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염려증 친구 셋이 자 우리 도시에서 이러지 말고 복잡한 생각을 다 떨쳐버릴 수 있게 신선한 공기를 쐬고 오자, 이렇게 얘기가 나와 여러 의견 교환 끝에 템즈강 보트 투어를 나선다. 노젓는 작은 배에 온갖 먹을것과 필수품을 싣고 런던 외곽 킹스턴에서 출발, 일주일동안 템즈강 하류를 거슬러 노를 상류쪽인 옥스포드까지가 갔다가 강을 타고 내려오는 게 그들의 여정이다.


이렇게 보면 여행기 같은데 소설이다. 이 책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후에 후속편 격인 <자전거 탄 세 남자>도 썼다. 형식상 소설이지만 서두에 '진실'을 기반하고 있다고 말한다. 기행문적인 요소도 있어서 <빌브라이슨의 영국 산책>의 유머 코드와도 살짝 통하는 데가 있다. 영국의 코메디언 미스터빈을 생각하면 그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떠오르는데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이 연출하는 바보짓이 딱 그과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하는 비주얼이 감칠맛나는 언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것만 다르다. 게다가 셋이 함께 하는 여행이라 티격태격 슬랩스틱 코메디가 트리플로 펼쳐진다. 


문장이 단순한데도 웃기고 재밌어서 번역을 어떻게 한걸까 궁금, 나중에 알고 보니 예전에 영어판을 구매해둔 게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문판은 엄청 짧고,  19세기에 쓰여진 티도 별로 안날만큼 단순하고 쉬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 번역문은 원작의 미묘한 표현을 티끌 하나 버리지 않고 자연스럽고 웃음 터지게 번역했다. 


그런데 이 책 제목 전에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우주복 있음 출장가능>에서다.  소년 주인공 킵이 아빠에게 우주에 가고 싶다고 조를 때 아빠가 읽고 있던 책이 바로 이 책인데,  킵의 아빠는 하도 많이 읽어 달달 외울 것 같은 그 책에 손가락을 끼우며 무심하게 대답한다. '가려무나'. 이 무심함 속의 유머는 <여왕마저도>, <화재감시원 > 등을 쓴 코니 월리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모양이어서,  이 책의 부제 <-개는 말할것도 없고>와 동일 제목의 소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쓴 후 서문에 이 책을 처음 알게 해 준 작가 하인리히에게 감사의 헌가를 바친다. (코니 월니스의 개는..은 오랫동안 절판이었는데 아작에서 7월중 출간된다는 훈훈하고 따끈한 소식, 아작 좋아)


이렇게 세 개의 소설이 연결되는데 아직 코니 월리스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다. 부제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번역본 제목에서는 빠져있지만, 이들 세 남자의 여행에 동행한 몽모렌시라는 개의 소설 내에서의 위치도 함께 말해준다. 독특한 캐릭터와 웃김의 비중이 세 남자 못자 않게 크고 사랑스럽다. 아 그런데 세 남자도 모두 사랑스럽다. 어찌 그리 게으르고 천진하며 뻔뻔한지.


여행기의 형식 내에서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주인공이나 등장 인물(개 포함)이 겪거나 들은 스토리텔링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잘잘한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시키지만, 그들이 들른 곳에 대한 장소가 배경을 이루고 있기에 여행기로서 그들이 들르는 곳 역시 관심이 간다. 코메다 코드에는 과장이 기본으로 깔려 있지만 흐르는 강물을 따라 뱃놀이를 즐기던 19세기 런던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으며 들르는 마을의 지나간 모습들 역시 알 수 없는 향수를 자극한다. 















킵의 아빠처럼 외울만큼 계속 읽는 사람도 이해갈 것 같다. 사실 슬픈 이야기라 하더라도 화자의 말솜씨에 따라 웃길 수 있고,  같은 상황을 묘사하더라도 이라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웃음의 정도차가 큰데 아 진짜 이 책은 최고다.


그런데 전자책에는 보트 얘기 말고 귀신 얘기 한 편이 더 들어 있는데 그건 별로다. 딱 내 수준과 스타일에 맞는 저

자여서, 제롬 K w제롬의 책은 밑고 보겠다. <자전거타는 세 남자>는 같은 출판사의 번역본이 있는데, 그것도 재미있지만, 웃기는 정도가 이 책이 더 웃기다. <자전거탄 세 남자>는 조금 더 유럽 풍물에 대한 내용이 많다.  <게으름에 대한 생각> 그것도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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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탄 배가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때는 17세기 효종 때다. 그들 일행 30여명은 잠시 제주에서 지내다가 왕명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 왕의 근위병이 되어 비교적 잘 대우받았지만 탈출을 시도하다가 걸려서 몇개의 그룹으로 뿔뿔이 흩어져 지방 각지로 보내진다. 지방에 있는 동안은 부임하는 지방 목사에 따라 처우가 달라졌으메 때로 풍족하고 자유가 있을 때도 때로 먹고 살기 힘들 때도 있었다.


하멜의 기록은 독자의 흥미를 겨냥한 여행 모험담이 아니었다.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생활 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간 다음에 쓴 기록으로, 글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고 서문은 설명하고 있다. 즉 돈을 받으려고 업무 일지를 착실하게 쓴 것이 이렇게 기록 유산으로 남은 거다. 당대 조선의 문화, 관습, 사회, 정치, 제도와 민심에 이르기까지,  꽁꽁 채워 걸었던 조선의 민낯을 전혀 다른 문화 체계를 가진 한 이방인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낯선 이국땅, 듣도 보도 못한 문화 속에 13년간 억류되어 살아가면서 온갖 감정의 폭풍을 경험했겠으나 그가 느낀 감정과 사색은 글 속에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보고 듣고 겪은 사실에만 집중한 기록이기에, 전통 문화보다는 서구의 문화와 사상에 더 가까이 있는 현재의 우리가 당대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어느 정도는 닮았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책은 서해 문집의 <하멜 표류기>으로 2003년에 번역 출간된 책이다. 이 책 이전에도 두 권의 하멜 표류기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오긴 했지만 원전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기보다는 황당한 흥미 위주의 모험담이 덧붙여진 것이어서 하멜 원전과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 책은 후에 네덜란드 학자가 식민지 관계 기록을 조사하다가 하멜일지와 조선국에 관한 기술 정본을 발견하여 출간한 것(후틴크 판, 1920년)의 영역본을 중역한 것으로 중역이기는 하지만 하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충실한 기록이며 원전과 영역 과정에서 달아놓은 주석을 함께 실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국외 연구를 엿볼 수 있었다. 따라서 서문은 당대 영역본을 현대 영역본으로 옮긴 영어 역자와 한국어 역자 두 사람의 서문이 모두 실렸다.

이 책 출간 이후, 2017년 보물창고에서 출간된 하멜 표류기가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후틴크 판의 영역본을 중역하였고, 목차를 보면 <서해문집> 판과 큰 차이가 없다. 삽입된 삽화와 자료 그림과 주석, 그리고 번역에서 오는 차이가 주된 차이일 것 같다. 


하멜일지의 원제목은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이다. 겔파르트는 제주도고 당시 그들은 제주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지는 시간순으로 주요 사건을 비교적 정확하게 그들에게는 발음조차 낯설었을 조선의 각종 지명 인명 제도와 문화 관습명 등을 포함해 날짜별로 기술하고 있다. 언어가 전혀 안통했을테지만 당시 이미 벨테브레라는 자가 수십년전 표류되어 조선에서 관직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고 조선에서 오래 살아서 처음에는 모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으나 곧 자유롭게 네델란드어를 구사하면서 조선의 정책상 일단 들어오게 되면 나갈 수 없음을 설명하고 이후에도 통역을 맡아 초기 의사소통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


생활사는 주로 그들 이방인에게 크게 주의를 끈 부분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어 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금했던 부분의 생싱한 기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여행 중 숙식에 대한 기록과 주석은 이렇다.

‘여행자들이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여관은 없다. 여행자들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비록 양반 집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이든지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자기가 먹을 만큼의 쌀을 내놓는다. 그러면 집주인은 즉시 이것으로 밥을 지어 반찬과 같이 나그네를 대접한다. 여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나그네들을 맞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군소리도 없다.? - 
(미주 : 환대는 가장 신성한 의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식사시간 중에 방문한 사람에게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중대한 수치일 것이다. 여기저기 먼 곳을 걸식하며 다니는 가난한 사람은 채비를 잘 할 필요가 없다. 밤이 되면 그는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호텔 |주막|에 가지 않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는데 어떤 집이든지 행랑채는 방문하는 사람이 묵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그 집에서 그날 밤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그리피스, 조선, 1905, 288~289).’


13년이라면 참으로 긴 세월이다. 식습관을 비롯하여 의식주 모두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낯설고 불편했을 터이지만 탈출을 원했던 이유로는 자유에의 갈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주된 것이다. 한편 조선인의 입장에서 거의 처음보는 낯선 사람들인데 사회 자체가 폐쇄되어 있어 거주 이전의 자유 등은 일반인에게도 제한이 있었던 당시 먹을 것과 입을 것 살 곳 등을 마련해주고 탈출 시도 전까지는 왕과도 알현하고 관직에까지 오르는 등 비교적 좋은 대우를 했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노예로 팔아먹었거나 잘 해봐야 누가 거들떠도 안봤을텐데 말이다.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원전에 가까운 이 책을 알게 되어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다. 서해문집의 같은 시리즈, <열하일기>를 읽을 때는 사상가가 쓴 책이라 연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생각으로 걸러진 18세기 중국을 통해 당대 조선 학자의 사고관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반대로 17세기 동쪽 끝 나라에 대해 새카맣게 무지한 외국인의 시각으로 보는 조선은 또다른 역사의 한 뷰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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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가장 다양한 번역본이 나와있는 책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햄릿이 아닐까 싶다. 알라딘 상품 페이지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햄릿을 키워드로 뒤져보니 상품 검색 창에 12페이지에 걸쳐 상품 목록이 나열된다. 한 페이지당 20권씩 나열되니까 240 종이 있다는 소리다. 그 중 일부는 어린이 책, 일부는 이북과 같은 판본, 그리고 특별판 개정판 등등이 있으니 절반 정도로잘라도 여전히 많다. 가장 많이 팔린 건 1998년 민음사 (최종철 옮김) 판이다. 아마도 개정판을 안찍고 예전 가격을 유지한 덕에 검색창의 왕좌를 지킬 수 있던 거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열책과 펭귄클래식과 문예판 세 가지가 이북으로 있는데, 이것 저것 바꿔가며 읽었다. 일장일단이 있어서였다. 


햄릿의 고뇌는 선왕의 모습으로 나타난유령의 말을 얼마나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로 시작된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의 작품인데, 한맺힌 유령이 나타나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사연을 얘기하는 방식은 마치 동양 괴담 같은 걸 연상시킨다. 햄릿과 당대의 사람들은 유령의 존재를 어떤 형태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선왕이 죽은 후  태자가 왕위를 계승받는 우리 상식과 달리 애초에 햄릿이 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을 받지 못했는지는 설명도 암시도 없는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더욱이 그는 어린 아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햄릿의 불만은 숙부의 왕위 계승보다, 정절을 지키지 않는 어머니를 향한다. 그는 왕위에는 관심도 없다. 햄릿의 여성 혐오의 화살은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무 죄도 관습도 어기지 않은 자신의 약혼녀에게까지 향한다. 더욱이 포틴브라스를 무찌른 선왕과 비교할 때 현재 왕인 숙부는 간교하고 무능한 인간이다.   ‘돼지우리 같은 침대’에서 혐오스러운 인간과 침실에서 함께 뒹굴며, ‘나의 생쥐’라는 호칭을 쓰는 두 사람의 관계는 햄릿에게 추악할 뿐이다. 


DNA의 절반을 공유한 어머니는 숙부보다 훨씬 가까운 핏줄이고 혐오의 끝엔 사랑이 맞닿아 있는 애증의 대상이다. 게다가 선왕(의 유령)은 자신을 배반하고 숙부와 바로 결혼해버린 왕비의 안위를 햄릿에게 부탁한다. 유령이 되어서조차 우뚝 선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 숙부와 놀아난 어머니.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햄릿형 인간이라 하면 흔히 우유부단형으로 말해지곤 하지만, 그가 아버지의 복수를 유예하는 까닭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왕좌를 차지한 숙부가 유령이 말한대로  진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 확신이 없다. 아니 꿈에서, 혹은 환상 속에서, 죽은 부모가 나타나 누가 죽였다 라고 말하면 바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나. 살아있는 생생한 증거가 아니라 유령의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하나, 시대가 중세면 유령이 해결사인가.


햄릿은 신중했을 뿐이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미친척을 하고 돌아다니며 고도의 심리전술로 왕의 의중을 떠보지만, 이로 인해 사건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가족 관계의 비극적 복수전에 끌어들이고, 계략과 반전의 드라마틱한 전개를 제공한다. 왕은 햄릿이 미쳤는지, 미친척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의 미친짓에는 왕의 범죄 행위를 알고 있는듯한 암시가 곳곳에 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왕은 햄릿의 친구이자 신하들을 스파이처럼 활용하지만, 생각과 의심이 많은 햄릿이 그들에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그가 택한 방법은 선왕의 살해사건과 유사한 세네카의 연극을 왕과 왕비 앞에서 공연함으로써, 그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 대사를 듣고 나서도 그의 숨은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 경우, 우리가 보았던 것은 악마였을 것이고, 내 상상력이 불칸의 모루처럼 흉악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유있는 탐색전이 끝나고 결정적으로 숙부의 살인이 확인된 후에도 그는 실행하지 못한다. 공연을 계기로 선왕 살해의 심증을 굳힌 햄릿의 우유부단함이 가장 크게 부각되는 곳이 바로 왕이 공연을 박차고 나가 홀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복수의 기회를 날려 보내는 장면이다.


참회하고 있을 때 죽이면 천국에 갈 터이니 진정한 복수가 아니라는 이유는 참으로 기독교다운 발상이다. 선왕은 참회할 기회도 없이 죽어 지옥을 떠도는데, 선왕을 죽인 숙부를 이 순간 죽이면 그는 천국에 갈거라는 그의 숙고는 결정장애적 경향을 충분히 보여준다. 게다가 그 순간은 선왕의 시해 사건을 확인하는 격정적인 순간이며, 다시 또 왕이 홀로 있을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유령의 말을 듣고 어차피 복수하기로 작정했다면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이 맞으며, 다른 기회가 오더라도 다른 백가지 이유를 들어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왕을 죽이는 건 반역이다. 그가 어떤 계략으로 왕이 되었건 현재 왕이기에 왕을 죽이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르며 성공한다고 해도 바로 반역죄로 체포될 것이다. 그러니 적자인 자신이 왕좌를 차지하도록 제대로 복수하려면 세를 규합하여 제대로 역모를 꾸며야 한다. 허나 계속 느끼는 거지만 햄릿은 자기 자신이 왕이 되는 일 자체에 별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햄릿과 신하와 하인들을 시켜 햄릿의 의중을 떠보고 급기야는 햄릿마저 살해하고자 하는 왕의 계략이 서로 엇갈리며 엉뚱한 사람이 죽어 나가고 피해자가 속출한다. 오필리아는 햄릿이 사랑한 여인이지만 왕의 고문 플로니어스의 딸로 햄릿에게는 적의 딸이나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왕의 고문 폴로니우스의 가족이다. 첫번째로 희생된 사람은 폴로니우스로,  왕이 햄릿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왕비에게 햄릿을 잘 구슬려 심문(?)하게 하고, 그들의 대화를 몰래 지켜보다가 변을 당한다. 폴로니우스의 가족은 권력의 최전방에서 햄릿의 집안 식구들 못지않게 깊게 연루되어 개인개인이 모두 다른 이유로 죽게 되는 비극의 가문이다.


오필리어에게 구애했던 햄릿은 유령을 만난 후 오필리어에게 인간적인 모욕을 넘어서는 대우를 하는데, 그 전에 오필리어는 먼저 가족들에게 햄릿이 바람둥이이며, 너에 대한 모든 찬사와 달콤한 사랑의 말들은 모두 거짓이니 그의 모든 구애를 물리치라고 조언한다. 딱한 오필리어는 구애를 물리칠 기회도 별로 없이, 미처버린(미친척 한) 햄릿에게 먼저 가혹한 말폭탄을 받는다.  햄릿의 혹독하고 매정한 말로 끝난 실연의 슬픔을 이겨내기도 힘든 오필리아에게 아버지는 햄릿에게 살해되고, 햄릿은 영국으로 떠나게 된 사실 등등이 모두 겹쳐 드디어 미친듯 행동하다가 결국 익사하는데, 오필리어의 죽음은 자살과 사고의 중간 정도에 있다. 실수로 떨어졌으나, 그대로 드레스를 날개처럼 펼치고 물 위에 누워 그 옷들  물을 흡수해 빨려들어갈 때까지 그대로 있었으니 말이다.


폴로니우스 살해 사건으로 인해 추이는 다시 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여론을 잠재울 구실로 왕은 햄릿의 신하이자 친구였던 두 사람에게 친서를 들려 햄릿을 영국으로 파견(?)한다. 하지만 그들이 영국 왕에게 도착해 보일 친서는 그 자리에서 햄릿의 목을 치라는 내용이다. 햄릿의 치밀함은, 그들이 지닌 친서를 바꿔치기함으로써, 또다시 두 사람의 희생을 낳고, 홀로 살아 돌아온 햄릿과 마주친 왕은 이번엔 해외에서 돌아온 폴로니우스의 아들 레어테스를 이용하여 햄릿을 죽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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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0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0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운 시골 기숙 학교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해맑은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시작되는 작품에는 곱고 하얀 쌀밥에 섞여 씹힌 작은 모래 알갱이처럼 돌출된 단어 하나가 서걱서걱 굴러다닌다.  뭔가 옳지 않아 하는 기운이다. 어린 소년 소녀들의 우정과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거기엔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섬뜩한, 비운이 감돈다. 아이들은 학대되거나 방치되지 않고 비교적 잘 돌보아지고 있는 듯하고, 창작 활동, 그룹 놀이, 교환회 같은 사건에 조명을 비춘다. 평화 속에 감도는 이상한 긴장감은 첫째, 아이들이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이유, 둘째,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과정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훗날 이미 이들 일부가 죽었음이 혹은 죽음의 단계에 있음이 간간히 나레이션을 통해 전달되면서 현재 시점에서 생존해 있는 캐시의 미래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현재 어떤 단계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일화들 각각은 기억이 반추하는 의미,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어떤 식으로 자각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 전체 이야기가 집중하는 것은 절친이었던 캐시와 루스 토미 사이의 사랑과 질투와 우정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지점의 섬세한 세부 사항들이다. 그러한 일화 속에서는 과거에서는 미래였을 현재를 암시하는 징조와 상징들이 드문 드문 포진해있지만, 이 해맑은 기숙 학교의 아이들의 관심사는 사소한 인간 관계와 선생님들이 강조하는 작품활동 뿐이다. 헤일셤이라는 장소는 그곳에서 성장한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장 후에 만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도 동경할만한 이상적인 장소다. 목구멍에 가시처럼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이질적 단어 '기증'은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그 맥락이 형체를 갖추면서 점차 이야기의 중심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기증은 여전히 아이들, 성인 직전 아이들, 혹은 성인이 되었을 때조차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애가 타고 끓어오르는 건 오히려 이야기 바깥에 있는 독자다. 아이들의 존재 목적, 정해진 운명의 정체가 온전한 문장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면서, 설마 아닐거야 아닐거야 하던 의심이 확증으로 변하는 순간의 충격은 책을 끝까지 다 읽을때까지, 그 이후까지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생명체를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거나 비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서사는 SF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익숙한 소재다. 그것이 클론이라 해도 전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 서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것이 독자를 경악케 한다.  기증이라는 행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독자에게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매우 낯선 방식이다. 이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앞에서 분노하거나 저항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심하게 좌절이라도 해야 할 문제를 제쳐두고 사소한 우정 속에 켜켜히 박힌 갈등과 사소한 기억과 의도를 따지며 관계적 감정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몰두하기에 충격과 걱정과 염려는 독자 스스로의 몫이다. 클론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인간의 장기 제공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무심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용서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정해진 삶 밖으로 나가는 걸 차단하는 것은 어떤 물리적 수단도 아닌 의식이었다. 은폐와 암시가 시간을 타고 천천히 성인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의식의 강,  만들어진 운명을 천명으로 알고 안주하는 인간의 태만, 무기력. 어찌보면 인간은 태곳적부터 사피엔스의 마음이 생겨났을 때부터 이렇게 시스템의 권력이라는 맹목적 허구에 길들여지는 것이 전체 종의 생존을 유리하게 했을테지만, 다시 보자. 이게 인간이다. 가축을 잔인하게 취급하고, 동물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끼리 노예를 부렸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노동자를 기계취급한 주체가 바로 인간이다. 

루시 선생님이 분노했던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장도 마담도, 아이들의 성장을 담당한 개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엄격한 교장은 아이들의 복지와 보호를 위해 교장으로서 할 일을 했고, 제롬비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스하게 보살폈고, 마담은 마담대로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작은 손으로 그리고, 만든 '최고'의 작품들을 수집했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아이들을 최상의 상태로 돌보고 성장시키지만, 아이들의 존재 목적에 기생하는 제도권의 수혜자들이며, 아이들과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루시가 분노하는 것은 반인륜적 클론 농장과 기증  제도가 아니라, 헛된 꿈을 꾸도록 내버려두는 아이들의 성장 환경이다. 캐시가 '네버 랫미 고' 노래를 들으며 베개를 끌어안고  아기를 떠나보내는 엄마를 상상할 때, 아이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마담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은 성교 교육 시간에 자신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실에 공허감을 느낀다. 캐시가 베개를 끌어안고 아이를 달래듯 '네버 렛미 고' 속에 투영하는 건 떠나가는 아기이며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아기이다. 태어날 수 없는 아기 대신 베개를 안고, 존재할 수 없는 아기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노래를 투영하는 모습은 슬픔 넘어의 것이며, 이룰 수 없는 막연한 동경일 뿐이다. 하지만 마담의 시선에 비친 캐시는 성장하자 마자 곧 생을 떠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이며 자신이 가진 한 차원 더 깊은 세계에서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마담은 불붙은 막대 끝을 기어가는 개미를 보듯 캐시를 보며 한없는 연민에 눈물 흘리지만, 캐시는 인간의 자신(들)을 향한 그러한 슬픈 감정을 잘 모른다. 훗날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라도 그들은 기증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의 실체를 잘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DNA 원본을 향한 호기심과 동경같은 것의 차원을 결코 넘지 못한다.

클론들의 삶은 정해져있다. 그들의 비극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이 장기제공용이라는 비인륜적 의무를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간병인으로서 거울처럼 똑같은 무수히 많은 죽음, 죽음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기증을 체험하는 방식으로 집행이 유예된다는 사실에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즉 성장이 끝나면 바로 기증을 마친 클론들의 간병인이 되어 자신이 겪게 될 똑같은 고통과 세네번까지의 반복적인 죽음을 수년간 수없이 많이 겪은 후에야 비로서 기증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간병인으로서의 생활을  비참하게 이어가며 겨우 5년의 삶을 유예한 루스는 기증의 시간이 다가오자 '기쁘게' 받아들인다. 11년을 간병한 주인공 캐시 역시 다르지 않다. 기증의 끝은 당연히 죽음이고 기증이 유예되는 유일한 길은 간병인의 연장이지만 간병 자체가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제 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위로하는 일이다.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간병 기간을 축소시켜 어서 임무를 끝내고 '할 일'을 완수하는 일보다,  삶이 곧 죽음이지만 그래도 헤일셤의 친구들이 대부분 생을 마친 후에도 아직 '살아'있으니 죽음을 통한 삶의 유예는 위안인가.

처음으로 근원자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토록 직접적으로 빈번하게 언급하고 앞뒤 맥락이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음에도 나는 아이들과 똑같은 상태가 되어, '듣고 있으나 듣지 않았'다. 듣고 있지 않았으나 말해졌고, 말해진 모든 것들은 어느새 아이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빈틈을 차곡차곡 채웠다. 루시 선생님은 그들이 '듣기'를 원했다. 어쩌면 생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를 바랐을 지도. 자신들의 운명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온전한 문장으로 듣는 그 충격적 순간조차 그들의 관심은 사실보다 루시 선생님의 감정에 더 집중한다.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았으나, 듣지 않음은 듣지 않은 시간 속에서 무심히 쌓여온 정보들이 마침내 한데 모아져 정확하게 삶과 운명을 정의해도 격정적 상태를 겪지 않고 순응하게 한다. 헛된 희망들은 여전히 꺼진 재 속에 남아 있는 불씨처럼 잔재해있지만, 자신의 근원자(원본)에 대한 막연한 환상, 사랑의 증명이라는 동화같은 전설이 유예해줄 것이란 순박한 믿음과 추론 뿐이다. 

이미 결정된 미래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대신 기증을 위해 흠없이 깨끗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매일 강조되는 학교에서 은연중에 기증이라는 단어가 의식의 어두운 장막 속에서 거주하며 조금씩 수용을 향해 움직였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작품을 걷어가던 외부인 마담의 주저하듯 두려워하던 시선이 어쩌면 외부인들과의 벽을 더욱 단단히 높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장을 마치고 외부로 나가 외부인의 세계에 살면서도 그들은 외부인들로부터 고립되어 있긴 마찬가지였으므로 무엇이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의 실체를 체험해보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 누군가는 기증을 위해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우주적 질서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캐시가 헤일셤 시절의 우정과 코티지 시절의 갈등과 이별 그리고 간병과 기증의 시간동안 다시 만나 엇갈린 사랑과 교활한 우정을 반추하고 용서받는 시간들로 채워나가고, 기증이라는 몇번의 수술과 고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죽음이 퇴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 지도 모른다. 내일 죽어도 오늘은 순간에 충실해야 할 세부적 감정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헤일셤은 특별한 곳이다. 이 특별한 헤일셤이라는 장소가 또다른 이슈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클론들이 오로지 목적만을 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사육된 것과 달리 헤일셤의 아이들은 당대 인권운동 바람을 맞은 곳이었다. 마치 오늘날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 복지가 이슈화되는 것처럼, 장기제공자들에게도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권리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던 시절, 많은 단체의 후원과 사회적 지원으로 인해 헤일셤이 설립되어, 그곳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교사들의 보살핌과 교육과 창작활동을 보장받은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성장을 마친 후에도 헤일셤 출신이라는 명패는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본인들에게도 자랑스레 추억할 수 있는 의미있는 장소가 된다. 캐시가 기증자들을 헤일셤의 지인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헤일셤 출신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며, 진실된 사랑이 증명되면 집행이 3년간 유예된다는 소문도 헤일셤 출신만 해당된다. 인간과 클론 사이의 계급관계 특권의식이 다시 클론들 사이에서 출신지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비련의 주인공들의 운명을 미리 알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그들이 헛된 꿈을 꾸는 걸 막지 않고, 들었으되 듣지 못하게 은폐하는 것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토록 '많이 들었으되 듣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아이에게 루시처럼, 화를 내며 너희는 청소부도 트럭 운전사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고 여길 나가자마자 곧 간병인이 되고, 기증을 하여 짧은 생을 마치리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그토록 잔인하게 전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는 에밀리 교장선생님처럼 해맑게 키우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훗날 봇물 터지듯 쏟아냈던 에밀리 교장의 말의 홍수가 헤일셤의 설립과 폐쇄, 아이들에게 작품활동이 격려되고 마담이 가져가는 작품과 갤러리에 대한 진실을 밝혀주는 듯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에밀리가 하는 말의 이면에는 단 한가지 주목할만한 진실이 있다. 헤일셤이 아니었다면 동물처럼 사육되었을 너희를 위해 우린 최선을 다했다고,  별 관심도 없어보이는 캐시와 토미에게 쏟아붓는 그 모든 고백의 핵심은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도 예술도 창작열도 그 무엇도 집행 연기의 사유가 될 수 없다. 기증 이외의 삶은 3년이 아니라 단 3개월도 주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며, 그 누구의 어떤 권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성역이다.  이미 세번의 기증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에서 엉터리 소문들과 더 엉터리 추론으로 만들어낸 겨우 3년이 되었을 희망. 평생을 사랑했지만, 교활한 우정이 찢어놓은 그 사랑 앞에서 남겨진 조각 시간들,  예리하게 가슴을 베이는 것처럼 아프다. 그들의 죄는 들었으되 듣지 못한 것이다.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는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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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환상 문학의 원형 혹은 영감이 된 북유럽 신화는 아쉽게도 그 원전이 많지 않다. 문제는 많지 않은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문제다. 많은 고대 신화를 가진 문화권에서 글이 존재했던 것과 달리, 북유럽 '야만인'들에게 문자는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들어왔기에, 기독교 이전 문화에서 흥하던 버전의 신화는 사라져 없어졌고, 기독교의 영향하에서 묘하게 섞인 형태로 신화가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에다이야기>의 역자가 한 말인데, 유일신 사상이 뿌리박힌 후라면, 신화 내에서 신들 사이의 권력 질서도 유일신 사상의 영향을 받아 대표신의 존재 같은 것들이 부각되는 형태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을테니, 더 오래전에 노래하던 스토리들과 현재까지 남아있거나 발견된 스토리 사이의 갭을 가늠하지도 상상할 수도 없음이 아쉬울 수밖에. 


책이 흔치 않았던 당시 신화는 스컬리(음유 시인)들이 노래로 전해졌을 거다. 닐 게이몬의 서문에서 그나마 산문의 형태로 신화가 남아있을 수 있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음유 시인들이 신들을 지칭할 때 토르니, 로키니, 오딘이니 하는 형태로,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서구식으로?)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직접 이름으로 신들을 지칭하지 않았으며, 은유 환유 직유 등등의 비유로 그들을 지칭하였으므로 지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려면 설명이 필요했다. 그 은유의 뜻을 풀어 남겼기에 신화의 기록이 남겨졌다는 이러한 설명은 내가 을유의 <에다 이야기> 2부 스컬리들의  시창작법을 읽으면서 이게 뭐야 했던 의문을 해소시켜주었다. 물론 2부를 읽으면서 대략 닐게이몬과 비슷한 이유를 짐작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산문에다가 왜 그토록 불친절한 것인지가 더 이해가 된다. <에다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직접 소비되는 문학이 아니라 말하자면 도매점 같은 걸로 스컬리들이 신화를 노래하기 위해 알고 있어야 하는 신화의 뼈대 핵심 이야기만을 써놓은 것이라는 추측이다. 전체 문맥을 이해하면 거기서 흥미로운 부분을 가져와 각색을 하고 운율을 맞춰 운문으로 노래하고 전달되고 아마도 그렇게 이야기는 시대와 시대의 경계를 통과해갔을 것이다. 


이 책에 있는 스토리들은 내가 북유럽 신화 책으로는 유일하게 읽었지만 또 국내 유이무이한 원전인 <에다 이야기>에 나와 있는 스토리들이 대부분이다. <에다이야기>에 뼈대만 앙상하게 붙어 있어 이야기의 완전한 모습, 그러니까 그 이야기속의 인물들의 생각과 의도와 성격 등등을 상상하기 어려운 반면, 닐 게이몬의 북유럽 신화는 그 뼈대에 이야기꾼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각 인물과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볼 수 있다. 왜 안그렇겠는가. 한 두 장에 쓰여진 이야기가 수십장의 페이지로 변모했는데, 프로페셔널한 작가인 닐 게이먼은 남아있는 운문 신화들과 해석, 사전들을 꼼꼼히 조사해서 찢겨져 나가거나, 공백인 상태였던 이야기와 행위의 틈새를 채웠고, 그 사이사이를 환상작가적 상상력으로 꼼꼼히 메웠다. 


얼마 전개봉한 토르 라그나로크를 관람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질좋은 리뷰를 통해 얻어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로키와 토르 사이가 티격태격 코믹하게 그려졌으며 제작사의 온갖 히어로들이 떼로 나와 플레이를 펼치는 면에서 어벤져스의 아류적 성격도 띤다고 하는데, 이런 요소들이 지나치게 상업적 추구에서 나온 결과로 재미 말고는 볼 게 없다는 의견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그렇다면 오히려 북유럽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다. 어벤저스처럼 북유럽 신화는 수많은 영웅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이야기를 갖는다. 다른 신화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유일신 이전의 신들은 각 지역 혹은 문화에 따라 숭배하는 신들이 각기 다르고, 그들의 지역 혹은 문화의 흥망성쇠가 어떤 운명을 따라갔는지에 따라 신들의 스토리와 운명도 달리한다. 그러니까 (이건 내 상상) 많은 종족들이 흡수 통합되어 하나의 나라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믿던 수많은 신들 역시 하나의 스토리로 통합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패배자가 믿던 신들의 원형은 악한 신으로 굳어졌을 거야. 그러니 수많은 히어로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능력을 과시한다면, 토르 한 명에게만 집중되었던 이전 버전의 토르 영화보다 더욱 북유럽 신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토르와 로키 둘이 티격태격 코미디같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닐 게이먼의 북유럽 해석과 맥을 같이 한다. 로키는 굉장히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스(에세르) 신족 출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스 신들과 같이 살며 운명을 공유하는 경제공동체로 보이는데, 교활하고 못된 로키를 아스 신들과 어울리는 이유는 아스 신들이 뭐 멍청하거나(아스 신들이 멍청한 건 맞지만, 로키랑 같이 사는 이유가 멍청해서는 아니다) 혹은 자비로와서 갈 데 없는 로키를 맡아주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로키에겐 다른 신들이 갖지 못한 두 가지 능력이 있는데, 하나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능력이고 또 하나는 문제해결능력이다. 이러한 로키의 특별한 능력이 신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진가를 발휘해 위기에서 해결해주기에 못된 짓을 업으로 일삼아도 참고 살아가는 한편, 신들 역시 피장파장 못되기는 마찬가지여서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못된 걸로 갈라설 필요가 없다. 로키의 탁월한 교활함이 멍청한 신들의 교활함을 보조하는 식이다.  필요할 땐 돕고, 심심할 땐 괴롭히고 못되게 구는 게 로키의 특성. 


신들이 노한 건 로키가 자신들보다 더 못돼서가 아니라 더 못되고 더 교활 혹은 영리해서다. 그는 하고 싶은 건 다 한다. 아름다운 금발인 토르의 아내에게서 머리카락을 뽑아가 하루 아침에 대머리를 만들어버리는 자잘한 일에서부터, 결국 자신을 유배시키고 라그나로크로 이어지게 하는 재앙들의 원인이 되는 발드르 살해 교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발드르가 불길한 꿈을 꾸자, 신들은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에게서 그를 해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데, 너무나 여리고 사소해서 그런 다짐을 받지 않았던 겨우살이와 발드르의 눈먼 형제를 조정해 결국 그를 죽게 하기에 이른 로키가 헬에 가서 부탁부탁해 그를 살려내려는 노력에도 방해를 하고 다니자 결국 신들의 대노를 사서, 피해 도망다니다가 잡혀서 독뱀에게 죽게 되다가 그가 낳은 세 괴물들과 거인들이 힘을 합쳐 신과 대결하는 게 라그나로크이며, 그 대재앙에 해와 달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파괴된다.


북유럽신화에서 신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혹은 생명체들은 저마다 자신의 필살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 필살기들은 도구와 관련이 있다. 누구든 때려잡을 수 있는 토르의 망치 묠니르가 대표적인 예인데, 인류 아니 신류 대멸망의 날인 라그나로크때에야 그 중요성을 알게 되지만 아내를 얻기 위해 버린 프레이르의 명검, 세상의 온갖 정보를 전해주는 오딘의 까마귀 후딘, 죽은자들의 군대, 종이처럼 접었다가 펼칠 수 있는 무풍 지대에서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강력한 배 스키드블라드니르, 낮에는 마차를 끌고, 저녁엔 잡아먹히지만 다음날 되살아나는 토르의 염소 두 마리 등등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고, 이들 물건들에는 각각 이름이 붙어있다. 토르의 망치가 말해주듯, 이 물건들은 개인의 능력을 결정하는 중요 수단이며, 이들의 활약은 이야기 전개에 주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신화에서 라그나로크는 미래의 이야기이다. 신화 자체가 과거에 쓰여진 이야기이므로, 과거에서 말한 미래가 이미 지난 미래를 말하는 것인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먼 미래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성경이나, 혹은 예언가들이 말하는 최후 심판 혹은 지구 멸망 같은 것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이며 아무도 알 수 없기에 결론은 해석과 믿음의 몫임에 비해, 라그나로크의 결말은 이미 지나간 일처럼 결정되어 있다. 이 결말은 모든 것이 파괴되는 재앙적 결말이지만, 낡은 것들이 모조리 파괴되어 사라진 후,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결말이고, 시작과 끝이 순환하는 세계관을 보여준다. 저자 닐 게이먼도 이 질문을 하고 있다. 라그나로크는 과거의 일인가 미래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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