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의 구멍 초월 3
현호정 지음 / 허블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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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의 구멍』을 관통하는 가장 선명한 이미지는 제목 그대로 고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다. 처음에 이 구멍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상징처럼 보인다. 노노를 잃고, 자신이 살던 터전을 잃고, 혼자가 된 고고에게 구멍은 상실과 결핍, 그리고 공동체에서 밀려난 소외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고고의 여정을 ‘구멍을 메우는 과정’, 다시 말해 상실을 치유하고 완전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될수록 이 구멍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를 거부한다.

거인들의 땅에 이르렀을 때 구멍은 고고에게는 명백하게 존재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는 고고를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며 그의 생존을 돕지만, 정작 고고가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구멍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실제 몸에 난 구멍이라기보다 기껏해야 ‘정신적인 구멍’으로 해석될 뿐이다.

이때 고고의 괴로움은 단순히 상처가 있다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내가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타인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커진다. 그래서 고고가 조바심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은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느끼는 분노와 닮아 있다. 아무리 친절한 타인이라도 나의 고통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친절에는 도달할 수 없는 벽이 남는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는 고고에게 가장 많은 것을 제공한 존재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고고의 가장 중요한 결핍 앞에서는 무력하다.

반대로 작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구멍은 더 이상 고고 혼자만의 이상 현상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구멍이 보이고, 공유될 수 있으며, 다른 존재와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금은 고고의 구멍을 실제로 메울 수 있다. 여기서 고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핍이 타인에게 이해되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했던 치유의 서사를 뒤집는다.

구멍이 메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상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너무 깊게 연결됨으로써 타인의 감정과 경험이 고고에게 밀려들어온다. 완벽한 이해와 완벽한 공감은 오히려 자아의 경계를 위협한다. 고고가 원했던 것은 분명 구멍의 치유였지만, 막상 그것이 가능해졌을 때 그 치유는 또 다른 고통이 된다.

나는 이 대목이 『고고의 구멍』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우리는 흔히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의 반대편에 ‘완벽하게 이해받는 상태’를 놓는다. 그러나 현호정은 양쪽 모두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아무도 내 구멍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고립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구멍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압도된다.

그렇다고 고고가 구멍을 메우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 욕망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고는 구멍을 지닌 채 사는 법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동시에 그것이 쉽게 없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인물에 가깝다.

그래서 고고의 여정은 ‘구멍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기보다, 구멍을 메우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이 메워질 수 없거나, 메워진다 해도 또 다른 고통을 낳을 수 있다는 현실 사이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과정처럼 읽힌다.

노노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노노를 되찾으면 구멍도 사라질 것처럼 느껴진다. 상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복구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노노새를 찾는다고 해서 구멍이 단순히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구멍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특정한 사건 때문에 생겨난 하나의 상처라기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한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결여에 가깝게 읽었다.

노노를 잃어서 생긴 구멍이기도 하지만 오직 노노만이 채울 수 있는 구멍은 아니다. 고향을 잃어서 생긴 구멍이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채울 수도 없고, 완벽한 공감으로 채우려 하면 오히려 자신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이와 함께 흥미로웠던 것은 작품 속 ‘몸’의 문제다. 『고고의 구멍』에서는 몸의 크기와 형태가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작동한다.

거인인 비비낙안에게는 하찮을 만큼 작은 음식 한 조각이 고고에게는 넘치는 식량이 된다. 처음에 고고는 비비낙안에게 먹고 입고 이동하는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지만,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작은 몸 자체가 오히려 생존에 유리한 조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은 사람 금과의 관계에서는 그 구조가 다시 뒤집힌다. 이번에는 고고가 금을 먹이고 보호하며 생존을 돕는다. 그러나 고고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구멍의 문제에서는 금이 우위를 갖는다. 금은 고고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고고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둘의 관계에는 일방적인 강자와 약자가 없다.

고고는 금을 살게 하고, 금은 고고의 구멍에 접근한다.

한쪽의 결핍이 다른 쪽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그 능력이 다시 상대에게 의존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에서 권력은 몸의 크기에 단순히 비례하지 않는다. 누구의 몸이 누구에게 필요한가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밤과 금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 몸을 굽혀 사족보행을 하며 금을 등에 태우는 밤은 외형적으로는 낮은 자세를 취하지만 오히려 의기양양해진다. 낮아진 몸이 반드시 낮은 지위를 뜻하지 않는다. 상대를 운반할 수 있는 몸, 먹일 수 있는 몸, 구멍을 볼 수 있는 몸처럼 각각의 몸이 가진 능력이 순간순간 관계의 권력을 재배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고의 구멍』에서 몸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다. 몸은 관계가 이루어지는 방식 그 자체이다.

또 하나 내가 계속 의문을 품게 된 부분은 고고의 성별이다.

해설이나 작품 외부의 소개에서는 고고를 흔히 ‘소녀’라고 부른다. 그러나 적어도 소설 자체를 읽는 동안 나는 고고를 여성으로 확정할 만한 뚜렷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고고의 성별을 처음부터 소녀라고 규정하면 고고가 타인에게 느끼는 애착과 질투 역시 자연스럽게 연애의 언어로 번역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고고가 비비낙안이나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를 반드시 이성적 사랑이라고 읽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

고고가 비비낙안과 비비유지의 키스를 목격하고 분노하는 장면 역시 꼭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긴 연애 감정’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고고가 자라온 쌍둥이 마을의 문화가 더 중요해 보인다.

고고가 알고 있던 세계에서는 존재들이 둘씩 짝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것은 사랑에 앞서 삶의 기본적인 형식이며 거의 자연법처럼 받아들여지는 질서다. 노노와 고고 역시 그런 한 쌍이었다.

그렇다면 노노를 잃은 뒤 고고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품게 되는 욕망은 반드시 연애적 욕망이라기보다 ‘누군가와 다시 배타적인 한 쌍이 되고 싶다’는 욕망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고가 이 오래된 관념에서 깔끔하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고고는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감정의 해소와 같지 않다. 금과 곰의 관계를 보는 일은 여전히 고고를 아프게 하고, 노노새와 커플새가 한 쌍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상처받는다.

고고는 밀접한 상대에게 자신 말고도 다른 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니다.

이 점이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관계의 관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방식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몸에 밴 욕망과 상처까지 이성적으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고고는 ‘둘이 한 쌍’이라는 관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습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 채 계속 아파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관계에 대한 명쾌한 해답도 없다.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면 다른 관계를 배제하고 싶어지고, 그러나 상대는 나만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질투하고, 수용하면서도 상처받는다. 고고의 구멍이 끝내 완전히 메워지지 않는 것처럼, 이 관계의 모순 역시 끝까지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고고의 구멍』을 다 읽고 나면 처음의 질문 자체가 조금 달라진다.

고고의 구멍은 무엇으로 메워질 수 있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

우리에게 있는 구멍은 과연 완전히 메워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의 구멍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구멍은 너무도 분명해서 나 자신에게는 견딜 수 없이 아픈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명하려 애쓰고, 보아달라고 요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할 때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가 그 구멍을 너무 완벽하게 이해하고, 너무 깊이 들어온다면 그것 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타인의 감정과 상처가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서로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공감은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고고는 끝까지 구멍을 메우고 싶어한다. 아마 우리도 그럴 것이다.

잃은 것을 되찾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면 비로소 이 구멍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구멍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멍이 없다고 가장하는 것도, 그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 안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때로는 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로도 그것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책을 덮고 나서 나는 결국 이런 질문으로 돌아왔다.

고고의 구멍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의 구멍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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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걸어도 나 혼자
데라치 하루나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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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좋은 이웃을 만나는 행운이 생기기도 한다. 좋은 이웃이란 무얼까. 핵가족 시대의 좋은 이웃이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한다. 유미코와 카에데는 40대 여성으로 낡은 아파트를 마주보는 이웃이다. 두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처음엔 책이 간질간질한 에세이처럼 생겨서 유미코의 첫번째 챕터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인줄 알았다. 시점이 바뀌고서야 이 책이 소설이란 걸 알았는데 알고 나서도 마치 잔잔한 자기 고백적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나갔다. 


유미코의 이사날 슬쩍 스쳐간 인연은 어느 날 발코니에서 서로를 알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고 요리를 좋아하는 유미코는 카에데를 자주 집으로 부르게 되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첫 이야기에서 유미코의 들려준 그간의 사정은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에게서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자주 집을 비우고 밤을 지내고 들어오는 일이 많아지면서 생긴 갈등과 별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이다. 딸은 사춘기로 보이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이때부터 남편의 태도가 달라지고 전가족과의 사이에서 생긴일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다가 결국 이혼을 결심하는데 쿨한 시어머니가별거부터 해보라는 식으로 말하고는 집값이 저렴한 자신이 사는 동네의 낡은 아파트 메종 드 리버라를 소개해준다.


절임 회사에 서무직으로 근무하는 카에데는 눈에 띄는 미인에 옷차림도 과감한 직장녀지만 사장이 추근덕거려 고민하다가 다른 직원에게 상담을 하니 구럴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등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직원들의 눈초리를 받고 결국 사퇴하기에 이른다. 요리나 가사일에는 관심이 없고 화장과 몸을 가꾸는 데에는 신경을 쓰는 카에테는 남친도 가볍게 사귀며 자주 바뀌는 편이지만 얼마 전 쿨하게 헤어진 전남친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이 있었음을 깨닫는 중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중년이 된 두 여성이 서로를 처음 만났늘 때 첫인상은 그들이 얼마나 다른 지를 말해준다. 카에테가 본 유미코의 첫인상이다.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 뭐랄까, 전혀 기름지지 않아 놀랐다. 선선했다. 교태나 애교가 전혀 담기지 않았다. 어쩌면 본인은 담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도가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발성법이었다. 무뚝뚝하거나 붙임성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눈썹을 대충 그렸다. ‘귀찮지만 화장을 하는 게 규칙이니까 일단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의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화장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막 옆집 주민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화장은 대충하지만 뜨게질과 수예 같은 걸 즐기는 따스하고 가정적인 유미코. 그건 이해가 가겠는데 목소리에 교태나 애교가 없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럼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디폴트로 교태와 애교가 장착되어 있다는 건지. 일본 사람들의 여성상은 알다가도 모르겠ㅋ. 반면 유미코의 눈에 카에데의 차림새는 와 대단하다 정도였고 이후 함께 밥을 먹으면서 카에데에 대해 처음 느낀 감정은 호감으로 결론이 나는 분위기다.


"생김새가 단정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위압감이 느껴지는데, 사귀어보니 이른바 고양잇과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간섭하려는 사람에게서는 필사적으로 멀어지려고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하면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느 날 유미코의 별거 중인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과 그 이후 고향 섬에서 본 사람이 있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전해듣고 싱숭생숭하던 중 카에데는 전회장에게서 매우 심각한 스토킹의 위협을 받아 경찰을 부르는 소동까지 생기고 둘은 직장을 구하는 일과 편의점 알바 등을 전전하며 중년 여성이 겪는 소외감과 사회적 편견, 젊은이들의 불편한 시선 등을 경험한다.


특히 재취업이 잘 안돼서 슈퍼마켓의 시식코너에서 젊은 여성과 알바를 하며 겪은 일은 중년 여성 아줌마라 불리는 사회적 계층에 대한 젊은층의 곱지 않은 시선이 가차없이 드러나지만 카에테의 거침없는 대응으로 속시원히 처리하는 대목이 성격 묘사를 생생하게 잘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솜털 하나하나도 빛나 보이는 젊은 여성이 씩씩하게 시식 알바를 잘 하는 걸 보고 귀엽다는 생각에 쉬는 시간에 칭찬을 해주었는데 뒤늦게 들어온 슈퍼마켓 정직원이 카에테가 화장실을 간 틈을 타 이 젊은 여성에게 괜찮냐고 정말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야?라고 다그치듯 묻고 있었다. 젊은 여성은 극구 아니라고 부인하는데도 말이다. 


"괴롭히는 주체가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오타의 바짝 긴장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얘, 괜찮니?” 

초콜릿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 사람이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어?”


이렇게 가볍게 비꼬며 넘어가려고 했더니 나름 변명이라고 내놓는 말이 더 가관이다. 


‘아줌마’는 다른 아줌마 아르바이트들을 말하는 거고요, 시마다 씨는 아직 젊으니까 당연히 괜찮지요.”


아줌마를 폄하하는 이같은 말에 카에테는 뚜껑이 열린다. 


이봐요, ‘아줌마’란 단순히 ‘중년기 이후의 여성에 대한 호칭, 혹은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야. 사전을 보면 그렇게 적혀 있어요. ‘아줌마’를 욕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쪽이 젊지 않은 여자에게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잖아요? 댁이 사귈 여자를 고를 때라면 그래도 상관없어요. 나이든 뭐든 댁이 좋아하는 기준에 따라 마음껏 고르라고요. 하지만 나는 여기에 그냥 일하러 왔어요. 당신의 그 웃기지도 않은 성적 대상 선정의 장에 나를 멋대로 끌어들여서는 아줌마는 안 되겠다느니 뭐니 생각한다면 불쾌하고 불편하니까 그만둘래요? ‘당연히 괜찮지요’라니 뭐가 괜찮아? 그게 위로랍시고 하는 소리야?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래, 나는 아직 괜찮구나. 다행이다’ 하고 기뻐할 줄 알았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당신이 나를 감정해줄 필요 없어요.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정하니까.”


카에테와 유미코는 함께 유미코의 남편을 찾으러 섬으로 떠난다. 민박을 정해 함께 지내면서 둘은 서로가 나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자잘한 일에서부터 깨닫기 시작한다. 지저분한 식당에서 누님 누님하는 남성과 만나 바로 호텔로 향하는 카에테가 못마땅한 유미코 게다가 그 남자에게 지갑까지 털리고 무인여관에서 나오지 못해 데리러 가야 한 유미코. 이런 해프닝에 전남편의 그림자는 섬 어딘가에서 어른거리는데..


잔잔하며 유쾌한 면도 있는 소설로 일상을 소재로 하다 보니 다소 가볍다는 느낌도 들지만 중년 여성들의 우정과 삶이 짊어져야 하는 고독의 무게와 우정이 감내해야 하는 서로에 대한 차이. 전통적 사회의 눈으로 바라보눈 핵가족 시대의 홀로 선 여성들. 거기에 여성에 대한 가차없는 편견과 기울어진 성도덕 등을 잔잔하고 친숙한 기법으로 잘 버무려놓았다. 중편 정도의 길이로 1~2시간이면 읽을 양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잘읽힌다. 가독성은 만점. 개성도 만점. 일본체 닭살 대화 없음. 인물만 수십여명에 돌고래 침팬치등 여러 종류의 외계종족들이 등장하는 복잡한 SF 읽다가 팽개치고 이거 읽으니 힐링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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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2-24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REBBP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CREBBP 2019-12-26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립니다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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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지식이 자유자재로 뻗어 있는 에코의 글은 산만해서 집중을 요구할 때가 많지만, 대신 항상 유머와 해학으로 즐거움을 서비스해준다. 블랙 유머는 독일어를 잘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시절, 지도교수를 잘못 만나면서 꼬이기 시작하던 시기를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한번 꼬인 인생은 성공으로 가는 우연의 길목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꼬인 채로 중년에 이르렀다. 고스트라이터에서부터 시작해서 번역 일과 온갖 잡동사니 신문에 닥치는 대로 글을 쓰며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며 사는 50세의 콜론나가 자신의 인생을 실패자로 규정하는 대목은 잘 안나가는 독자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준다. 

패배자는 독학자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승리자보다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저 한 가지만 잘 알아야지 무엇이든 다 알겠다고 시간을 허비에선 안 된다. 박학다식하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건 패배자들이 겪는 업보이다. 어떤 사람의 지식이 늘면 늘수록 잘못 돌아가는 일들도 자꾸 늘어간다는 것이다. 24


그러던 어느 날 시메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제안을 한다. 콤멘다토레가 발행하게 될 새로운 신문의 창간 멤버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인데, 제시하는 액수가 엄청나다. 이렇게 뜬금없는 금액을 제시할 때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있다. 시메이는 이미 세상 쓴 맛을 두루 섭렵했을 콜론나에게 숨김없이 계약 조건을 이야기한다. 

창간 준비만 하다가 발행인의 결정으로 사업이 끝나버리면, 나는 책을 출간할 겁니다. 책은 폭탄이 될 것이고 나에게 거액을 인세를 안겨줄 겁니다. 그런데 책이 출간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내가 책을 출간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주겠지요 (p33)


이 책은 우선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타블로이트 신문의 창간 준비호가 제작되는 과정의 세부 논의 과정들을 통해 뉴스가 제작되는 생태계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재능있고 경험이 풍부한 콜론나는 데스크를 맡으며 창간을 준비하기 위해 고용된 기자들과 친해진다. 그 중 한 편으로는 브라가도초와 뜻하지 않게 자주 얽혀 그의 장황하고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음모론의 청취자가 되고 술값까지 내게 되는 상황이 자주 생기고 한편으로는, 연예인 뒤꽁무니만을 따라다니던 전직 연예계 기자 마이아와 썸을 타게 된다. 브라가도초가 기레기를 대표한다면 마이아는 아직까지 대중에게 진실을 전하고 싶은 순수한 기자 정신을 대표한다. 

나오지도 않을 신문이지만, 시메이 주필과 콜론나는 기자들에게 신문의  이상적인 모습보다는 신문의 실제적인 요구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발행인인 콤멘다토레가 요양원을 소유했는데 한 판사가 요양원의 운영실태 수사를 하는 것을 알게 되고 발행인에게까지 수사의 영향력이 미치게 될 것을 미리 염려해, 수사관의 뒤를 캐는 것이 신문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신문이 할 일은 무엇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옳지 않'을 때 취해야 할 것은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의 정당성을 떨어뜨릴 만한 것을 찾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청렴하다고 해도 수상쩍은 일을 한가지쯤은 했을 거에요. 그것도 아니라면..그가 매일 하는 일을 수상해 보이도록 만드는 겁니다...상상력을 발휘해 보세요. 188

이 얼마나 익숙한, 사실 진부하기까지 한 수법인가. 어제도 오늘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이 처형해왔던가. 오늘도,  미디어를 장악한 베를루니코스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각종 비리와 부패의 파티장으로 벌였던 10년의 장기집권 기간 중의 범행은 우리나라가 겪은 10년의 개막장이게나라냐정부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이탈리아에서 꺼진불도 다시보지 않고 재활용했던 파시스트들의 잔존 여파가 부패 극우로 변신하는 과정과 혈서 쓰고 친일을 한 후 공산당까지 골고루 돌아가며 했던 자랑스런 아버지를 둔 덕에 허황된 지역주의에 목을 맨 세력과 이에 호응하는 대중을 업고 대통령까지 했던 박씨의 성공담과 구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경우 미디어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리고 노력해도, 적당히 해먹었어야 덮는 게 가능하지라는 본보기를 근과거의 역사가 흔들리는 촛불의 잔영속에 비추지만, 미디어는 오늘도, 진실을 전하기 보다는,  목적을 위해 사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잘라내기 오려붙이기를 통해 대중의 눈을 속이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월호 이후 세월호에 탔던 어린 아이들이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가라앉았다는 그 엄청난, 믿기지 않은 사건의 본질은 실종되고 숨은유병원찾기놀이로 일제히 여론이 움직였던 일을 잊은 듯 본질을 호도한 보도들에 묻혀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을 의심하고 비방하고 검찰의 권력 앞에 꼭두각시처럼 부화뇌동하고 있다.

악한 사람을 신문에서 착하다고 부르면 그 사람은 착한사람이 되고, 사람들은 신문을 따라 착한OO라고 부른다. SNS 시대에도 여전히 신문과 뉴스의 효과는 그 무엇보다 막강하고,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이 개인 1인 미디어가 외치는 말보다 진실성 있다고 믿는다. 아니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음모가 어떤 세력을 와해하고 혹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사소한 거짓을 퍼뜨리는 방법은 교묘해서 알아차리기 힘들다. 1의 거짓을 전달하기 위해 99의 하찮은 진실에 1의 중대한 거짓을 섞어 전달하면 99의 하찮은 진실이 휘발한 후 1의 거짓만이 99만큼의 진실성을 확보한다. 이 짓거리들에 한국의 신문들은 최고가 되었다.

맞아요 신문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145

신문들은 뉴스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뉴스를 덮어서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250

가짜뉴스가 판을 치다 보니,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달에 가지 않았느니, 에이즈라는 질병은 존재하지 않는다느니, 미국정부가 UFO니 외계인을 숨기고 있다느니 하는 여러가지 음모론 속에 0.1%의 몰랐던 진실, 매우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실이 숨어있다면 음모론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브라가도초는 어이없게도 처형당한 무솔리니가 대역이었다는 음모론을 개발(?) 중이다. 뭔가를 믿기 시작하면 확증편향으로 이어져, 연관된 모든 것을 의심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게 된다. 물론 본인은 개발이 아니라 진실을 캐는 과정이지만, 브라가도초가 제시하는 무솔리니의 대역 음모론은 말처럼 그리 황당하지만은 않다. 그는 무솔리니 체포 및 처형 당일의 행적을 깨알같이 조사하며 꿰어맞추면서 클론나에게 음모론의 진실(자기가 믿는)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는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그게 진실이라 하더라도 드러나는 몇몇 군데 구멍들은 상상력으로만 메꿀 수 없다. 결국 그 구멍들을 메꾸기 위해 조사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연관된 인물과 사건이 활보하는 시간 범위는 더 가까와진다. 

두체 무솔리니 파시스트 스토리는 참으로 흥미로왔다. 서너 페이지에 걸쳐 거의 칼럼 기사처럼 브라가도초가 조사한 무솔리니의 행적이 정리되어 있는데, 이를 간략하게 옮겨보면 이렇다. 짧은 지면이지만 등장인물도 많고, 이동 경로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주의깊게 읽었다. 

무솔리니 대역 처형 재구성 시나리오 등장 인물

카벨라 : 마지막 충신, 파시스트 신문 
산드로 페르티니 :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영웅 
라켈레 : 아내
클라레타 페타치 : 애인
마르첼로 페타치 : 애인의 오라비(스페인 영사로 분장)
*페드로 : 빨지산 부대 대장
*발레리오 대령 : 무솔리니 처형 지휘 대장

무솔리니의 도피 행적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실질적 수도였던 살로에서 시작된다. 전쟁이 막바지였던 1945년 4월 18일 무솔리니는 살로를 버리고 밀라노 도청을 본부로 삼는다. 4월 25일 해방군과 맞닥뜨리자 무솔리니 일행은 밀라노 탈출, 가족, 애인도 코모에 집결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날 가족과 만나지 않는다. 이후 코모 인근 카르다노에서 무솔리니는 애인과 합류하고 도피중, 히틀러가 보낸 호위대가 오스트리아로 대피를 돕기 위해 나타나고 메나조에서 이들과 합류, 스위스 국경 키아벤나로 향하지만 실패하고 무소에서 빨치산과 대면한다. 호위하고 있던 독일군들은 이탈리아인들을 빨치산에게 넘기고 퇴각하지만, 돈고에서 독일군에 대한 전면 수색이 이루어지고 독일군으로 변장한 무솔리니가 여기서 발견된다. 이 때 조약에 의해 무솔리니는 연합군에게 인도될 예정이나, 해방위원회는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처형 이유는 이렇다. 

"해방위원회의 대다수는 이탈리아에 당장 하나의 상징, 파시즘의 20년 세월이 끝났음을 알리는 구체적인 상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두체 무솔리니의 죽은 몸뚱이가 바로 그 상징이다.(..) 만약 무솔리니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지 않으면 그의 이미지가 오래 남아 실체는 없으면서도 다루기 곤란한 존재가 되리라 직감한다. 바르바로사(붉은수염)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전설을 생각해보라.(..)동굴의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가 때가 되면 깨어나 독일을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 거라는 웅대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는가. 무솔리니가 그런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이탈리아 국민을 과거로 회귀하도록 환상을 불러일으키면 안되는 것이다(162)"

4월 29일에 모든 시체가 밀라노 로레토 광장에 부려진다. 이 광장은 거의 9개월 전에 근처에서 총살당한 빨치산들의 주검이 버려졌던 곳이다. - 빨치산들을 총살한 파시스트 민병대원들은 그 주검들을 온종일 햇볕이 뺑쨍한 곳에 놓아두고 유가족들이 시신을 거두어 가지 못하게 했다(169)

체포되어 공개 처형된 무솔리니가 대역이었다는 근거는 콜론나가 보기에도 독자가 보기에도 허술하기 짝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는 점, 당대 사람들이 무솔리니의 얼굴을 잘 몰랐다는 점, 1주일만에 수척했던 무솔리니가 퉁퉁하게 살이 올라있었다는 점 등을 기반으로 한 추측성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몇가지 모순까지 존재하기에 브라가도초는 만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디에 있었겠는가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거대한 역사의 음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가짜와 진짜가 교묘하게 섞어서 짜맞추면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내일 창간되지 않을 창간 준비호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음모론에 빠진 브라가도초가 진실의 실 조각들을 모아서 짜낸 스토리 어딘가에는 누군가를 두렵게 하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들어서 알게 된 모든 것이 가짜이거나 왜곡이었다는 거야. 우리는 25년동안 계속 그들의 속임수 속에서 살았어. 내가 그랬잖아. 남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그 모든 뉴스는 오래전부터 유포되고 있었어. 다만 집단의 기억에서 뉴스들이 지워졌던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한데 모으려면 기록보관소나 자료실에 가면 돼...마치 새로운 폭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전 뉴스를 지워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끌어내 다시 죽 늘어놓기만 하면 돼. 브라가도초가 바로 그 일을 했고, BBC도 그 일을 한 거야. 재료를 혼합해서 저마다 칵테일을 만들었어. 그래서 우리 앞에 두 잔의 완벽한 칵테일이 있어.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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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친구가 홈지라고 부르는 주인공 소녀가 가진 강박증을 이토록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된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의 말에서, 존 그린은 두 사람의 정신과 의사를 언급하며 그들 덕분에 자신의 삶의 질은 엄청나게 나아졌다고 말했다. 지나친 청결에 사로잡힌 강박증도 그 종류가 여럿 있을텐데, TV (엉터리) 교양 리포트에서 떠드는 '화장실보다 세균이 천배 많이 발견된다는 OOO' 시리즈는 OOO의 대상을 주기적으로 바꾸지만, <내 속에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를 읽고 나면,   오히려 그런 세균과 박테리아 등등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더 느긋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미생물들은 내 몸의 일부이고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걸, 그리고 나쁜놈과 좋은놈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대충은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강박증 아이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세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대략 50퍼센트가 세균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나를 이루는 세포의 절반은 전혀 내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라는 특정한 생물 군계에는 지상의 인간보다 천 배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으며, 종종 내 안과 표면에서 살고 번식하고 죽는 그들의 존재가 느껴지는 듯했다.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강박증을 일으키는 원인을 객관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세포 속에 살고 있는 그 미생물들이 자신을 차지하고 마음대로 조정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쁜 미생물에 대한 공포에 매몰되어 있다. 단짝 친구인 데이지의 힘겨운 경제적 사정과 가정사에 거의 아는 게 없다시피할 정도로 자기 자신과 자기자신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만 생각한다. 그럼에도 데이지와 홈지는 둘도 없는 단짝이고, 둘은 10만불의 현상금이 달린 백만장자 데이비스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다. 

화이트 강 건너 저택엔 강둑과 저택이 있고 그곳에 데이비스가 산다. 강건너 저택이 돌담과 강둑과 철조망으로 방비된 덕에 홍수 때마다 강이 홈지네 쪽으로 범람한다.  부가 흘러 넘치는 곳에 재난은 빠져나가지.  데이비스가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홈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데이비스를 슬픔 캠프에서 만났었고, 캠프가 끝난 후에도 그들은 몇 번 만났다는 걸 기억하는 데이지가 데이비스를 이용하여 그의 아버지의 행방을 찾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이들의 사건은 데이비스와 홈지를 연결시켜주는데, 서서히 데이비스를 알아가면서 사랑을 느낀 홈지는 자신의 강박증 때문에 더이상 나가지 못함을 알고 절망한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때로 이게 무슨 과학 대중서에 나올만한 대사들을 읋어 대는 아이들을 보며 이거 미국 고등학생들은 이렇게나 똑똑하단 말야? 는 감탄이 나오다가도, 그렇게 잘 아는 아이가, 손세정제를 먹어 간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는 막무가내의 행동까지 할 때에는 그를 그렇게 만드는 힘이 정체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강박증은 병인 거 맞고, 완치되기 힘들지만, 여러 심리 치료로 조금 삶의 질이 나아질 수는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주로 TV에서 하나의 재미있는 캐릭터로 자주 만난다. 예전에 어떤 친척분이 약간 그런 증세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직까지 화자되고 있는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접시에 새우깡이 조각조각난 조각이 많이 있더란다. 이게 뭐냐 했더니 새우깡을 집어먹을 때, 손에 닿은 부분을 안먹고 떼어놓은 거란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외식을 하고 숟가락을 같이 쓰고 그럴까 하며 깔깔거렸는데, 그 분이 캄필로박터균과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레와 엡스타인 비 바이러스 같은 병원균의 이름을 일일히 알았을 리는 없지만, '세균' = '병원균' 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하는 행동과 그것에 대한 주변의 조소 때문에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 지는 짐작할 길이 없다. 책에는 그 강박적 마음이 어떤 식으로 그런 자해적인 행동을 불러오는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이들의 대사도 통통 튀고. 읽을만 하다. 


옛날에 어떤 과학자가 있었어. 과학자는 구름처럼 모인 관중 앞에서 지구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지. 지구가 수십억 년 전에 우주 먼지로 이뤄진 구름 속에서 생겨났고, 한동안 아주 뜨거웠다가 또 한동안 서늘해져서 바다가 생겼다고. 바다에서 단세포 동물들이 출현하고, 또 수십억 년이 지나 생물이 늘어나고 복잡해지다가 25만 년 전쯤부터 인간이 진화하고, 우리는 보다 진화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주선과 그 모든 것을 만들게 됐다고. 그렇게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체의 역사에 대해 연설하고 끝으로 관객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었어. 그러자 뒤에 앉은 할머니가 손을 들고 말했지. 
‘잘 들었습니다, 과학자 선생님. 하지만 사실 지구는 거대한 거북이 등에 세워진 평평한 땅이랍니다.’
과학자는 할머니를 골려 주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물었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거대한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답했지. 
‘더 거대한 거북이가 있죠.’
이제 과학자는 화가 나서 물었어. 
‘그럼 그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나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지. 
‘선생님, 이해를 못하시네요.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는 거예요.’

나는 깔깔 웃었다.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구나.”
“거북이들만 존나 있는 거야, 홈지. 넌 맨 밑에 있는 거북이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왜냐하면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으니까.” 

나는 영적 깨달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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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40도씩 기온이 오르던 여름 휴가때 바닷가에서 읽었다. 읽은지 한참 되어서 내용이 기억이 안날 거 같았는데, 그래도 꽤 많이 굵직굵직한 사건이 떠오른다. 어떤 책은 읽은 지 몇 달만 지나도 뭐였더라 완전 까먹고 뭔가 힌트를 줘야 대략적으로 생각나는 경우도 많은데, 그래도 띄엄띄엄 기억나는 거 보면, 인상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때로 책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한참 두어달 후에야 제대로 내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거칠게 요악한다면 각자 따로따로 상처받은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나 만드는 사랑이야기다.  인상적인건 두 사람의 캐릭터다. 웃기지도 재미있지도 그닥 매력적이거나 특별할 것도 하나 없는 사람들. 따지고 보면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련만, 대개 소설 속 주인공들은 트라우마에 가까운 깊은 상처를 안고 산다. 경애가 안고 살아가는 상실과 상처는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영화 동아리 아이들과 지하 주점에서 파티를 하다가 화재가 났는데, 인구들 모두 죽고 혼자서 살았다. 게다가 직장에서는 파업 기간 동안 노조 위원장(?)에게서 성희롱을 당하고 이를 폭로했다가 회사는 물론 노조에게서도 미움을 받아 외토리이다. 그래도 경애는 꿋꿋하게 혼자서 잘 살아간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상수와 경애의 공통점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건데, 경애의 억울함과 달리 상수는 올곧은 듯 하며 뭔가 눈치가 없기도 한 듯 한 성격적 결함(으로 주변에서 생각하는)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상수는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타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성인 상수는 페이스북에서 연애 코치를 하는 유명한 '언니'다.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아,  익명의 페이스북으로 상수는 경애의 과거와 현재 죽은 남자친구와 화재에 대한 사연을 모두 알고 있다. 게다가 상수는 아버지의 배경탓에 낙하산으로 들어왔기에 더욱 더 그를 향한 동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둘다 회사와 동료 입장에에서 자를 수도 없고 두고 보기도 싫은 계륵 같은 존재다. 그러던 차에 둘을 베트남으로 전근을 보내는데. 거기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상수의 성격과 악착같은 경애가 기존에 영업하던 팀과 트러블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은 둘을 현실 세계에서 가까와지게 만드는데, 경애는 여전히 상수가 페이스북의 상담 '언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렇게 밋밋하게 스토리를 정리하다보니, 좋은 소설을 망쳐놓은 거 같은데, 실제 소설은 두 사람의 마음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주고 받는 대사에서도 잔재미가 있다. 회사, 가정, 썸타는 경애 모두와 잘잘한 트러블을 겪는 상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시련은 그에게 가장 큰 낙이자, 또다른 정체성이었던 페이스북 계정인 '언니'가 해킹당하는 것이다. 


익명성을 믿고 동성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자신의 모든 걸 내보인 사람이 같이 일하는 동료라는 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은 어떨까. 용서하고 자시고의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마음, 경애의 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였다는 데서 오는 혼란일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 안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배반감에 몸을 떨며 없었던 시간처럼 마음을 거두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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