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다가 아들놈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해킹해서 들이다보게 되었는데, 아들놈 보다 한 술 더 뜨는 놈이 아들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리포트 숙제였던 모양인데, 지는 열심히 책 뒤지고 해서 겨우 마치고 게임하려고 하는데 내가알기로 베프쯤 되는 절친이 자기 어디 놀러가 있는 중이라고 자기 리포트도 써달라고 하는거다. 사내놈들 문자가 길지가 않아서 짧은 말들(주로 욕)로 이어지는 대화를 보고 내가 흐뭇했던게, 싫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던 거다. 그런 부탁 거절하기 위해 구구절절 설명하려면 카톡에 얼마나 길게 써야 할텐데. 싫어 이 OO놈아. 니가 해. 거절하는 사람이 세게 나가니까 부탁하는 사람은 점점 더 구질구질해진다. 인터넷 뒤져서 아무거나 베껴서 이름 만 써서 내달라는 거다. 미친놈 싫어 / 말이 되는 부탁을 해야 들어주지/ 뭐 이런 류의 문자. 하도 끈덕지게 부탁한 터라 나중에 어떡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연한 거절을 심리적 갈등 없이 당연하게 처리하는 아들의 단호함이 좋았다.

MT(요즘도 그런 걸 가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데 가면 주로 일하는 사람은 일하고 노는 사람은 놀고 그러는데, 나는 궂이 나서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하는 사람한테는 같이 놀자 하고 노는 사람들한테 같이 일하자 하고 부추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해야 되는 걸로 아는 사람이 있다. 남들 다 놀아도 혼자서 뒤치닥거리 하고, 뭔가를 나르고 가져오고 해주고... 그런 사람들은 원래 내 어릴적 할머니처럼 누구한테 뭔가를 해주는게 즐겁고 좋아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책을 읽다보니 거절하지 못해서, 싫은데도 하는 모양이다.  같이 즐기고 노는데 필요한 일이 산더미같으면 누군가가 일을 해야 하는데, 그 누군가는 모두가 되어야지 한두사람이 되어선 안되지 않나. 그런데 그 한두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 사람들이라면 읽어볼만한 책이 있다. 이하늘의 [거절 잘하는 법]이다.거절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조언하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절을 해야 할 다양한 상황들의 단막 스토리들이 굉장히 공감이 갔다.

여기 나와 있는 사례들 중 화나게 답답한 ‘착한 사람들‘ 얘기가 많다. 아들에게 리포트 부탁했던 것과 비슷한 거가 언니의 친구 자기 소개서까지 써주는 일, 지인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다가 혼자서 모든 일을 덤탱이 쓰고 다 해야 했던 일. 대리 출석도 아니고 대리 수강 부탁에 응한 일, 사내에서 도시락 싸기 귀찮다는 선배의 도시락을 매일 도맡아서 싸싸야 하고, 게다가 한술 더떠 반찬투정까지 받아야 하는 사람, 시도때도 없이 10만원씩 빌려가서 갚지도 않는 친구, 직장녀가 된 딸에게 시시콜콜 잔소리하는 엄마까지 세상은 넓고 마음 약한 남을 이용해먹는 인간군상의 종류들도 참으로 많다. 

이쯤 되면 거절하는 수업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이용해먹는 사람들은 양심의 크기가 크고 작은 범죄에도 가담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사람으로 경찰에서 주시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나는 거절을 잘 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절을 할 때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부탁을 받을 일이 있고, 그러다보니 나름 몇 가지 규칙이 생겼다. 

1.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지인이 있다면, 먹튀해도 안아까울 만큼의 돈을, 먹튀해도 안아까울 만큼 아끼는 사람에게 준다는 느낌으로 빌려준다. 그래도 소식 없이 안갚으면 섭섭하더라. 

2. 물건을 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거절할 건 거절하고, 살건 사고.

- 암OO류의 피라미드는 꼭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사지만, 회원가입이니 한 번만 가보자는 둥의 행동에는 확실하고 명확하게 절대로 두 번 다시 물어보지 않게 의사표현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나는 피라미드가 그닥 윤리적인 상행위라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하면 물러설 것 같지만 이 말은 반론의 여지를 주고 수년간 갈고 닦은 마케팅 기법의 대화에 말려들게 할 가능성이 생기게 한다. 그냥 간단히 ‘나는 절대로 거기 안가, 나를 거기 끌어들일 목적으로 만나는 거 아니라면 그 얘기 그만해‘  섭섭해하던지 말던지. 이렇게 해서 일단 관련 대화를 끝내는 게 상책이다. 종교나 피라미드성 판매는 모두 마찬가지.

- 피라미드성이 아닌데 물건을 파는 경우 : 생계와 관련이 있고, 값비싼 사치품이 아니라면 가깝던 멀던 대개는 사는 편이다. 이건 내 엄마에게 배운 작은 생활의 지혜라고나 할까. 그닥 제품이 좋아보이지도 않는 값비싼 방판 화장품을 쓰기에, 내가 딴거 사다주까 했더니, 아니라고 이거 파는 이가 동창인데, 남편 죽고 혼자서 이거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내가 단골인데 계속 사줘야한다고.. 1천원 2천원은 그렇게 아끼면서 남을 생각하는 이런 작은 세심함은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상조 서비스를 판매하는 친구가 있다면 들어준다고 손해볼 거 1도 없다.

3. 다른 부탁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거절할 기회도 없다. 
아마도 무례한 부탁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거절당할 염려가 없는 앞에서 언급한 종류의 ‘착한‘ 사람들에게 주로 무례한 부탁을 하는 거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 뭘 부탁하는 걸 못봤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내가 누구에게 부탁을 거의 안하는 거 같다. 대학때 절친이 노트정리를 예술적으로 해서 과의 대표 노트가 되어 돌아다녔는데, 절친임에도 불구하고, 그거 빌려달라는 말이 안나오더라. 아니 빌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친구 정리 기술은 시험 막판에 더욱 효과를 발휘해서, 시험앞두고 머리속에 정리되어 있는 걸, 도표를 그려가며 막판에 자기 정리겸 애들한테 정리해주면 그걸 5분내에 암기해서 시험 잘보는 단골들도 꽤 있었는데, 나는 졸며 흘겨쓴 노트보다는 그냥 책보고 혼자 공부했다. 당연히 점수도 별로. 

현대 사회에서 나는 부탁도 거절도 별로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사회 시스템이 누이좋고 매부좋고 그렇게 부탁으로 돌아가는 게 달갑지 않다. 조금 더 나가면 청탁이 되고, 학연 지연 특혜가 되고 그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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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1-08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 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