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에는 절망이 있는 것 같아요. 절망을 넘어서면 아이는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요? 세속의 지혜들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죠. 강한 쪽에 붙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나 권력에 복종해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나. 하지만 그런 게 어른이라면 부끄럽지 않나요? 아이들 보기에 너무 부끄럽지 않나요? 어른이라면 강한 자들과 권력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파괴해도 우리 안의 다이아몬드를 부술 수는 없다고 말해야지요. 절망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어른이 되는 거지요. 정신 좀 차리지 마세요. 끝까지 예뻐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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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란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서양에서 최초로 시간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논술한 사람이다. 고백 록 11권에 있는 어거스틴의 이야기는 매우 간결하지만 시간의 문제의 복합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아무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 이요, 만일 아무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 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지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이 두 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하여 있게 되는 것입니까? 반면에 현재라는 시간이 항상 현재로 남아 있어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현재가 ― 시간이 되기 위해서 ― 반드시 과거로 지나가는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현재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현재 시간의 존재 이유가 지나가 없어져 버리는데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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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애인을 위해서 한 가지 향기를 남겨두는 것은 각 애인들에 대한 내 나름의 순정이다. 내가 여러 종류의 향수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애인을 만나러 갈 때마다 그가 좋아하는 향수를 기억해서 뿌릴 줄 아는 나의 인지 및 분류 능력을 나는 늘 기특해 한다.
애인이 떠나면 나는 한동안은 그를 만날 때 쓰던 향수를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떠난 뒤 내가 처음 하는 혼잣말은 '향수를 바꿔야 겠어'이다. 언제나 우리의 만남을 동반하던 향기를 맡지  않으면 이미 휘발돼버린 그의 존재를 그리워하지 않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사랑은 순간에 머무는 자극이고 또 기분일 뿐인지도 모른다.
(31페이지)       

                                                                              ---쥔스킨트의 <향수>가 생각난다..

 

시간은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순간들의 체적일 뿐이다. 나는 시간을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은 채 그냥 흘려보내는 편을 좋아한다. (52페이지) 

                         ----<행복한 죽음>에서 뫼르소가 그렇게도 원했던 시간의 개념이 생각난다..

 

진희: .....부탁이야. 나한테는 농담만 해줘
현석: 사랑해
진희: 그래, 정말 좋은 농담이야
(중략)
진희: 잘 알잖아. 나한테는 끊임없이 남자가 필요해
현석: 당신한테 필요한 건 남자가 아니야. 사랑의 존재를 의심하는 싸구려 연애 감정이지. 당신은 사랑이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자꾸 남자에게 곁은 주는 거라구
진희: 당신말대로라면 당신도 그중 하나 아냐?
현석: 난 사랑을 믿는 사람이야. 믿는 사람에게는 보여
진희: 그거야 당신 방식이고 나한테는 내 방식이 있어. 맞든 안 맞든, 너무 오래되고 익숙해서 난 그 방식이 편해. 날 바꾸려고 하지 마
  (208-209페이지)

 

진희: 나는 희망을 갖는 일이 두려워. 결국 적응하게 되고, 지속되기를 바라고 그런 것들 모두. 희망을 가지는 것은 문가를 믿는다는 거야. 당신은 그 결과가 뭐라고 생각해? 삶은 늘 우리를 속인다구. 삶은 말야. 믿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배신을 가르쳐주기 위해 있는 거야. (259-260페이지)
 


진희: 조금은 믿게 해줘. 말하자면 당신의 청혼 같은 그런 희망. 기쁨의 순간이 있어. 그러나 그것은 스쳐가는 일이야. 거기에 집착하면 인생이 무거워져. 빗방울 처럼 발밑으로 떨어진다구.
삶은 폭력남편과 비슷한 점이 있다. 때린 다음에 반드시 울면서 안아 준다. 그리고 또 때린다. 아내들은 속는 줄 알면서도 믿는다. 절대 이혼하지 못한다. 삶은 커다란 속임 속의 작은 믿음을 익혀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현석:언제까지나 순간에서 순간으로 떠다닐 수는 없어.
진희: 나는 인생에 자신이 없어. 그래서 가볍게 살고 싶어하는 거야. 난 내인생을 사소하고 잘게 나누어서 여러 군데에 걸쳐놓고, 그리고 작은 긴장만을 갖고 그 탄성으로 살아갈 거야. 전불ㄹ 바쳐서 커다란 것을 얻으려고 하기엔 나는 삶의 두려움을 너무 빨리 알았어.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인지도 몰라.....희망을 가지면 난 약해져
. (26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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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단수(單數)가 아니다. 단수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일직선 위에 배열하는 것을 뜻한다. 시간이 단수라고 여기는 한, 앞의 물음들은 그저 불가지(不可知)나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시간은 단수가 아니다. 유(有)와 무(無)의 경계를 넘나들고, 관현악의 화음처럼 중첩되어 있으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다. 시공간이 연출하는 이 화려한 퍼레이드를 목격하면서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선분 위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것들을 그저 ‘포스트모던’의 징후로 돌리는 건 적절치 않다. 분명 근대 이전에도 시간은 복수(複數)였다. 중세적 문명론은 천(天)․지(地)․인(人)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적 시공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단수가 된 건 20세기 근대의 산물이다. 오직 인간의 활동만으로 역사를 구성하게 되면서 시간은 단 하나의 척도로 가늠되었다. 시간의 ‘주름들’이 얇게 펼쳐지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일직선으로 늘어서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간은 계산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대상을 수로 측정할 수 있다는 건 모든 것이 동일한 질량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균질화!

모든 시간이 동일한 질량으로 이루어졌다고? 오, 그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사랑하는 이와 뜨겁게 교감하는 시간과 증오와 분노로 마음지옥을 헤매는 시간, 혁명적 열정으로 바리케이드 위를 지키는 전사의 시간이 어떻게 동질화될 수 있단 말인가? 토굴에서 7년 동안 면벽하는 달마 대사의 시간과 아무런 목표도 의지도 없이 방황을 거듭한 나의 20대가 어찌 같은 척도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을 수로 계산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강제한다.

그 이유는 바로 ‘시간이 돈’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균질화하는 배후의 동력은 화폐라는 ‘숨은 신’이다. 시간은 돈이다! 돈이기 때문에 단 한순간도 헛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시간을 낭비하는 자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고귀한 가치처럼 내세우는 ‘노동의 신성함’ 역시 그 기저에는 ‘시간의 화폐화’라는 원리가 작동한다. 그러므로 상식처럼 통용되는 ‘노동/게으름의 이분법’은 사실 돈이 되는 ‘짓’을 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자신이 아무리 즐거워도 돈이 안 되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스스로 알아서 죄의식을 느낀다. 자신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국가와 인류에게. 속도에 대한 신앙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속도의 문화는 화폐화된 시간의 단선성 그 자체에 있다. 잘게 쪼개서 화폐로 계산하고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강제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피로함.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맹목의 리듬, 속도! 이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삶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죽거나 나쁘거나!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외부’를 꿈꾸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속도의 파시즘’이라 할 수 있으리라. 속도의 파시즘은 20세기 초 기차와 함께 이 땅에 도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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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어떤 길을 가다가 맞은편에서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는 사람과 만났다고 할 때, 우리는 다만 우리가 걸어온 쪽의 길만 알 뿐 상대편이 걸어온 쪽의 길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와의 만남에서 그가 걸어온 길을... 말하자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너’라는 완전한 관계의 과정에 있어서도,우리는 다만 우리가 살아온 양상에 따라서 우리가 살아왔다는 것, 우리가 걸어온 길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상대편이 걸어온 길은 다만 우리에게 마주쳐지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그 길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만남 속에서 그것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마치 만남 저편의 어떤 것인 양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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