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지말아야지 맨날 다짐을 하건만,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른 날이면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나온다. 그리도 자제했건만 '이건 지금 사야 하는 책이야!'라는 내 속의 나 아닌 나가 나를 대신해 계산을 끝내버린다.
정신을 차려보면 책이 손에 들려있고 심한 자괴감에 빠져 하루 종일 자책하곤 한다. 하지만 맨날 그런 건 아니다. 어제 같이 대어(?)를 낚으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읽고 있으면 흐뭇해지는 바보같은 나를 발견하게 되니까.
어제 알라딘 신림 중고 서점에서 구입한 책은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주저인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이다. 예전에 학교 철학개론 교과서에 안셀무스의 '신의 존재론적 증명'이 수록되어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이 무슨 말같지도 않은 증명인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읽으니 그의 치밀한 논증에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그가 책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물리적 강도의 표현은 분명히 <베르그손>의 <시론>에서도 비슷한 논의를 확인한 바 있다. 결국 베르그손은 안셀무스의 이 책을 읽은 것이 분명하며, 베르그손의 이런 강도에 대한 논의는 11세기까지 소급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 알라딘 신림점에서 한 번 사려다 놓친 책인데,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는 중이다. 번역도 정말 잘 돼 있어 술술 읽힌다~
사실 복수의 책을 병행하여 읽고 있는 지라 안셀무스의 저서를 읽는 건 좀 모험이었다. 요즘 체홉으로 인해 다시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이기에. 체홉의 단편들은 정말 재미있고 저절로 몰입이되며 감동까지 있으니 어찌 안 읽을 수 있으랴.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 바로 그의 다른 단편집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하루만에 다 읽고 보니, 더 이상 체홉의 단편집은 없었다. 그래서 러시학 문학 코너에서 골라든 책이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가룟 유다>이다. 십여 페이지가 남아 있어 오늘 중에 다 해치울 수 있겠다.
안드레예프는 처음 접한 러시아 작가인데, 이 작품은 꽤 매력이 있다. 유다의 행적을 상상력으로 매꾸어 성경과 전혀 다른 해석을 보여주는 작가의 필력은 예사롭지 않다. 다만 열린책들의 번역본과 비교해서 번역의 퀄러티가 떨어지는 점이 많이 아쉬웠다. 상황 상 이해가 여러운 부분이 꽤 있었기 때문. 어쨌거나 이 작품, 읽을 만하다.
마지막으로 지하철에서만 있는 책이 있다. 살림문고본인 <성스러움과 폭력>. 거의 르네 지라르의 저서들을 압축하여 저자 나름으로 정리해 주는 내용인데, 나름 읽을만하다는 생각이다.
더는 책을 사지 말아야 하는데, 항상 다니는 길목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는지라, 걱정이다. 그냥 지나쳐 가다가 다시 돌아가 돌아봐야 직성이 풀리니....그럼 손에 책이 들려 있고...ㅜㅜ
정신 없는 와중에도 알라딘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