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부터 컬렉팅 해 온 그림이 50점을 넘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온라인 경매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낙찰 받은 그림이 50점을 넘은 거다. 온라인 경매가 열리면 정말 욕심을 제어하기가 힘들다. 책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중독이 책보다 심하다. 책은 '이번 10권이 마지막이야!'라는 결심을 우습게 무산시키는데, 그림도 마찬가지. '이번 경매에 이번 그림이 정말 마지막이야! 더 사면 안돼! 공간도 부족하고, 비용도 정말 한계점에 이르렀어. 이제는 정말 안돼!!' 이렇게 결심을 하지만 경매가 열리면 여지없이 입찰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치열한 경쟁이 붙으면 내가 설정한 한도가 넘어 포기를 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경쟁이 치열하지 않으면 낙찰에 성공한다. 이렇게 입수한 그림 중에 100호 유화가 있다.


[파도, 162cm x 112cm, 캔버스에 유화, 1999]


그림이 정말 내 맘에 딱 드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100호 그림이 말도 안되는 가격에 올라온 거였다. 나름 수준급 그림 실력을 보여주는 파도 그림. (나는 파도 그림을 싫어한다. 바다 그림은 유화 초보자가 많이 그리는 그림이라 좀 질리는 감이 있다.) 내가 이 그림을 낙찰받은 이유는 캔버스 때문이다. 아사 100호 캔버스는 캔버스만 30만원이 넘는다. 그림이 좀 질리고 맘에 들지 않으면 캔버스를 재차 사용할 요량으로 구입한 건데, 실물을 보고 나니, 어떻게 이런 그림을 말도 안되는 가격에 업어올 수 있는지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심지어 액자도 있다!!)이거 보다 훨씬 못 그린 40호 짜리 파도 그림. 작년 뱅크 아트페어에서 보았다. 400만원. 경력 5년도 안된 신진작가의 그림인데, 낙찰 받은 그림에 비하면 정말 형편 없었다. 100호 이 정도 실력의 그림이면 아트페어에서 800만원은 가뿐히 넘을 거다.


갤러리나 아트페어 자주 가다보면 원화 그림의 대체적인 가격을 알 수 있는데, 온라인 경매 가격은 그에 비하면 정말 착하다. 물론 온라인 경매라 사진만 보고 판단해야 하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사진이 좋으면 실물은 대개 훨씬 좋다. 그 반대도 간혹 있긴 하지만 유화 구상화이면 대체로 좋다. 100호 그림 낙찰받기는 처음인데, 액자도 있는 상태라 정말 횡재한 그림이다. 심지어 작가 미상인 작품도 아니다. 작가 서명도 분명하다. 찾아 보니 하삼도에서 활동하는 중견 화가인듯한데, 메이저로 진출하지 못한듯. 어쨌거나 유명작가는 아니지만 작가가 분명한 작품 중 이렇게 저렴하게 나온 그림은 처음인듯하다. 물론 저렴한 가격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작가가 유명하지 않아서일 경우가 크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나중에 그림이 싫증나면 캔버스만 재활용해야 겠다. ㅎㅎ


이 페이퍼의 핵심 주제: 온라인 경매시장은 원화그림을 가장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루트. 원화 그림을 구입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림을 사야겠습니다>와 같은 아트 컬렉션에 관한 책을 보는 것보다는 온라인 그림 경매 시장을 노리는 게 훨씬 낫다. 이런 건 책에 나오지 않는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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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5-04-22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오~ 안개는 없지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연상되네요. 좋으시겠다~

yamoo 2025-04-23 09:4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필리아님!!^^
음...필리아님은 이 그림에서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연상되는군요! 정말 사람마다 그림 보는 방식은 천차반별 인듯합니다.ㅎㅎ 어쨌든, 되게 좋습니다요!!ㅎㅎ

페크pek0501 2025-04-23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그림을 보고 와~~ 하다가 파도가 미지근하게 느껴졌어요. 파도가 세거나 잔잔하거나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중간이라서요. 그저 제 취향이 그렇단 뜻입니다. 그래도 저 정도 수준으로 그리려면 얼마나 연마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yamoo 2025-04-24 10:11   좋아요 1 | URL
역시 그림을 보는 사람만큼 많은 감상 포인트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낍니다.ㅎㅎ
파도가 힘차게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해변에서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모래사장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죠.ㅎㅎ
파도 그림을 많이 보다 보니, 대가들일수록 전체적인 어두운 톤의 색을 쓰는 작가들이더군요. 이 그림이 좋았던 것은 파도가 크게 치기 전 물이 빠지는 순간을 포착해서 그렸다는 점입니다. 바위를 보면 파도가 친 흔적이 보여요. 파도의 세기가 컸을 때 파도의 흔적...전체적인 색감도 어둡고..여튼 수준급 화가가 그린 것만은 분명해요.
동네에 그림파는 가게가 새로 오픈했는데 20호 그림이 250만원 이랍니다. 우리 사생회 회원분들보다 못그린 그림이...원화 그림은 정말 비싸긴 합니다. 그에 비하면 이그림은 거의 공짜죠..^^
 
그니까 미술 작가가 뭐냐면 - 그림 그리기부터 전시, 작품 판매까지 미술계에서 아트 작가로 살아가는 법
이계진 지음 / 더디퍼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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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니까 미술작가가 뭐냐면>(더디퍼런스, 2024)이란 책을 읽었다. 나도 초보 작가 나부랭이이기 때문에 미술작가에 대한 안내서는 눈에 띄는 즉시 구입하여 읽는다.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인 이계진은 30대 초반의 신진 작가이다. 이 책 역시 미술작가의 저작이기에 누구나 미술작가가 될 수 있다는 사탕발림으로 시작한다. 왜 그런지 몰라도 작가들(특히 미술!)은 누구나 미술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미술작가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려주는 책인데, 이거 괜히 사서 읽었다. 서점에서 넉넉잡고 3시간이면 초보 작가에게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책이다. 그냥 블로그에서 A4 4장 정도로 깔끔하게 초보 작가에게 필요한 정보를 안내하면 됐지, 이런 책은 왜 냈다 싶다. 다 읽고 돈이 정말 아까웠다.

 

책 겉표지 안내대로 이 책은 그림 그리기부터 전시, 작품 판매까지 안내되어 있긴 한데, 매우 피상적이다. 미술계에서 아트(art) 작가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다는 책치고는 밀도가 많이 떨어진다. 단체전이나 개인전 한 번 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면 건질 게 별로 없는 안내서다. 정말 이제 막 전시를 한번 해 볼까하는 사람이 보면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7장까지 구성되어 있는데, 1-2장까지는 미술의 기초, 즉 자기가 미대 입시 준비했던 이력에 대한 내용(미술 기초는 중요하다!)이고, 3-4장은 그리는 방법과 그림 감상하는 방법에 대한 기본 안내이다. 미술작가가 되기 위한 기초 안내 정보. 이런 내용은 유튜브만 봐도 얼추 알 수 있다. 미술 기본기에 대한 정보와 그림 감상법에 대한 정보는 이 책의 내용보다 좋은 유튜브 영상이 널렸다.

 

이런 류의 책, 그러니까 신진 작가가 예비 미술작가에게 자기의 경험을 알려주는 내용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정보가 이 책에는 빠져있다. 즉 초보 작가가 어떻게 창작하고(주제와 대상을 어떻게 선정하고), 공모전이나 레지던시에 어떻게 하면 선발되는지 그 생생한 경험담이 빠져있다는 말씀. 물론 전시계획서를 어떻게 쓰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에는 대관 전시와 공모 전시 그리고 개인전을 열기 위한 과정을 알려주긴 하지만 공모 작가 선정 방법이나 레지던시 선정 방법의 노하우 정보가 통째로 빠져있다.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없다는 사실. 개인전을 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데, 비용을 보조해 주는 협회에 어떻게 준비해야 선정되는지가 빠져있다는 말. 그냥 어디서 지원금 준다더라는 정보가 전부다.

 

물론 저자는 무료로 개인전을 할 수 있는 공모전이나 개인전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해 주는 미술 단체에 선정된 이력이 꽤 된다. 그렇다면 어디 어디서 이런 공모전이 있고 이런 보조금을 주는 단체가 있는데, 여기에 선정되려면 이러이러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방법론을 왜 빠뜨렸을까? 개인전을 준비하는 과정은 그렇게도 새새하게 나열하면서 왜 가장 중요한 선정 노하우는 왜 쓰지 않았을까? (정말 괘씸한 부분이다)

 

핵심 노하우가 없는 안내서는 읽으나 마나 한 책이다. 한마디로 돈을 벌 수 있는 자게서에서 자기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핵심만 쏙 빼고 나머지 부가적인 것들만 열거해서 자신의 출판이력만 추가하는 꼴과 다를 게 없는 책이다. 창작의 길을 걷는 예비 작가들에게 건네는 실질적이고 유용한 이야기라고? 이런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말라는 의미로 리뷰를 남긴다.

 

 

1. 이 책이 궁금하면 서점에서 필요한 부분만 읽으면 되겠다. 2장의 마지막 절과 3, 4장만 읽으면 왕초보 작가가 궁금해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절대 구입하지 마시라!

2.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정보'는 아트허브나 네오룩에 올라온 정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이제 막 시작하는 작가로, 경력 10년 도 안된 신진작가가 이런 책을 쓴다는 자체가 놀랍다. 신진작가로서 자기보다 더 초보인 작가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기 위해 이런 책을 썼다고 한다면, 위에서 내가 언급한 대로 자신이 선정되어 뭔가 지원을 받은 이력이 있다면 어떻게 선정되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이 적시되어야 자기가 말한 바있는 책 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텐데, 왜 정작 그 중요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쏙 빼놨는지 의문이다. 대외비인가? 그렇다면 이런 책은 왜 썼을까? 자기 경력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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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18 0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술작가라고 하셔서 미술에 대한 감상이나 평론글을 쓰는 ㄴ방법을 알려주는 책인줄 알았더니 화가가 되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네요.미대 출신이야 굳이 읽어 볼 필요가 없겠지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책인것 같은데 야무님 글을 보니 좀 허술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yamoo 2025-04-18 10:12   좋아요 0 | URL
미술작가는 어떤 일을 하는가...에대한 책인데...그냥 개인전과 단체전 등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안내서입니다. 매우 피상적이고 개인전을 하면 돈이 많이 들기에 지원금을 타서 개인전을 해야 작가 이력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근데, 가장 중요한 그 지원금을 타는 공모에 선정작가가 되는 방법이 아예 빠져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에요. 자기는 선정작가가 된 이력이 찬란한데 그걸 알려주지 않아서 좀 빡쳤다는...ㅎㅎ

은지 2025-04-18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돈굳었네요 감사합니다

yamoo 2025-04-21 10:5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글 쓴 보람을 느낍니다!^^
 

알라딘 서재를 열고 포스팅을 하면서 처음에 설정했던 프로필 사진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엘르 페닝 어릴 적 사진. 난 엘르 페닝 어린 시절 팬이었기에 그걸로 프로필 사진을 정했다. 


근데 아무래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이고 이제 성인이 된 엘르 패닝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기에 바꾸어야 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귀찮고 자꾸 까먹었다. 아니, 방치했다는 게 더 적절하다싶다.


최근에 내 작업의 근간이 되는 아주 중요한 주제를 확정했고 스타일도 정했기에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내가 작업했던 그림 중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프로필 사진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캔버스에 아크릴과 파스텔로 그린 6호 짜리 그림이다. 제목은 '상상계적 환원으로서의 풍경'이다. 그림을 완성하고 지금까지도 만족하는 구상 계열 3작품 중 하나. 작년에 그린 30 작품 중 하나인데, 일부는 여기 올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요즘 내 작업은 콜라주인데, 이 그림을 축소 내지 확대 복사해서 열심히 사용 중이다. 갑자기 엘르 페닝이 없어지고 이상한(?) 그림이 보이면 그것이 yamoo라고 생각하면 되시겠다.^^



[덧]

1. 아마도 올 하반기 즈음 개인전을 할 예정이다. 단체전은 6-7월로 잡혔다. 내 돈 내고 개인전 하기 싫어서(대관하면 최소 500이상 든다) 갤러리들이 신진작가에게 지원하는 공모에 지원해서 선정됐다. 돈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용을 최소화 하면서 아트페어나 개인전을 할 수 있게 됐다.

2. 개인전 열기 위해서는 20호 이상 그림이 최소 10점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계속 그려야 한다. 그래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 그래도 한 달에 책 2-3권은 꼭 읽으려고 하고 있다. 쉴 때는 주로 드라마를 봐서 책 볼 시간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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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12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프로필 사진을 바꾸셨군요.전 컴치라 프로필 사진을 어떻게 바꾸는지도 잘 모르겠어서 계속 그냥 나두고 있습니다.그나저나 직접 그리신 그림이라니 참 좋은 취미를 가지고 계신것이 부럽습니다^^

yamoo 2025-04-14 10:37   좋아요 0 | URL
서재관리로 들어가셔서 내 정보에서 바꾸면 됩니다. 아주 쉬워요~~ㅎㅎ
네, 직접 창작을 하고 보니, 창작물 들이 하나씩 쌓이는 기쁨이 크긴 한데, 너무 많아지니 보관의 문제가 대두되네요..ㅎㅎ
더 많아지면 큰 문제가 될 듯합니다..ㅎㅎ

페크pek0501 2025-04-12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멋진 그림, 멋진 프로필입니다. 제목은 있어 보입니다.

yamoo 2025-04-14 10: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
저두 저 그림에 만족하여 여러 가지로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ㅎㅎ

니르바나 2025-04-12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yamoo 작가님,
그림이 참 인상적입니다. 한번 보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책이야 그 동안 많이 읽었으니까 전시회 작업을 위해 잠시 휴식기를 취해도 될 것 같습니다.^^

yamoo 2025-04-14 10: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반추상 작품이라, 상상적인 걸 그려서 현실에 저런 곳은 없지요..ㅎㅎ
고맙습니다! 전시회 준비하면 자연스럽게 책읽기는 휴식기로 돌입하는 듯합니다..^^
 
타임 셸터 -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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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작인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타임 셸터>를 읽었다. 처음 읽는 불가리아 소설. 불가리아 국민작가라는데, 이런 작가가 있었는지 나는 알 턱이 없었다. 번역되어 나오는 세계문학 전집에 불가리아 작가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으니까. 다소 의외인 건 문학동네에서 자기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펴낸 게 아니라는 거. 왜 그런지 좀처럼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름도 모르는 작가의 신간을 사서 읽는 건 모험에 가까운데, 일단 알라딘 문학 리뷰의 대가이신 뽈 님이 본 소설에 무려 별을 5개 줬기에 어느 정도 믿음은 있었다. 근데 사실 처음 신선함은 좋았지만, 20여 페이지를 지나 70쪽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 작품을 계속 읽어야할지 아니면 던질지 기로에 섰었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치매 치료로 이어지기에, 언젠가 읽었던 메디컬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신선했는데, 갑자기 알츠하미머 치료에 대한 이야기라니, 흥미도가 급격히 떨어진 게 사실. 그래서 70쪽에서 고민에 빠졌던 거. 가독성은 좋아서 속는 셈 치고 계속 읽기로 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의 분신과 같은 가우스틴은 과거의 기억 속에 살아가는 알츠하이며 환자들을 위해 옛 시대를 완벽히 재현한 클리닉을 고안한다. 영원한 과거의 노스텔지어의 공간인 타임 셸터를 구축하려는 그의 욕망은 점차 세계로 확대되고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

 

70쪽을 넘자마자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지면서 탄력이 붙었다. 그러다가 3본보기로 선택된 나라에 이르러서 약간 루즈해 졌다. 3장을 읽어내는 데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4장을 빠르게 지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작가의 필력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타고도 남을 만했다. 플롯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 대가의 아우라가 느껴졌다랄까.

 

기억 재현 클리닉을 국가로 확대하고 각 국가가 국민투표를 통해 자국의 시대를 택한다는 방식은 기상천외했다. 유럽의 역사와 국제정세를 알지 못하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 구조다. 책 후반부에 작가의 유럽 지도 삽화가 있는데, 각 유럽 국가들이 자국의 회귀 연도를 국민투표로 채택해 나타낸 지도. 매우 신선했다. 각 나라가 지향하는 과거의 향수가 있었고, 이는 각 나라의 국제정세와 역사에 해박하지 않으면 설정할 수 없는 내러티브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회귀 국민투표가 실시된다면 언제가 될까 생각해 보았다. 1988? 1994? 2002?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기억의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히 베르그손의 저작을 읽었던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기억은 수직의 원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에 수록된 기억의 원뿔 모형]


베르그손의 주저 <물질과 기억>에 보면, 어떤 특정한 기억은 수직의 원뿔 구조 속에서 아래 위를 오르내리며 현재에 개입한다고 한다. 원뿔의 밑층에 잠재해 있는 기억은 현재에 촉발된 상황으로 인해 현재로 즉시 소환되어 현재의 이미지를 구축한다고. 게오르기는 이 기억의 층을 건물 구조로 구체화시켜 보여준다. 클리닉에서 60년대는 2층이고 40년대는 지하다. 각 층은 닫혀진 게 아니라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이고, 장치들(잡지나 음반)은 과거가 현재에 개입할 수 있도록 중요한 트리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영원한 과거의 노스텔지어 공간인 타임 셸터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늙어감이 아닐까. 아무리 과거를 재현하여 없어지는 기억을 붙잡는다고 해도 인생은 결국 고립되어 죽어간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끔찍한 고립이 찾아오고 있어, 분명해.”(p307) 그래서 이 한 문장의 울림은 컸다.


 “나는 결말을 좋아한 적이 없다. 결말이 기억나는 책이나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 (중략) 나는 오로지 시작만을 기억한다. (중략) 내가 지금 얼굴을 바짝 갖다댄 채 바라보고 있는 장미를 기억한다. 나는 장미 덤불과 키가 똑같다. 어느 전쟁에서 접은 외투를 입고 참호 속에 앉아 짧고 매운 담배를 피우는 나를 기억한다. 나는 52번가의 허름한 술집에서 불확실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앉아 있다.”(p448)

 

그렇다. “나는 이 기억 말고 다른 인생이 없다.” 각자의 고립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만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지만 저 먼 과거의 존재는 현재의 사람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두려움.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이를 담담하게 전한다. 그렇기에 더욱 비애감이 크다.

 

인생(과 시간)이란 얼마나 도둑 같은가, ? 얼마나 강도 같은가.. 평화로운 카라반을 매복 공격하는 악랄한 노상강도보다 더 악랄하다. 그런 노상강도들은 돈 가방과 숨겨둔 황금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유순하여 실랑이 없이 재물을 내놓으면 다른 것-목숨, 기억, 심장, 생기-은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이나 시간이라는 이 강도는 어느덧 다가와 모든 것-기억, 심장, 청력, 생기-을 앗아간다. 심지어 고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손에 넣는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그 와중에 당신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가슴을 축 늘어지게 하고, 엉덩이엔 뼈만 남게 하고, 허리를 굽게 하고, 머리칼을 성긴 백발로 변하게 하고, 귀에서 털이 자라게 하고, 온몸에 점을 뿌려놓고, 손과 얼굴에 검버섯을 돋게 하고, 앞뒤 안 맞는 말을 지껄이지 않으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게 하고, 모든 말을 빼앗아 아둔하고 망령 든 사람이 되게 한다. 그 개자식은-인생, 시간, 노년 다 똑같다, 똑 같은 쓰레기, 똑 같은 깡패다. 그 개자식은 처음에는 적어도 공손해지려는 노력이라도 한다. 솜씨 좋은 소매치기처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도둑질하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작은 것들을 훔쳐간다-단추 한 개, 양말 한 짝, 가슴 왼쪽 윗부분의 미세하게 찌릿한 통증, 몇 밀리미터쯤 두꺼워진 안경, 앨범 속 사진 세 장, 얼굴들,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pp169-170)



이 소설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의 불가리아 버전처럼 생각된다. 사람의 나이듦을 막을 수 없고, 시간이라는 존재에 인간은 무력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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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최규석, 연상호 <계시록>

장르: 호러, 스릴러, 미스터리, 범죄

러닝타임: 122분

감독: 연상호

주연: 류준열, 신현빈, 신민재


연상호 감독의 최신 영화 <계시록>을 봤다. 류준열(성민찬)과 신현빈(이연희) 주연의 영화라서 기대가 되었고, 광고도 매우 기대감 있게 떡밥을 던져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계시록, 개봉 3일만에 세계 1위". 그래서 기대감을 갖고 봤는지도 모르겠다. 보고 나서는 괜히 봤다는 생각. 연상호는 더 이상 영화를 연출하지 말자. 어떻게 <부산행>을 넘어서는 작품을 단 하나도 만들지 못할까?


플롯도 그렇고 개연성과 핍진성이 한참 떨어졌다. '계시록' 특유의 상징성도 없었다. 도대체 감독은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류준열의 개신교 목사역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뭐랄까, 무대 연극을 보는 느낌이랄까. 배우 이미지 자체가 목사와는 거리가 있는데, 영화 내내 적응할 수 없었던 캐릭터다. 신현빈 역시 마찬가지.


제작이 무려 알폰소 쿠아론이다. 들어간 자본을 생각하면 대망작이지 않을까. 그 어떤 광기도, 호러적 요소도 없는 '계시록'. 타이틀을 '계시록'으로 붙였다면 최소한 두 가지는 보여줘야 했다. '계시'와 '시간의 종말'. 영화는 두 가지 모두를 보여주지 못했다. 신파적 구원은 계시록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걸까. 지난 4.3. 컨슈머인사이트가 발표한 4월 1주차 OTT 신청자 평가에서 10점 만점에 55점을 기록했단다. 이 영화에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을 보긴 했는데, 영화 보고 난 후 호불호가 갈릴 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그냥 망작이다. 돈을 때려 부어도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면 그건 순전히 연출가의 몫이 아닐까.


이 작품을 보는 건 시간 낭비다. 캐릭터, 플롯, 음악, 영상, 주제의 구현 등 그 무엇하나 건질 게 없는 영화. 연상호 감독은 더 이상 영화 찍지 말자. 제발 부탁이다~



영화 한 줄 요약 :  내 122분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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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4-05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 없었고, 별로 내용도 없었고,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았고, 녹아들지 못했지요. 이 글 마치 제가 쓴 글이라고 착각할 정도네요. ㅎㅎㅎㅎ 저는 시즌 2까지 나온 지옥도 별로였는데, 지옥은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연상호 감독은 영화나 드라마 감독을 맡지 말았으면 하는 의견에 완전 동의합니다. 초기 컨셉만 잡아주고, 각본과 감독은 다른 사람들이 맡아주면 좋겠어요.

yamoo 2025-04-07 09:29   좋아요 0 | URL
감은빛 님, 저하고 똑같이 느끼셨네요..ㅎㅎ 영화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영화 좋다는 평 못들어 봤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딱 기생수까지에요. 기생수는 재밌게 봤습니다. 드라마는 영화보다 연출이 좋기는 합니다. 헌데, 영화만 찍으면 말아먹어요. 욕심이 항상 과해서 그런가 봅니다. 뭐, 컨셉 잡는 능력하나는 좋은 듯해요. 그래서 감은빛님 말씀마따나 컨셉만 잡아주고 연출은 다름 사람에게 일임하는게 좋을 듯한데...그놈의 시나리오를 연상호가 직접써서 그런 그림은 힘들듯합니다..ㅎㅎ

서곡 2025-04-05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볼까말까 하던 중인데 킬링타임으로 정 볼 거 없을 때 걍 비지엠처럼 틀어야겠습니다

yamoo 2025-04-07 09:30   좋아요 1 | URL
정 볼거 없을 때 지비엠처럼 듣는 것도 한 가지 시청 방법이겠네요..ㅎㅎ 근데 다른 좋은 작품 찾아서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요..^^

잉크냄새 2025-04-05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감독님...<부산행>이후 영 아니올시다~~
그나저나 요즘 이곳이 감독들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네요.ㅎㅎ

yamoo 2025-04-07 09:31   좋아요 0 | URL
네...맞아요. 영화는 부산행 이후 제대로 된 작품이 없어요.
그나마 드라마는 영화보단 낫습니다만...

음...뭘랄까, 요즘 넷플 영화들이 거의 폭망 수준이라 볼 게 별루 없어요. 보변 화나고 시간아깝고...하~ 그래서 여기 푸념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