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힘을 다해 ‘자기 자신‘을 해부하다가 결국 ‘인간‘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책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고전을 읽다 보면 이상한 일을 자주 경험한다. 마치 옛 사람들이 빤히 알고나 있었다는듯이 천연덕스럽게 '지금' 막 우리들 눈 앞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들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우리가 '헉. 과연 이 사람이 까마득한 옛날에 살았다는 그 사람이 맞아?'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정말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떨 땐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여러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건들에 부닥쳐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고전을 쓴 저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그 문제를 명쾌하게 바라보며 시원스런 답변을 내놓는 듯한 느낌이 들 때조차 있다. 그들은 마치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전문가들이거든'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작년에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특히나 많이 받았었다. 그때 그 느낌이 얼마나 쎄게 다가왔던지 나는 한동안 그의 책에 나오는 참으로 재치있고 절묘한 구절들을 베끼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분량들을 베껴 쓰는 데도 나는 거기에 투자하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의 글들을 처음에 그저 눈으로만 싱겁게 만났을 때나 곧바로 이어진 두 번째 만남에서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머릿속에 아예 집어넣을 욕심으로 마구 덤벼들면서 그의 글들을 어딘가에 부지런히 퍼담을 때나 두 번 모두 그의 재치와 절묘함이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던 점에 한번 더 놀라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의 글들은 워낙에 질서가 없는 점이 한가지 뚜렷한 특징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질서정연하고 견고한 뼈대를 갖춘 글들, 가령 주춧돌과 기둥들과 지붕들이 저마다 제 역할을 뚜렷이 보여주는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그런 글보다 훨씬 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만큼 그의 글은 이리저리 제멋대로 술술 굴러다니는 듯하면서도 막힘이 없고, 방자하게 흐른다 싶다가도 금세 엄숙함과 근엄한 모습을 되찾는 솜씨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게 그사람의 타고난 재능이고 매력이었다.
 
아무튼 나는 한동안 그의 글들을 커다란 자루에 정신없이 주워 담기에 바빴는데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는 말로 빗대자면 맛있는 음식을 마구 '폭풍 흡입'하는 딱 그꼴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무질서하게 주워 담았던 방대한 글뭉치들은 결국 언젠가는 다시 좀 꺼내 보고 또 도로 집어넣어야 할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루에 담을 때마다 필요한 물목에는 적당한 번지수를 적어둘 필요를 느꼈다. 커다란 자루 속에 다양한 색깔과 무늬와 표식을 적은 또다른 자루를 여럿 만드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잡다한 자루들에는 가령 다음과 같은 제목들이 제대로 붙은 것들도 있고 어떤 자루들은 미처 자루를 만들 겨를조차 없어 그저 생각의 자루에만 그친 경우도 있었다. 결국 자신의 자루를 마련하지 못한 글뭉치들은 아직도 커다란 자루를 제 집 삼아 거기서 제멋대로 뒹굴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그런 크고 작은 자루들을 굳이 체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주욱 나열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책에 대하여... 글쓰기에 대하여... 나이에 대하여... 노년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친구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섹스에 대하여... 철학에 대하여... 운수에 대하여... 습관에 대하여... 용모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은퇴에 대하여... 부자에 대하여... 여행에 대하여... 본성에 대하여... 술에 대하여... 거짓말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등등등

그런데 저런 제목을 단 글뭉치를 담은 자루들은 내가 가끔씩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목적으로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굳이 어디에 공개할 필요가 딱히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어떤 책을 읽다가 책 속의 글들이 내 마음에 아주 쏙 들어올 경우 그 내용들을 부지런히 베끼고 난 다음에 그걸 보따리째 내놓는 경우가 그동안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에 따로 만든 글뭉치 자루들은 그걸 굳이 남들이 두루 구경할 수 있도록 어디에 내놓기가 영 주저되기도 하고 또 '뭉치들을 담은 자루'의 특성상 그 모습을 공개된 장소에 펼쳐 보이기가 어딘가 민망스런 느낌도 들었다. 그 자루들은 그저 벽장 속 어두컴컴한 곳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고 내 생각에도 그런 자루들은 거기에 제멋대로 퍼진 상태로 머물러 있는 모습이 딱 좋았다.

그런데 어제 문득 그런 '숨겨진 글뭉치'를 담은 자루들을 혼자서 이리 저리 들추고 꺼내 보다가 제법 깊숙한 곳에서 이상한 모양으로 널브러져 있는 자루 하나를 발견했다. 그 자루엔 '오입과 거짓말'이라는 다소 야릇한 제목이 붙어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자루의 존재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작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 아주 묘하게 진행되면서 온갖 다양한 추리를 낳고 있을 때, 마침 내가 읽고 있던 몽테뉴의 책 속에서 그 사건에 관한 '절묘한 해답'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쉴 새 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 사건에 대한 얘기는 잠시만 뒤로 미뤄두고 아직은 '오입과 거짓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루의 탄생에 관한 얘기를 조금은 덧붙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나는 몽테뉴가 쓴 매우 두툼한 그 책을 읽는 동안 별로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 작년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이 예고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면서 내게 책을 읽는 데 독특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데 힘입은 바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어째뜬 나는 아까부터 얘기한 그 '이상한 느낌' 때문에 서둘러 그런 제목을 붙이고 그런 글들을 끌어담을 자루를 하나 만들었을 뿐이지 달리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물론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자루를 한번쯤 꺼내 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이 글을 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분명 '거짓말'을 명백히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라도 나는 이쯤에서 미리 그런 말을 해 둘 필요를 느낀다.

어쩌면 내가 다시 들춰낸 그 자루 속에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같은 야한 비디오 테이프가 한 개쯤 담겨 있을 듯한 착각마저 든다. 아주 오래 전에 봤던, 어디에서 봤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영화가 어떤 스토리를 담고 있었는지도 알아볼 겸 '이번 기회에' 찾아 봤더니, 그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딱 내가 찾은 자루 속 글뭉치들과 아주 절묘한 호응을 하고 있었다. 가령 내가 찾아낸 몇 줄의 글들은 눈에 번쩍 띄었다고까지 말해야 옳을 듯하다. "그래함이 가진 발기부전은 그가 행한 부정에 대한 처벌이었을 것이다. ······ " "비디오 테이프가 가진 의미는 아마도 거울과 일기장 두 가지일 것이다. 사람은 거울 앞에 설 때 거짓없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 "

누구나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그냥 묻어두거나 심지어 아예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 완전히 처박아 두는 경우가 가끔씩 있다. 오늘 문득 내가 그런 글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오입과 거짓말'이라는 자루 하나를 발견한 탓에 내 글이 자꾸만 어디론가 딴 데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지만, 결국 내 글이 달릴 궤도는 내가 바로 잡을 일이고 내 글의 종착역은 결국 그 자루에 담긴 글뭉치들에게는 어둠에서 해방되는 곳임을 미리 예고해 놓아야 겠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내가 무엇하러 '자루' 얘기를 쓸데없이 이토록 길게 늘어 놓겠는가.

나는 그 이상한 자루에 담긴 글뭉치들을 꺼내 오랫만에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보았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를 얼마쯤 세세히 비교해 보면서 말이다. 내가 작년 가을 무렵에 이런 제목을 자루에 몰래 붙여 놓고 몽테뉴의 책 속에서 발견한 '묘한 구절들'을 끌어모을 무렵엔 나라가 온통 '거짓말' 때문에 '두 번째로' 시끌벅적할 때였다. 먼저 일어났던 거짓말은 이른 봄에 있었다. 너무나 뻔뻔한 거짓말을 누구에게나 '거짓말처럼 들리도록' 온 국민 앞에서 생방송으로 떠들었던 그 인물은 '입'으로 먹고 산다는 묘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해외'에서 '공무수행중' 일어난 일들에 대해 늘어놓은 거짓말은 금세 들통나는 바람에 너무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일어난-어쩌면 실제로는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거짓말' 사건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시원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앞선 '거짓말' 사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풀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문제'를 잔뜩 떠안고 있었다. 좀 더 부풀려 얘기하자면 그 문제는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들과 수많은 언론 분야 종사자들이 일년 내내 붙들고 씨름할 정도로 중차대한 문제였으며, 한때는 한 사람의 '과거 문제'가 거짓이냐 아니냐에 따라 실로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것처럼 보였고, 그 사건이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동안 사건의 당사자조차 스스로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심을 거듭하는 동안 실로 많은 사람들을 '잠시나마' 오리무중 속으로 꼼짝없이 붙들어둘 정도가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거짓말' 하나 때문에 온통 난리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뜨거운 관심을 보이던 그 문제도 어느새 '벽장 속으로' 깊숙히 자취를 감춘 지 꽤나 지난 듯한 줄 알았는데 그저께 문득 뉴스를 보다가 스쳐 지나가듯 '자막 형태'로 내 눈에 우연히 띈 게 결국 탈이 되고 말았다. 잡다한 뉴스에 관심을 끊은지 오래인 내게 그 자막은 결국 글뭉치를 담은 그 자루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게 나를 부추겼고, 오래 전에 내가 벽장 속에 처박아 둔 글뭉치들조차 드디어 세상 구경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며 내심 들뜬 분위기로 반기는 듯했다. 엊그제 내가 자막으로 봤다는 그 뉴스의 제목을 여기에 직접 옮길 필요까지는 차마 느끼지 못하겠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싶은 분들은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으시더라도 꾹꾹 눌러 참으시고 잠시만 시간을 내어 저 손가락을 따라 한번 다녀오시라. ☞ 여기

많은 분들이 이미 오래 전에 이와 같은 결과를 충분히 짐작했을 듯하다. 그런데 나는 남들이 '진실 혹은 거짓말'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이리저리 제멋대로 옮겨 다닐 때 '진실'을 먼저 알고 있었다는 태도로 그 사건을 말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나는 마침 그때 운이 아주 좋아서 그 사건을 둘러싸고 '거짓말 논란'이 한창 뜨거울 때 '거짓말의 묘한 얼굴'을 아주 절묘하게 밝혀 놓았던 몽테뉴의 글들을 발견했을 뿐이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몽테뉴의 글들이 너무 절묘해서 그 글뭉치들을 어떤 자루에 부지런히 옮겨놓는 일에 열중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이 글이 혹여 남의 불행을 보고 묘한 쾌감을 느끼는 고약한 성미를 드러내는 글은 아닐까 싶어 공개하기가 몹시 주저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하나다. '거짓말'이 얼마나 놀라운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특히나 그것이 '오입'과 결부되었을 경우에 대해서 몽테뉴가 얼마나 예리한 생각과 현명한 판단을 우리 앞에 내놓고 있는지 너무나 놀라서 내가 뒤늦게라도 적당한 때를 틈타 이런 식으로 말해 보고 싶은 것뿐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권에 영합하는 언론사의 '특종 보도'에 어른거리는 비열함과 완력에 더해, 칼자루를 쥔 권력자들의 포악한 만행에 치를 떨며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었을 듯했던 우리들의 '슬픈 영웅'이자 '호위무사'를 자칭했던 그분만 너무 우스운 꼴이 된 게 아닌가 싶어 몹시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 여기


 

 

 

 

 

 

곱사등이를 보고

모든 일을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하는 자가, 자기의 진실한 존재는 사람들에게 감춰 두고 가면을 씌워서 보여 준다면, 그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곱사등이를 보고 체격이 잘생겼다고 추어올려 주어 보라. 그는 그것을 욕으로 들을 것이다. 그대가 겁보인데 사람들이 용감한 사람이라고 숭배한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대일까? 그대를 딴 사람으로 본 것이다. 누가 수행원 중의 가장 변변찮은 한 병사를 장수로 잘못 알고 올리는 인사를 그가 만족하게 받는다면, 나는 그 꼴을 똑같이 귀엽게 보아 줄 것이다.(933쪽)

(나의 생각)
장렬하게 전사한 어느 '호위무사'를 떠올리게 한다.                       (<---- 이 글은 2013. 9.21 기록임)


이번에 문득 든 생각은 그토록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 그 '호위무사'가 『몽테뉴 수상록』이나 혹은 내가 최근에 읽었던 고대 그리스 비극 가운데『아이아스』를 미리 읽어보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그 분이 설사 그런 책들을 모두 읽었다손 치더라도 '분노'라는 무시무시한 무기 앞에서 결국 그 스스로 찔려 죽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이아스'의 분노에 아무리 깊은 감명을 받았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맞닥뜨리게 마련인 '불처럼 타오르는 분노' 앞에서는 결국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게 너무나 뻔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은 참 여러모로 나약한 존재이고, 자신이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조차도 '수많은 벌판'을 지닌 무수한 거짓말로 막을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들도 결국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약함만을 무턱대고 드러낸 꼴이 아닌가 싶다. 이런 글뭉치를 담은 자루를 꺼내 들고 긴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나 역시 어리석고 나약하긴 매한가지다.


격정이 지배하는 것

우리의 맥이 극도로 뛰며 흥분을 느끼는 동안은 일을 중지할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가라앉아 냉철해질 때에는 사물들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때에는 격정이 지배하고 격정이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격정을 통해서 보면, 마치 안개를 통하여 보는 물체와 같이 잘못들이 우리에게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 배고픈 자는 음식을 찾는다. 그러나 징계를 사용하고자 하는 자는 벌 주고 싶은 생각에 굶주리고 목이 말라서는 안 된다.(785쪽)


분노라고 하는 무기


다른 무기를 가지고는 우리가 그 무기를 움직이지만, 분노라고 하는 무기는 반대로 우리를 움직인다. 우리의 손이 무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손을 조종한다. 이 분노라는 무기가 우리를 잡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 무기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792쪽)

(나의 생각)

최근에 읽었던 고대 그리스 비극 가운데 소포클레스가 쓴 『아이아스』가 생각난다. 그가 격분했을 때에는 그리스 병사들이 '트로이아에서 훔쳐온 가축들'조차 그가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던 그리스 병사들로 보였다. 그는 심지어 '말'을 기둥에 묶어 두고 채찍질을 하면서 그 말을 '오뒷세우스'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 이 글은 이번에 덧붙인 기록임)


사건을 기다려 보는 태도

나라가 동란에 빠지고 국민이 분열되어 있는 마당에 박쥐같이 휘뚝거리며 마음이 어느 편으로 움직이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훌륭하다거나 명예롭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중도를 취함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길도 취함이 아니다. 그것은 운의 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사건을 기다려 보는 태도이다."(티투스 리비우스) (8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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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 속으로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래 인용문들은 작년 9월에 만든 '오입과 거짓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루에 쓸어담아 놓았던 글뭉치들이다. 이번 기회에 아무런 '가감없이' 그대로 들춰내 본다. 앞서 인용한 글뭉치들도 처음엔 여기에 함께 섞여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배치만 조금 바꿔서 자루 밖으로 꺼내 놓은 것이다.


 * * *


거짓말쟁이

그들은 지각 없게도 제 올가미에 자신이 걸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왜냐하면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그렇게도 여러 가지로 말해 놓은 것을 무슨 기억력으로 모두 둘러맞출 재간이 있겠는가? 나는 우리 시대에 이런 훌륭한 기술을 가졌다는 평판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것은 명성이 뭔지 모르거나 성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44쪽)



 

진실과 거짓말

만일 진실과 같이 거짓말에도 얼굴이 하나밖에 없다면 우리의 사정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면 거짓말쟁이가 말하는 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의 반대는 수없는 얼굴과 무한한 벌판을 가지고 있다.
(45쪽)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641쪽)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크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737쪽)



 

악의

악의는 그 자체의 독을 대부분 들이마시고 제 독에 중독된다. 악덕은 몸의 종기와 같이 영혼에 후회를 남긴다. 이 후회는 항상 제 상처를 긁어서 피를 흘린다.
(886쪽)



 

우리 따위

우리의 개인 생활을 자신에게밖에 보여 줄 데가 없이 살고 있는 우리 따위는, 주로 우리들의 행동을 검열하기 위해서 우리들 속에 모범을 세우고, 그것으로 행동을 심사하며, 거기에 따라서 우리를 칭찬하기도 하고 정제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887∼888쪽)



 

이것을 제거한다면 전부가 와해된다

나는 나를 판결하기 위해서 내 법률과 재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데보다도 거기에 호소한다. 나는 남의 의견을 잘 따라서 내 행동을 억제한다. 그러나 내 의견에 의해서밖에는 행동을 확대시키지 않는다. 그대가 비굴한지 잔인한지, 믿음직하고 착실한지 신앙이 깊은지, 아는 것은 그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불확실한 추측으로 그대를 짐작한다. 그들은 그대의 기교를 보는 만큼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결에 매이지 마라. 그대 자신의 판결에 매여라. "그대가 자신에게 하는 판단을 그대는 사용해야 한다."(키케로) - "양심이 자신에게 해 주는 악덕과 도덕의 증명은 한층 더 막중하다. 이것을 제거한다면 전부가 와해된다."(키케로)
(888쪽)



 

후회

후회는 우리 의지를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를 아무 데로나 되는 대로 끌고 돌아다니는 미친 생각에 대한 반대 심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 자에게 지난 날의 도덕과 순결성을 부정하게 한다.
(888쪽)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자기의 개인 생활에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훌륭한 인생에서 보는 일이다.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줄리우스 드루수스가 장인(匠人)들에게 한 말은 점잖은 말이었다. 장인들이 그에게 3천 에퀴만 내면 그의 집을 전과 같이 이웃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대답했다. "내가 6천 에퀴를 주겠으니, 누그든 어느 기둥이나 주춧돌을 들여다보아도 좋게 만들어 놓으라."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888∼889쪽)



 

오입과 거짓말

나는 거짓을 꾸미기에 몹시 힘이 든다.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나는 남의 비밀을 맡아 두기를 피한다. 침묵을 지킬 수는 있다. 그러나 아는 것을 부인하기는 괴롭고 속이 상한다. 정말 비밀이 되려면 그 본성으로 그래야 되지, 의무로 그래서는 안 된다. 왕을 섬기려면, 덮쳐서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고는 비밀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가 오입한 일을 엄숙하게 부인해야 할 것이냐고 밀레토스의 탈레스에게 문의했던 자가 내게도 물어 보았더라면, 나는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오입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다. 탈레스는 아주 다르게 충고하며, 작은 잘못으로 큰 잘못을 막기 위해서 맹세하며 부인하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충고는 악덕을 골라 내는 일이 아니고 늘려 가는 것이다.
(931∼932쪽)



 

이 사람아, 그는 내게 물을 끼얹은 것이 아니야

마케도니아 왕 아르케실라오스가 거리를 지나는데, 누가 그에게 물을 끼얹었다. 그의 부관이 그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이 사람아, 그는 내게 물을 끼얹은 것이 아니고, 나를 다른 누구로 오인하고 그 사람에게 끼얹은 것일세" 하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누가 그에게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자, "그 자가 말하는 것은 내게 관한 일이 아니고" 하고 말했다.(933쪽)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자와 마찬가지로 애써 가며 사실에 대비하는 자를 비웃는다. 마누라를 새치기당한 수치는 지워질 수 없다. 한번 걸리면 영원히 걸린 것이다. 그것에 징벌을 주면 잘못한 일 자체보다도 더 사실을 드러내 놓게 되는 셈이다. 알려지지 않은 의문을 풀어서 우리들의 개인적인 불행을 드러내고 비극의 무대 위에 나발을 불어 대면 보기 좋은 꼴이다. 그것은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이다. 왜냐하면 착한 아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은, 그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괴롭고도 쓸모없는 지식은 피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960∼961쪽)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나는 점잖게 그리 꼴 흉할 것 없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사람 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활달한 대장부는 그 때문에 동정을 받아도 경멸은 받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이 불행을 틀어막게 하라. 점잖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을 저주하게 하라. 그대를 모독한 자는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게 하라. 그리고 천한 자, 귀한 자 할 것 없이 이런 의미에서 소문나지 않은 자인가?

수많은 군대를 지휘한 장군까지도 ······
모든 점에서 너보다 나은 자들도 그렇다, 이 못난아.
 
   (루크레티우스)

그대 앞에 하고많은 점잖은 인물들이 이런 책망에 걸려 드는 것을 보는가? 다른 데서는 그대 일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아마 부인들까지도 그대 일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금실 좋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 말고, 다른 무엇을 조롱하기를 더 즐기는가? 그대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마누라를 건드렸다. 그런데 본성은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로 변화무상하다. 이런 사건이 잦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민거리가 덜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못난 격정이지만, 그것은 또 남에게 상의할 수 없는 일이니 딱하다.

운명은 우리에게 불평을 들어 줄
귀마저 내주기를 거절한다.
 
   (카툴루스) (9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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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4-01-25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은 (현실로) 윤회된다, 오렌님 페이퍼를 찬찬히 읽으면서 새삼 전율이 입니다.
그들이 남긴 말은 어쩌면 현실 속에서도 그토록 딱딱 들어맞는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oren 2014-01-26 12:59   좋아요 0 | URL
몽테뉴만 하더라도 아주 옛날 사람이었는데 그사람의 말로는 "지난 시대의 풍부하고 위대한 심령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내 상상력과 소원의 극한을 훨씬 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인지요.. ㅎㅎ

* * *

그들의 문장은 나를 놀라 넘어지게 하며 감탄으로 넋을 잃게 한다.

나는 늘 마음속에 한 상념과 뒤섞인 어떤 영상을 갖는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와 같이 내가 써 내놓는 것보다 더 나은 형태를 보여 주는데, 나는 그것을 파악해서 전개시켜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상념 자체도 중간쯤밖에 못 된다. 내가 이것으로 추론해 보면 지난 시대의 풍부하고 위대한 심령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내 상상력과 소원의 극한을 훨씬 넘는 것이다. 그들의 문장은 나를 만족시켜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나를 놀라 넘어지게 하며 감탄으로 넋을 잃게 한다. 나는 그들의 미를 판단하며 그 미를 눈으로 본다. 전부를 이해하는 것이 못 되더라도 적어도 내가 그런 것을 써 보려고 갈망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정도까지는 이해한다.

* * *

분노라는 격정, 격정이 갑자기 꾸며낸 궤변

분노는 그 자체에 쾌락을 느끼며, 아부하는 격정이다. 얼마나 여러 번 우리는 그릇된 원칙 아래 혼동되어서, 누가 와서 우리들 앞에 정당한 변호와 변명을 제시하면, 우리는 진리나 실속 없는 일에 대해서 분개하는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옛날의 한 경이로운 예를 기억하고 있다.

피소는 탁월한 도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부하 병사 하나가 꼴을 베러 갔다가 혼자 돌아왔고 같이 갔던 동료를 어디에 두고 왔는지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 자가 그를 죽인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하고 당장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래서 그를 사형대에 올려놓았을 때에 마침 길을 잃었던 동료가 돌아왔다. 군대 전체는 이것을 큰 경사로 여기고, 두 병사는 한참 서로 껴안고 어루만지면서 반가워했다. 그 다음 거기 와 있던 피소에게도 이 일은 대단히 기쁘리라고 기대하고, 사형 집행인이 이 두 병사를 그의 앞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사정은 거꾸로였다. 피소는 수치와 울분으로 아직도 속에서 치밀어오르던 화가 배로 터지며, 그의 격정이 갑자기 꾸며 댄 궤변으로, 홧김에 이 셋에게 죄를 씌우며 모두 형장으로 보내게 하였다. 첫번 병사는 그가 선고를 받았으니 유죄이고, 길을 잃었던 둘째 병사는 그의 동료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으니 그렇고, 사형 집행인은 그가 받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까닭에 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 『몽테뉴 수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