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건 책이 아닐세

 

동무여, 이건 책이 아닐세,

이걸 건드리는 이는 사람을 건드리는 걸세,

(지금 밤인가? 우리 여기 홀로인가?)

그대가 잡은 것, 그리고 그대를 붙잡은 것은 나일세,

나는 책장에서 그대 두 팔로 튀어 안기네-죽은 것이 나를 불러내는구려.

 

(241쪽)

 

휘트먼도 그의 시어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세월이 흘러 수정과 증보를 거듭했던 『풀잎』의 '임종' 판에서는 이 세상도 그의 시어를 '자극'하지 못하고 원초적인 목소리로 남는다. 휘트먼도 그의 시어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세상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펼쳐져 있는 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774년에 (휘트먼도 존경해 마지않았던) 괴테는 이렇게 노래했다.

 

자연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책인지 보라,

잘못 이해할 순 있을지언정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지 않은가.

 

 

이제 1892년 죽음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휘트먼도 여기에 동의했다.

 

모든 대상에는, 산, 나무, 그리고 별-이 모든 생성과

죽음에는,

서로의 의미의 한 부분으로서-서로에게 진화한 존재로-각각의 표면 뒤에는

비밀의 신비한 암호가 고스란히 오므린 채 기다리고 있구려.

 

(241∼242쪽)

 

 

자연이 펼쳐지는 곳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

 

"훗날, 이따금 여름과 가을철에 나는 일주일 동안 시골이나 롱아일랜드 해안에서 보내곤 했다. 그곳의 확 트인 공간에서 나는 구약과 신약을 탐독했으며(아마도 나에게는 그 어느 도서관이나 실내 공간보다 유익했는데-어디에서 책을 읽느냐에 따라 책 읽기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셰익스피어와 오시안, 그리고 호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등의 작품 중 번역이 가장 뛰어난 판과 독일어로 된 『니벨룽겐의 노래』, 고대 인도의 시, 그리고 다른 걸작 한두 편, 특히 단테의 작품에 열중했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 대부분을 나는 무성한 나무슢에서 읽었다." 그리고 휘트먼은 이렇게 묻는다. "그런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왜 진한 감동을 받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그것은 아마 내가 묘사했던 것처럼 자연이 펼쳐지는 곳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태양 아래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과 전망, 혹은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책을 읽었으니······." (244∼245쪽)

 

 

독서 행위에서 서로를 비추는 존재

 

휘트먼이 볼 때 텍스트와 작가, 독자, 그리고 이 세상은 독서 행위에서 서로를 비추는 존재였다. 서로를 비추는 이런 행위의 의미를, 그는 그런 행위들이 벌어지는 우주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까지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끊임없이 확대해 나갔다. 이런 연계선상에서 보면 독자는 작가를 반영하고(그와 나는 하나다), 세상은 한 권의 책(신의 책, 대자연의 책)을 반영하고, 책은 곧 피와 살이며(작가 자신의 살과 피이지만 문학적 변형을 통해 나의 것이 된다), 이 세계는 판독해 내야 할 책이 된다(작가의 시는 나의 세상 읽기가 된다). 휘트먼은 한평생 책 읽는 행위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천착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독서 행위는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하면서 그 행위에 참여하는 요소들의 은유이기도 하다.(247쪽)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

 

스페인 태생의 미국 철학자인 조지 산타야나는 "이 세상에는 이름 모를 독자가 여백에 갈겨 쓴 각주나 논평들이 텍스트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책도 있다. 이 세상도 그런 책들 중 하나이다" 라고 덧붙였다.

 

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249쪽)

 

 

어떤 책은 음미해야 하고 또 어떤 책은 삼켜야 하고

 

책 읽기는 은유의 수단으로 작용하지만 책 읽기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부터 은유로 인식되어야 한다. 작가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텍스트를 놓고 퇴고를 거듭하고, 하나의 줄거리를 위해 설익은 아이디어를 내놓고, 장면에 풍취를 더하고, 논쟁의 뼈다귀에 살을 붙이고, 돈을 노린 대중적인 요소들을 지루한 산문으로 녹여 내고, 삶의 한 단편에다가 독자들이 덥썩 물 만한 암시를 담느라 겪게 되는 고충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 책 읽는 사람들도 책 한 권을 음미하고 있다거나, 책에서 자양분을 섭취하고 있다거나, 또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거나, 아니면 지루해서 진절머리를 냈다거나, 어느 문장을 몇 차례 반추했다거나, 어느 시인의 시구를 낭랑하게 낭송했다거나, 시에 흠뻑 빠졌다거나, 탐정 이야기를 읽는 재미로 산다는 따위 이야기를 한다. 공부하는 기술에 관한 에세이에서 16세기 영국 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어떤 책은 음미해야 하고 또 어떤 책은 삼켜야 하고 극히 일부는 씹어 소화시켜야 한다"고 공부 방법을 분류했다.(250∼251쪽)

 

 

너의 마음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너의 육신을 불멸로 만들란 말야.

 

1695년경에 이르러 은유가 언어에 어느 정도 깊숙이 파고들었는가하면, 윌리엄 콩그리브가 『사랑을 위한 사랑』의 서막에서 은유를 패러디할 정도였다. 이 장면에서 학자연하는 발렌타인이 자기 종자(從者)에게 "이놈아, 읽고 또 읽어! 너의 식욕을 고상하게 하란 말야. 가르침을 좇아 사는 법을 배우라고. 너의 마음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너의 육신을 불멸로 만들란 말야. 읽으면서 눈으로 자양분을 취해. 입은 굳게 다물고 이해의 되새김질을 하라구." 그러자 "주인장 어른이나 이 종이 음식으로 살이나 뛰룩뛰룩 찌우시지요"라고 그 종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한 세가도 채 지나지 않아 존슨 박사는 테이블에 펼친 책을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읽었다. 존슨 박사는 전기를 쓴 보즈웰은 "그는 마치 책을 삼키려는 듯 게걸스럽게 읽었는데, 어느 모로 보나 그의 공부 방식 그대로였다"고 적고 있다. 보즈웰에 따르면 존슨 박사는 "(저질스런 직유법을 쓴다면) 코앞에 놓인 음식을 먹으면서도 나중에 먹으려고 발로 뼈다귀를 잡고 있는 개를 닮아, 한 가지 오락거리를 늘 준배해 두려는 욕구에서, 저녁 식사 시간에도 책을 식탁보로 덮어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고 한다.(253쪽)

 

 

어떠한 책 읽기도 결코 완성이 될 수 없는 이유

 

한 권의 책이랄 수 있는 이 세상은 이 세상이라는 텍스트에서 글자 한 자에 해당하는 독서가에 의해 게걸스레 먹힌다. 이리하여 독서의 끝없음을 위해서 순환적인 은유가 끊임없이 창조된다. 우리 존재는 읽은 만큼 성장한다. 그 순환이 완성되는 과정은 단순히 지적인 과정만은 아니라고 휘트먼은 주장했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지적으로 읽어 어떤 의미를 파악하고 어떤 사실들을 지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텍스트와 독서가는 서로 한데 얽히면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택스트를 섭취하여 텍스트가 가두고 있던 무언가를 풀어 낼 때마다 그 텍스트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휘트먼이 자신의 시를 거듭 손질하고 다시 펴내면서 믿었던 것처럼, 어떠한 책 읽기도 결코 완성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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