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시대의 중국 - 중국은 과연 세계의 지배자가 될까
사토 마사루 지음, 이혁재 옮김, 권성용 해제 / 청림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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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China" 의 이미지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한때 중국제품은 가격 경쟁력만을 우위에 두고 융단 폭격식으로 시장을 점령하는 그야말로 저질상품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짝퉁의 신천지라는 불명예로 인식되어 왔고 지금까지도 세계의 소비자들에게 이런 이미지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 역시 현실이기도 하다. 한때 세계 최강의 국력을 과시했던 중국은 근대화와 제국주의라는 파도에 힘없이 쓰러진 종이 호랑이 신세로 전락했고 사회주의 시스템을 채택함으로써 인류의 또 다른 반대편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다시한번 굴복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장원리에 입각한 시스템은 국가 통제기획 경제 시스템에 완승을 거두었다고 생각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위기를 겪으면서 이러한 판정승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시점에서 "Made in China" 로 대변 되는 중국의 이미지가 크게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중국에 대한 관심의 시각은 비단 지금의 경제상황에서 비롯됐다기 보다는 덩샤오핑의 개방정치가 부각을 나타내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말은 어느 날 갑자기 깨어보니 중국이라는 거대국가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 아니라 이미 중국은 잠룡의 시절을 벗어나 하늘을 비상하는 용으로 세계인들 앞에 우뚝서기 시작했던 것이다.(중국인들의 가장 인기 있었던 교양 프로그램 '대국굴기'는 이러한 그들의 자긍심을 만천한에 고했던 하나의 절차적 형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구와 땅덩어리만 많을 뿐이지 그외엔 어느것 하나 내세울게 없었던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미국이라는 종주국을 대처할 정도로 자리매김한 중국은 이제 중국을 논외로 그 어떠한 정책수립이나 협의를 할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이 큰 국가로 세계인들 앞에 다가 왔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는 현 최고권력자인 후진타오 총서기의 뒤를 이을 제5세대 권력의 핵심인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중국을 미리 살펴보는 전략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통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정치부 기자인 저자는 수많은 중국권력층과의 인터뷰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이 피부로 느끼는 중국 정치와 미래의 방향에 대해서 향후 중국의 권력이동과 더불어 발생할 수 있는 사안들 그리고 경제, 군사, 외교등 다방면에 걸쳐 포스트 후진타오의 중국을 상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중국이라는 실체에 대해서 문외한일수 밖에 없는 일반 독자들에게 중국의 국가권력 구조와 공산당 구조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일반 국민들의 시각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동안 통계수치를 통해서 중국을 평가해왔고 중국의 내부 권력구조에 대한 인지는 그다지 높지 않았던 편이었다. 이는 그저 경제부분으로만 중국을 바라보아왔고 실상 경제를 진두지휘하는 그 이면의 정치구조에 대해선 그다지 많은 상식을 가지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국가의 힘이나 비전은 정치권력 구조에서 입안되어 실행된다는 점에서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중국의 정치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다가온다. 무엇보다 권력의 세대교체인 올 가을 공산당 대회를 앞두고 무성한 루머에 대한 나름의 체계적인 안목을 제공하고 있으면서 향후 포스트 후진타오의 중국호를 이끌어갈 시진핑을 비롯한 5세대 권력층의 실상과 그들의 정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의 끌고갈 중국이라는 배의 방향을 미리 예견할 수 있어 향후 세계경제와 정치의 향방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독할 만한 저서로 판단된다.

 

특히 예로부터 강력한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와 중국의 관계를 유추해 보더라도 <시진핑 시대의 중국>는 국내 독자들에게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보게 하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Made in China" 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수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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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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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에게 선(善,good)보다는 악(惡,evil)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항상 쫒아다니게 마련이다. 특히 선에 반대되는 이분법적인 개념의 악은 고래로부터 너무나 강렬히 각인되어 있는 관계로 굳이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되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있어 일종의 시금석같은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절대선과 대비되는 절대악이라는 개념이 아닌 막연히 악에 대한 개념정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딘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현실적인 문제이다. 현실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디까지가 악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면 사회의 지탄을 회피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행위를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차원적인 사유를 뒤로 하더라도 우리는 꾸준히 그러한 완충지대를 적절히 만들고 운영하면서 절대선의 향한 극히 도덕적인 성찰은 아니더라도 절대악은 아니라는 적당한 위안감을 스스로 창출시키면서 악에 대한 모호한 경계선을 확대 재생산해왔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이는 그동안의 세계사를 상고해 보더라도 과연 악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힘들 만큼의 모호한 이중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니크한 개념으로 잘알려진 한나 아렌트의 사유는 바로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어느쪽을 선택하고 어느쪽을 확대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악의 프리즘은 하늘과 땅차이만큼이나 변동성을 가질수 있다는 개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라는 정치적 산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치사회적인 구조적인 문제이면의 철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멀리 갈필요성 없이 우리 사회의 현 주소만을 살펴보더라도 이 개념은 정의는 어느정도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 사례속에 숨겨진 혹은 들어나기를 억제받거나 전혀 도적적인 죄책감을 교묘하게 빗나가게 하는 악의 평범성을 통해서 정치적,철학적,사회적 현상을 새롭게 보는 프리즘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다.   

전반적으로 전체주의의 이해를 우리사회 구조와 더불어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철학적 담론에 대한 다소 어려운 밑그림형태의 형이상학적인 이해 보다는 악의 평범성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에 도움이 된다. 세계사에 나타났고 그리고 현재도 진행중인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서 전체주의가 어떻게 조직과 개인들에게 악의 평범성을 부지불식간에 강요하고 서서히 각인시키는지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것 만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저작이라고 해야 겠다. 절대악 내지는 한 사회의 통념상 정의되는 선에 반대되는 개념의 악이라는 정형화되고 도식적인 구조적인 형태의 인지보다 평범성을 가장하여 절대악의 한축을 교묘하게 벗어난 상대적인 개념의 악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관심과 의미부여가 중요함을 인식하게 한다. 세계 그리고 지금도 한국사회에 만연된 이러한 악의 평범성이 새로운 시각과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아렌트 읽기>는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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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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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라 함은 고차원적으로 인류의 지식,신념,행위의 총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쉽게 굳이 정의를 내려보자면 한 민족이나 사회의 전반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지칭하더라도 크게 무리를 없을 것이다. 그럼 조금 평이한 수준의 정의개념을 들추어 보면 한 사회의 전반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그건 한 사회구성체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나열대는 거의 모든 것의 총량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여기에게 정치, 철학, 사회, 경제, 인물등 그 사회 구성원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분야를 망라할 것이다. 단지 지엽적으로 문화라는 개념과는 사뭇 다른 거시적인 범위의 삶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별것 아니지만 이런 개념이 전제된 상태에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라는 책을 읽게 될 경우 지엽적인 문화개념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좀더 효과적으로 저자의 사유의 전개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삶 즉 문화에 대해서 나름의 논거를 가지고 비평을 펼쳐나간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자의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사유이기 때문에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이와 정반대로 납득하기 힘들거나 강하게 거부감을 표출할 수 있는 사유들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독자들 개인적인 프리즘의 위치가 제각각이고 사유의 표출 방식이 제각각 상황에서 저자의 사유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단지 이러한 사유들을 독자 자신의 사유와 한번쯤 비교해 보고 자신의 사유가 어디쯤에 그리고 과연 올바르게 사물이나 사건을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체크해 본다는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는 상당한 읽을거리와 더불어 많은 도움(인문학적 소양의 진전등)을 가져 올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상고하더라도 로마제국만큼 최대의 강역과 세월을 영위한 제국은 없었다. 이는 로마만의 독특한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양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로마제국은 인종,국적,민족,문화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획일화 내지는 통일화 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던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구성원들 각자의 다양성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대제국이라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존속할 가치가 없고 존속하더라도 그 명이 짧을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지켜봐았다. 이런점을 상고해서 우리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사유 역시 또 하나의 다양성의 표출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십수년간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여졌던 사건,사고들 그리고 그 이면에 담겨져 있는 문화와 그에 따른 비평들 전반적으로 지나온 시절을 리뷰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러한 사건과 그에 따른 사회 각층의 반응이 제각각일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한 정답을 이 책을 통해서 찾고자 하면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이상은 저마다 바라보는 시각과 그에 따른 사유는 같을 수 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사유가 옳고 어느 한쪽의 사유가 틀렸다는 이분법적인 사고 보다는 다양성에 근거한 포용적인 사고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책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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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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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한 자식들이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전통국악인의 흥겨운 축가속에 절을 올리고 가족,친지,동네지인들을 초청하여 하루동안 떠들석한 잔치를 베풀었던 풍경이 케케묵은 고래적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30년전 이 나라의 보편적인 풍습중에 하나였다. 당시 회갑을 지칭하는 61세라는 나이는 많은 의미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까지 생존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심장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물며 70을 넘어 세상을 등질경우 호상이라는 아이러니한 표현까지 성행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인들이 이제 살만큼 살았다고 자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십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주변엔 이러한 풍경은 찾을 수도 없거니와 회갑, 칠순을 지난 사람들을 대놓고 노인이라고 말하기도 뭔가 어색한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다.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에서 이제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시기라고 해야할 정도로 나이에 대한 개념이 180도 변했다는 것이다. 통계는 우리도 이제 고령화 사회(사실 이 단어가 출현한지도 얼마되지 않았다. 30년전만 해도 가까운 일본이나 유럽 선진산업국에만 해당되는 부러운 현상으로 받아졌으니까)에 진입했고 조만간 초고령화 시대로 접어들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인류가 출현하고 역사시대를 개척하면서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자부하지만 실상 산업혁명이전의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평균수명에 대한 개념자체가 모호할 정도로 정작 자신의 수명에 대해선 통제불가능한 상태였다. 멀리 갈필요도 없이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수명이 47세정도였으니 의료적,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했던 일반대중의 평균 수명은 그야말로 의미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종교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사후에 대한 보전책으로 장례관련문화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삶의 길이에 대한 로망이 어쩌면 인생의 목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고한 철학적 명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만큼이나 오래 살아볼 것인가' 가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이에 비한다면 지금의 시절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풍족하고 풍요로운 시대이다. 얼마큼 살 것인가에 대한 대략적인 아웃라인이 정해져 있고 거의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다면 삶의 길이는 보장받는 시대에 각 개인들은 예전 철학자들이 부르짖었던 어떻게 살 것이가를 고민하는 시대이니 그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을 셈인가? 하지만 살짝 돌려 생각해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명제가 주는 압박감과 이면의 또 다른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담론이 또 다른 발목을 잡는 형국으로 커져가고만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말은 근대시대이전 사람들보다 두배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자 동시에 두배의 고민거리도 같이 안고 가야한다는 이율배반적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색 쇼크>는 날로 고령화 되어가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며 또 어떻게 대비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인류학,정치학,경제학,사회학적 다양한 측면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신선한 보고서이다. 과학혁명으로 인한 의학의 진보로 인해 평균 수명 자체가 길어지는 것을 우리는 당연시 받아 들이면서 모든 촛점은 좀 더 평균수명을 늘릴는데만 집중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고령화가 과연 인간에게 축복인지 아니면 오일쇼크와 같은 충격인지에 대한 모호한 경계점에 도달했다는 점을 인식해 본적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대표적인 고령화 국가인 일본,스페인,미국의 노인층들의 삶을 인터뷰하면서 고령화가 가져오는 폐해(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고령화가 저출산과 맞물리면서 생산활동인구의 감소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 자녀 양육기간의 증대, 사회보장보험(의료보험,연금등)에 대한 막대한 부담 그리고 생산구조(제조업의 쇠퇴등) 자체의 변화, 고령층을 상대로 한 사회적 범죄의 증가등 예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고령화문제는 리얼타임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경제축에 의해 이제 더 이상 일국의 사회적 문제를 떠나 세계 각국이 서로 연관될 수 밖에 없는 범지구적인 문제로 급상승하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과 일본의 실례에서 보여주듯이 생산적정인력의 부족은 이민의 부정적인 면을 증가시켜 자칫 잘못하면 인종적인 문제로까지 비약될 수 있음을 상기 시킨다. 반면에 이러한 부정적인 요인의 이면에 또 다른 경제적 틈새시장의 길이 열여 있음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은퇴연령층을 겨냥하는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의 증가는 새로운 블루마켓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래 저래 고령화 문제는 여러 방면에서 많은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극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분명 기대수명의 증가는 바람직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나 오랫동안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대이전 인간의 수명은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외부적 요인(전염병,전쟁,기아등)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했기에 죽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는 구조였다면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수명의 시간적인 개념 보다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담론이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인한 요인보다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획기적인 담론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인간수명은 다시 퇴보할 소지도 있다는 점이 두려운 것이다. 

<회색 쇼크>는 전체적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고 있어 그 현실감이 뛰어나고 그동안 고령화 문제를 원론적이고 통계적인 문제에서 보아왔던 시각을 미시적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볼 기회를 주고 있다. 플로리다 세러소타의 신개념 주거단지인 CCRC, 물류업의 부상, 개인의 기억을 저장하는 라이프로깅등의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분야에 대한 언급은 고령화 시대와 발맞추어 어떠한 방식으로 삶의 질을 제고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인간노화의 과정을 30대부터 연령별로 분류한 항목은 그 어떠한 의학서적보다 더 현실감 있게 풀어 설명해주고 있어 호기심 많은 독자들에게 색다른 재미(약간의 서글픔을 포함하여)를 선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슴에 와닿은 점은 스페인과 일본의 고령화 사회상을 살펴 보면서 특히, 별다른 준비없이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인간의 어머니 자궁에서 착상되어 태아로 발달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명시계의 축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더 오래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이제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고령화시대는 한편으로 축복의 시대가 될 수 도 있지만 반면에 기억하고 싶지 않는 시대가 될 수 도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살 것인가를 떠나서 이제는 정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각계각층의 범사회적인 담론 형성이 시급한 때임을 우리는<회색 쇼크>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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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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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계 프랑스인 자크 데리다는 서양 현대 철학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물론 현대철학에 무관심하거나(솔직히 그 철학적 담론들이 담아내고 있는 정의가 어렵기 때문에 자연 무관심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한다) 철학하면 인상부터 쓰게 되는 독자들에게 자크 데리다는 의외의 인물중에 하나이다. 특히 그가 주창했던 해체주의라는 담론을 쉽게 접할 수 도 없었고 실상 해체주의에 대한 명확한 이해 또한 부족한 입장에서 자크 데리다는 그저 머나먼 이방인중에 하나로 남을 뿐일 것이다. 

철학(서양철학) 특히 현대철학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들 정도로 난해한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현대철학에 문외한인 이들에게 이들 현대철학자들의 논거는 꿈길속을 건는듯한 모호함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담론들을 깊이 들어갈 냉철한 가슴과 머리도 부족하지만 대충 서브해서 접근하더라도 매한가지임을 통탄할 수 밖에 없는 한계점으로인해 현대철학은 일반독자들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면에서 이번 <자크 데리다 평전>은 그나마 멀어져 가는 끈을 놓지 않게금 새로운 방식으로 현대철학을 일반 독자들의 시선에 들이대고 있다. 

대게 평전이라는 장르는 특정 인물의 생애를 연대기별로 서술하여 인물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그 인물의 특정한 주요한 사상을 등재하는 것이 보편적인 형식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가의 평전에선 그의 정치사상을 예술가의 평전에선 예술작품과 그 감각을 확이나게 마련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데리다 평전은 현대철학자의 평전으로 그의 내면적인 상태와 더불어 데리다가 주창했던 철학적 담론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레비나스,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등 기라성같은 철학자들의 사유와 더불어 데리다의 사유를 비교해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로 다가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데리다의 사유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시대별로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와 비교할 수 있어 자크 데리다 개인의 사유를 뛰어 넘어 서양현대철학의 틀을 정리할 수 있는 개론서적인 충실함이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왠만한 현대철학 기본서를 능가할 정도의 다양한 사유들을 이렇게 한권의 책에서 만나기란 그다지 쉽지 않으리다 여겨 진다. 

하지만 평전임에도 불구하고 왠만한 현대철학 기본서를 능가할 정도의 사유로 점철된 이전 책은 오히려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일반독자들에겐 여전히 어럽게 다가올 공산이 크다. 루소의 애인 바랑부인과 관련되어 시작된 대리보충(연기와 차이) 논리와 이런 논리를 보이는 서구적 사유가 자신의 존립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는 작업이라서 점에서 "해체"라 불리고 이 해체는 또한 서구적 사유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탐색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동시에 거부된다등의 핵심논거를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솔직히 많은 시간을 들여 읽어봤지만 그 모호성과 난해성앞에 버텨낼 재간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의 평전답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지만(그리고 자크 데리다의 사유가 범인들의 사고틀로는 범접하기 힘들지만) 너무 철학적이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는 점이 강하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철학 특히 현대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 그리고 전공자들에겐 다시 없는 반가운 저작으로 보여진다. 또한 일반 독자들에게도 비록 책읽기의 고통을 감내해야 겠지만 자크 데리다라는 인물과 더불어 서양현대철학의 맥을 한번 잡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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