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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스릴러적 요소의 스포일러는 하지 않으려 조심했습니다만, 대략의 줄거리는 나옵니다.
제목을 보고, 첫 장을 읽는 순간 느낌이 온다. 펠리시아, 고생길이 펼쳐지겠구나! <펠리시아의 여정>, 원제는 <Felicia's Journey>인데, 'journey'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특히 멀리 가는)여행[여정, 이동]'이라고 한다. 보금자리로 돌아올 것이 예정되어 있는 '여행'과는 달리 '여정'은 어쩐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펠리시아의 고향인 아일랜드가 가톨릭 국가인 점을 감안해 성경에서 'journey'가 어떻게 쓰이는지 찾아보니 '사역'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모양이다. 신이 주신 임무를 행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은 자는 그 사역에 대한 보상으로 신의 은총을 얻는다. 펠리시아가 여정 끝에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은 펠리시아가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시작되며, 그녀가 떠난 이유를 회상을 통해 보여준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옛날 이웃집 오빠인 조니를 만난다. 그녀는 조니와 사랑에 빠진다.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에 왔을 뿐인 조니는 떠나고, 펠리시아에게 남겨진 것은 뱃속의 아기와 '조니는 영국 버밍엄 북부 지역의 잔디깎이 부품 공장에서 일한다'는 불분명한 정보뿐이다. 펠리시아의 아버지는 영국놈과 만나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임신했다는 그녀의 말에 "창녀"라는 말을 던진다. 아일랜드에서는 1861년 낙태금지법을 제정하여 낙태를 하면 최고 징역 14년에 처했고, 2018. 5.에야 낙태죄가 폐지(여성이 원할 경우 임신 12주 이내에서는 다른 사유가 없어도 임신중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되었으므로, 이 소설이 발표된 1994년에는 낙태죄가 엄연히 존재하였으며, 아버지와 100살 된 증조할머니의 존재로 대표되듯 아일랜드는 엄격한 가톨릭이며 보수적인 국가이다. 그녀에게 어떤 선택지가 남아 있었겠는가? "그런 쪽으로는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해."라고 말하는 7-8살 연상의 남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그의 주소나 연락처를 제대로 받아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는 "전통적인 죄, 탐욕의 죄, 참을성 부족의 죄"를 짊어지고 구원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펠리시아가 영국에 도착해 아무리 수소문을 해보아도 잔디깎이 부품 공장을 찾을 수가 없다. 길을 헤매고 다니는 그녀의 앞에 자꾸만 한 남자, 힐디치가 나타난다. 힐디치는 이 소설을 스릴러소설로 분류되도록 만든 장본인인데, 이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독자는 긴장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대체 어떤 인간인지, 어떤 의도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매의 눈으로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는, 즉 어리고, 순진하고, 이방인이고, 의지할 데 없는 여성을 포착하여 토끼몰이 하듯 모종의 목적을 향해 몰고 간다는 점이 소름을 돋게 한다.
헤매는 펠리시아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인물, 캘리거리는 일종의 종교공동체에서 지내며 전도를 위해 돌아다니는 여성으로, '지상낙원'이 그려진 안내책자를 들고 다닌다. 갈 곳이 없는 펠리시아는 캘리거리를 따라 종교공동체에 잠시 몸을 의탁하지만 곧 그곳을 떠난다. 그 뒤 힐디치가 짜둔 그물에 걸려 결국 그의 집에 머물게 되고, 임신중단 수술까지 받는다. 그러나 펠리시아는 힐디치의 기대와 달리 그의 곁에서 떠나고자 한다.
이제, 아기는 사라졌고 조니를 찾을 가능성도 사라진 마당에 펠리시아가 택할 수 있는 길이 뭐가 남아 있을까? 집을 나와 떠도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쉽게 "집 나오면 고생이야, 얼른 들어가."라고 말하는가. 홈 스윗 홈. 돌아온 탕아가 가족의 품에서 회개하는 스토리에 익숙한 독자라면 펠리시아 역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서로를 얼싸안는 눈물의 상봉을 기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작가는 완전히 반대의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통념의 전복을 꾀한다.
캘리거리가 보여준 '지상낙원'도, 힐디치가 제시한 '거짓 섞인 안락'도 펠리시아에게 구원이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현실이면서도 진실한 연민에 기초한다. 말하자면 '얼굴에 비치는 따뜻한 햇볕'같은 것, "그럴 필요가 없는 어떤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구급차를 부르는 것"이나 "밤에 수프를 가져오는 여자들", "자신의 존재를 부랑자들의 썩은 이에 바치는 치과의사"다. 나는 이토록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소설을 본 적이 없다.
'Felicia'라는 이름은 라틴어 'felix'에서 유래했는데, 그 의미는 'happy, lucky'라고 한다. "밑바닥 인생"에도 따뜻한 햇볕이 비춰질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녀도 이름대로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남은 여정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빌며, 다정한 세상을 위해 작은 선의라도 보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