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선수는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뒤이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지금쯤은 앞날의 거취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교수가 어느 매체에 실린 ‘연아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김 선수에게 공부를 하라며, ‘스무 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들’, ‘역설적으로 소소한 실패와 좌절을 지금 하라고’ 곡진한 말로 권고했다. 그 좋은 글을 읽고 나도 마음이 움직여 조금 흉내를 내서 이 글을 쓴다.

지금의 대학 풍속에서는 김연아가 강의에 출석하지 않고도 다른 방법으로 학점을 얻어내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대학을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사회활동에 크게 지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룰 만한 것을 이루었으며, 그것이 그의 미래를 보장해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려고 든다면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상적인 것은 평범한 것인데 그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다. 그의 편에서야 그 강한 성격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낼 수 있겠지만, 동료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수들까지도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평범한 학생은 학교 근처 식당에서 싸고 양 많은 밥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토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토하는 학생의 등을 두드려 주기도 한다. 광장의 잔디밭에 앉아, 지나가는 얼굴 하얀 남학생을 곁눈질로 훑어보기도 하고, 수줍은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새벽같이 도서관에 나가 맡아 놓은 자리를 책가방이 지키게도 하고, 공들인 보고서와 벼락치기 보고서를 번갈아 제출하고, 친구에게 대리출석을 부탁했다가 젊은 선생을 펄펄 뛰게도 한다. 이런 일이 김연아에게는 쉽지 않다.

말 그대로의 공부도 김연아에게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에게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넘치기 때문이다. 겨울올림픽 직후 한 인터뷰에서 김 선수는 체육심리학에 흥미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런 과목이건 다른 과목이건 그 내용은, 여러 경기에서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긴장을 이겨냈던 그에게, 매우 지루하고 시들한 것이기 쉬우며, 그래서 포기되기 쉽다. 지루하고 시들한 것의 진수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역시 평범한 학생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김연아가 그를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던 그 자질로 이 어려운 일들에 어느 정도라도 성공하게 된다면, 돈이 될 수도 없고, 영예를 안겨주지도 않으며, 당장은 업적이 될 수도 없는 일에 턱없이 진지하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건 사회적으로건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 대학이라고들 하는데, 대학에는 미래의 직접적인 압박에서 벗어나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삶을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구실 아래 그 자유는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거의 폐기되기까지 했다. 김연아가 적을 둔 대학이며 내가 강의하는 대학의 김예슬 학생이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하고, 서울대의 한 학생이 그에 호응하여 대자보를 붙이게 된 것도 필경 대학의 없어져 버린 이 자유와 관련이 있다. 김연아가 평범한 대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 대자보 앞에도 서 있어야 할 것이다.


한겨레신문 2010.4.2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연아에게 보내는 편지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딴 날, 대한민국의 많은 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눈시울을 적셨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인식을 깬 최고의 연기, 혼신을 다해 자신의 길을 개척한 한 인간에 대한 절절한 감동 때문이었으리라.

그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김연아 뉴스가 연일 매스컴을 장식한다. 본인은 은퇴를 고려한다는 등, 아이스 쇼 단에 갈 것이라는 등, 다음 에는 트리플 악셀이 필요하다는 등, 소치 올림픽까지 가서 아사다 마오와 재대결을 벌여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고 추측도 다양하다.

스무 살 나이에 세상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세계 최정상에 오른 대한민국 처자의 앞날은 대체 어떻게 될까, 쓸데없는 상상과 걱정을 하게 된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녀가 맞닥뜨릴 인생의 많은 파도들은 어느 방향에서 올까. 주책 맞은 노파심이지만 우리는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최정상에 오르고도 불행한 선택으로 모두를 슬프게 했던 한 여배우의 이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리고 만약 김연아 선수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단 한 줄이나마 쓸 수 있다면 '지금 공부하라'는 것이다. 그녀의 선택과 결정이 전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그녀 역시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솔트 레이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사라 휴즈는 예일대에 들어가 공부하느라 다시는 스케이트화를 신지 않았다고 한다. 골프의 미셀 위도 스탠포드 대학에 들어가 골프와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김연아에게 지금 부와 명예는 주어진 것이지만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장담 할 수 없다. 나는 오직 현명한 판단과 인생에서 얻어지는 진짜 배기 경험들만이 그녀가 지금 얻은 것을 지켜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 지금 공부하라고, 지금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상처를 받고, '뭔가를 배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최고의 몸값으로 CF를 찍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지금보다 더 부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스무 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들, 지금 해야 인생에서 그나마 비용이 덜 들어가는 경험들, 역설적으로 소소한 실패와 좌절을 지금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것은 비단 김연아 선수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똑 같이 권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한민국의 대학 시스템이 지금 잘 나가는 젊은 스타나 스포츠 선수들을 너무 봐 준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출석 한 두 번이면 학점을 딸 수 있고, 책 한 권 안 읽어도 졸업장을 준다. 영화학과 강사 시절, 내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아무리 대단한 영화계 스타일지라도 적어도 내 강의에 한해서는 시험을 보지 않으면 절대 학점을 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모두들 힘들어 했지만, 많은 친구들이 한 두 권 책을 읽고라도 시험을 보았고, 오히려 교수의 그런 관심과 태도에 감사하다는 편지를 받은 적도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스타일지라도 김연아는 지금 스물 한 살의 대학생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의식 있고 똑똑한 그녀가 인생의 파도들을 잘 헤쳐나갈 것을 믿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 왜냐면 김연아 그녀는 내 후배들과 내 딸의 롤 모델이므로.

김연아. 그녀는 지금 곳곳에 암초가 숨겨져 있는 인생의 빙판을 탈 워밍 업을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한국일보 2010.3.3 

ps : '공부하라'라는 심영섭 교수의 말은 여러모로 나의 생각과 비슷하다. 책을 읽으라, 공부하라, 상처받으라, 느껴라 등등 사실 지금의 인간들에게 비단 대학생뿐만 아니라,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너무나 쉽게 사는 듯 하다. 지금의 우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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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에 1만5090개 파편 등록…우리 위성 7개 ‘미아’
미국·러시아 위성 충돌도…로봇팔로 수거기술 연구 

 

» 미국 항공우주국의 ‘우주파편사업부’가 광학망원경과 레이더 관측자료, 귀환한 우주선 표면 등을 참고해 모델링한 컴퓨터그래픽. 하얀 점 하나하나가 인공위성 또는 로켓 잔유물 등 우주파편을 나타낸다.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지구 궤도에는 1957년 당시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이래 6600여개의 인공위성이 쏘아 올려졌다. 유럽우주국(에사)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인공물이 3만6131개에 이르며, 이 가운데 94%는 임무를 마치고 떠도는 인공위성이거나 부서진 파편들이라고 밝혔다. 에사는 2040년에 그 수가 12만7884개까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의 ‘우주파편사업부’가 운용하는 미 우주감시망(SSN)에는 지난 1월6일 현재 위성체 3299개와 로켓 잔해물 및 파편 1만1791개 등 모두 1만5090개의 우주파편들이 등록돼 있다. 이는 지름이 10㎝보다 큰 경우만 추적한 것으로, 이보다 작은 파편까지 합치면 20만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공위성을 띄워 보내는 과학자들로서는 언제 ‘기뢰’를 만날지 불안할 수밖에 없다. 

 

■ 우리 위성 7개도 떠돌이한 달 뒤면 우리나라는 자체 개발한 첫 정지궤도 위성인 ‘통신해양기상위성’(통해기위성)을 보유하게 된다. 통해기위성은 다음달 말께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발사장에서 발사돼 궤도에 안착하면 우리나라가 보유하는 11번째 위성이 된다. 그러나 실제 운용하는 위성으로 따지면 4번째다. 11개 위성 가운데 1992년 8월 최초로 발사된 ‘우리별 1호’를 비롯한 우리별 시리즈 3기, 과학기술위성 1기, 상용통신위성인 무궁화 시리즈 2기, 다목적 실용위성인 무궁화 1호 등 나머지 7개의 위성은 임무를 모두 마치고 우주를 떠돌고 있다. 이들이 지구 대기권으로 들어와 산화하려면 적게는 수십년에서 많게는 1세기가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정대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위성관제팀장은 “위성에 센서를 달아 파편을 피하는 연구 등을 하고 있지만 아직 장착을 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라며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아이티유)에 위성 궤도와 주파수를 등록할 때 특정 파편이 많이 몰린 궤도를 피해 등록을 한다”고 말했다. 항우연에서는 운용중인 아리랑 2호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수백개의 파편을 추적하고 있다. 강경인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 위성연구실장도 “우주파편에 부닥칠 확률은 백사장에서 모래를 맞히는 격으로 극히 낮다”고 했다.

■ 충돌 남의 일 아닐 수도 그러나 지난해 2월 러시아 위성 코스모스 2251호와 미국 위성 이리듐 33호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나사 우주파편사업부는 지난해 우주파편과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9차례에 걸쳐 인공위성과 국제우주정거장(ISS)의 궤도를 수정했다. 나사는 위성은 충돌 확률이 1만분의 1 이상일 때, 유인우주선은 1000분의 1 이상일 때 실제 대응을 한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는 좀더 적극적으로 우주 쓰레기를 직접 수거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2~3년 안에 로봇팔을 가진 소형 우주선을 띄워 올려 지구 궤도에 남아 있는 우주 쓰레기들을 붙잡아 활용도가 떨어지는 궤도로 보낸다는 것이다. 영국 서리대 과학자들은 내년에 ‘태양돛’으로 자체 추진하는 3㎏짜리 ‘나노위성’을 쏘아올릴 계획이다. 이 위성은 이르면 2013년부터 우주파편 수거작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사이언스 데일리>가 30일 보도했다.

우리의 경우 수명이 다한 무궁화위성 1호를 잔여 연료를 이용해 애초 선회하던 궤도보다 150㎞ 이상 더 밀어올려 폐기궤도로 보내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2010.3.31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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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투표의 고차방정식 

르몽드디플[18호] 2010년 03월 05일 (금) 

속물주의, 탈정치화 아닌 정치적 계몽의 산물
좌파 언어 탁월해져야 세대의 계급화 가능


 세대는 계급을 대체했는가? 요즘 사회과학에서 유행하는 담론을 찾아본다면 확실히 세대는 계급을 대체한 듯이 보인다.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비정규직이나 실업이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다. 마치 한 세대 전체 혹은 절대다수가 ‘잉여인간’이라는 동일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린 듯한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 투쟁에서도 계급을 대체하는 듯한 세대 담론이 가진 물리적인 힘은 세계 곳곳에서 검증되고 있다. 2006년 프랑스 청년들의 대규모 노동법 개악 반대 시위에서부터 2008년 그리스의 반정부 시위는 명백하게 청년층이 주도했으며 시위의 주제 또한 청년실업과 직결됐다. 서구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이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홍콩의 거리에 갑자기 나타나, 중국 본토와 연결하는 초고속열차 때문에 삶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연대를 주장하며 비타협적 시위를 주도한 것도 ‘80년후’ 세대라고 불리던 청년들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적대의 전선이 분명히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세대의 문제로 전이된 것처럼 보인다.

 세대는 저절로 투표하지 않아
 

▲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그러나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흔히 불러일으키는 오해처럼 경제적 영역에서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 영역에서 ‘노동 없는 가치 창출’ 혹은 ‘노동의 일회성화’라는 자본 축적 방식의 변화에 따라 한 세대 전체가 졸지에 노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될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적대 전선이 자본과 조직화될 수도 없는 잠재적 노동으로서 청년 세대 사이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문제는 이 경제적 적대가 바로 정치적 투쟁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급이 자동적으로 투표하지 않는 것처럼 세대도 저절로 투표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가 한국의 20대다. 지난 촛불 시위에서도 고등학생까지 거리에 뛰쳐나오는데 왜 20대와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 많았다. 이 때문에 20대에 대한 고전적 탈정치화론에서부터 보수화론까지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20대들은 자신이 언제든 잉여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프랑스나 그리스, 홍콩에서처럼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88만원 세대론이 보수주의 언론에 의해 왜곡되어 쓰이는 것처럼 자본과 세대 간의 적대가 세대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문화’이다. 경제는 문화를 관통할 때만 정치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88만원 세대가 처한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감각이다.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세대가 계급을 사유하고/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스펙터클의 사회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지금의 20대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속물’이다. 그리고 이 ‘속물’들이 도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세상에 대한 태도는 ‘냉소주의’인 것이다. 인간 모두가 속물인 사회에서 무한경쟁은 인간의 숙명이 되어버린다. 만약 무한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며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가치’라는 것은 냉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대학생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하던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본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에 대한 토론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한다. 이런 통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으며 진실은 누군가를 통해서 밝혀지며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대중은 진실에 감응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학생이 만든 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시나리오였다. 독재의 붕괴 이후 민주정부가 곧 들어서지만 정책적 무능으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때맞춰 미디어에서는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브이’라는 영웅의 사생활을 캐고 온갖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혼란을 틈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대중 사이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결국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냉소했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독일의 문제적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논법을 따르자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미각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에 대해 계몽된 존재인 셈이다. 이들은 정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졌고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1)가 되는 셈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단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덕의 냉소주의가 만들어내는 속물의 정치이다. 가치의 종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속물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이명박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이명박을 지지한 20대 대부분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서 지지한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치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냉소한다. 

 속물인가, 속물이 돼야만 하는가  

실로 우리는 속물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미디어에서 성공하고 있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우리가 얼마나 속물인가를 과장해 까발리는 내용이다. 얼마 전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어모은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자. 남성의 전형으로 나오는 정형돈은 쉽게 말하면 찌질이 혹은 진상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예쁜 여자와 축구뿐이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귀찮아할 뿐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 하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의 전형으로 제시된 정가은은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멍청한 남자친구를 여우 짓을 통해 후려 처먹는 것이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백’밖에 없는 된장녀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20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상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야 한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 자신은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꿀벅지’에 이어 ‘말벅지’가 등장했다. 송일국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말벅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내 스스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스펙터클로 치장해야 한다. 스펙터클의 바깥은 없다. 심지어 이번 중학생들의 졸업식 알몸 사건처럼 내가 남을 때리는 것조차도 인터넷에 올려 자랑을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 아니라 속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좌파가 가장 패착하고 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보수주의자들에게 지고 있다. 이 문화 전쟁에서 실패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영국의 사례다. 1972년 11월 5일 영국 버밍엄의 빈민가 핸즈워스에서 유색인종 청소년 3명이  백인 노동자 1명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언론에서 ‘강도 사건’으로 대서특필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영국이 도덕적 위기에 빠졌으며 법과 질서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질서의 적은 바로 이주노동자였으며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옷차림과 언어를 즐기는 청소년이었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노동당의 무능이 고발되었다. 한편 미조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장악한 노동당에 등을 돌렸다. 대신 그들은 국가를 도덕적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처주의의 언어에 동의했다. 이것이 영국에서 전후의 합의에 바탕을 둔 조합주의적 정치가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대처주의로 넘어가는 배경이었다. 노동당은 투표에서 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대처에게 진 것이다.

 여기가 우리의 로두스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때의 영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좌파들이 구사하는 대다수 언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알아버린 20대에게는 냉소주의만을 더 강화하는 진부한 성명서 언어만을 반복하는 패착에 빠져 있다. 한국 좌파의 언어에는 정치에 지나치게 계몽된 지금 20대의 냉소적 앎을 압도할 수 있는 ‘탁월함’이 없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진보 정당이나 노동조합, 시민단체의 모임과 뒤풀이는 여전히 80년대의 계보학과 ‘깔대기 이론’으로 사람을 녹다운시키고 있다. 탁월함. 이것이 속물과 냉소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핵심어다. 희망은 이 20대가 여전히 탁월함에 대해서 감동받고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김연아를 능가하는 스펙터클로서의 탁월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의 가치에 대한 탁월함은 사이버공간의 웹툰이나 아고라같이 고전적 좌파들이 거의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대가 ‘계급’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고전적 좌파’의 언어가 20대와 단절된 것이다. 속물주의와 냉소주의에 맞서는 좌파의 탁월한 언어가 필요하다. 좌파끼리 만나는 성명성의 언어가 아니라 좌파와 대중, 특히 20대와 만나는 좌파의 상식에 대한 언어, 그것이 우리의 로두스이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글•엄기호
연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권연구소 창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닥쳐라, 세계화>(당대·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2009) 등을 썼다. 

<각주>
(1) 슬로터다이크의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 대한 이진우의 발문 19~2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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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투표의 고차방정식 

르몽드 디플[18호] 2010년 03월 05일 (금) 

선거철이다. 계급투표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하지만 이 단어를 들으면 한편으론 고개를 끄덕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묘한 반감마저 들기도 한다. 왜냐면 한국 정치사에서 계급투표라는 말을 쓸 만큼 눈에 확연하게 드러난 선거 결과가 과연 얼마나 존재했을까라는 도발적 질문이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방 이후 한국 정치에서 계급의 이익을 배신하는 반(反)계급투표만 끊임없이 반복해온 현실만 머리에 맴돌 뿐이다. 1950~60년대 ‘막걸리 선거’와 ‘고무신 선거’를 거쳐 80~90년대 ‘빨랫비누 선거’와 ‘갈비탕 선거’로 이어져온 각종 향응이나 금품 제공은 부정선거의 화려(?)한 단골 메뉴였다. 고무신 한 짝과 막걸리 한 잔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도 지독히도 지연·혈연·학연에 연연해온 풍토는 우리 선거 문화에 여전히 내재하고 있다. 노동자로 대표되는 서민이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후보에게 신성불가침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가문·학교에 따라 줄서기를 하는 전근대적 선거 행태를 지금도 쉽게 접하는 마당에 계급투표 운운하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지 외려 의문부터 드는 게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냉소적이고 자기비하적 자책 이전에 한국의 정치 사회에서 계급투표는 어떻게 굴절되고 왜곡·변형돼가는지 한 번쯤 따져보는 게 의미 있을 수 있다. 정치사회학에서 계급투표는 특정 계급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는 집단적 투표 행위를 의미한다. 특정 집단이 기존 조직이나 제도로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선거 공간에서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계급투표다. 이런 정치적 행위는 궁극적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사회적 변화를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는데, 계급투표라는 본디 개념은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투표 행위에서 연유한다. 

계급투표의 구체적 실체는 노동자 집단이 선거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 행위를 조직하고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가 당선되도록 하는 행위를 말한다. 노동자 계급투표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으로 파생되는 계급정치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흔히 보편적 이해관계로 포장되는 경향이 있는 자본가적 계급투표에 비해 노동자 계급투표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즉,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선거에 참여하고 투표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 <구두>, 1885-빈센트 반 고흐 

먼저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합목적적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계급투표를 제한할 경우 변혁과 개량의 구분이 우선된다. 이 경우는 노동자계급의 대표가 실제로 획득하는 득표율에 대한 의미보다는 선거 과정에서 후보가 일반 대중을 상대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얼마나 철저하게 알리고, 자본가 주도의 계급지배가 만들어낸 사회구조적 모순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문제점을 전파하는 데 의미를 둔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대표자를 의회로 진출시키는 일에 심정적으로 동의한 노동자가 손쉬운 투표 행위 정도로만 집단화한다는 의미에 무게중심을 두는 해석도 있다. 이 경우는 노동자 대표가 선거에서 실제 획득한 득표율에 대한 해석에 의미를 둔다. 선거를 선전과 선동의 장으로 보는 해석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한국 사회에서도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의 동질적 투표 행위가 실제 존재하는지는 과연 자신들의 선거구 내에서 진보 정당을 얼마나 지지했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투표라는 개념은 노동자 지지표의 ‘응집력’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계급투표의 저변에 놓인 노동자 개인의 행위를 규명하기보다 현상으로서 계급투표를 증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계급투표의 원인 분석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계급투표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단편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계급 형성 과정에서 필요한 노동자 정체성을 확인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음에도, 이에 대한 해명이 불충분하다. 게다가 계급투표가 존재한다고 해서 계급의식 역시 자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할 수는 없다. 이 모든 의문은 한국 정치사에서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계급투표, 과연 있기는 하나? 

계급의식을 가진 특정 계급이 집단적 투표 행위를 하는 것을 계급투표라고 할 경우,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계급투표를 하고 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19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대중화됐지만, 선거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계없는 몰계급적 투표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즉자적 계급’(Klasse an sich)으로서 산업노동자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노동자의 투표 행위는 다른 계급 혹은 계층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아 ‘대자적 계급’(Klasse für sich)으로서 노동자계급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원론적 의문마저 제기될 수 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전국 평균 득표율 약 3%를 올린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비록 일부 산업 지역에서 평균 이상의 득표율을 올렸지만 전국 합계 약 71만여 표에 불과했으며, 이 득표수는 80만여 명에 달하는 민주노총 조합원 수보다 적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제조업 노동자가 밀집해서 살아가는 울산·창원과 같은 산업 지역의 경우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려는 후보가 꾸준히 당선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계급투표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 경우는 전국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지역적이고 예외적이라는 점에서 일반화하기 어렵다. 
 

  반(反)계급투표, 과연 무슨 의미일까? 

사회적 존재인 계급과 무관한 투표를 하는 걸 반(反)계급투표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이른바 계급이라는 존재를 배신한 반(反)계급투표의 경향성은 한국 정치사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해방 이후 한국 정치·사회의 지형은 ‘진보 배제’와 ‘보수 독점’이라고 간략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10년 전에 등장한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했기에 진보 배제라는 말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국회에서 진보 정당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감안하면 정치적 배제라는 용어 사용이 그리 무리가 아니다. 

이런 정치적 현실은 선거라는 장에서 더욱 쉽게 확인된다. 노동자계급이 포함된 서민층은 계급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지역 정체성’에 따라 투표를 해왔으며, 선거 결과는 마치 삼국시대로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준다. 다시 말해 유권자의 투표 행위는 계급 정체성보다 지역 정체성으로 구조화돼버린 현실에서 과연 노동자의 합리적 선택이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회의도 가능하다. 물론 최근 들어 정치적 주류의 흐름과 관계없이 노동자의 집단적 투표 행위가 현상적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 현상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가 선거 시기에 자신의 후보에게 몰표를 던지는 행위로 인해 생기고 있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계급의식 형성의 단서라고 볼 수 있는 ‘노동자 정체성’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몰표를 던지는 투표 행위와 유사한 현상이 자본가계급에서도 존재한다. 강남 3구를 주축으로 하는 부동산 자산가인 소부르주아지들의 투표 행위가 대표적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종부세 저항의 진원지였던 강남 3구 소자본가계급의 투표 행위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 부동산과 투표 행위 간의 인과성을 실증적으로 증명한 손낙구의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수도권 편>에도 나와 있듯이 다주택 소유자, 아파트 거주자, 정상적인 부부 가구 모형이 많은 지역의 투표율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을 뿐만 아니라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성도 높다. 주택의 소유·주거·가구 형태에 따라 지지 정당과 투표 가능성까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지난번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나타났듯이 선거 과정에서부터 부정선거 의혹이 끊이지 않던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빈센트 반 고흐 

부동산 자산을 소유한 유산계급이 계급투표에 몰두하는 데 비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무산계급의 투표 경향성을 두고 반(反)계급투표의 전형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주장은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손낙구의 책에도 이미 나와 있듯이 표의 응집성에선 비록 유산계급에 미치지 못하지만 무산계급 역시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대변하는 중도 혹은 진보 정당에 나름대로 열심히 투표해왔다고 보는 게 정당하다. 선거 결과에서 당선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투표 행위가 계속되면서 무산계급의 정치적 무관심 역시 높아졌을 개연성을 두고 계급의식의 부재로 인한 몰계급적 투표 행위라고 핍박해선 곤란해 보인다. 쉽게 말해 아무리 열심히 투표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데 대한 염증과 혐오가 계급 응집력의 저하와 정치적 무관심의 증가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민으로 대변되는 무산계급의 이해관계를 무시하는 유산계급 중심의 정치는 항상 자신들만의 고유 의제인 지역주의를 감초 삼아서 우려먹어왔을 뿐이다. 

반(反)계급투표라는 말은 한편으론 노동자계급 중심의 계급투표의 허약함을 냉소적으로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 중심의 계급투표를 숨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하지만 이 언어적 이중성은 자산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계급투표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는 현실의 원인마저 찾아보기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의 빈약함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모든 문제를 ‘내 탓이오’라는 식으로 돌리는 숙명론과 결정론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자산가가 주도하는 계급투표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본주의적 사회질서를 강화하는 역(逆)계급투표일 뿐, 결코 계급지배 질서에 반(反)하는 계급투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반(半)계급투표, 무엇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표는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데, 자산가 중심의 계급투표는 제대로 꽃을 피우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 왕왕 생기고 있다. 제대로 된 진보 정당이 필요하다는 여론조사에선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긍정적으로 답하면서도, 실제 선거에만 들어가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권자만 선택하는 격차가 존재하듯이 계급투표 역시 의미와 현실에선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을 간단하게 말하면 계급정치의 빈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사회에서 노동자계급 주도의 계급투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산업화 초기 시절 형성된 노동자 계급정당에 충성하는 산업노동자의 모습은 서구사회에서는 흘러간 옛 추억의 하나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제발 일어났으면 하는 소망의 하나이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계급투표가 발현하기 어려운 점은 우선 자본주의 초창기에 형성된 공장노동이라는 동질적 조건에서 집단적 계급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던 서구와는 너무나도 다른 조건의 차이에 기인한다. 멀리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시대적 조건으로 인해 진보와 보수로 대별되는 이념적 균형을 한국 사회에서 만들기 어려운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여기에 압축성장이라는 한국적 발전 모델이 사회운동에도 그대로 투영되면서 경제적 분배 정의에 초점이 맞춰진 노동운동과 탈물질적 가치 다양성이 우선될 수밖에 없는 신사회운동이 동시에 공존해, 계급정치 형성과 내용에 대한 접근마저 너무나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따라 계급정치 형성에서 필요한 주체들이 지속적으로 보수 정당에 몸을 의탁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계급정당의 출현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어 이웃한 다른 계급과의 연합 혹은 연대를 구축해가는 계급정치가 더디게 발달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노동자계급 내부가 결코 동질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복잡다단하게 변화하는 현실에서도 기인한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규모에서 전면적으로 작동하면서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화와 이질성 증가라는 현상은 산업화된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먼저 산업화 정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인구학적 측면에서 전통적 노동자계급의 주류였던 제조업·생산직 노동자 수는 점차적으로 줄고 있다는 점이다. 노조 조직화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면 노조라는 조직으로 모으기가 쉬운 노동자 수는 줄어드는 데 반해, 노조 조직화가 어려운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정체성을 확인하고 계급의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간 교두보인 노조의 역할이 점차 약화 혹은 무력화하는 현상이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고전적 노동자계급의 요새였던 ‘굴뚝산업’이 서서히 사라지고 첨단 정보기술(IT) 산업과 민간 서비스 산업이 신흥 산업으로 부각되면서 노동의 성격이 강제성에서 자율성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증가하면서 남성 주도로 대표되는 기존 노조운동에 변화를 강요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통적 육체노동자에 초점이 맞춰진 노조운동으로는 정신적 서비스가 가미된 ‘감정노동자’를 포섭하기가 어려운 현상이 산업사회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전 지구적 규모에서 발생하는 공통분모적 현상 이외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종사자 사이에 2배 이상의 임금 격차가 존재하고, 노조 조직률이 임금노동자 전체 대비 10% 안팎에 이를 만큼 낮다는 사실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노조조직에 포함되지 않은 대다수 노동자에겐 계급투표의 징후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조직된 노동자는 열심히 계급투표를 하고 있는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반쪽짜리 계급투표의 전형일 것이다. 하지만 이 반쪽짜리 계급투표가 노동시장의 변화에 속수무책의 지경에 놓인 노조운동의 무기력에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능동적이고 공세적으로 변화하는 자본의 움직임에 따른 것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볼 대목이다.  

 
 계급투표와 민주주의의 함수관계  

우매한 대중이 합법적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철저히 반(反) 혹은 비(非) 민주적 지도자를 선출할 때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는 위기에 빠진다.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체제의 등장 과정에는 선거라는 절차가 통과의례처럼 있었다. 한 사회에서 일자리 문제가 가장 심각했을 때 대중은 반(反)계급적 투표 행위에 몰입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착안하면, 민주주의 위기와 계급투표 사이에 놓인 상관관계의 비밀은 풀릴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은 곧잘 들리면서도 사회·경제적 첫 번째 의제인 일자리 문제는 비켜가거나 굴절되는 기이한 현상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다.  

새해가 되면 일자리 문제 해결이 가장 시급하다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말하고 있지만, 정작 노동시장에서 늘어나는 일자리란 불안정하고 장래가 없는 비정규 노동밖에 없는 상황이다. 학생에서 실업자로 자리를 바꾸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게 무어냐는 청년층 예비 노동자들의 볼멘소리가 개인적 무능으로 치부되는 현실은 하나의 보기일 뿐이다. ‘88만원 세대’만 있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직업 선택의 기회마저 제대로 없는 노령 노동자를 일컫는 ‘50만원 세대’도 있다고 말을 하면, 그건 나만 아니면 그만일 뿐이고 사회가 개인적 불행까지 감당할 수 없지 않느냐는 기묘한 도덕 교육으로 환원되고 만다. 이것도 모자라서인지 청년과 고령 노동자 사이에 놓인 중·장년 노동자 중에서 노조로 조직된 대기업 노동자에겐 ‘대기업 이기주의’라는 사회적 저주와 비난이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노조라는 울타리에서 보호받는 행운(?)을 걸머쥔 노동자가 계급투표의 주도 세력이라는 사실은 항상 괄호 안의 내용으로 숨겨지고 있다. 

일자리 문제는 구직자가 눈높이를 낮추면 해결될 수 있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계급의식을 가진다는 건 또 다른 인고의 노력을 요구한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더 이상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이 계급정치를 주도하기 어려운 현대사회에서 계급이란 과거처럼 생산관계에서 파생된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소비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계급의식은 과거처럼 작업장에서 유사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동질적 의식이 아니라, 소비를 할 수 있는 상품과 문화의 향유에서 발생하는 의식적 동질성에 따라 새로이 형성·변화하는 과정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촛불 세대’가 보여준 신선한 문화적 충격에 노조 운동가들이 스스로 변화하려고 몸부림쳤듯이, 우리 시대의 계급의식 역시 새로운 이미지와 모습으로 변형되고 있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글•이종래
독일 뮌스터대 철학박사.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사회학). <신자유주의와 세계 노동자계급의 대응>(2002), <노동의 저항>(200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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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농장서 프랑스 식탁까지, 총성 없는 전쟁 

르몽드디플 [18호] 2010년 03월 05일. 

사소한 소비 습관이 때론 일파만파의 결과로 이어진다. 겨울철 토마토 1kg의 이면에도 우리의 소비 습관이 불러온 무시무시한 현실이 감춰져 있다. 밍밍한 맛의 토마토를 감내해야 하는 소비자, 스페인 농장에서 혹사당하는 외국인 노동자, 과로에 시달리는 동유럽 출신의 화물기사, 운송트럭이 내뿜는 매연, 폭리를 취하는 대형 유통업체들까지…. 이렇듯 토마토 하나에 무역 세계화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유럽에서는 매년 대동소이한 일이 벌어진다. 10월이면 자국 땅에서 재배한 신토불이 토마토가 서서히 종적을 감추고, 스페인산(1)이 홀연히 나타나 재래시장이나 슈퍼마켓 진열대를 독식한다. 스페인에서 수입한 이 토마토는 단단하고 아삭거리는 식감에 텁텁하고 밍밍한 맛이 난다. 집에 돌아와 과일 바구니에 담아두면 여느 과일처럼 맛있게 무르익는 게 아니라 시들시들 윤기를 잃고 금세 곯아버리기 일쑤다. 카르푸 남프랑스 매장에서 청과물 담당자로 일하는 로베르는 “프랑스 소비자는 사시사철 토마토를 원한다. 한겨울이고 뭐고 없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토마토를 공급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사시사철, 그러나 값싸게    
문제는 독일이나 영국, 네덜란드, 폴란드 국민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소비자도 kg당 2유로 이상 나가는 토마토는 구매하려 들지 않는 데 있다. 제철이 아닌 계절에도 2유로 이하가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업계는 겨울철에 토마토를 경작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 말고도 다소 모순된 경제적 난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토마토의 소비자가를 2유로 이하로 낮추려면 생산 단가를 kg당 50상팀(약 0.5유로) 이하로 조정해야 수지가 맞았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자구책으로 떠오른 곳이 안달루시아의 소도시 알메리아다. 지중해와 웅장한 가도르산맥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은 유럽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고, 인건비는 가장 낮기로 유명한 곳이다. 

예전에 이곳은 황야지대였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1960~70년대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미국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역자)(2) 여러 편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하지만 요즘 이곳을 찾는 여행객은 수천 개 비닐하우스 행렬이 연출하는 예기치 않은 진풍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어떤 것은 요새처럼 튼튼하고, 어떤 것은 바람이 할퀸 듯 너덜너덜하다. 전부 얼마나 될까? 어림잡아도 3만 개의 비닐하우스가 3천~4천ha에 걸쳐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리고 여기에 수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일한다. 유럽 소비자에게 사시사철 채소(3)를 제공하기 위해 고용된 이들 중엔 불법 체류자도 부지기수다. 

알메리아대학 부속 사회인류학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후안 카를로스 체카의 분석에 따르면, 알메리아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는 11만 명으로 추산되고, 8만~9만 명은 외국인이며, 이 가운데 2만~4만 명 정도가 불법 체류자다. 불법 체류자 가운데 50%는 모로코인, 나머지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루마니아 출신의 노동자다. 

프랑스에서 농업노동자는 하루 8시간을 일하고 일당으로 55.40유로(세후)를 받는다. 고용주가 내는 사회부담금은 월 104유로다. 반면 알메리아의 일용직 노동자 일당은 32~37유로밖에 되지 않는다. 법정 최저임금이 44.40유로(세후)(4)이지만 실제 임금은 그처럼 형편없다. 게다가 사실 소득신고도 하지 않기에 고용주는 사회부담금을 낼 필요도 없다.

 수만 명의 타자, 이주노동자
외국인 노동자의 기숙사 사정은 어떨까. 비좁은 임대주택에 15명이 함께 기거하는 경우는 그나마 호사에 가깝다. 운이 나쁜 노동자는 급수나 전기 공급도 되지 않는 시멘트 건물에서 생활해야 한다. 본래 농가 주인이 화학비료를 쌓아두는 곳이다. 최악은 널빤지나 비닐을 덧대어 만든 빈민굴에서 간신히 숙식만 해결하는 경우다.이런 빈민굴은 눈에 띄지 않고 인적이 드문 비닐하우스 한복판에 설치된다.       

모로코 테투안 출신의 23살 노동자 엘 메흐디는 “나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불법 체류를 문제 삼지 않는 맘 좋은 사장님을 만났다”며 서투른 스페인어으로 답한다. 창문 하나 없는 기숙사는 음침하기 그지없다. 급수나 전기는 물론 난방시설도 기대하기 힘들다. 옆방에는 황산염 비료통이 방 안 가득 쌓여 있다. 엘 메흐디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저 비료를 뿌리는 게 내 일”이라고 설명한다. 서로 인접한 비닐하우스 두 동은 소유주가 같다. 그에게 고용된 외국인 노동자 엘 메흐디는 하루 8~10시간을 일하고 일당으로 33유로를 받는다. “그나마 일이 있는 날의 얘기”라고 그가 덧붙인다. 그래도 그는 만족한다. “여름 두 달, 일이 없는 동안에도 사장님의 배려로 계속 기숙사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법 체류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신 파펠레스’(sin papeles)는 유럽인이 귀가 닳도록 들어온 단어다. 2000년 2월 초순, 한 젊은 스페인 여성이 정신장애를 가진 모로코 불법 체류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거센 인종주의 폭풍이 사흘 밤낮 동안 엘에지도 일대를 휩쓸었다. 스페인 시민 수천 명이 쇠몽둥이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술집과 상점 등을 뒤지며 모로코인 색출에 나섰다. 이 폭동으로 5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그중 경찰과 이민자가 각각 20여 명이었다.  

이후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됐다”는 게 알메리아 농업노동자조합 대표 스피투 멘디의 판단이다. 해마다 비닐하우스 일대 길가에는 버려진 외국인 주검이 발견된다. 하지만 경찰 수사도 형식적인 선에 그치고, 살인범이 잡히는 일도 거의 없다.

 토마토를 위한 인간 이하의 삶 

이지도르 마르티네즈는 알메리아 제일의 농업협동조합 카수르에서 일한다. 기술엔지니어인 그가 자긍심 넘치는 태도로 취재진의 공장 견학을 도왔다. 카수르의 주 고객은 프랑스의 카르푸, 독일의 에드카와 리들, 영국의 아스다, 네덜란드의 매그니푸르츠라고 설명한다. 공정 과정을 들어봤다. 일단 토마토가 반입되면 가장 먼저 자동세척실로 향한다. 여기서 물 분사, 세제 투입, 회전 브러싱, 고온 건조 순으로 세척 작업이 진행된다. 마르티네즈는 “토마토 표면에 남아 있는 구리·황 잔여물을 말끔히 제거해야만 소비자에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금세 미소를 지으며 “사실 가장 유해한 물질은 과육에 잔류해 있어서 육안으로는 식별이 힘들다”고 덧붙인다. 

일단 품질·크기별로 정리된 토마토는 팔레트에 담긴다. 그 다음, 이 팔레트는 토마토 온도가 10도로 내려갈 때까지 1~2일간 냉장실에 보관된다. 마지막으로, 언제든 유럽 전역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마친 냉장트럭에 적재된다. 12월에서 이듬해 2월에 이르는 성수기가 되면, 출하 상품을 싣고 알메리아를 빠져나가는 화물트럭 수가 하루 500대에 육박한다. 알메리아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는 1900km(법정 휴식 시간을 고려했을 때 이틀 반나절), 런던까지는 2300km(사흘 반나절), 베를린까지는 2700km(나흘 반나절), 바르샤바까지는 3300km(닷새)에 이른다. 마르트네즈는 “수확에서 마트 입고까지 5~8일이 소요된다”며 “초록색 토마토를 출하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가 내민 색상기준표에는 초록색에서 붉은색 순으로 1~10까지 순번이 매겨져 있다. 그는 “런던 고객이 8에 해당하는 토마토를 주문하면, 4에 해당하는 토마토를 출하한다”고 설명한다. 살짝 색만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색을 바꿔치기하는 이유는 바나나·아보카도·키위와 달리 토마토는 일단 수확하고 나면 후숙 과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튿날 저녁, 화물트럭이 출발한다. 총 22개 팔레트, 적재 중량은 15t이다. 행선지는 카르푸 베지에 물류센터다. 베지에 물류센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카르푸 물류센터는 크기가 어마어마하고,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한다. 이곳에 하역된 제품은 몇 시간 만에 다시 트럭에 실려 해당 지역의 카르푸 슈퍼나 대형마트 매장으로 입고된다. 이번에 카르푸 화물을 맡은 47살의 안토니오 파셰코 산체스는 34년간 도로에서 잔뼈가 굵은 화물기사다. 그는 “13살에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 일을 도왔다. 지도를 보고 길을 알려드리는 일을 했다. 16살에 아버지와 교대해 야간 운전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노안 때문에 밤 운전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라며 간단한 이력을 소개했다. 그가 운전할 트럭은 볼보인데, 방금 출하한 신차처럼 아주 말끔하다. 그는 “이런 차는 못해도 15만 유로는 줘야 한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보기 좋으면 몸에도 좋은가 

출발을 앞두고 상관 안드레스 발베르데가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그는 화물차 400대를 보유한 알메리아 제일의 운수회사 카리온의 영업부장이다. 그에 따르면 1회 운송에 드는 경유는 km당 45ℓ에 육박한다. 차량은 물론이고 냉장설비를 가동하는 데도 연료가 들기 때문이다. 이는 ‘총운송비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실례로, 파리까지 운행하는 데 드는 운송비가 토마토 1km당 총 15상팀(약 0.15 유로)이라면 그중 5상팀이 연료비인 셈이다. 그는 “상황이 그런데도 대형 유통업체의 압박은 끈질기기만 하다. 계속해서 더 낮은 가격을 요구한다. 이미 문을 닫은 운송회사도 부지기수다. 현재로서는 앞으로의 향방을 전혀 알 길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대로라면 육로운송이 항만운송에 잠식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모로코 탕제항 개항으로 이런 가능성은 더욱 농후해졌다. 그럴 경우 안달루시아 농업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이런 위기의식의 발로로 현재 스페인에서는 알메리아와 프랑스 됭케르크를 잇는 항만노선 개설을 논의 중이다. 몽펠리에 국립 농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던 장클로드 몽티고는 “항만운송 전환의 붐이 일고 있다”고 진단한다. 청과물 운송물류 전문가인 그는 “향후 지중해 지역의 물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뀔 것”이라며 “현재 물류 요충지로 대접받는 지역도 미래에는 요충지에서 배제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고속도로를 누비는 화물트럭이 대세다. 고객의 가격 압박에 맞서 묘안을 찾아낸 운송회사도 있다. 이들은 육로운송과 관련해 유럽 내 통일된 법제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허점을 이용해 동유럽의 값싼 운송기사를 고용하는 꼼수를 부렸다. 이들 역외 노동자는 역내 노동자와 비교해 임금이 2분의 1~3분의 1가량 낮다. 스페인 출신의 운송기사 월급이 2500~3천 유로라면 우크라이나인 기사의 임금은 최하 1200유로까지도 곤두박질친다. 

이런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 예가 2002년 룩셈부르크-오스트리아 합작회사 크랄로베츠 금브흐사(5)의 도산 사건이다. 당시 이 회사는 소피아나 키예프에 화물기사 고용사무소를 개설하는 수법을 썼다. 현지 사무소를 통하면 ‘현지법’에 근거한 근로계약을 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 노동자의 주된 일터는 서유럽의 고속도로였지만 버젓이 편법이 자행됐다. 오스트리아 운송노조 대변인 프란츠 피쉴은 “오스트리아 운송회사에 고용된 화물기사 중 80%가 외국인 불법 체류자”(6)라고 털어놓았다.

 트럭은 질주한다, 살기 위해서  

요즘 상황은 어떨까? 새벽 3시경 발렌시아에서 카스텔로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한 식당을 찾은 화물기사 산체스의 의견을 들어봤다. 그는 “예전보다 도로에 불가리아나 우크라이나 출신의 화물기사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전한다. 취재진과 같은 테이블에 합석한 이들 중엔 산체스의 절친한 동료 프란시스코 파코도 끼어 있다. 그 역시 화물기사로, 그의 입을 통해 좀더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운송업계에서는 기존 기사들을 해고하고 대신 우크라이나 기사를 고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실제 동료로부터 들은 실화다. 해고된 이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밀매까지 감행한다. 새 타이어를 내다 팔고, 대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헌 타이어를 사용한다. 심한 이들은 다른 화물기사들이 대형 주차장에 들러 잠시 새우잠을 청하는 사이, 몰래 접근해 연료를 빼내거나 타이어를 훔쳐간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주행 거리에 따라 임금을 책정받는 기사들은 법정 휴식 시간까지 위반해가며 무리해서 운행 거리를 채운다. 심하게 낡은 타이어, 과로하는 운전사…. 그만큼 교통사고의 위험도 크다. 

취재진은 프랑스 국경에 조금 못 미친 부근에서 운전기사 산체스와 헤어지기로 했다. 베지에까지 동행해 하역 작업까지 마저 취재할 수는 없을까? 사전 취재 요청을 했지만, 카르푸 물류센터 담당자 티에리 갈쟁은 “절대 불가”라고 못박았다. 이어 “취재에 응하지 말라는 상부 지시가 있었다. 워낙 지침이 강경하다. 양해해주기 바란다. 직원이니 지시를 준수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카르푸 프랑스의 홍보실에도 연락했지만 “죄송하지만 취재를 허가할 수 없다”는 같은 답변만 돌아왔다. 프랑스 내 물류센터 수나 위치만이라도 알려줄 수 없느냐는 질문에도 홍보실 직원은 “기밀 사항이라 답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운송 시간이 길어질수록 접촉으로 인한 상품 훼손의 가능성도 늘어난다. 그래서 스페인산 토마토의 성패는 제품의 단단함에 달려 있다. 카르푸 물류센터에서 신선식품 담당자로 일했던 티에리 B는 “팔레트에 조금이라도 무른 토마토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 바로 반입이 금지된다”고 설명한다. 이 회사에서 청과물 담당자로 일하는 로베르 C도 익명 보장을 요구하며 입을 열었다. 그는 “입고되는 토마토는 경도가 높아야 한다. 수차례 고객 손을 거칠뿐더러, 진열 기간도 2~3일이나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89년 이스라엘 연구가들은 충격에 쉽게 손상되지 않고 장기 보관이 가능한 새로운 ‘장수’(long-life) 토마토 품종(다니엘라 토마토) 개량에 최초로 성공했다. 이후 이 신종 토마토의 색, 향취, 식감, 수분 함량, 연한 질감 등을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가 잇따랐다. 프랑스에서는 국립 농학연구소를 필두로 유수 연구소들이 토마토 품종 개량과 청과물 물류 운송 최적화를 위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7) 국가가 출연한 기금으로 진행되는 이 연구의 최대 수혜자는 주로 대형 유통업체다. 

프랑스의 경우, 대형 유통업체가 전체 식품 판매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67%다.(8) 상대적으로 근린 상권이 적은 독일이나 영국보다 낮은 점유율이다. 이 시장을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는 업체는 카르푸(시장점유율 23.9%), 르클레르(16.9%), 앵테르마르셰(13.5%), 오샹(11.1%), 카지노-모노프리(10.3%), 시스템 위(9%) 등 모두 6곳이다. 2009년 이 기업들이 올린 총매출액은 2450억 유로였고, 이 중 960억 유로를 카르푸가 단독으로 달성했다.(9) 

그렇다면 알메리안산을 피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동네 과일가게를 이용하면 알메리아산 토마토를 살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할인점에서 kg당 1.9유로에 판매되는 토마토가 동네 가게에서는 3~4유로에 공급되지만, 둘 다 동일한 생산지에서 동일한 처리를 거쳐 동일한 트럭으로 운송된 동일한 제품이다. 최악의 상황도 있다. 몽펠리에 대형 도매업체 로베르 오르탈에서 간부사원으로 재직하는 조엘은 “종종 대형마트에서 퇴짜 맞은 제품에 대해 구매 의향을 묻는 연락이 온다”고 증언한다. 그는 “그런 경우 제품을 구매한다. 고객에게 저렴한 가격 혜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고객층은 누구인가? 로베르 오르탈은 영세상점에서 대규모 상점에 이르기까지 몽펠리에 내 거의 모든 소매상점을 상대한다. 

대형 유통업체가 출하 상품의 반입을 거부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과일의 경도나 크기, 색상 등이 부적합하거나, 하역시 제품 온도가 너무 높아도 불합격 처리된다. 이 때문에 할인점 납품용 토마토 중 상당 부분이 재래시장이나 동네, 시내에 위치한 영세 청과물 가게로 흘러 들어간다. 이들은 대형 유통업체의 위협적인 성장에 맞서 살아남은 공영도매시장(MIN) 최후의 생존자다. 프랑스에는 이런 도매상점이 18곳에 이른다. 그중 하나가 룅지스다. 연구원 몽티고는 “룅지스마저 완전히 환골탈태했다”며 “요즘은 룅지스에도 모든 게 완비돼 있다. 대형 유통업체에나 있던 물류센터는 물론, 전문적인 상품 수입 담당자, 도매 담당자까지 없는 게 없다”고 덧붙였다. 

소비자에게 다른 선택은 없는 것일까? 모로코산 토마토는 어떨까? 모로코산(10)이나 스페인산이나 오십보백보다. 산업화된 경작 방식으로 인해 토질이 악화된 흙을 자양분으로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기는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자국산 토마토를 애용해보는 건 어떨까? 일견 옳은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요즘 노지 재배 토마토가 어디 있단 말인가? 흙에 뿌리를 내리고 태양을 쬐며 자라나는 토마토가 희귀하다는 사실을 알고나 하는 말일까? 프랑스의 연간 토마토 생산량은 60만t이다. 하지만 그중 95%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영국에서는 하우스 시설 3분의 1에 최첨단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사계절 내내 가스 난방이 풀가동되는 따뜻한 유리 온실이 마련돼 있다. 지상 50cm 높이에 고정대가 설치되고, 컴퓨터에 연결된 점적 관수 시설이 토마토 뿌리가 잠긴 큰 홈통으로 물과 비료를 공급한다.

 제철 과일이 맛도 좋고 착하다 

네덜란드나 벨기에는 아예 온실 ‘수경재배’에만 의존하는 형편이다. 이제 최후의 방법은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 자크 푸르셀의 조언을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몽펠리에에서 ‘자르댕 데 상스’ 레스토랑(세계적 권위의 레스토랑 평가지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2개 등급을 받은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이 요리사는 “나는 여름에만 토마토 요리를 한다”고 얘기한다. “여름이면 밭에 햇살 가득 흙을 품고 토마토가 자라난다. 관개수도 적당히 사용되고, 화학비료도 최소한만 살포된다. 이렇게 재배된 토마토는 맛이 끝내준다. 너무 질퍽하지도 않고 살짝 신맛이 가미된 게 향미가 뛰어나다”고 그는 전한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대학에서 문학 전공 교수를 지낸 뒤, 1999년부터 오스트리아 주재 <르몽드>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리베라시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때로는 기타 국가의 토마토가 스페인산을 대신한다. 진열대를 점령하는 토마토를 수입국별로 살펴보면, 프랑스에서는 모로코산이, 독일이나 영국에서는 네덜란드산이 주류를 이룬다.
(2)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 등이 있다.
(3) 알메리아의 비닐하우스 4만ha 중 9천ha에서 토마토가 생산된다. 조금 북쪽에 위치한 뮈르시에도 추가로 3천ha의 토마토 경작지가 있다. ‘스페인산 어디까지 뻗어 있나?’, <Végétable>, n°262, Morière-les-Avignons, 2009년 12월호. 알메리아에서 생산되는 주요 채소와 과일로는 오이, 고추, 수박 등이 있다.
(4) ‘Convenio colectivo de manipulado y envasado de frutas, hortalizas y flores de Almeria’, <Boletin Oficial de Almeria>, n°233, 2008년 12월 3일.
(5) 창립자 카를 크랄로베츠(Karl Kralowetz)는 룩셈부르크 법원으로부터 불법 체류자 고용 혐의로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고용한 불법 노동자의 월간 주행 거리는 3만km에 달했다.
(6) ‘동유럽에서 서유럽을 누비는 화물기사들’, <리베라시옹>, 파리, 2002년 1월 29일.
(7) Claire Doré, Fabrice Varoquaux, ‘50여 종 재배식물의 역사 및 품종개량’ INRA, 파리, 2006, p.695 이하 참조.
(8) 프랑스 통계청(Insee), ‘2008년 상업보고서’,
www.insee.fr.
(9) <Distribook 2020-Linéaires>, Cesson-Sévigné, 2010년 2월호.
(10) 모로코산 토마토는 이전에 아가디르 근교 수스에서만 생산되다가 요즘은 서사하라의 작은 해안도시 다클라를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다클라, 모로코산의 탄생’, <Végétable>, n°262. 

 

[박스기사] 18세기의 '데자뷔' 

 스페인 안달루시아는 막대한 양의 토마토 수출을 자랑한다. 스페인은 1995년 이후 연간 90만t의 햇토마토를 수출하며, 역내 최대 수출국(전세계적으로는 멕시코와 시리아에 이어 3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뒤를 네덜란드(2007년 수출량 83만4천t), 터키(37만2천t), 모로코(29만7천t), 벨기에(20만3천t), 프랑스(16만7천t), 이탈리아(11만t)가 뒤좇고 있다.(1) 네덜란드의 경우, 온실 수경재배에만 의존하는데도 토마토 생산량이 막대하다. 그 근간에는 우수한 기술력, 자국 해양에서 추출한 천연가스를 이용한 저렴한 난방, 값싼 노동력 등 세 요소가 원동력으로 자리하고 있다. 

2008년 스페인 토마토의 독일 수출량은 20만1천t, 영국은 17만4천t, 네덜란드는 14만5천t, 폴란드는 5만7천t, 이탈리아는 3만3천t, 체코공화국은 2만8천t에 달했다.(2) 유럽에서 토마토는 감자 다음으로 많이 소비되는 채소다. 2007년 그리스의 1인당 토마토 소비량은 61kg, 덴마크는 32kg, 이탈리아는 31kg, 스페인은 17kg, 프랑스는 14kg, 영국은 8.1kg, 벨기에와 독일은 각각 8kg에 이르렀다.(3) 영농 조합원 스피투 멘디는 “이처럼 우리는 막대한 양의 토마토를 즐기고 있지만, 이게 모두 알메리아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덕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라고 반문한다. 그는 “18세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보면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고 말한다. “이 저서에서 몽테스키외는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재배를 노예의 노동력에만 의존하다 보면 미래에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예견했는데, 오늘날 알메리아산 토마토의 실정과 딱 맞아떨어지는 얘기가 아니냐”며 경탄했다.

<각주>
(1)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chiffres 2007, http;//faostat.fao.org.
(2) Eurostat(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산하), ‘스페인산 토마토 역내 수출추이 통계표(2004~2008년)’, http;//epp.eurostat.ec.europa.eu.
(3) Eurostat, ‘역내 청과물 소비추이 통계표(일인당 kg 단위로 표시)(2000~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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