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선수는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뒤이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지금쯤은 앞날의 거취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교수가 어느 매체에 실린 ‘연아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김 선수에게 공부를 하라며, ‘스무 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들’, ‘역설적으로 소소한 실패와 좌절을 지금 하라고’ 곡진한 말로 권고했다. 그 좋은 글을 읽고 나도 마음이 움직여 조금 흉내를 내서 이 글을 쓴다.

지금의 대학 풍속에서는 김연아가 강의에 출석하지 않고도 다른 방법으로 학점을 얻어내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대학을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사회활동에 크게 지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룰 만한 것을 이루었으며, 그것이 그의 미래를 보장해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려고 든다면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상적인 것은 평범한 것인데 그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다. 그의 편에서야 그 강한 성격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낼 수 있겠지만, 동료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수들까지도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평범한 학생은 학교 근처 식당에서 싸고 양 많은 밥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토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토하는 학생의 등을 두드려 주기도 한다. 광장의 잔디밭에 앉아, 지나가는 얼굴 하얀 남학생을 곁눈질로 훑어보기도 하고, 수줍은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새벽같이 도서관에 나가 맡아 놓은 자리를 책가방이 지키게도 하고, 공들인 보고서와 벼락치기 보고서를 번갈아 제출하고, 친구에게 대리출석을 부탁했다가 젊은 선생을 펄펄 뛰게도 한다. 이런 일이 김연아에게는 쉽지 않다.

말 그대로의 공부도 김연아에게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에게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넘치기 때문이다. 겨울올림픽 직후 한 인터뷰에서 김 선수는 체육심리학에 흥미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런 과목이건 다른 과목이건 그 내용은, 여러 경기에서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긴장을 이겨냈던 그에게, 매우 지루하고 시들한 것이기 쉬우며, 그래서 포기되기 쉽다. 지루하고 시들한 것의 진수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역시 평범한 학생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김연아가 그를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던 그 자질로 이 어려운 일들에 어느 정도라도 성공하게 된다면, 돈이 될 수도 없고, 영예를 안겨주지도 않으며, 당장은 업적이 될 수도 없는 일에 턱없이 진지하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건 사회적으로건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 대학이라고들 하는데, 대학에는 미래의 직접적인 압박에서 벗어나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삶을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구실 아래 그 자유는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거의 폐기되기까지 했다. 김연아가 적을 둔 대학이며 내가 강의하는 대학의 김예슬 학생이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하고, 서울대의 한 학생이 그에 호응하여 대자보를 붙이게 된 것도 필경 대학의 없어져 버린 이 자유와 관련이 있다. 김연아가 평범한 대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 대자보 앞에도 서 있어야 할 것이다.


한겨레신문 2010.4.2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연아에게 보내는 편지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딴 날, 대한민국의 많은 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눈시울을 적셨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인식을 깬 최고의 연기, 혼신을 다해 자신의 길을 개척한 한 인간에 대한 절절한 감동 때문이었으리라.

그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김연아 뉴스가 연일 매스컴을 장식한다. 본인은 은퇴를 고려한다는 등, 아이스 쇼 단에 갈 것이라는 등, 다음 에는 트리플 악셀이 필요하다는 등, 소치 올림픽까지 가서 아사다 마오와 재대결을 벌여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고 추측도 다양하다.

스무 살 나이에 세상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세계 최정상에 오른 대한민국 처자의 앞날은 대체 어떻게 될까, 쓸데없는 상상과 걱정을 하게 된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녀가 맞닥뜨릴 인생의 많은 파도들은 어느 방향에서 올까. 주책 맞은 노파심이지만 우리는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최정상에 오르고도 불행한 선택으로 모두를 슬프게 했던 한 여배우의 이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리고 만약 김연아 선수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단 한 줄이나마 쓸 수 있다면 '지금 공부하라'는 것이다. 그녀의 선택과 결정이 전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그녀 역시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솔트 레이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사라 휴즈는 예일대에 들어가 공부하느라 다시는 스케이트화를 신지 않았다고 한다. 골프의 미셀 위도 스탠포드 대학에 들어가 골프와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김연아에게 지금 부와 명예는 주어진 것이지만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장담 할 수 없다. 나는 오직 현명한 판단과 인생에서 얻어지는 진짜 배기 경험들만이 그녀가 지금 얻은 것을 지켜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 지금 공부하라고, 지금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상처를 받고, '뭔가를 배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최고의 몸값으로 CF를 찍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지금보다 더 부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스무 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들, 지금 해야 인생에서 그나마 비용이 덜 들어가는 경험들, 역설적으로 소소한 실패와 좌절을 지금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것은 비단 김연아 선수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똑 같이 권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한민국의 대학 시스템이 지금 잘 나가는 젊은 스타나 스포츠 선수들을 너무 봐 준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출석 한 두 번이면 학점을 딸 수 있고, 책 한 권 안 읽어도 졸업장을 준다. 영화학과 강사 시절, 내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아무리 대단한 영화계 스타일지라도 적어도 내 강의에 한해서는 시험을 보지 않으면 절대 학점을 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모두들 힘들어 했지만, 많은 친구들이 한 두 권 책을 읽고라도 시험을 보았고, 오히려 교수의 그런 관심과 태도에 감사하다는 편지를 받은 적도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스타일지라도 김연아는 지금 스물 한 살의 대학생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의식 있고 똑똑한 그녀가 인생의 파도들을 잘 헤쳐나갈 것을 믿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 왜냐면 김연아 그녀는 내 후배들과 내 딸의 롤 모델이므로.

김연아. 그녀는 지금 곳곳에 암초가 숨겨져 있는 인생의 빙판을 탈 워밍 업을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한국일보 2010.3.3 

ps : '공부하라'라는 심영섭 교수의 말은 여러모로 나의 생각과 비슷하다. 책을 읽으라, 공부하라, 상처받으라, 느껴라 등등 사실 지금의 인간들에게 비단 대학생뿐만 아니라,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너무나 쉽게 사는 듯 하다. 지금의 우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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