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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평점 :
여기,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외로운 여자가 있다.
'사람'이 아니라 굳이 '여자'라고 칭한 것은 외로움의 크기에 성별이 기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혼'이라 쓸까 하다가 그만둔 이유는 외로움은 정신의 문제로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육체의 문제라 보는 편이 맞겠다. 주디스 헌, 그녀는 뼛속까지 외롭다.
왜 그녀는 이토록 외로운가?
첫째, 이러쿵저러쿵 해도 여차할 때 손내밀 수 있는 혈족이 없다. 부모 없는 그녀를 돌보아주던 이모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하자, 그야말로 이 세상에 혈혈단신으로 남겨진 것. 다행히도 미성년은 아니었지만, 불행히도 젊지도 않은 주디스는 홀로 생을 무겁게 짊어진다.
둘째, 살을 부비며 친밀감을 느낄 존재가 없다. 아이는 물론이요, 애인도 없고, 반려동물도 없다.
셋째,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 주디스가 일요일마다 찾아가는 오닐 교수, 그녀는 그를 친구라고 믿고 있지만 그는 주디스가 올 시간이 되면 서재로 도망가기 바쁘고, 그 부인만이 마찬가지로 내빼려는 아이들을 단속해가며 주디스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지만, 이 둘을 친구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학창시절 유일한 친구는 요양원에 가 있고...
첫째도 큰 불행이긴 하지만, 둘째와 셋째는 더 참담한데, 이게 결국 외모와 돈 문제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묘사되듯이 주디스 헌의 외모는 '볼품없다'. 얼굴이고 몸매고 어디 한 군데 예쁘지가 않다. 아, 그나마 머리칼이 괜찮다고 나왔던가... 이모의 투병으로 재산도 날아가고, 연간 얼마 정도 연금이 나오긴 한다는데 턱없이 부족하여, 주디스는 최대한 적게 먹으며 돈을 아낄 궁리를 하기 바쁘다.
미모의 여성이 혈혈단신에 빈털털이라 해보자. 그녀에게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더해질 것이고, 많은 남자들이 보호를 자청할 것이다.
부유한 여성이 혈혈단신에 못생겼다고 해보자. 그녀에게는 황금의 후광이 씌워질 것이고, 많은 남자들이 셔터맨을 자청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디스 헌에게는?
진짜 아무것도 없다. 작가가 어떻게 주인공을 이렇게까지 만드냐 싶을 정도로 암것도 없다.
성격도 매력없고 지루해서 아이들까지 도망가는데, 수녀학교 같은 데서 살다가 이모 간병하며 20대를 보낸 여자가 매력이 있기도 어려울 것이다. 미모와 관련 없이 존재하는 매력은 어느 정도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본다. 주디스처럼 아무것도 없는 여자에게 자신감 내지 자아존중감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녀는 타인에게 철저히 자신을 맡긴다. 다른 이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머리 속으로 화젯거리를 모으려 애쓰며 노심초사.
자,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주디스 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녀가 기대기 위해 찾은 대상은 세가지다.
망상, 종교(카톨릭), 술.
이 책을 읽으려는 분들을 위해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나는 주디스 헌이 용감했다고 생각한다. 세가지를 끝까지 밀어부쳤다는 점에서. 정말로, 그녀는 끝까지 간다. 끝장을 본다.
어제 은오님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리뷰를 읽었는데, 이 책의 주디스 헌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삶을 중단하는 사안은 애초에 삶을 시작하지 않는 사안보다 훨씬 선택하기 어려우므로, 주디스는 삶을 놓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묻는다. 나는 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주디스 헌과 같이 삶이 주는 쾌락보다 고통이 훨씬 크고, 대체로 부정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이 객관적으로 명확한 이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이 책을 주디스 헌이 그 답을 찾아 온몸을 부딪히는 이야기로 읽었다. 못생긴 40대 '아줌마'가 온갖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어가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으나, 삶에 대한 그녀의 진지한 태도는 비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 주디스 헌은 나름의 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서 벗어나, 자기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 앞으로의 주디스의 삶에도 여전히 고통이 계속되겠지만, 바닥을 친 자의 단단함으로 보다 성숙하게 자신과 주변을 살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는 것.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생...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