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책의 내용은 죽음을 다루었지만 차원이 다른 내용이다. '사망일기'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지은이의삶의 회한과 소중함에 대한 내용이라면, '자유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자기 선택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자유죽음'을 가지고 아마도 몇몇 사람들은 개인의 삶을 목숨을 포기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 하며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학살과 수용소의 힘든 상황을 이겨낸 저자가 결국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전쟁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 책을 읽는 다면 '자기 살해'가 아닌 죽음과 삶의 의미를 좀더 알 수 있지 않을까? 

ps : 예전 군복무 시설에 '사망일기'를 읽었다. 상병이 꺽인 다음부터는 책을 좀 읽을 수 있어서... 근데 내가 '사망일기'란 책을 읽으니 부대 정보장교가(참고로 난 정보병이었음) 나를 이상하게 처다보며 왜 이런 책을 읽냐 호통(?)을 치며 책을 압수했다.(나중에는 돌려줬지만) 난 그때 정보장교에게 이 책은 이상한 내용(?)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아주 슬픈내용의 실화를 다룬 내용이다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대상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아주 단편적인 부분만 가지고 해석, 판단하는 것 같다. 나부터 그러지 말아야지.

 

조선일보 2010.2.18      장 아메리 '자유 죽음' 번역 출간 

장 아메리(1912∼1978)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문학과 철학 박사학위를 따고 글을 쓰는 지식인이었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유대인으로 낙인 찍힌 아메리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활동 중 체포된 그는 게슈타포의 악명 높은 고문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고 아우슈비츠에 갇혔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망가진 몸을 이끌고 겨우 돌아온 그는 친구인 시인 헬무트 하이센뷔텔의 도움으로 조용히 작가 생활을 했지만, 대표작인 ’자유죽음’을 내놓은 지 2년 만인 1978년 끝내 자살했다.

국내에서는 처음 번역, 출간되는 아메리의 작품인 ’자유죽음’(산책자 펴냄)은 삶과 죽음의 의미, 자살의 자유를 성찰한 철학 에세이다.

죽음에 이미 한 발을 들여놓은 듯 위태롭고 처절한 작가의 사색은 예사롭지 않다.

“우리더러 군홧발이나 불구덩이에 희생당하라고 하면서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라며 그리스도의 신을 들먹이는 말이야말로 진짜 신성모독이다.”

’자살’이라는 말이 품은 사회적 함의는 명백하다. 생명은 하늘이 내리고 사회가 지켜주는 소중한 것이므로 목숨을 스스로 끊은 자는 의무를 저버린 배신자다. 생명을 예찬하는 말은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으나 자살을 예찬하는 것은 방종이며 비윤리다.

그러나 아메리는 주저하지 않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자살이라는 금기에 다가간다. ’자기살해’라는 뜻의 자살(Suizid)이라는 말도 자유죽음(Freitod)이라는 말로 바꾼다.

그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무엇인지 물으며 자신은 물론 이웃의 존엄과 자유까지 짓밟으면서 치욕적으로 끌려가는 인생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일은 자연사만큼이나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타인의 의지에 자신을 맡겨버린 사람과 다르다.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에게서 사회 통념을 깨부수려는 치기 어린 도전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의지를 바닥까지 긁어내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반평생 망가진 몸으로 고통의 기억 속에서 산 노인의 치열한 성찰은 역설적으로 강렬한 실존의지에 대한 예찬이다.

“어찌 됐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아메리의 자살론은 여전히 위험하다. 삶을 멸시하는 이들에 의해 오용될 가능성이 곳곳에 숨어 있다.

다만, 이 책은 현실 도피로서 자살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을 통째로 부정한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기를 부정하는 일은 나약한 자의 도피와는 다르다.

해제를 쓴 김남시 박사는 “아메리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한다면, 그의 사유를 이끌고 있는 것이 삶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경외와 자기 삶에 대한 자기 결정 권리, 그리고 자유에의 갈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풀이했다.

 

경향신문 2010 2.19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면 차라리... 

30여년 전 출간됐을 당시 독일, 스위스 등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책으로 논쟁, 논란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자살을 교묘하게 옹호하고 있다고. 오죽하면 저자가 첫머리에 “자유죽음을 옹호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할까. 자살은 어느 사회에서나 신의 뜻을 ‘감히’ 거부하는 배신이며, 반자연적·비도덕적인 행위이자, 없어져야 할 사회병리현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는 자살, 자살을 한 인간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 “살아 있는 자나 살아남은 자의 눈이 아니라, 자살을 택한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내면에서” “누군가의 부모나 자식·친구 등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생 상황에 처한 한 명의 실존적 인간으로” 바라본다. “죽는 것만 못한 삶”이라면, “산다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더 추하게” 만든다면 “존엄성과 자유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의 생각은 ‘자살’ 대신 ‘자유죽음’이란 용어를 쓰자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니체에 따르면 자유죽음은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깨어 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선택한 죽음”이다.

그래서 저자는 ‘감히’ 말한다. 귀를 틀어막은 비난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역설적인지 아느냐”고.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짓이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줄여주기 때문”이라고. 나아가 자살을 다시 바라볼 때 “우리의 지평 앞에 새로운 휴머니즘이 떠오른다”고.

자살, 죽음, 삶 등에 대한 넓고 깊은 인문학적 논의가 씨줄로, 저자 자신이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로 끌려다니며 “죽음보다 못한 삶”을 처절히 살아내며 쌓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날줄로 엮었다.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증언 작가’ 3인방으로 꼽힌 그는 결국 고향에서 자유죽음을 택했다. 김희상 옮김·김남시 해제.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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