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이 불러들인 사람들에 한해서만 훼방이 용남되는 공간

 

아버지의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그리고 어머니의 감시의 눈길을 벗어나기 힘든 현실에서 그 소녀는 자기 방에서, 밤에 자신의 침대에서 유일한 피난처를 찾는다. 어른이 된 후에도 줄곧 콜레트는 이런 식으로 혼자만의 독서 공간을 추구하게 된다. 안뜰이 딸린 아담한 여관이든, 아니면 널찍한 시골 저택에서든, 세를 낸 침실 겸용 거실에서든, 아니면 파리의 넉넉한 아파트에서든, 가족과 함께든 아니면 혼자든 그녀는 자신이 불러들인 사람들에 한해서만 훼방이 용납되는 공간을(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지만) 따로 두곤 했다. 담요를 포근하게 깐 침대에 쭉 펴고 드러누워서 두 손에 쥐어진 귀중한 책을 자신의 배에 얹고 있으면 그녀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의 단위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221쪽)

 

 

세월까지 멎게 했다는 기분으로 베개에 푹 파묻힐 때 밀려오던 그 기쁨

 

나 역시도 침대에서 책을 읽는다. 어린 시절 수많은 밤을 맞았던 침대 속에서, 천장으로 길을 달리는 차량의 불빛이 괴기스럽게 스쳐 지나치는 낯선 호텔방에서, 방안의 냄새와 소리가 내게는 너무도 낯설었던 집에서, 해무(海霧)로 끈적거리던 여름날의 작은 별장에서, 아니면 산 속의 공기가 하도 건조하여 내가 호흡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옆에 유카리나무 수액을 끓인 대야를 둬야만 했던 별장에서, 침대와 책의 결합은 어느 하늘 밑에 있더라도 나에게 매일 밤 고향을 찾은 듯한 안온함을 안겨다 주었다. 그 누구도 나를 불러내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요구하지 않았다. 나의 육체는 그저 침대 시트 밑에 꼼짝 않고 파묻혀 있을 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벌어지는 일들은 모조리 책 속에서였고, 나는 그 이야기의 변사가 되었다. 삶의 전개도 내가 책장을 넘기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지막 몇 장을 아끼며 책을 내려놓을 때, 마지막 장면은 적어도 내일까지는 일어나지 못하게 책장을 몇 장 남겨 두고서 세월까지 멎게 했다는 기분으로 베개에 푹 파묻힐 때 밀려오던 그 기쁨보다 더 황홀한 즐거움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222쪽)

 

   

특별한 몸가짐과 특별한 자세

 

일부 책은 책 읽기에 특별한 몸가짐을, 즉 독자의 육체가 특별한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자연히 그런 자세에 적합한 독서 장소도 필요하게 된다(예를 들어 콜레트는 '고양이 중에서 가장 현명한' 팡셰트와 함께 자기 아버지의 안락의자에 웅크리고 앉을 수 있을 때까지는 미슐레의 『프랑스사』를 읽을 수 없었다). 종종 책 읽기에 따르는 즐거움은 독자의 육체적 안락감에 크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223쪽)

 

훌륭한 이야기를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사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나에게는 안락의자에 앉아 읽는 책도 있고, 책상에 앉아 읽는 책도 있다. 또 지하철에서나 전차에서, 또 버스 안에서 읽는 책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기차 안에서 앉아 읽는 책은 안락의자에서 읽는 책과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아마 안락의자나 기차에서는 주변으로부터 나 자신을 쉽게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영국 소설가 앨런 실리토도 "훌륭한 이야기를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사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이다. 주위에는 온통 낯선 얼굴인 데다가 창으로 낯선 풍경들이 흐르면 책 속에 펼쳐지는 복잡한 삶은 매우 특별하고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의 마음에 각인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224쪽)

 

꼭 화장실에서 읽어햐 하는 글들이 있다

 

공공 도서관에서 읽는 책들은 다락이나 부엌에서 읽는 책과는 결코 맛이 같을 수가 없다. 1374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침실에 보관하기 위해' 연애 소설 한 권에 66파운드 13실링 4펜스나 지불했는데, 이는 그런 책의 경우 꼭 침실에서 읽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12세기 작품인 『성 그레고리우스의 생애』에는 화장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서판(書板)을 읽을 수 있는 은밀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헨리 밀러도 이에 동의한다. "나의 훌륭한 독서는 화장실에서 이뤄졌다"고 언젠가 고백한 적이 있다. "『율리시즈』에는 문장의 맛을 철저하게 뽑으려면 꼭 화장실에서 읽어햐 하는 글들이 있다." 실제로 "보다 특별하고 망측한 목적으로 쓰이게 되어 있는" 그 작은 공간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는 "결코 침범당할 수 없는 고독이 요구되는 모든 일, 즉 독서나 몽상, 울음, 관능적 쾌락을 위한" 장소였다.(224쪽)

 

 

큰 나뭇가지 밑의 탁 트인 공간에서 시를 읽을 것

 

에피쿠로스 학파인 오마르 하이얌은 큰 나뭇가지 밑의 탁 트인 공간에서 시를 읽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몇 세기 뒤에 지식에 까다로웠던 생트뵈브는 스탈 부인의 『회고록』을 '11월의 나무 밑에서' 읽으라고 충고했다. 셸리는 "옷을 홀랑 벗은 채 바위에 걸터앉아 땀이 다 식을 때까지 헤로도토스를 읽는 것이 나의 습관"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열린 하늘 밑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마그리트 뒤라스는 "나는 좀처럼 해변가나 정원에서 책을 읽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두 가지 빛, 다시 말해 햇빛과 책이 뿜어내는 빛을 한꺼번에 받으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언제나 전기불로만, 방안은 아둑하게 하고 책장에만 불을 밝힌 채 책을 읽도록 해야 한다."(225쪽)

 

 

'책 읽는 행위를 무척 존경하는' 동료들 

 

책 읽는 행위를 통해 공간 자체를 변형시킬 수도 있다. 여름 휴가철 동안 프루스트는 다른 가족들이 아침 산책에 나서기만 하면 곧바로 살금살금 식당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럴 때면 그의 주위에는 벽에 걸린 그림 접시와 금방 어제 날짜가 찢겨 나간 달력, 시계와 벽난로 등 '책 읽는 행위를 무척 존경하는' 동료들만 남았으며, 이런 것들은 비록 말을 건다고 할지라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웅얼거림도 인간의 말과는 달리 프루스트 자신이 읽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결코 흐리게 하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프루스트는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런 축복의 시간을 두 시간 정도 보낼 때쯤 "'지나치게 일찍' 식탁을 차리려고 요리사가 나타난다. 그럴 때도 요리사가 묵묵히 식탁을 차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의무감에서 '그렇게 있으면 불편할 텐데, 책상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시간이 더 흘러-밤에,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뒤에-앞으로 읽어야 할 페이지가 몇 장 남지 않았을 때는 발각될 경우에 예상되는 벌까지 감수하면서 그는 촛불을 다시 밝혔다가 밤을 하얗게 지새곤 했다. 그 이유는 책을 한 권 다 읽고 나면 그때까지 가슴 졸이며 좇았던 구성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열정에 들떠 잠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25∼226쪽)

 

 

진정한 책은 어둠과 침묵에서 탄생해야

 

프루스트가 생의 종말에 가까워 천식의 고통을 덜기 위해 벽을 코르크로 바른 방에 갇혀 지내야 했을 때, 그는 푹신한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린 자세로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진정한 책은 밝은 햇살이나 다정한 대화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침묵에서 탄생해야 한다" 라고. 프루스트의 독자인 나도 한밤에 침대에 파묻혀 책장 위로는 어둑한 노란 불빛이 비치는 가운데 그 신비스런 탄생의 순간을 재연하고 있다.(226쪽)

 

 

오락 이외에 그 무엇, 은밀함 

 

조프리 초서는-아니 그의 작품 『공작 부인의 책』에 등장하는 불면증 환자 부인은-침대 위에서의 독서를 서양 장기보다도 더 훌륭한 오락으로 여겼다.

 

하지만 침대에서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에는 오락 이외에 그 무엇이 있다. 바로 은밀함이다. 침대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자기 중심적인 것으로, 절대 흔들림이 없고 세상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며 일상의 사회 전통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또 그런 책 읽기는 욕망과 죄스럽기까지 한 나태의 영역인 침대 시트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금지된 장난을 하는 듯한 스릴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존 딕슨 카, 마이클 이니스, 앤터니 길버트의 탐정 소설에-이 작가들의 책을 나는 모두 사춘기 시절 여름 방학 때 읽었는데-이상야릇하게도 호색적인 색채를 불어넣었던 것도 바로 그런 한밤의 독서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침대로 가져간다'는 일상적인 문구도 나에게는 언제나 관능적인 기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226∼227쪽)

 

침실이야말로 유일한 피난처

 

귀족풍 소설을 주로 썼던 미국의 여류 소설가 에디트 워튼에게는 침실이야말로 19세기 규범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읽고 쓸 수 있었던 유일한 피난처였다. ······ 침대에 파묻히면 그녀의 신체도 자유로웠고, 그녀의 펜도 자유로웠다. 자유롭기는 책 읽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은밀한 공간이면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왜 그 책을 선택했는지 아니면 그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런 공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워튼은 한때 베를린의 에스플라나데 호텔에서 "호텔방에 침대가 적절하게 놓여 있지 않아 약간의 히스테리 증세를 느꼈고 침대를 창문으로 향하도록 다시 정리하고 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베를린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도시란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고까지 한다.(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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