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속의 던적스러움

 

  ‘작은 패거리’에 속하려면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건 그룹이 은연중에 내세우는 수칙 가운데 하나로, 그 해에 베르뒤랭 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부인 말처럼 ‘그토록 바그너를 멋지게 연주할 수는 없다!’ 거나, 플랑테나 루빈슈타인 ‘저리 가라 싶게’ 연주한다는 평가에 따라야만 했고, 또 코타르 박사가 내린 진단이 포탱 박사를 능가한다는 점을 수긍해야만 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의 사랑」도입부에 나오는 말이다.

 

 

  프루스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까지 귀족 문화가 건재했던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는 살롱 모임이 유행했다. 위에 나오는 베르뒤랭 같은 유한마담이 주로 파티의 주관자였는데, 장소도 제공하고, 물주도 되면서, 참석자까지 선별했다. 시쳇말로 ‘오야붕 마음대로’ 마담 역할을 수행했다. 교양 있는 모임도 많았지만 패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그룹에서는 은근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곤 했던 곳이 살롱의 마담 자리였다.

 

 

  놓인 숟가락만 차지하면 되는 손님 입장에서는 베르뒤랭이 주도하는 패거리 분위기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부인의 드넓은 드레스 폭 한 자락을 잡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맘 깊이 안도하게 된다. 사람이 모이면 으레 편을 만들게 되는데, 권력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가진 자 위주로 재편된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이 결속감을 가지려면 거기에 걸맞은 적이 있어야 한다. 합치고 뭉치는 이면에는 ‘우리가 남이가’란 정서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결속을 위해서라면 없는 적도 만들어 내야 한다. 적이 없으면 뭉칠 이유가 없다. ‘끼리끼리’ 정서가 유지되는 최고의 비결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되기 두려운 우리는 오늘도 베르뒤랭 부인이 주최한 테이블에 앉아 그저 그런 피아니스트를 향해 휘파람 곁들인 환호를 보내고, 별 하자 없는 포탱 박사의 진단서에 이러쿵저러쿵 의문을 단다. ‘건전한 남’보다 ‘음험한 우리’가 주는 결속의 쾌감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양심을 팔아 산 그 쾌락이 돌아서면 고대 환멸로 남을 것을 알면서도.

 

 

 

 

 

 

2. 흔들리지 않는 지침서

 

  주대환의 신간『좌파 논어』는 술술 읽힌다. 논어를 해체해 저자의 입맛에 맞게 재편했다. 498장 모두를 해석한 게 아니라 149장만을 골라서 해석했다. 저자의 그간 행보에 어울리게 전통적 해석과는 사뭇 다른 진보적 시각의 해석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기록에 남아있는 공자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시각을 견지하는 건 아니다. 조금은 알고 있는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과 학자로서의 자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고 있어 금세 읽힌다.

 

 

저자가 안내하는 것처럼 공자는 당대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앙만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절대적 인품을 보유해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배신도 당하고 비난도 받았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험한 꼴을 자초하기도 하고 멸시도 당했다. 정치판에 기웃대다 비웃음을 사기도 했고 관계 맺기에 서툴러 헛발질도 일삼았다. 한마디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보를 한 이가 공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살이의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따라서 공자의 일상적 삶의 생각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공자가 위대한 것은 훌륭한 인품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가치관이 시대를 떠나 보편타당한 깊이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건 성현들이나 나나 같은데, 그들은 자기 성찰적 사유를 남기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시간만 축낸다. 우리가 성현들을 존경하는 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제대로 내기 때문이다. 공자 또한 그런 좋은 예이다.

 

 

  가장 보수적인 ‘논어’를 가장 진보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작가의 독창적 시도가 신선하다. 논어가 일반 독자에게 학문적 깊이를 강요하는 수단이 될 이유는 없다. 작가의 말대로 논어는 연대의 언어이다. 공자는 주저함이 없이 당을 만들었다. 인과 예가 그 강령이고 진성당원으로 군자라는 캐릭터를 구축했다. 서로 의지하고 격려해야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끼리 지켜야 할 인예(仁禮)의 지침서인 논어, 다양하게 해석될수록 독자로서는 덤을 얻는 기분이다.

 

 

 

 

 

 

 

 

 

 

 

 

 

 

 

 

 

 

 

 

  3. 말의 외연

 

  공자의 언행 및 주변 문객과의 대화를 수록한 책이 『공자가어』이다. 거기의 한 장면. 초나라 공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활을 잃어버렸다. 신하들이 급히 나서 활을 찾으려 했다. 왕은 도리어 느긋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둬라. 어차피 초나라 사람이 주울 것 아니냐. 훗날 이 일화를 들은 공자의 반응은 이랬다. 왕이 한 말에서 ‘초나라’를 뺐으면 좋았을 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사람이 주울 것이다, 라고 했다면 더 훌륭했을 걸.

 

 

  잃어버린 활을 대하는 초나라 공왕은 그 자세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하다. 평소 공왕이 지녔던 백성에 대한 기본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좋은 임금은 언제나 자신을 넘어선다.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 국가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래서도 안 되지만 - 자신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백성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줄 안다. 왕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없는 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화살에 대한 공왕의 가르침의 크기도 공자의 덧붙임 말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다스리는 초나라 사람들에게만 호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자의 생각 그릇은 초나라 사람을 넘어선 ‘사람’ 자체를 다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면 흥미 있는 기록 하나가 더 있다. 공자의 말에 이은 노자의 주석은 이러했다. 공자의 말에서 ‘사람’마저 빼는 게 더 낫겠다고. 그렇다. 잃으면 줍는다. 노자는 공왕과 공자를 뛰어 넘었다. 나라와 사람을 건너 천지우주를 보듬은 것이다.

 

 

  말은 곧 사람이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는 도구이다. 한 마디 말에도 그 사람이 드러난다. 실천적 행동으로 말을 말을 증명하는 사람들은 온전한 신뢰를 얻는다. 큰 사람은 넓게 말하고 크게 아우를 줄 안다. 아무리 정의를 외쳐도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면 잘 말한다고 할 수 없다. 내 것을 위해, 내 앞의 이익을 위해 큰 소리를 내는 것보다 전체를 위해, 모두의 화합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조근거리는 것이 훨씬 나은 말의 사용법이다. 그걸 알면서도 말의 외연을 확장하지 못해 스스로에게 종주먹만 날리는 날들이다.

 

 

 

 

 

 

 

4. 천성으로 착한 이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는 자기 긍정 지수도 높다. 대개 천성이 밝고 명랑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앞뒤 재는 것이 없고, 이것저것 따지려하지도 않는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타자의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약점보다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해낸다. 언제나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한다. 비도적인 것이 아니고, 악행과 거리를 두기만 했다면 그 어떤 것과도 친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순정한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 곁에 있으면 인간사 갈등도 피할 수 있고, 괜히 흰소리나 낸 건 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에서도 자유롭다. 긍정지수가 높은 이들은 타자와의 차이에 민감하지 않거나, 그 차이를 인정하는 선천적 센스가 장착된 사람들이다.

 

 

  새치름한 자만심도 분주한 이기심도 없는 그들 곁에 있으면 착하게 사는 게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건전한(?)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믿는다.) 살인자도 강도도 그런 생각에서 멀지 않다. 그렇기에 누군가 제 삶의 리듬에 끼어들거나, 섣부른 충고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잔소리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다. 치명적인 실수를 했거나 기본적인 도리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닌데도, 충고자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고 그것을 따르기를 바라면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라 해도 듣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언짢고 부담스럽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관이 같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치관은 평생을 통해 시나브로 내 안으로 스며든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그 어떤 방해꾼이 나타나더라도 자신이 가진 장점인 천성의 착함을 급격하게 버리지는 않는다. 악행을 일삼는 이가 하루아침에 제 기질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들은 타자보다는 자신에 솔직하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 진솔하리만큼 객관화한다. 실수는 하되 그것을 곧장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한다. 말하기 전에 먼저 듣기를 즐기고, 약속한 것은 핑계 없이 지키려한다. 학습이 아니라 천성으로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인다. 진심으로 사람 사이의 차이를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처럼 될 수 없다면 그들 반만이라도 따라잡자,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5. 시간의 상대성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간다.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려 한다. 이렇게 쓰는 내 마음이야말로 시간의 노예라는 증거다. 시간을 느긋하게 대하고 있었다면 ‘올해의 절반이 지나려면 멀었네. 이 정도면 괜찮아. 뭔가 해야 할 시간이 아직은 충분한데.’ 이런 맘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게 본심이다 보니 저런 긍정의 태도가 나올 리 없다. 대개의 사람들이 시간에 내몰리며 살아간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확고한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시간에 휘둘려 허둥대는 것만은 분명한 이 아이러니.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제대로 부릴 줄 아는, 확신 서린 자기 관리법이 대견하게 보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시간을 부릴 줄 안다고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할수록 가장 확실한 시간의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한 시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강박이 시간을 시간 그대로 놔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그 아까운 시간에 뭔가를 프로그램화하고 스스로 만족도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을 자초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시간을 제대로 부린다 해도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될 뿐이다. 거기엔 즐기는 시간이 없고, 해결해야 할 시간만 남는다. 잘하는 자 즐기는 자만 못한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시간 없다고 말하는 건 진짜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기화해서 즐길 제대로 된 시간’을 찾지 못한 자기연민과 습관성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미녀에게 구애할 때는 한 시간이 일초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철판에 앉아 있을 때는 일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상대성이다.’ 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시간의 상대성은 시간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데서 출발한다. 시간 없다고 징징 대기에 앞서 시간을 자유롭게 풀었다 조였다 하는 마음 여유부터 찾아야겠다. 당장 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6. 운세의 심리학

 

  신문이나 잡지 한 귀퉁이를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것이 있다. 한 수 더 떠 요즘은 전화 한 통에 사주나 운세를 봐준다는 광고가 실릴 정도이다. 사주나 운세 등에 관한 기사나 광고 등이 예삿일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거기에 의존한다는 말도 된다. 우리 전통 문화의 토양이 사주나 운세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도 이런 현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운세나 혈액형으로 보는 성격 유형 등에 나오는 서술 내용은 사실 변별력이 거의 없다. 대개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바넘 효과 (Barnum effect)라 한다.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학생들에게 각각의 성격 테스트를 한 뒤, 결과와는 상관없이 똑 같은 내용의 결과지를 나누어준다. 그것을 모르는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테스트 결과가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대답한다. 사람에게 있는 보편적 특성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종 점술은 바넘 효과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불안한 심리 상태의 내방자는 이미 상담자가 들려주는 얘기를 믿을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상태에서 막연하고 일반적인 특성이나 확률적으로 높은 사항을 묘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있다는 사실은 인식할 겨를이 없고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만다. 더구나 그런 보편적 얘기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좋은 것들이라면 그것을 정당화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운세 서비스나 점술 등에 의지하는 게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합리적 대안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현대인들은 자신을 맡기고 조력을 구할 만한 데가 없기 때문이다. 단, 유명 철학관이니 족집게 점집이니를 찾아다니는 우리들 불안의 행보도 바넘 효과의 진실을 인식하는 선이라면 과하지 않다는 뜻이다.

 

 

 

 

 

 

  

7. 인권 수난 시대

 

  문명은 발달하고 문화는 확장 되어간다. 지구촌 한마당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니 편 내 편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게 현대 사회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늘 변화가 요구된다. 거기에 맞춰 지적 ․ 물적 토대 역시 날로 풍성해진다.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꽃일 뿐이다.

 

 

  풍요의 노래가 넘쳐날수록 환희의 축포가 터질수록 그 이면에 인권유린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인권 유린은 자연 재해 앞에서 인재 앞에서 사고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일어난다. 불가항력의 산사태로 생겨난 주검들, 뒤집어져가는 여객선 안에서 고통으로 끝내 생을 마감한 영혼들, 납치와 폭력 앞에 고스란히 숨죽일 수밖에 없는 어린 여학생들. 어쩜 그리 인권이란 보호의 보자기는 약자와 여성들만을 잘도 알고 피해 가는지.

 

 

  실시간으로 중계해주는 지구촌 뉴스를 대하다 보면 우리 인류의 미래가 밝기만을 바라는 건 지나친 희망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수단에서는 개종 및 배교를 했다는 이유로 임신 중인 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삼일 간의 개종 시간을 부여했는데도 이슬람교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교수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기독교 남성과 결혼한 여동생이 배교했다며 오빠가 당국에 고발하고 처벌을 원했다.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따르면 아버지가 무슬림이면 자식인 딸도 같은 종교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무장 단체 보코 하람의 여학생 단체 납치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우울한 얘기들만 들려오니 망연자실해질 뿐이다. 삼백여 명에 이르는 어린 여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열망과 힘이 없었다는 두 가지 이유만으로 죄 없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있다.

 

 

  인권 침해는 약자들이 그 표적의 대상이 된다. 가진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당당한 자들보다는 소심한 이들에게,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수난의 화살이 꽂힌다. 가진 것 없고 힘없다고 인권 또한 없는 건 아닌데 왜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지 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8. 기억이라는 고통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나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자의식과잉이란 파도에 휩쓸리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다. 던적스럽게 달라붙는 오염된 해초 같은 일상의 찌꺼기, 시도 때도 없이 증식하는 감염된 치어 같은 잡념들. 스스로를 괴롭히는 그 물결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쓸 수 있다. 자의식의 바다에서 눈물콧물 범벅인 채 가쁜 숨을 내쉬기만 하면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흔들리되 평정심을 유지할 것, 힘들어도 유머를 잃지 않을 것, 연민을 품되 객관적 시선을 확보할 것. - 프리모 레비의『이것이 인간인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이 세 가지로 정의해보았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레비는 운이 좋았다. 화학 전공자였기에 죽음의 가스실 대신 실험실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록했다. 악몽 같은 수용소의 기억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그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 문학으로 남겼다.

 

 

  홀로코스트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그는 무조건 분노하거나 적개심을 드러내는 않는다. 그저 갇힌 자들의 운명에 대해 동지적 연민으로 관찰하고 묘사했다. 인간 심연 깊숙한 본질에 대해 사색하고 통찰했다. 극한 상황에서 얼음 칼 같은 문장을 조각한 프리모 레비의 문장을 보면서 절망한다. 서늘한 칼날이 심장을 파고드는 순간 피톨이 뛰쳐나와 수만 송이 장미꽃으로 피어오르는 이 느낌. 차디찬 칼날로 벼린 기억의 고통을 수만 송이 장미꽃으로 피워내는 레비의 힘, 자의식을 제대로 제어한 그의 문장으로 내 오월의 허기를 채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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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05-23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정말 팜님 책상은 9첩 진수성찬이예요.
매일 편식만 일삼는 저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신랑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시리즈를 샀는데, 저는 쳐다도 안 봤거든요.
님 리뷰 읽고 나니 저도 시작해볼까, 그런 마음이 드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다크아이즈 2014-05-24 08:09   좋아요 0 | URL
단발님, 스완의 사랑 편, 섬세하게 읽으니 무지 재밌네요.
프루스트는 상남자가 아니라 결 고운 여자 스똬일이에요.
들은 이야기로, 기억에 의지해서 이토록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을 건져내다니요.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제대로 보이네요.
책에 관한한 저도 편식주의자입니다.ㅋ

페크pek0501 2014-05-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님의 재주는 여전하고!!!
공감 수가 많은 것도 여전하고!!!

아, 저는 오월의 허기를 어떤 책으로 채울까요?

다크아이즈 2014-05-24 08:09   좋아요 0 | URL
시간에 쫓길수록 공포에 가까운 허기 - 쉬 내려놓지 못하는 욕망의 들끓음. 누가 찬물을 끼얹든지, 그 들끓음 속으로 스스로 빠지든지. 이도 저도 아니니 쫓기면서 허기만 남는다는... 부디 페크님은 평안하소서 ^^*


성에 2014-08-17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 >,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때때로 ' 나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게 편해'
라고 생각해요, 나쁜 짓을 하려면 온갖 머리를 굴리고 힘을 쓰고 하는게
귀찮고 마음이 불편할텐데 그게 나로선 안 되는거지요.
그래서 때로 내게도 ' 동기유발 '---이란게 생기면 평소 순하고 착한데서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럭비공이 되는거죠. 거기까지의 통제가 자신이 없어요.

팜므님 정말 책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모든 글이 내게 의미있게 다가오는데
그 중 하나만 썼어요. 공자님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사유의 기록,
인과 예의 강령으로 이루어진 군자당, 이런 새로운 시각도 인상 깊습니다.

오늘도 톡톡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14-08-19 09:35   좋아요 0 | URL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삶의 철학이 담백하지 못합니다.
어쩐지 찌질하고, 확실히 다혈질이며, 언제나 쪼개지기 쉽고, 자주 옹졸하며...
그래도, 그래도 단단히 견딥니다.
성에님도 잘 지내시지요?

라로 2014-08-19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저저는,,,천성적으로 착한 사람 같아요;;;;;(이 글 써놓고 다른 댓글 달 염치가 없다는;;;;ㅎㅎㅎㅎㅎ후다닥3=3=3===3=33===3==3333333)

다크아이즈 2014-08-19 09:32   좋아요 0 | URL
4번 페이퍼가 아롬님을 맘에 두고 쓴 건 줄 어찌 아셨단 말입니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