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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평점 :
어릴 때 도란도란 둘러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듣곤 했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기억나지는 않지만, 둘러앉은 그룹에는 누군가 무서운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 있고, 또 간이 콩알만해져서 조금만 무서워도 소리를 꽥꽥 지르며 놀라는 아이가 있고, 긴장이 한창 고조될 때 일부러 괴상한 소리를 갑자기 내서 단체로 사람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짖꿎은 아이도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무서운 이야기들이 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시간들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에서도 사람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돌아가며 각자의 이야기를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말하고, 듣는 사람들은 믿어야 할 지 말아야할 지 모르게 오싹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두런두런 공포 이야기의 시간을 갖던 것과 같은 부류다. 밤의 이야기꾼들은 깜깜한 밤 폐가에 모이는데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각자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돌아가면서 말한다. 그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긴장을 고조시키고 가뜩이나 믿어지지 않는 괴상하고 오싹한 스토리들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는 목적이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끔찍한 범죄에 연루되었거나, 믿을 수 없는 사실 때문에 익명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진실을 전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 수 있겠고, 또한 이러한 오밤의 스토리텔링 시간이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완결된 별개의 스토리라는 점에서 단편집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인물들이 같은 공간 상에서 서로 대화하고, 또 전체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 주인공이 등장하므로 장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액자의 맨 앞 프레임의 프롤로그에서 한 소년이 가족과 캠핑갔다가 갑자기 물이 불어 가족을 잃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도란도란 둘러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즐기던 그 어린 시절 그 시간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그게 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 때문이었던 것처럼, 밍밍하게 말하면 강가에 캠핑갔다가 비와서 부모가 죽었다 라고 아무 감흥도 없이 말해서는 무서운 이야기는 커녕 별 주목도 받지 못할 널리고 널린 사건 사고 소식에 불과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말하는 방식, 말과 말 사이의 간격, 단어의 선택, 등등 긴장감있게 풀어내는 말재주꾼이 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 밤의 집중 호우와, 혀를 넘름거리며 사람을 잡아먹을 듯 세차게 요동치는 강물을 헤치며 아슬아슬 아이를 데리고 강건너 피난처로 향하는 장면을 너무나도 긴장감있게 묘사한 덕에 처음부터 독자를 끌어들여 금새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밤의 이야기꾼들은 무엇이냐. 취업난 속에 어렵게 입사한 잡지사에서 취재가서 만나게 된 이야기꾼들로, 자신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괴이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요즘도 가끔 괴상한 누가 무얼 어떻게 했다는 둥 하는 끔찍하고 이상한 루머가 돌기도 하고 그러는데 대체적으로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처음부터 그 이상한 잡지사에 별 애정도 없던 주인공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도 혼란스러워한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신고해야 할지. 거기에는 화자가 생각하기에 살인자라 판단되는 사람도 있고 정신병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취재차 온 화자에게로 관심이 쏠리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그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때 그 폭풍우 속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이제껏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그 어둡고 무서웠던 밤, 그리고 죽은 엄마와 아빠가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까지도..피비린내가 물씬 풍기기도 하고, 먹먹하고 슬픈 이야기도 있고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야기도 있다.
모든 이야기들에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실감나게 무섭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능있는 이야기꾼의 생명이 살아있고, 엄청난 흡입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각자의 이야기 하나 하나도 모두 개성있고 재미있었지만 전체를 하나로 이어가는 화자의 역할도 훌륭했다. 끝까지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부정하지만 결국은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마는데, 그로써 우리 모두는 각자 부서져가는 폐가의 깊은 어둠속에서만 밝힐 수 있는 믿기지 않는 혹은 숨겨진 기이하고 잔혹한 스토리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잠재해 있어서 깨닫지 못하는 동안 뇌 속 어디엔가 숨어있다가 폐가에 들어가 이야기꾼들을 만나면 술술 벗겨져 나오고, 그것이 다시 또 이야기가 된다면 이 세상에는 정말로 기이한 이야기들의 천국이 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