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단수(單數)가 아니다. 단수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일직선 위에 배열하는 것을 뜻한다. 시간이 단수라고 여기는 한, 앞의 물음들은 그저 불가지(不可知)나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시간은 단수가 아니다. 유(有)와 무(無)의 경계를 넘나들고, 관현악의 화음처럼 중첩되어 있으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다. 시공간이 연출하는 이 화려한 퍼레이드를 목격하면서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선분 위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것들을 그저 ‘포스트모던’의 징후로 돌리는 건 적절치 않다. 분명 근대 이전에도 시간은 복수(複數)였다. 중세적 문명론은 천(天)․지(地)․인(人)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적 시공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단수가 된 건 20세기 근대의 산물이다. 오직 인간의 활동만으로 역사를 구성하게 되면서 시간은 단 하나의 척도로 가늠되었다. 시간의 ‘주름들’이 얇게 펼쳐지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일직선으로 늘어서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간은 계산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대상을 수로 측정할 수 있다는 건 모든 것이 동일한 질량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균질화!

모든 시간이 동일한 질량으로 이루어졌다고? 오, 그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사랑하는 이와 뜨겁게 교감하는 시간과 증오와 분노로 마음지옥을 헤매는 시간, 혁명적 열정으로 바리케이드 위를 지키는 전사의 시간이 어떻게 동질화될 수 있단 말인가? 토굴에서 7년 동안 면벽하는 달마 대사의 시간과 아무런 목표도 의지도 없이 방황을 거듭한 나의 20대가 어찌 같은 척도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을 수로 계산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강제한다.

그 이유는 바로 ‘시간이 돈’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균질화하는 배후의 동력은 화폐라는 ‘숨은 신’이다. 시간은 돈이다! 돈이기 때문에 단 한순간도 헛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시간을 낭비하는 자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고귀한 가치처럼 내세우는 ‘노동의 신성함’ 역시 그 기저에는 ‘시간의 화폐화’라는 원리가 작동한다. 그러므로 상식처럼 통용되는 ‘노동/게으름의 이분법’은 사실 돈이 되는 ‘짓’을 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자신이 아무리 즐거워도 돈이 안 되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스스로 알아서 죄의식을 느낀다. 자신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국가와 인류에게. 속도에 대한 신앙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속도의 문화는 화폐화된 시간의 단선성 그 자체에 있다. 잘게 쪼개서 화폐로 계산하고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강제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피로함.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맹목의 리듬, 속도! 이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삶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죽거나 나쁘거나!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외부’를 꿈꾸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속도의 파시즘’이라 할 수 있으리라. 속도의 파시즘은 20세기 초 기차와 함께 이 땅에 도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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