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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운 책이다.
팟캐스트 책읽아웃 삼천포책방을 듣다가 김하나 작가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언급하고 지나가서 보관함에 담아두었는데, 절판되었고 마침 도서관에 있어 빌려보게 되었다. 내용도 전혀 몰랐는데,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직전에 읽은 <악의 해부>에서 다루고 있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다.
레오폴드 거스키는 나치를 피해 고향을 떠나 3년이나 없는 존재처럼 숨어 지낸다. 그는 사랑을 잃고, 혈육을 잃고, 고향을 잃고, 첫 작품을 잃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것 같은, 자신이 죽어도 누구도 알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또다른 화자 알마는 십대 소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의 유래가 된 <사랑의 역사> 속 주인공 알마가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찾아나선다.
한편에서는 레오폴드가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분투하고, 한편에서는 알마가 죽은 아빠를 그리워하는 엄마를 위해 두사람의 사랑의 증거인 <사랑의 역사>에 대해 파헤친다. 접점에 이르러, 레오폴드는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존재를 회복한다.
그냥 읽어도 좋은 소설이지만, 옮긴이의 말을 보면 나로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퍼즐 조각들이 많이 숨어 있는 모양이다. 많이 아는 이는 더 많이 즐길 수 있겠다.
다시 출간되면 사서 소장하고 싶은 책.
엄마는 아빠와 처음 만났던 여름만큼이나 생생하게 아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은 포기해 버렸다. 엄마는 복잡한 생명체로서는 유일하게, 며칠 동안 물과 공기만으로 버틸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종(種)의 원조가 될 만도 했다.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머리만 그리려면 전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줄리언 외삼촌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파리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모든 풍경을 포기해야 한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한정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하늘을 전부 가진 척하는 것보다는 어떤 것을 아주 조금만 갖는 편이 우주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엄마는 이파리나 머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선택했고, 아빠에 대한 그 하나의 감정에 기대고 싶어서 이 세상 전부를 희생했다. -67쪽
죽음의 두려움은 1년이나 지속되었다. 나는 누가 유리잔을 떨어트리거나 접시를 깨도 울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 건 아니다. 더 절망적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늘 나와 함께 있는 무언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마치 발목에 돌멩이를 매단 것처럼 난 이 의식을 질질 끌고 다녔다. 어딜 가더라도 따라왔다. 머릿속으로 슬픈 노래를 만들곤 했다. 떨어지는 이파리를 애도하는 노래도 불렀다. 내 죽음을 백가지로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장례식은 늘 같았다. 내 상상력의 어딘가에서 붉은 양탄자가 깔렸다. 죽을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비밀스럽게 죽지만 나의 위대함은 늘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인생이 마감될 수도 있었을 텐데. -177쪽
한 번은 내가 아무 데라도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민자였고, 그들이 나를 찾으러 오리라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살수를 저지르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며 살았다. 표를 어디에서 사야 하냐고 묻지 못해서 기차를 여섯 대나 놓친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기차에 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은 그러지 못한다. 화장실 물을 내리는 걸 깜빡해도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자물쇠를 잠그고 여는 게 내 직업이다. 고국에서는 자물쇠를 여는 건 도둑의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 미국에서 나는 전문가였다. -184쪽
고독할 때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었다. -186쪽
전쟁이 끝났다. 그는 누이 미리엄과 부모와 다른 네 명의 형제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큰형 안드레의 경우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염두에 두고 추측만 할 따름이었다.) 리트비노프는 진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것이다. 그건 코끼리와 함께 사는 것과도 같았다. 그의 방은 작았다. 아침마다 화장실에 가려면 진실 옆을 간신히 돌아가야 했다. 팬티를 입으러 옷장에 갈 때는 진실이 그의 얼굴에 주저앉지 말기를 기도하며 진실 아래로 기어가야 했다. 밤에 눈을 감을 때면 진실이 위에서 배회한다고 느꼈다. -219쪽
3년 후에 어머니도 잃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보았을 때 어머니는 노란 앞치마를 입고 가방에 물건을 싸고 있었다. 집은 난장판이었다. 어머니는 숲으로 가라고 말했다. "가!" 나는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많았지만 아이처럼 따랐다. 어머니는 다음 날 오겠다고 했다. 우리 둘 다 아는 숲 속의 장소를 골라두었었다. 인간적인 면이 있다면서 아버지가 좋아했던 커다란 호두나무였다. 굳이 안녕이라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쉬운 쪽을 믿기로 했다. 기다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어머니가 스스로 짐이 되리라 생각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깨닫고 그 죄의식에 억눌렸다. 빌뉴스에서 공부하던 프리치도 잃었다. 오, 하느님, 누군가를 아는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가 기차에 탄 것을 본 게 마지막이라고 했다. 사리와 한나는 개들에게 잃었다. 헤르셸은 비에 잃었다. 요세프는 시간의 틈에 잃었다. 웃음소리를 잃었다. 신발을 잃었다. 헤르셸이 준 신발을 잠결에 벗었는데 일어나 보니 신발이 사라졌다. 며칠 동안 맨발로 다니다가 남의 것을 훔쳤다. 사랑하고 싶었던 유일한 여자를 잃었다. 시간을 잃었다. 책을 잃었다. 내가 태어난 집을 잃었다. 그리고 아이작을 잃었다. 그러니,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정신까지 잃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내 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를 알리는 표식이라고는 오직 나뿐 이었다. -237-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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