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무 쉬운 효도법

 

  엄마가 아는 최고의 회는 붕장어회이다. 젊은 날 부산의 당신 언니네서 먹은 첫 회가 소위 ‘아나고’라 불리는 붕장어였다. 추억 또는 회한으로 버무린 그 맛을 잊지 못한 나머지 엄마는 그 회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 나는 걸로 아신다. 다른 회를 잘 먹어보지 않은 엄마만의 기준으로는 아나고야말로 으뜸 회가 되는 셈이다.

 

 

  뼈를 발라내 부드러워진 붕장어를 탈수기에 돌리면 꼬들꼬들해진다. 그것을 초고추장에 버무려 야채에 싸서 먹는데 엄마 입에는 그보다 더한 천하일미가 따로 없다. 회 종류도 잘 모르고, 회 각각의 고유 맛도 구분할 줄 모르는 나는 엄마의 그 서민적 미감을 ‘익숙한 것에 대한 찬양’의 입맛 정도로 치부하곤 한다. 다만 한 대상의 본질과 주관적 느낌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엄마의 아나고 회’를 통해서 깨칠 뿐이다. 한 주체가 애정을 느끼는 그 무엇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사자에겐 충분한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다.

 

 

  연휴를 맞아 엄마한테 들렀다. 효도하는데 창의성을 발휘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어쩜 해마다 그리 똑 같은 매뉴얼의 효도법만 떠오르는지. 출발 전, 바닷가 시장에 들렀을 때 엄마께 뭘 드시고 싶으냐고 물었다. 엄마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나고 회 한 접시’면 된다고 했다. ‘할마시 과부’가 된, 평소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이웃들과 함께 나눠 드실 거란다. 회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며 맛난 회가 얼마나 많은데 그것만 찾느냐고 핀잔을 해보지만 회에 대한 엄마의 취향은 요지부동이다.

 

 

  마루에서 예의 할마시들과 윷놀이를 하다말고 엄마는 우리 네 식구를 맞았다. 앉은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얼른 시댁에 가서 효도나 하라며 다그친다. 당신은 건강한데다 이웃과 이토록 재미시리 지내니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챙기는 게 도리란다. 나는 안다. 건강하다고 큰소리치지만,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엄마도 실은 성당에 갈 때 지팡이 없이는 안 되고, 그나마 도중에 서너 번은 쉬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이 나이에 큰 병 없고, 자식 우애 있고, 정 낼 이웃이 있으니 더 바랄 게 무어냐’고 진심으로 말씀하신다.

 

 

  사위가 건넨, 알량한 용돈을 그나마 절반 뚝 떼 한사코 마다하는 아이들 주머니에 다시 챙겨 넣는 호호백발의 엄마. 우리 네 식구 탄 차가 골목을 꺾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점 소실점으로 서있는 엄마.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참으며 나는 기어이 ‘아나고 회, 다 식겠다, 얼른 들어가셔!’ 라고 냅다 소리나 지른다. 깊은 손사래가 있는 흔들림 없는 모성 앞에서 이토록 흔하고 뻔해빠진 아나고 회 같은 효도법이라니!

 

 

 

     

 

   2. 빨간 셔츠와 갈색 바지

 

  망망대해, 외항선이 파도를 헤치며 나아간다. 해적선 한 척이 나타나 그 배를 포위한다. 선원들이 허둥댈 때 선장이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위엄을 잃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라고 말한다. 빨간 셔츠를 입은 선장은 선원들과 힘을 합쳐 배에 오르려는 해적들에 맞선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선원들이 생기긴 했지만 무사히 해적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며칠 뒤 망루에 있던 파수꾼이 이번엔 두 척의 해적선이 나타났다고 외친다. 공포에 질린 선원들은 몸을 웅크려 숨을 곳만 찾았다. 선장이 예의 위엄을 갖춘 채 소리쳤다.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 저번에 비해 사상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날 밤 갑판에 나온 선장과 선원들은 별을 바라보며 승리를 자축했다. 존경에 찬 낯빛으로 누군가 선장에게 물었다. “왜 빨간 셔츠를 입으시는 겁니까?” 선장만이 지을 수 있는 위엄한 표정으로 그가 답했다. “빨간색 셔츠를 입으면 부상으로 피를 흘려도 들키지 않는다. 그러면 너희도 두려움 없이 싸움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선원들은 선장에 대한 자신들의 신뢰가 헛되지 않은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다음날 새벽 이번엔 해적선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모두 열 척이었다. 선원들은 당황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빨간 셔츠’의 용감한 선장이 있지 않은가. 침착하게 선장의 지시만 기다렸다. 드디어 선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갈색 바지를 가지고 오라!”

 

 

   비교적 평화 또는 약간의 위험 상태에서는 누구나 본심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다급할 때 그 본심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약하고 비겁하며 위선에 가득 찬 경우라면 저부터 살기 위해 갈색 바지를 찾을 것이고, 원래 강하고 정의로우며 참된 길을 도모하는 경우라면 끝까지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고 명할 것이다. 갈색 바지를 숨기고 있으면서 빨간 셔츠를 잘도 말하는 곳, 뼈아픈 참사 이면을 들여다보면 곳곳이 이런 현상들로 얽혀 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인 걸 어쩌란 말이냐.

 

 

 

 

 

 

 

3. 풍경의 우호성

 

  누구나 자신이 보는 대로 느끼고 자기가 경험한 대로 생각한다. 따라서 누군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기록한 것이 다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느낌의 진정성까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특히 모든 이국적 시선은 진실과는 별개로 신선한 시각이 될 수는 있다.

 

 

  펄 벅 여사는 우리나라를 무한 애정의 시각으로 바라본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작가의 장편『살아있는 갈대』는 그 좋은 예이다. 구한말에서 해방될 때까지 한국의 근대사를 살아간 4대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외국인의 시선에 비친 우리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0년대 초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 차 우리나라를 방문한 작가의 에피소드 한 자락이 자못 흥미롭다.

 

 

  여사는 지프를 타고 경주 안강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황혼녘 지게에 볏단을 가득 진 농부가 역시 볏가리를 잔뜩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묵묵히 들길을 가더란다. 미국인 시각으로 봤을 땐 농부가 무겁게 지게를 질 게 아니라 달구지에 짐을 다 싣고 편하게 소잔등에 올라타 채찍이나 휘둘러야 상식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농부는 소와 짐을 사이좋게 나눈 채 나란히 들길을 가고 있었으니 여사 눈에는 그것이 무척 신기하게 보였나 보다. 여사는 그 한 장면을 보고 급기야 ‘고상한 국민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격찬까지 하게 된다. 여사의 우리나라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우호적인 시선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 목가적 풍경이 ‘고상한 국민적 정서’와 그리 큰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드넓은 땅에다 도로 사정이 좋은 그들 입장에서는 마차에다 곡식과 사람이 동시에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말 달구지도 아니고 소달구지인데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 우리 입장에서는 볏짐을 하나라도 더 옮기기 위해서 농부도 지게를 질 수밖에 없다. 거창하게 자연이나 동물과 공생하겠다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구한말의 농부는 주어진 환경에 맞는 행동 패턴을 취했을 뿐이다. 그것이 작가의 눈에 신선하게 비춰졌을 뿐이다.

 

 

  ‘마차(carriage - 이 경우 이 단어가 맞는지 모르겠다)의 경험’을 가진 눈이 ‘소달구지(oxcart)의 풍경’을 보고 한없이 낭만적 우호성을 펼쳐 보이는 것. 문학이나 예술이 과장된 희망이나 과도한 서정을 조장해서는 안 되겠지만 가끔 이런 대책없고 무한정으로 따스한 눈길이 싫지는 않다. 모두 지쳐 있는 요즘 대한민국 상황이라면 더더욱.

 

 

 

 

 

4. 주는 만큼 받는 상처

 

  사람들을 만나면 의외로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만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쉽게 주고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사람 관계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건 여러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사람 사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다만 개인적인 좋고 나쁨이 있을 뿐이다. 그가 옳고 그른지는 사실 나와 무관하다. 호의적인 그가 좋게 느껴지면 그 사람은 내게 좋은 사람이다. 비호감인 그가 미우면 그 사람은 내게 나쁜 사람이 될 뿐이다. 만인에게 좋은 사람도 없고, 만인에게 나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찍이 심리학자들은 모든 이를 사랑하겠다거나, 모든 사람에게서 인정받겠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친구가 삼겹살집을 차렸다 치자. 내게 호의적인 그미를 위해 나는 신발 벗고 나설 수 있다. 그미 가게의 번창을 위한 것이라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다른 친구들과 일부러 시간을 내 삼겹살을 먹으러 가고, 반상회에 나가 적극적인 입소문도 내준다. 생고기인지 냉동고기인지, 맛은 좋은지 나쁜지, 국내산인지 수입산인지 등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미에게 필요한 것은 미주알고주알 맛 판별하는 맛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응원해줄 친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만약 삼겹살집을 차린 이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미의 가게에 발을 내딛기는커녕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되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 보다 깊은 아픔은 없다고 스스로를 결박한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타인에게 상처 준만큼 내가 그 상처를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받은 상처는 가슴팍에 착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지만, 준 상처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사람이다. 따라서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치유법은 내가 받은 상처로 아파하는 만큼 내가 준 상처로 누군가 아파하고 있겠구나, 하는 셈법을 잊지 않는 것.

 

 

 

 

 

 

  5. 후하다는 것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데는 서투른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호의를 얻을 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신선함을 느끼면서도 혼란스러움을 맛보게 해주는 말이다.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답게 몽테뉴가 대단한 통찰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신선하고,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그의 시선이 어딘지 삐딱하게 보인다는 면에선 혼란스럽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후자는 판단유보해도 되겠다. 내가 잠시 혼란을 느낀 것은 내 통찰력이 위대한 사상가에는 터무니없이 못 미쳤기 때문이란 걸 알겠다.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자유자재로 파악한, 불편한 진실을 꿰뚫은 그의 눈길 앞에서 다만 뜨끔해질 뿐이다.

 

 

  천성 깊숙이 선한 사람들은 태생적 유전자가 ‘주책없이 후하게’ 굴도록 설계된 자들이다. 호의나 베풂은 그들의 자연스런 친구이다. 진심에서 오는 그 호의가 서툰 것인지 영악한 것인지 그들은 생각조차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좋아서 나눔을 실천할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선이다. 호의를 베푸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잠시다. 간사한 게 사람인지라 그 다음의 호의가 이전만 못하거나, 기대하는 호의에 다음 것이 못 미치면 이내 실망하고 의심한다. 몽테뉴의 다음 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받아버린 것은 이미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앞으로 후대 받을 것밖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왕은 남에게 주다가 줄 것이 없어질수록 그만큼 심복을 잃는다.”

 

 

  받는 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그 유효 기간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지나친 베풂은 사람들로 하여금 후대를 기약하게 하고, 그럼에도 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선행을 하리라는 것. 한편으로는 호의를 기대하는 그 사람들을 잃을까, 주는 것조차 조절해야 하는 군주까지 있게 된다는 무섭고 서늘한 통찰. 몽테뉴의 저 한 마디는 순한 사람과 탐욕스런 사람이 함께 살아가도록 운명적으로 조직화된 게 인간사라는 것을 깊숙한 찌름으로 보여주고 있다.

 

 

 

 

 

 

  6. 이 봄날

 

  온 나라가 슬픔의 도가니다. 며칠 째 집단 우울에 감염된 사람들로 넘쳐난다. 직접 고통을 당한 분들에 비할까만 근래에 이토록 안타까움과 갑갑함에 절망해본 적도 없다. 세탁소 옷걸이에 걸려 있는 실종 학생들의 교복들. 며칠 째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처연한 그것을 방송사 카메라가 클로즈업한다. 말없이 비춰주는 그 장면만으로도 또 눈시울이 붉어진다. 슬픔을 덜어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일부러 과장된 명랑을 낯빛에 심는다. 독서모임이 있는 날이다. 자유 토론에 들어가면 오늘도 어김없이 눈물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웃음을 되찾을 묘안을 짜본다. 애송시 낭송 대회를 열기로 한다. 떨어지는 봄꽃에게도, 날아드는 꽃가루에게도, 또한 그 봄을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다. 속울음 삼키며 저마다 준비한 시를 읊는다. 가슴 가득 쌓인 절망의 켜들이 조금이나마 낮아지는 기분이다. 이 시간만큼은 슬픔의 그림자는 잠시 미뤄 놓기로 한다.

 

 

  ‘이 봄바람을 어찌할 거나? / 나름 수양했다는 수양버들도 / 저리 흔들리는데 / 대충 산 나야……. /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지.’ 중년의 나이에도 사랑의 불씨는 살아 있더라, 며 누군가 이 시를 읊었다. 성급한 박수와 환호가 이어질 만큼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기야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던가. 어쩐지 사랑 앞에 시시해진 나 같은 목석파도 시구가 외워질 정도로 이 시는 참말로 진솔하게 와 닿는다. 제목도 시인 이름도 출처도 모른다는 낭송자를 대신해 누군가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수동 화백의 그림 에세이『오늘, 수고했어요』에 나오는「이 춘풍」이란 시다.

 

 

  집단으로 우울해지는 것과 봄은 어울리지 않는다. 집단으로 꽃바람이 나, 이 춘풍 하면서 맘껏 까불대고 한껏 발랄해져도 좋을 이 봄날, 여전한 상실감이 우리 곁을 맴돈다. 수양 쌓았다는 수양버들조차 저리 흔들리고, 대충 산 필부필부들은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 할 이 봄이건만, 지독한 슬픔의 바리게이트는 절벽이 되어 바위가 되어 가슴에 부딪는다. 누가 이리 만들었나.

 

 

 

 

 

 

 

 

 

 

 

 

 

 

 

 

 

  7.어쩜 이다지도 영리한

 

  그림 형제 민담집 중에「영리한 엘제」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리한 딸 엘제를 결혼시키려 하는 남자에게 한스라는 청년이 나타난다. 엘제의 영리함을 전제로 한스가 청혼하자 남자의 아내까지 거든다. ‘저 애는 골목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볼 수 있고, 파리가 기침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저녁 식탁에 오를 맥주 심부름을 하러 지하실에 간 엘제는 머리 위 벽에 걸린 곡괭이를 보고 슬피 운다. 한스와 결혼 뒤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 역시 맥주 심부름을 왔다가 곡괭이가 떨어져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식구(엘제의 아빠, 엄마, 하녀, 머슴 등)와 청혼을 하러 온 한스까지 똑 같은 생각으로 ‘어쩜 이다지도 영리한 엘제일까!’하게 된다.

 

 

  드디어 한스와 결혼하게 되고 그 이후에도 엘제 식 영리함은 발휘된다. 죽이 식을까 염려 되어 일하는 것에 앞서 죽을 먼저 먹고, 배가 부르니 곡식 거두는 것보다는 잠을 먼저 자버린다. 결코 영리하지 않은 엘제에게 실망한 한스는 방울 달린 새잡이 그물을 잠자는 그녀 주변에 친다. 잠에서 깬 엘제는 어리둥절해진다. ‘난 나일까, 아닐까?’ 엘제는 고민하며 방울 소리를 울리며 집으로 달려간다.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스를 향해 집안에 엘제가 있냐고 물어본다. 한스는 태연히 그렇다고 답한다. ‘그럼 난 내가 아니구나.’ 놀란 엘제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방울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은 문을 닫아건다. 결국 엘제는 마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 이후 엘제를 본 마을 사람은 없었다.

 

 

  이 이야기의 첫 문장은 ‘옛날 어떤 남자에게 영리한 엘제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다. 분명 엘제 이야기인데 ‘어떤 남자’인 아버지가 주체로 나온다. 남성적 시각으로 바라본 엘제를 그리는 셈이다. 엘제는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욕망(어쩌면 피해의식일지 모를)과 거기에 동조한 엄마, 또 다른 아버지 격인 한스의 눈으로 본 엘제가 있을 뿐이다.

 

 

  엘제는 영리했을까? 동화나 민담의 일반적 해피엔딩을 따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가면을 벗어 던지고, 외롭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고 믿고 싶다. 남성적 욕망의 덫에 걸려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8. 보너스

 

 

 

 

   **좋아하는 알라디너 분이 소장한 책을 내놓았다.  갖고 싶은 책들이 꽤 많았다. 조금의 망설임없이 그 중 몇 권을 주문했다. 대여섯 권 쯤 되었을까? 그런데 배달된 책은 무려 한 박스!  애초에 내가 주문한 책이 무엇인지 까먹을 정도로 다 맘에 드는 책 뿐이었다. 원서부터 시집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나긋나긋하고 여리여리한 목소리까지 덤으로 선사해주신 그미 전화를 수업 중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받지 못했다. 더구나 난 갱상도 토박이 아닌가. (사투리 컴플렉스 있어서, 주눅이 마구마구 들었다. ㅠㅠ)  박스를 뜯었을 때 감동했던 건 맘에 든 책들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미의 섬세한 마음결이 담긴 소품도 한몫했다.  저 독서용 미니플래시를 보라!!  - 내가  책을 받은 건 한 달도 훨씬 지난 것 같다. 이제나저제나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지 했는데, 이렇게저렇게 바쁜 날들에 엎어지다 보니 이제 겨우 알라딘에 접속했다.

 

어여쁜 알라디너님, 늦은 안부 여쭙니다. 여여하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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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05-11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집단으로 우울한건 봄에 어울리지 않는데 이번 봄은 봄도 아닌가봐요.
어머님, 좋아하시는 회 앞으로도 많이 많이 드시고 계속 행복하시기를 바래요~~~

페크pek0501 2014-05-13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리신 글, 잘 읽었어요.

"따라서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치유법은 내가 받은 상처로 아파하는 만큼 내가 준 상처로 누군가 아파하고 있겠구나, 하는 셈법을 잊지 않는 것." - 좋군요...

저는 이런 생각을 취한 적이 있어요. 내가 받은 상처라서 다행이지 이 상처를 내가 남에게 주었으면 어떡할 뻔했나, 하는 생각이요. 때린 사람은 다리 뻗고 못 자는 법... 입장을 바꾸어 보면 차라리 제가 상처 받는 쪽이 낫더라고요.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데는 서투른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호의를 얻을 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 중요한 것 배워 갑니다. 몽테뉴는 천재인 듯...

2014-05-18 0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