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퍼시 스노우(Charles Percy Snow, 1905 ~ 1980) 남작은 <두 문화 The Two Cultures>를 통해 서구 문명을 이루는 두 문화의 오랜 갈등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두 문화>를 통해 '과학자'들과 '인문계 지식인'들 간의 불통(不通)을 서구 사회의 문제로 지적한다. 

 

 선진국인 우리 서구 사회는 공통의 문화라는 것을 요구하는 소리마저 잃고 말았다. 우리가 아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주된 지적 관심의 분야에서는 상호간에 의사 소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의사 소통이 결여된 가장 두드러진 예를 내가 이름붙인 이른바 [두 문화]라는 것을 대표하는 그룹의 사람들이라는 모양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그 한쪽은 과학자들로서 그들의 중요성, 업적, 영향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또 한쪽은 문학적 지식인을 말한다.(p75)  <두 문화> 中


  전문화(專門化)와 분화(分化)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과학자들과 인문계 지식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들만의 언어로 말해왔고, 그 결과 공통의 문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스노우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은 무엇일까? 저자는 교육(敎育 education)을 통한 제3의 문화의 창출을 통해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두 그룹, 즉 과학자와 인문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거의 커뮤니케이션이 없고, 상호 이해보다는 일종의 적의 같은 것을 품고 있다.(p75)... 우리들의 시대, 또 우리들이 예측할 수 있는 시대에 있어서의 여러 조건 밑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을 찾는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열려진 중요한 수단은 교육이다.(p76) <두 문화> 中


 제3의 문화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듯이 말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것이 나타나게 될 때, 커뮤니케이션에 따르는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결국은 해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화는 그 본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도 과학적 문화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p86) <두 문화> 中


 그렇지만, 이러한 '과학 - 인문학'의 이분법적인 접근은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 ~ 1936)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부족함이 있다. 그는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Kulturwissenschaft und Naturwissenschaft> 속에서 과학을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으로 구분하면서 이들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먼저 자연과학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두 종류의 경험과학적 작업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에는 자연과학이 있다. '자연'이라는 말은 대상의 측면뿐만 아니라 방법의 측면에서도 자연과학의 특생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자연과학은 자신의 대상을 모든 가치 연관과 무관한 존재와 사건으로 보고 있고, 자연과학의 관심은 이러한 존재와 사건에 타당한 보편 개념과의 관계나,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보편 법칙을 인식하는 것을 향해 있다.(p174)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中


 리케르트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현상으로부터 보편법칙을 이끌어내는 과학인 반면, 문화과학은 특수성과 개성을 발견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다소 거칠게 리케르트의 문화과학을 사회과학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추구. 이것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일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역사적 문화과학이 있다. 이 과학을 지칭하는 말과 관련해, '자연'이라는 표현에 상응하면서 동시에 대상의 측면이나 방법의 측면에서 이 과학의 특색을 드러낼 수 있는 말이 우리에게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이라는 말의 두 가지 의미에 조응하는 두 가지 표현을 선택해야만 한다. 이 과학은 문화과학으로서 보편적인 문화 가치와 연관된 객체, 즉 의미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객체를 다루고, 역사적 과학으로서 이 객체의 일회적 발전을 특수성과 개성에서 서술한다.(p175)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中


  결국, 스노우가 서구 문명을 이루는 두 문화를 '과학'과 '인문학'으로 나누었다면, 리케르트는 '과학'을 '문화과학'과 '역사과학'으로 다시 나누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끝없이 학문을 나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분화의 부작용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학문의 분화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인문계열'와  '자연계열'로 나뉘면서 학생의 향후 진로가 크게 갈리게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수학'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수학을 좋아하면 자연계열로, 좋아하지 않으면 인문계열로 진로를 잡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시절을 보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과학 - 인문학'의 갈등을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스노우의 주장을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오히려, 교육을 통해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스노우의 해결 방안을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제시한 제3의 문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위해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교훈을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 ? ~ 1645)의 <오륜서 五輪書>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니텐이치류(二天一流)에서는 두 자루의 검, 즉 장검과 단검을 이용한 병법을 가르친다. 이때 장검과 단검은 각자 편할 대로 양손에 나눠들면 되는데, 장검과 단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병법을 가르치는 까닭은 양손에 힘을 길러 검을 한 손으로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p15) <미야모토의 무사시의 오륜서> 中 - 병법 35개조 중 1조 - 


 일본의 전설적인 검술가인 미야모토 무사시는 두 개의 검을 사용한 검법(劍法)으로 이름을 떨쳤다. 긴 칼과 짧은 칼을 상황에 맞게 사용할 것을 강조한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우리가 만든 한계상황을 이제는 깨나가야 하지 않을까. 사람에 따라 어떤 분야가 장검이 되느냐는 달라지겠지만, 우리의 삶을 위해서 우리는 양쪽 모두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은 우리 공부의 평생 과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그림] 미야모토 무사시 (출처 : 위키백과)


 장검(長劍)을 선호하는 유파가 있는가 하면, 단검(短劍)을 선호하는 유파도 있다. 이들 역시 진정한 병법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부터 검은 길이에 따라 장검과 단검으로 나누어 사용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힘이 센 사람은 장검을 가볍게 다룰 수 있어 굳이 단검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파에서 단검을 선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들은 단검의 길이가 짧다는 점을 이용해 상대방이 검을 휘두르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재빨리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p134)... 무엇이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므로 무사라면 장검이니 단검이니 한쪽에 편중하지 말고 올바른 병법과 바른 도리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p136) <미야모토의 무사시의 오륜서> 中  


PS. 물론 베르세르크처럼 큰 칼 하나를 아주 잘 써서 성공할 수도 있긴 하다. 드물겠지만...


[그림] 베르세르크 (출처 : http://blog.artlords.com/2018/03/22/the-art-of-berserk-kentaro-mi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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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05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야모토 무사시도 켄신 혹은 오타니처럼
이도류였나 봅니다.

만화 <배가본드>로 보다말다 한 기억이
나네요.

균형 잡힌 학문에 대한 추구, 듣기만 해도
멋집니다. 저로서는 불가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죠.

겨울호랑이 2018-08-05 23:20   좋아요 0 | URL
네... 미야모토 무사시도 말씀하신 것처럼 이도류였습니다. 균형잡힌 공부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보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8-08-06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6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8-11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베르세르크! 끝이 나긴 했나요? 도서대여점이 사라진 이후 끝을 못 봤어요ㅋ

그리스 철학 전후만 해도 서양은 ‘자연철학자‘라고 불렀잖아요. 과학적 탐구부터 인문학까지 두루 공부했으니까요. 다빈치나 괴테(<색채론>: 야매라고 좀 혹평을 받긴 하지만ㅎ;)까지만 해도 인문-자연과학 공부를 확연히 나눠서 한 것도 아닌 거 같고요. 개인의 역량에 따라 차이가 날 뿐. 학문 분과가 시초였겠으나 기술 혁신이 사회 변화를 본격화한 산업혁명 즈음 이후부터 이 분리가 심화된 게 아닌가 싶어요? 동양도 지덕예체 하며 분야를 그리 나누지 않았던 거 같은데(기술, 무예를 아래로 본 문화부터는 문제) 근대 이후부터는 서양 문화 때문에 이리 된 거겠죠.
최근 통섭이니 하며 과학과 인문학적 사고의 조화와 결합을 논하는 건 일종의 회귀일까요ㅎ 많은 걸 겸비하는 게 좋긴 하겠으나 이젠 지식의 총량이 너무 방대하여... 한 300년 뒤에 태어났으면 좀 더 공부하기 편했을라나 싶네요ㅎㅎ 그러나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 거나 지구가 이미 없을 지도ㅋㅋ;;;

겨울호랑이 2018-08-11 15:37   좋아요 1 | URL
<베르세르크>는 아마 작가 자손 대대로 물려가며 완성할 계획인 듯 합니다. <유리가면>과 더불어 끝을 보기 힘든 작품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알아야할 지식도 많아지면서 ‘전문화‘라는 이름하에 극히 일부만 알게 된 것이 현실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에 통하는 법칙이랄까 원리는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면을 바라보는 안목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돌아가는 추세라면 300년 후에는 AgalmA님 말씀처럼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새롭게 변화해야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