혼을 했다가 퇴자를 맞는다.  키티는 안나의 시누의 새언니인 돌리의 동생으로 브론스키 백작이 구혼할거라고 기대하고 성대한 파티를 준비했다가, 브론스키가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고 안나와 질펀하게 춤을 추는 장면을 보고 실망을 하여 병이 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안나의 심경 변화다. 역에서 만났을 때부터 브론스키는 계속해서 안나에게 노골적으로 치근덕 거리는데, 안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그를 피하고 외면하지만 연회장에서는 그와 함께 정열적으로 춤을 추면서 그를 갈구한다. 자신을 마중나온 남편을 보고, 저이의 귀는 왜 저모양으로 생겼을까라고 생각하는 안나는, 결국 이전까지의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브론스키가 나타나는 사교계에 얼굴을 들이밀고, 조금씩 조금씩 대담하게 브론스키와의 러브어페으를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아이를 임신하기에까지 이르는데,(이 부분이 영화랑 헷갈려서 1편에서 이미 임신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의 외도를 눈치챈 남편이 주의를 주우도 막무가내의 태도로 일관하던 그녀는 결국 경마장에서 브론스키가 탄 말이 낙마하는 사건을 계기로 외도 사실을 온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부, 아름다운 부인, 냉철한 이성, 안가진 거 빼놓고 모든 걸 다 가진 안나의 남편 카레린 역시 부인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모든 것이 안나의 외도를 반증하고 그녀가 그를 더이상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 뻔한 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추궁하거나 외도사실을 캐거나 함으로서 자신의 자존심을 더럽힐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경마장에서의 사건으로 이미 안나가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했음에도,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내기 힘들다. 이런 카레린의 태도는 관대하다기 보다는, 득과 실을 따져서 유리한 것을 취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인식된다. 


한편 키티에게 퇴짜를 맞은 레빈은 귀족임에도 시골의 영지에서 육체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며 살아가는데, 키티가 브론스키와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고, 상처받아 몸이 아프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더 자존심을 건드린다. 2편은 스티바의 아내 돌리가 아이들과 함께 레빈이 사는 시골 자신의 영지 근처로 여름을 지내러 왔다가, 레빈을 만나고, 동생 키티가 이곳에 합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다. 


소피 마르소 주연,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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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응구기 와 시응오가 노벨상을 받지 않을까 싶었다. 이시오구가 본인은 일본사람이라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데, 아무리 하루키에게 노벨상을 주고 싶다고 해도, 혹은 주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일본 태생일 뿐 일본문학으로서 받은 상은 아니라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작년에도 영어 문화권에서 받았고, 그 전에도 계속 서구 문화권에서 받았으니까. 그런 하루키와 시응오가 확률이 높았던 모양인데, 다시 영어문화권으로 상을 주려니 노벨상위원회 쪽에서도 캥기는 게 있는지, 이시구로의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 운운하는데, 문화는 생김새나 유전자에서 생기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세계에 많은 나라들이 있고,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유독 개별적인 나라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보다는 아프리카라고 통칭한다. 아프리카 내에서 개별 나라들의 정체성보다는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큰 덩어리의 정체성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검은 피부, 가난한 땅, 핍박받고 굶주린 사람들과 부패한 정권, 부패한 정권과 분노한 반군이 총과 칼을 들고 서로를 겨누는 대신, 약자를 겨누는 황폐한 땅. 이런 것들 말고 한 개인이 세계에 대한 어떤 이해를 바탕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꾸려나가고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피의 꽃잎들》은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글자가 빽빽한 탓도 있었겠지만, 이질적 문화에 대한 생경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등장 인물도 많고 시점이 명확하지 않아서 지금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예정된 비극적 결말을 유예시키고 싶었던 거다.


제국의 지배가 물러난 후, 식민 청산을 하는 일은 공산주의 혁명을 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듯하다. 어느 나라가 제대로 그 일을 해냈을 지 궁금하다. 제국의 그늘 아래 제국의 문화와 제도를 동경하고, 그들에게서 교육받아 제국을 위해 민초들의 피를 빨았던 특권층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물러난 후, 스스로 괴물이 된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친일을 한 덕에 모은 재산과 권력을 대대 손손 유전자가 멀겋게 희석되도록 물려받고 아직까지도 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배 권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케냐의 외진 마을 일모로그의 한 매음굴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의 희생자들은 추이, 키메리아, 음지고 세 사람이고 이들은 생게타 양조회사의 이사들이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무니라, 압둘라, 완자, 카레가가 지목되고 감옥에 갇힌다. 이 일의 시작은 아주 오래 전 초등학교 교장 무니라가 황폐하고 버려진 땅 일모로그에 처음으로 도착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모로그의 가난, 가뭄에 시달리고 인구마저 줄어든 황무지, 내일이면 그가 잔인함을 경험했던 도시로 달아나 신기루에 불과한 미래에 직면하게 될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을 바라보는 것은 더 심오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그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었다.  221


오래 전 선조들은 그 풍요로운 땅에서 평화롭게 지냈으리라. 하지만 식민주의 시대에, 전쟁으로, 개발로, 숲을 빼앗기고 남자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 전쟁에서 죽거나 도시 빈민이 되고, 노인과 아이들만 남은 일모로그에 처음 무니라가 학교를 운영하러 도착하자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지 못한다. 이런 버려진 땅에 젊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무니라는 그곳에 정착한다. 한 명의 학생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학생수가 늘어가고, 잘린 다리 대신 나귀 한 마리를 데리고 마을에 새로 정착하여 가게 겸 술집을 차린 압둘라, 그리고 고등학교 때 임신을 하고 집을 떠나 전전하다가 다시 되돌아온 완자와 친해지고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카레가는 무니라와 같은 학교를 나온 후배로 나중에 무니라를 찾아왔다가 이들과 알게 되고, 나중에 학교 선생으로 채용된다.


소설의 전개는 방화사건의 범인을 찾아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방화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 네 사람들은 각자 말하지 못한, 혹은 말할 수 없는 아픈 사연들을 지니고 있다. 대지주이면서 목사인 아버지를 가진 무니라는, 주류에 편입하지 못하고 주변부에서만 머무는 햄릿형 인간이다. 그들의 과거가 드러날 수록 그들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즉 일모로그의 발전과 교육을 위해 헌신하던 무니라가 그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후배 교사인 카라가와의 관계가 전에 반정부 투쟁을 하던 중 자신의 가족이 귀에 잘리고 누이 동생이 죽는 일과 관계가 있음이 드러나고, 이로 인해 분노한 무니라는 자신의 추천으로 고용한 카라가를 해고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러한 관계는 완자와 압둘라가 죽은 세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욱 극명한 갈등을 내포한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개인과 개인이 서로 얽히고 섥힌 관계는 우리 사회가 개인의 행동과 관계 들의 상호 조합 속에 서로 뒤엉켜 일으키는 커다란 작용들임을 시사한다. 지식인들의 투쟁과 상호 갈등과 또 절망과 변절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는 사회 대로 국가라는 제도 내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들여온 개발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더이상 원주민의 사회 그대로 정체되어 있을 수 없는 현실은 수탈과 약탈을 감내해야 했던 원주민들의 삶에 미세하게 현미경의 초점을 맞춤으로서만이 가능하다.


처음에 완자가, 무니라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는 임신이 하고 싶다. 결혼도 안한 처녀가 왜 임신이 하고 싶을까. 어떻게 먹여 살리려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러한 사고방식들은 후에 완자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알고 보면 무니라의 시점에서 쓰여지긴 했지만 완자가 주인공인 듯하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그녀는 자신을 위협하는 어떤 불의에도 승복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 그리고 마침내 전통주인 생게타 주조로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사업을 확장하여 지역 사회에서 성공을 거머쥔다. 평범한 소설이었다면, 혹은 헐리우드식 영화였다면 여기서 끝났어야 옳다.


가뭄 때문에 거지떼들 처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도시로 가면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장면은 아름답고 슬프지만 한편으로 코믹하기까지 한 로드 무비같다.  그 모든 것을 겪어내고, 어떤 고비와 시련에서도 강인한 의지와 실천 그리고 혜안 있는 선택으로 성공을 가졌을 때,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자본이 몰아치고, 넓직한 신작로가 생기고, 비가 곡식을 열매맺어 풍성한 먹거리들이 넘쳐날 때, 이제까지 가뭄에 사람들이 죽어가도 처내버려두었던 일모로그를 그 땅을 그들의 생게타를 자본이라는 괴물이 그 소박한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있도록 그대로 둘 리가 없다.


마지막 완자의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는 더이상 질문의 가치가 없다. 그녀는 살아남아야 했고, 보고 배운대로 살아남아야 했을 뿐이다. 인간의 대지에서 솟아나는 새싹들이 열매를 맺고 곡식을 거두어 먹고, 이웃이 서로 아플 때, 배고플 때 돕고 살아가는 그 단순한 삶이, 어떤 이유로든, 가뭄이든, 산업화든, 신식민주의든, 자본주의적 약탈이든,  더 이상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이 남아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다시 우리에게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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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책의 조르주 심농 메그레 시리즈가 중도 하차를 했었는데, 최근 새 책이 몇권 나왔다.











탐정 소설은 중학교 때, 마아도 축약본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홈즈와 괴도 루팡 시리즈를 탐독한 이후로 큰 관심사가 아니었는데, 쟁겨뒀다가 어디 여행하거나 심심할 때 가볍게 읽을 작정으로 구입했다. 미드 중에서 CSI 같은 심각한 드라마는 챙겨보는 편이 아닌데 한때 몽크 시리즈의 광팬이었음을 돌이켜볼 때, 탐정 소설이 긴 시리즈를 갖게 되면 캐릭터가 점점 강화되고 인간적인 면들이 많이 부각될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몽크를 볼 때, 사건의 해결보다는 캐릭터의 짠한 우스꽝스러움과 그 깊숙히 숨겨진 마음의 상처와 결벅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동안 주변의 경멸과  또 따스함 같은 것들을 함께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매우 인간적인 모습에 찡했었는데, 메그레 반장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 전체의 개수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103편이나 된다고 하니, 인간적인 매력을 기대할만했다.열린책들에서 전체 19권을 번역출간했으며 이를 다 묶어 세트로 판매하는데, 이북 대여 기간은 끝났지만 구매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저렴한 편이다(59,000원)



시리즈의 첫번째  책 1권이 <수상한 라트비아인>인데, 지난 달에 오며 가며 읽었고, 2권 <갈레씨 홀로 죽다>도 바로 읽었다. 시리즈의 처음이라 메그래의 캐릭터에 그리 두드러진 특징은 크게 인상적이 않았다. 큰 덩치에 말이 많지 않은 편이고 범인을 향한 어떤 인간적인 면모가 문득문득 보인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특히, 전개가 일반 탐정 소설과는 달리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찾는 게 아니라, 범인을 먼저 발견하고 사건을 찾아나간다. 사건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국제 마약범 정도로 인터폴의 연락을 받고 한 남자를 쫓아다니는데, 실시간 사진 전송 수단이 없던 당시 범인의 인상착의에 대한 묘사가 신기했다. 얼굴의 모든 근육과 뼈 같은 부분에 붙은 의학적 명칭을 하나한 나열하며 인상착의를 묘사한다. 예를 들어 눈동자 색 무슨색과 무슨색, 눈과 눈 사이 거리 몇센티, 이런 식으로 엄청 긴 묘사인데 이걸 보고 또 사람을 찾아낸다. 어쨌든 찾아낸 사람은 어떤 범죄 조직에 가담하고 있지만, 그사람을 잡아들일만한 단서도 없는 상태에서, 범인이 탄 열차에서 똑같이 생겼지만 다른 사람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메그레 반장은 범인이 묵은 호텔과 살해된 사람이 살고 있던 시골 마을을 오가면서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이 여러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을 관찰하는데, 범인은 이미 메그레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메그레 역시 그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서로 쫓고 쫓기면서 심리전을 펼치는데, 독자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사람(한 명은 술주정꾼 루저, 한명은 성공한 사업가)이 실은 한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천천히 드러나는 진실은 쌍둥이 형제의 비밀을 품고 있고, 살인의 이유와 목적은 사랑과 배반과 상처와 음모를 가지고 있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름에 길게 어디 휴가 같은데 가서 아무 생각없이 읽기에 잘 어울리는 책이라 하겠다. 한 권 읽고 나면 바로 다음 권도 궁금해져서 펼쳐보게 되는 시리즈이다.


갈레씨 홀로 죽다 역시 수사물이지만, 갈레씨의 죽음에 대한 쓸쓸한 미스터리를 찾아내는 과정을 다룬다. 한 사람의 가장과, 그 가장이 홀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벌인 모든 행동들은 현대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이 씁쓸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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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초보 2017-10-2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누구 보라는 글은 아니겠지만 스포가 좀 있네요 ^^

CREBBP 2017-10-25 11: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중요한 스포라서 나름 처리를(까만색으로 지웠) 했습니다 ^^
 

자신의 글이 도용당하고 있다는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자신의 글이 도용당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됩니다. 어렵죠. 직접 찾으려면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코앞에 다가왔는지 이미 시작되었는지 하는 마당에, 그런 걸 일일히 검색어 뒤져서 하면 안되겠죠.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구글링 해봤는데 3초만에 이런 사이트가 나오더군요. 


https://www.copykiller.com/ 


사이트 이름은 <표절 검사의 기준 카피킬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로 논문 표절 등을 검사하는 것 같지만, 자료 종류에 감상문이라고 있습니다. 제 글 중 하나를 해봤더니 표절률이 무려 100%가 나오더군요. 알고보니 같은 글을 티스토리 블로그와 책방 블로그에 동시에 올린 걸 찾아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올리면 PDF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다음과 같이 보여줍니다. 기본으로 표절을 구분하는 기준은 6어절 이상이 일치하거나 한 개의 문장 이상이 일치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기준은 변경할 수 있습니다. 아래 예는 36%로 나온 경우입니다.  표절 여부를 테스트하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는데,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처리해본 것입니다. 리뷰를 도용하는 경우는 제 추측에, 아마도 리뷰 이벤트로 받은 책을 읽지 않고 숙제하듯 때울 때 쓰는 편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이 커지지 않기를 원하는 원작자님분들이 대개 조용히 삭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계속 다른 글을 퍼서 베낍니다. 저라면 먼저 신고부터 하고, 그 다음에 처리 경과를 공개적으로 대대적으로 게시했을 것 같습니다. 



아 진짜 남의 글 추려 베끼려면 뭐하려고 책을 읽습니까? 안읽는다고요? 그럼 왜 받습니까?  기증 도서 스탬프 찍히기 떔에 책 받아서 팔지도 못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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