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 / 문학동네 / 1918년 7월
이안 매큐언 소설을 몇 권 읽은 독자로서, 그의 소설에 대한 인상은 대체적으로, 심각한 역사적 혹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도 블랙 유머가 지적으로 세련되게 잘 배합한다는 것이다. 태아의 입장에서 햄릿을 재해석한 <넛셀>이 어두운 인간의 이면을 매우 영국스러운 유머로 풍자했다면, <솔라>는 작품은 조금은 더 소리내서 웃을 수 있는 코믹스러운 요소가 구석구석 배어있다.
피부가 노출되면 바로 얼어버리는 북극의 살인적 한파 속에서 스노우 모빌로 신속해 이동해야 하는 상황의 한 복판에서도 신체는 그 환경과는 무관하게 한결같이 자신의 순환 사이클을 멈추지 못해서 생기는 비극이 피식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그 잠시의 빙벽 배설 행위로 인해 저온에 노출된 신체의 중요한 일부가 스노우 모빌에 돌아와 달릴 때, 똑 떨어져 겹겹으로 입은 바지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마비된 감각으로 느끼는 장면이 그 중 압권이다.
작품이 주는 웃김이 순수한 웃음이 아닌 씁쓸한 웃음을 주는 이유는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에 있다. 지구를 구한다면서 자기 집 관리나 자기 자신 조차 건사하지 못해, 사랑하지도 않고 결혼 생각도 없는 여자 집으로 향하는 남자.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환경보호자들이 당연히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이나 단체에서 지원하는 행사인 북극의 환경 파괴 현장 체험에 가서 목격하는 탈의실의 카오스. 신체적 약점(뚱보에 늙고, 키작고 등등)과는 반대로 지속적으로 꼬이는 온갖 타입의 여자들.
다섯번의 이혼과 그로 인한 노벨상에 걸맞지 않은 빈털털이 신세의 이 남자에게 여자가 꼬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화자가 굳이 독자에게 드러내지 않은 숨은 매력이 있을 수는 있겠다. 재치있는 말주변이라든가 혹은 (겉으로 보이는) 세심한 심적 배려라든가. 가장 설득력있는 추측은 끊임없이 여성을 쫓고 평가하고 작업거는 평소 한결같은 태도에 20년 전에 성취한 노벨상의 권위가 합쳐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외모지상주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권위가 상쇄시키는 이성적 인간적 불호감은 철통같다. 노벨상은 말할 것도 없고, 돈과 권력, 스타적 유명세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이안 매큐언이 워낙 유명해서 노벨상 수상자인가 했더니 부커상을 몇 번 받았지만, 노벨상은 아닌 듯하다(어쩐지 읽는 재미가 있다 했더니ㅋ). 하지만, <솔라>에 등장하는 마이클 비어드는 노벨상 수상자이고, 젊은 시절 넝쿨째 굴러들어온 이 노벨상이라는 세계적 권위의 수상이력은 그의 나머지 삶의 대부분의 부분을 떠받치고 부양하는 토양이 된다.
20년동안 아무 연구도 진척된 것 없이, 이런 저런 위원회의 장과 같은 한직을 쫓아다니고 대중강연과 연설로 먹고 사는 동안에도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일차원적 탐욕이다. 돈, 여자, 술, 음식, 권력. 노벨상 수상자가, 자신의 외도로 인해 이미 관계가 끝난 네번째 부인의 외도를 질투해, 그를 살인자로 조작하고, (자신 때문에) 죽은 연구원이 남긴 연구 내용을 가로채, 지구를 구한다는 명분과 유명세, 돈을 탐닉하는 모습은 악한자의 전형이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읽다보면, 그런 그가 그렇게 악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만연된 사회의 부조리에 익숙해지면, 그런 일은 특히 큰 권위를 등에 업고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더럽게) 살아가는 방식은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분명 윤리적으로 아주 엄청나게 큰 잘못을 하고 있는데도, 마이클 비어드에게는 지구를 지킨다는 명분이 있다. 자신이 훔친 아이디어를 제안한 연구원이 살아있을 때는 포스트닥인 위치에서는 구현 가능성이 없는 그 아이디어를, 마이클 비어드는 노벨상의 이름으로 구현하고자 설득하고 애쓰는 모습이 악의 이면을 드러내고, 외면했던 그 태양광 합성 에너지를 구현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연설을 하던 와중에 남성우월주의로 오해받아 분노한 대중에게 조소와 모멸을 받는 장면은 악의 경계를 더욱 흐리게 한다.
그의 악은 마블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절대적 악이 아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사회의 저변에 만연했지만 전체가 한꺼번에 모두 드러나기 전에는 그 깊이와 밀도를 알 길이 없는, 그저 원래 사회라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그렇다는 듯 조금 못마땅하게 인정하고 모두들 조금씩 그 사회의 작동 원리에 동조하는 어떤 거대한 힘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탐욕을 방해한 타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런 대가를 치를만한 인간임을 꾸준히 스스로에게 설득하는 모습, 죽은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쳐 대규모 사업을 벌리고 다니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노력에 밥숟가락 하나 더 얹으려는 사기꾼 집단 취급하는 심리. 이렇게 그가 악을 행하는 상대들은 마이클 비어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속물이고 탐욕스럽게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나누자고 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악한 인간이 또다른 악한 인간들을 볼 때의 시선. 그것 때문에, 마이클 비어드의 행위가, 결코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 악의 행위로 읽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영화 <어톤먼트> 덕분에 더욱 널리 알려진 작가지만, 영화적 비주얼이 주는 강렬한 느낌을 바꾸고 싶지 않아, 가장 재미있다는 대표작 <속죄>를 책으로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책표지가 바래가고 있는 중.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던 책을 고르라고 한다면 <칠드런 액트>를 꼽고 싶다. <검은 개>는 1992년 작인 것 같은데, 첫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 두 마리 검은 개를 서로 다르게 의미 부여하고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의 삶이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려지는 듯하다.
검은 개 / 문학동네 / 201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