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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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월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 영화는 반값 할인으로, 전시회는 무료로 볼 수 있다. 집에서 버스를 타면 1시간 이상 걸리는 대구미술관에서 그림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미술관에 관람객이 많이 오지 않아서 여유롭게, 천천히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살다보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근사한 미술관에 가서 전시된 그림들을 볼 때, 한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기가 무척 힘들고 아쉽다는 느낌에 젖는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한 그림 앞에 오래도록 그 그림이 주는 감동과 충격을 음미하고 싶은데 시간은 그걸 허락하지 않고 보아야 될 그림은 연이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어쩌면 ‘책그림책’이란 책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흥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책을 주제로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 현재 세계 문단을 주름잡는 작가들이 쓴, 때로는 시 같은 때로는 콩트 같은 짤막한 감상문을 덧붙인 책. 하지만 이런 산문적인 설명으로는 이 책의 진가를 전혀 전달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오히려 이 책은 읽는다거나 페이지를 넘긴다기보다 그림 하나하나 혹은 글 한편 한편마다 오래도록 하염없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책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주제로 쓴 글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눈 덮인 광활한 들판을 가로질러 머나먼 지평선을 향해 가는 한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이 보이는가 하면, 지붕 위 하늘을 마치 마법의 양탄자라도 되는 양 책을 타고 비행하는 사람도 보인다. 때로 책은 길가의 천막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잠시 쉬어가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높이 쌓아올려져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받침대 구실을 하기도 한다.

 

 

 

 

환상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케 한다. 서로 상관없는 낯선 오브제와 풍경이 기이하게 만나면서 동시에 현실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그림들은 모두 책―일부는 타자기나 종이―이 소재다. 달빛 아래 들판에 커다란 책을 이불처럼 덮은 소년, 푸른 평원 위에 중절모 신사가 잔뜩 쌓인 책 위에 걸터앉은 풍경, 사다리를 밟고 책 밖으로 튀어나온 책 속의 사내. 환상과 꿈이 뒤범벅된 그림들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에게 책이란, 삶이란 무엇인가.’

 

아까운 술을 조금씩 마시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든다. 예컨대 배에 책을 가득 싣고 수평선을 향해 노 저어 가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강변에 놓인 책상에서 열심히 뭔가를 집필하고 있는 사람 주위에 모여든 이들은 훼방꾼일까, 아니면 조력자일까. 단순한 듯하면서도 그림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상기시키고 또 상상하게끔 만든다. 책과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사람들은 현실에서 책으로 책에서 현실로 자유롭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나온다.

 

누구는 시나 소설을, 누구는 찰나의 단상과 송곳처럼 벼린 우화를 보내왔다. 이해하려 들면 점점 미로에 빠진다. 갸우뚱, 애매하고 애매하다. 근데 곱씹다 보면 뭔가 우러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느새 온몸의 털이 솟구치는. 그 속엔 책과 인생 위에 펼쳐진, 세상과 우주가 있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한 철학자의 말을 원용하자면 책의 안과 바깥의 구분은 사실 무의미하다. 자율적이라 믿는 당신의 모든 행동이 실은 책에 쓰인 한 단어 한 문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사람의 일생이라는 게 기껏 높이 쌓아올려진 한 무더기의 책일 수도 있다. 책 속의 그림 속의 여인을 보는 당신을, 지금 누군가, 당신이라는 그림이 그려진 책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책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혹은 보고 있다고 믿지만 그 세상이 곧 하나의 거대한 책이라면 그 책을 펼쳐들고 읽고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어린 시절 한 권의 책이 손에 들어오면 당신은 그걸 마음 놓고 읽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어디론가 숨곤 했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나만의 장소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책을 읽듯 그런 우리 또한 어느덧 읽혀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들에 따르면 책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책 속에서 열리고, 책 속에서 갇힌다. 각성과 혼돈의 공존. 그렇기에 책은 고맙고도 무섭다. 빌딩만큼 쌓아올려진 책 위에 홀로 선 남자 그림을 받은 체코 출신 작가 이반 클리마도 그 양면성을 훑는다.

 

 

 

 

“이는 책이라든지 다른 모든 사물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숫자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말이다. 그건 거리의 자동차든, 신발장의 신발이든 아니면 하늘의 별이든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우리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친구에서 우리를 자기들 사이에 파묻어 버리는 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인생의 답은 책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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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 프로젝트 - 4할 타자 미스터리에 집단 지성이 도전하다
정재승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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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요시,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말을 아는가. ‘요시(よし)’는 ‘좋다’는 뜻의 일본어다. ‘그란도 시즌(グランド シ―ズン)’은 ‘그랜드 시즌(grand season)’이란 영어의 일본식 발음이다.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원하는 것을 얻게 됐을 때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감탄사를 쓰면 적절하다. 비슷한 말로 '라지에타가 터졌어'가 있다. 꼭 좋은 일이 아니더라도 뭔가 인상적이고 강렬한 일이 터졌을 때 두루 쓸 수 있는 감탄사다.

 

 

               

 

인터넷에 '백인천 요시'라고 검색하면 쉽게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백 전 감독의 '요시, 그란도 시즌' 동영상  

 

이 표현의 특별한 의미는 야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잘 알 것이다. 2008년 일본 센트럴리그에 소속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던 이승엽 선수가 홈런을 때렸을 때 TV 해설을 하던 백인천 전 야구감독이 흥분하면서 뱉은 표현에서 유래했다. 당시 이승엽 선수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09일 만에 터진 첫 안타가 시즌 1호 홈런이었던 것.

 

이승엽 선수의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자 백인천 전 감독은 흥분 상태에서 “요시, 아~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 아주 그냥” 등의 말을 쏟아냈다. 백 전 감독은 일본 생활을 오래 해 평소 일본식 표현을 쓸 때가 많다. ‘그란도 시즌’은 만루 홈런을 뜻하는 ‘그랜드 슬램’과 시즌 1호 홈런을 실수로 합쳐 말했다는 설과 이승엽 선수에게 ‘좋은 시즌’이 시작됐다는 의미로 말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후 ‘요시, 그란도 시즌!’과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는 일본식 표현이 주는 묘하게 입에 붙는 느낌과 이승엽에 대한 야구팬들의 관심 등이 어우러져 네티즌 사이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해설 음성은 인터넷에 이승엽 선수 관련 이미지를 올릴 때 꼭 함께 쓰이는 합성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고 있는 이승엽이 슬럼프 끝에 안타나 홈런을 치게 되면 네티즌들은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댓글을 달기도 한다.

 

 

 

 Scene #2  4할 타자는 왜 사라졌는가?

 

뜻하지 않은 감탄사 한 마디가 야구팬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어 해설위원으로서의 백 전 감독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선수 시절에 남겼던 개인 성적이 ‘백인천’이라는 이름 석 자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다.

 

한국 프로야구 30년사에서 최고의 타율기록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MBC청룡에서 뛰었던 백 전 감독이 기록한 0.412(4할1푼2리). 그 이후로 4할대의 타자는 아직껏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야구의 역사가 오래된 미국에서도 요즘 4할 타자를 보기가 쉽지 않다. 1941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가 0.406을 기록한 이후로 메이저리그에서 4할의 타율은 자취를 감췄고, 일본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작년 60개로 일본 한 시즌 최다 홈런과 동시에 아시아 리그 최다 홈런을 기록(종전 기록이 이승엽의 56개)하여 일본 리그를 평정한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의 시즌 타율은 0.330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아주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일명 백인천 프로젝트. 한국 프로야구에서 왜 4할 타자가 없어졌는지 그 이유를 밝히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트위터를 통해서 이 작업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았다. 자료를 모을 사람, 통계 처리를 할 사람, 자료 분석을 담당할 사람, 홈페이지를 만들 사람, 논문을 작성할 사람 등이 집단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중에 과학자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일반 시민들이다. 참가자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통계 전문가, 야구 데이터 수집가, 직장인, 대학생, 야구광... 연구자의 눈으로 보면 오합지졸일 수도 있는 참석자들이 각기 움직이며 질문도 답도 스스로 찾아내서 연구를 한 끝에 드디어 작년에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사실 4할 타자의 멸종에 관한 궁금증은 야구팬들의 수다거리로만 여겼던 주제였다. 그러다가 진화생물학자이자 골수 야구광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최초로 과학의 연구 주제로 끌고 들어왔다. 진화론자답게 굴드는 4할 타자 실종을 시스템의 진화적 안정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메이저리그는 정착화 되고 팀이 이길 수 있는 다양한 전략들이 등장한다. 이렇다보니 점점 최고 타율의 선수와 최저 타율 선수 사이의 차이가 줄어든다. ‘신계’에 가까운 뛰어난 실력을 가진 테드 윌리엄스 같은 특출한 선수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대표적 진화이론인 ‘외부의 유입이 없는 닫힌 계에서는 진화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돌연변이 확률이 떨어진다’는 내용을 야구에 적용한 것으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굴드의 가설 이외에도 야구계에서는 ‘타자의 기량 약화’, ‘투수의 전문화와 기량 향상’, ‘타자에게 불리한 룰과 심리적 압박감’. ‘경기장의 변화’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놨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여러 가지 가설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프로야구는 타율 향상 폭이 연평균 0.3리가, 출루율은 연평균 0.6리가, 장타율은 연평균 1.1리가 각각 상승하는 등 기존 야구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타자의 기량 약화'가 아닌 타고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투수 지표는 평균자책점(ERA), 이닝당 출루 허용률(WHIP), 9이닝당 삼진수(K/9)를 분석한 결과 기록 하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투저’ 현상을 확인됐다. 이러한 ‘투저타고’(투수는 성적이 낮고, 타자는 성적이 좋음) 현상의 입증을 통해서 ‘타자의 기량이 떨어져 4할 타자가 사라졌다’, ‘투수 성적이 높아져 사라졌다’는 속설도 틀린 셈이다. 결국 굴드의 가설이 4할 타자의 실종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타당성이 증명되었고, 한국 야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는 30년 동안 선수들 사이의 기량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튀는 선수가 사라지고, 4할 타자가 나타날 확률도 그만큼 낮아졌다.

 

 

 

 Scene #3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에서 이미 입증된 결론을 검증한 연구 결과가 다소 허무할 수도 있겠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기량이 점점 떨어지는 이 슬픈(?) 사실을 알게 된 야구팬들 입장에서는 맥이 풀렸을지도. 하지만, 과거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4할에 가까운 성적을 달성했던 선수들이 있었다. 앞으로도 4할 타자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전설의 야구선수 요기 베라의 말을 잊지 말자. 한 시즌 끝났다고 해서 야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드디어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지 않은가. 제2의 백인천의 등장을 기대하면서 앞으로도 특별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확보된 데이터는 한국 야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본다.

 

‘백인천 프로젝트’는 야구학의 측면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무려 58명의 아마추어 과학자들이 공저자로 참여해 외국 잡지에 제출할 만한 논문을 완성했다는 것 자체가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넘어 ‘과학의 대중적 참여’가 가능한지를 탐색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 덕분에 야구를 몸으로 직접 뛰며 하는 동호인이나 데이터를 분석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마니아 모두 야구에서 ‘즐거움’을 찾았을 것이다. 일단 시동이 걸린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 어디까지 진화하고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 같다. 마음에 품고 있었던 야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라지에타처럼 지금 터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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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명상에 관련된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기가 있었다. 1990년대 국내 출판계에 크리슈나무르티, 칼릴 지브란 등의 책과 함께 많은 작품이 번역 소개되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1995~2000년)에 교실 학급문고 책장에 꼭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꽂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만해도 크리슈나무르티와 칼릴 지브란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고 크게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도 지브란의 <예언자>는 분량이 얇아서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초딩이 심오한 명상의 세계를 제대로 알 리가 있나. 처음에는 지브란의 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긴 내용의 시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향하는 일종의 주문서 같은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문장은 무척 난해하게 느껴졌다.

 

지브란, 크리슈나무르티 이외에도 국내에 한창 이름을 알리고 있었던 명상철학자 한 명이 또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쇼 라즈니쉬다. 라즈니쉬는 1931년 인도의 자이나교 집안에서 태어나 22세 때 어느 날 공원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철학을 전공했다. 자발푸르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1964년에는 명상캠프를 열어 동서고금의 종교경전 등에 대해 설법했다. 그는 1990년 1월 ‘바다와 같이 무한하다’는 뜻을 지닌 오쇼라는 이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2백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라즈니쉬가 작고한지 일 년이 지난 이듬해 출판사마다 다투어 라즈니쉬의 명상서가 홍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라즈니쉬의 대표작으로 가장 먼저 소개되는 우화모음집 <배꼽>(박상준 역, 장원, 1991년 중판)은 발간 4개월 만에 20쇄 50만부를 찍고, 교보문고 및 각종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기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배꼽>을 낸 출판사 입장에서는 라즈니쉬 열풍 덕분에 대박을 쳤다는 점이다. 장원출판사는 1988년 11월 24에 정식으로 법인 등록되었다. <배꼽>은 1990년 연말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문을 연지 2년 밖에 안 된 신진출판사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이 집계한 1991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독자 성향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1991년에 가장 잘 팔린 책들은 공통적으로 인도 명상철학가의 우화집, 사랑을 주제로 한 소녀취향의 시집과 수필집이었는데 그 중에서 라즈니쉬의 <배꼽>은 종교 분야가 아닌 수필/비소설 분야에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비소설 분야뿐만 아니라 <배꼽>은 1991년 올해의 최고 인기 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큰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출판사측 말에 의하면 1991년 11월까지 1백27만부를 팔았다고 한다.

 

라즈니쉬의 <배꼽>이 대박 난 이후에도 국내 출판사들은 앞 다투어 라즈니쉬의 글 모음집이나 저서를 출판했지만 역자와 출판사가 임의대로 편집한 책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한 라즈니쉬의 수십 권의 책들 중에 라즈니쉬가 직접 쓰고 출판한 공식적인 텍스트 자체를 온전히 번역한 책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장원의 <배꼽> 같은 경우에도 ‘배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Tao: The Pathless Path>(전 2권)과 <Sufis: The People of the Path>(전 2권) 외에 10여 권의 텍스트에서 역자가 우화들을 골라서 한 권의 우화 모음집으로 만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장원 이외에도 타 출판사에서도 제목 그대로 따온 유사도서가 출간되거나 심지어 ‘배꼽’ 인기를 반영한 듯 <배꼽 2><배꼽 3> 같은 후속편도 나왔다. 이러한 출판사들의 과잉 출판은 ‘표절도서’로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부 서점은 독자를 현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배꼽> 유사도서를 판매 중단하기도 했다.

 

 

 

 

 

헌책방에서 구한 두 권짜리 <배꼽>은 같은 역자에, 같은 출판사에서 낸 것이 아니다. 1권은 ‘장원’에서, 2권은 ‘카나리아’라는 출판사에서 낸 것이다. 책 표지가 서로 비슷해서 같은 출판사에서 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나도 처음에 헌책방에서 발견했을 때 모르고 있었다가 뒤늦게야 출판사가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책 다 책 앞, 뒤표지가 너무 유사하다. 아무래도 먼저 나온 장원의 <배꼽> 제목과 표지를 카나리아 출판사가 그대로 따온 듯하다.

 

카나리아 출판사 말고도 <배꼽> 또는 <배꼽> 시리즈를 낸 출판사가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배꼽>에 수록된 우화 일부 내용은 다른 제목과 표지로 바꿔서 출간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저자명이 라즈니쉬로 표기된 책들이 간간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적지 않은 책들을 일일이 찾아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확인하기 어려운 더 큰 이유가 그렇게도 많이 내던 라즈니쉬의 책들 절반은 이미 절판되었다는 사실이다. 20여 년 전 베스트셀러 종합 1위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고 지날수록 대중의 기억에 잊히는 법이다. 1991년 가장 많이 팔린 장원의 <배꼽>은 헌책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되었고, 한 권의 책 덕분에 잘 나가던 출판사는 1997년 이후로 책을 내지 않았다. 장원 출판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지만, 출판사소식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장원 출판사가 1997년까지 낸 책들이 현재 절판인데다가 그 이후로 책이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IMF 외환위기로 부도가 났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1991년 라즈니쉬 열풍은 짧고 간결하면서도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통해 정신적인 공허감을 극복하려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명상이나 신비주의 철학을 고집하는 독서가 무조건 좋다고는 볼 수 없다. 자칫 현실 문제를 외면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짧은 이야기로 구성된 우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방대하고 심오한 명상철학의 본질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 간단하고 보기 쉬운 이야기만 선호하는 독서는 가볍고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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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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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나는 오늘을 위해 피를 팔면서 산다  

 

피는 생명의 증거이자 죽음을 부르는 신호다. 피가 매매의 대상일 때 삶은 잔인하고 비루해진다. 피를 파는 것은 목숨을 파는 것이며 자신을 파는 것이다.

 

매혈(賣血)은 헌혈과 다르다.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 피를 뽑는 것이다. 매혈을 통해 번 돈으로 재산을 축적하겠는가. 최악의 생존 조건에 내몰린 사람이 선택한 마지막 연명 수단일 뿐이다.

 

허삼관은, 그래서 슬프다. 그가 피를 팔고자 했을 때는 늘 가족이 우선이었다. 자신을 위해 피를 팔아본 적이 없다. 동네 미녀 허옥란과 결혼하기 위해, 첫아들 일락이가 자기 핏줄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의 사고 처리를 위해, 가뭄 때문에 온 가족이 굶주릴 때, 문화대혁명으로 농촌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손에 돈을 쥐어주기 위해, 갑작스런 병으로 신음하는 일락이를 살리기 위해, 허삼관은 기꺼이 자신의 피를 판다. 중국에서 한번의 헌혈에 뽑는 피의 양은 4백밀리, 우리의 헌혈량과 같다. 그에게 피란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자 돈줄이며 배를 곯는 가족들에게 국수를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족들 앞에서 가장의 능력과 권위를 한껏 뽐내기 위한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다.

 

병원에 피를 파는 허삼관은 나름대로 몇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다. 피를 팔러가는 길 내내 오줌보가 터질 만큼 물을 마신다. 그래야 피가 묽어져 그 양이 곱절로 늘어날 것이란다. 피를 판 후에는 꼭 볶은 돼지 간 한 접시와 황주 두 냥을 챙겨 먹는다. 빠져나간 피를 보충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피를 팔며 연명하지만 허삼관의 삶이 고단하거나 비루하지는 않다. 큰 아들 일락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남의 집 아들을 9년 동안이나 키웠다며 동네 사람들이 ‘자라 대가리’라고 비웃었을 때도, 피 판 돈으로 아들의 상사에게 술을 따르고 담배를 권해야했을 때도 그는 당당하다. 일락이의 간염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사흘 단위로 피를 뽑을 때에도 행복하다. 피라도 팔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며 피를 뽑아도 괜찮은 자신의 건강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Scene #2  매혈의 웃음 뒤에 감춘 아버지의 눈물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맨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냐. 널 11년이나 키워 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는 안 되는 것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1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야.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내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할란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일락이 눈에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아주 조심스럽게 허삼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갑자기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187쪽)

 

집 나간 의붓자식 일락이를 찾은 허삼관이 아이를 등에 업고 걸어가며 퍼부어대는 욕에 자신의 처지가 다 들어 있다. 허삼관은 의붓자식 일락이를 차마 어쩌지 못한다. 미울 때는 욕을 퍼붓다가도 애써 친자식들과 웃을 때 닮았다며 자위한다. 허삼관은 늘 피를 팔아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라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 그래서 말로 음식을 만들어 먹이기도 하고, 일락이만 빼고 국수를 먹으러 가기도 한다. 일락이도 국수가 먹고 싶다. 그래서 친부를 찾아가 보지만 어림도 없다. 결국 허삼관이 그를 다시 품는다. 아이는 국수 먹으러 가는 거냐고 천진하게 묻는다. 아비는 ‘그래’라고 짧게 답한다. 짤막한 아비의 대답에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소설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독자들의 슬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다.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 자린고비를 능가하는 기지로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나, 문화대혁명이라는 혹독한 시간에 비판의 대상에 오른 아내의 자기비판회를 여는 모습은 역사와 한 개인의 삶과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허옥란이 마녀사냥을 당하는 장면과 소문이 진실이 되고 마는 혁명기의 인간 군상이 허허롭다.

 

허삼관의 피는 건강한 민중성이며 친근한 가부장성을 상징한다. 평생 가족을 위해 피를 팔았던 그가 육십을 넘긴 인생의 황혼 길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오직 볶은 돼지 간과 황주를 먹고 싶어서 피를 팔고자 한다.

 

모두가 안정적인 삶의 자세를 잡아가는 어느 날 환갑이 다된 허삼관은 갑자기 피를 판 후에 먹는 고기와 술이 먹고 싶어서 피를 파는 병원에 간다. 하지만 피를 팔 수 있는 이를 고르는 혈두는 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를 팔 수 없다고 우긴다. 평생 가족과 다른 사람을 위해 피를 팔다가 오직 자신의 욕구에 따른 의지로 피를 팔려 했을 때, 그것이 안 된다고 했을 때의 허무감.

 

하지만 늙은 피는 가구 칠에나 쓰일 뿐이라며 병원에서 쫓겨났을 때 그의 곁에는 아내 허옥란이 있었다. 쓸쓸해진 남편에게 돼지 간과 황주를 먹이기 위해 승리반점으로 데려가는 아내의 모습에,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진한 페이소스가 배어있다. 늘 그렇듯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가정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일생을 살아온 남자, 어려웠던 시절에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냈던 우리의 아버지들, 집안에 닥쳐온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내다 팔고 허름한 장터 구석에서 돼지국밥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진다.

 

 

 

 Scene #3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 뜨겁고도 진한 생명력

 

 

 

마크 퀸  「Self」 2001년

 

 

‘매혈’하면 허삼관 말고도 생각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지금도 활동 중인 영국 출신 컨템포러리 예술가 마크 퀸.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만든 그의 작품 중에 ‘Self’라는 것이 있다. 이 작품은 미술 역사사상 가장 엽기적이다.

 

‘Self'는 5년마다 한 번씩 마크 퀸 자신의 혈액 4ℓ를 채혈해 만든 시뻘건 ‘피 두상’이다. 자신의 피로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을 만든 것이다. 일단 대부분 사람들은 마크 퀸의 피로 만든 두상을 끔찍하게 여긴다. 무엇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실은 두상을 만드는데 사용한 4ℓ의 혈액은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전체 피의 양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Self'는 일회적인 작품이 아니다. 놀랍게도 연작작품이다. 1991년 첫 작품을 제작한 후, 조금씩 자신의 피를 뽑아 모았다가 5년마다 한 개씩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크 퀸의 작품은 간신히 혐오감을 누르고 보면 ‘인간 존재의 찰라성과 허무함’을 ‘핏속’까지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냉동장치를 통해 적절한 온도를 맞추어 주지 않으면 변색이 되거나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퀸은 왜 굳이 자신의 피를 뽑아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정기적으로 채혈 작품을 만들어도 퀸은 생명에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허삼관처럼 퀸에게 피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인 것이다.

 

“설령 목숨을 파는 거라 해도 전 피를 팔아야 합니다.” (291쪽)

 

‘피’는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매혈은 목숨의 일부를 파는 일이다. 허삼관의 인생여정이 가장의 삶을 넘어 이타적 인간의 삶으로 비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허삼관의 매혈 인생은 자신이 누구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매혈은 ‘자라 대가리’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무식하고 어리석은 방법일 수 있으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뜨겁고도 진한 생명력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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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4-12-30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 근사한 글을 읽고갑니다. 새삼 북플에 감사라도 전해야하나 싶어지네요.인터넷였다면
이리 들여다 보진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하면 참.엄마,라는 그 무게만큼
복잡다단한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제 매혈기의 감상은 님처럼 진중하게 아버지를 똑바로 관통하지 못합니다.
대충 얼버무린 우스겟소리로 헤치워버리고
말았는데..덕분에 위로가 되서 따듯해졌어요.
실은 바라는 거죠..누군가는 책임있는 아버지가 좀 되어 이시대의 아버지를
보여줄 순 없는거냐고...무얼 원하는건지
알게 되서 기쁩니다.고맙습니다. 저는 님의
글로 선물을 받은 셈인데..cyrus님껜 딱히
드릴게 없어서 새해엔 그저 원하는 일들의 순탄함을 빌어 드리는 수밖에 없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cyrus 2014-12-30 18:26   좋아요 0 | URL
잡문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감상을 선물로 표현한 분은 장소님이 처음입니다. 칭찬보다 건설적 비판을 선호하는 성격이지만 장소님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필사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컴퓨터 글씨체로 된 문장을 읽다가 필사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읽게 됩니다. 이것이 필사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장소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

[그장소] 2014-12-30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이지만 이 첨단을 달리는 기계는 편리함은 주지만 오래도록 기억을 붙잡아주는데엔 영 아닌 것 같아
반편이 같이 저는 손글씨를 쓰고 사진을 찍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소통의 도구임에는 확실하단걸 알겠네요.
비판은 쓰고 칭찬은 달터인데..약이 뭔지..
가려 드시는걸 보니..늘 조심하여 글추렴 해야겠다..싶어집니다.그러나 좋은 선생은
가까이..그렇지요..?
못난 글씨 봐주셔서 감사하고 잠깐의 환기
정도 되었다면..기쁘게 여기겠습니다.
좋은글..자주 부탁 드립니다.많이 배우겠습니다.따듯한 저녁 되세요..(^-^)v

루쉰P 2015-01-17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많은 책을 읽고 계시네요 ㅎ 하정우의 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관심이 생겨 책은 어떤 건가 보러 왔는데 ㅋ 이렇게 잘 써주셨네요 ㅎ
대학은 졸업 하셨는지요? ㅎ 아직도 학생이신지 궁금합니다

cyrus 2015-01-18 14:52   좋아요 0 | URL
루쉰님!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는 작년에 이미 졸업했고요, 취업 준비 중입니다. 루쉰님이 저를 학생으로 기억하시는 모습을 보니 물 흐르듯이 지나간 시간이 그리워지고, 그 때 그 시간의 기억에 딱 멈춰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루쉰P 2015-01-1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리 말씀하시니 지나간 시간이 그리워 지네요 ㅎ
전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살던 중 ㅎ 아예 모든 것을 접고 노무사가 되기 위해 대학동 고시촌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취업 준비 중 이시라니 여러가지 힘든 것과 싸우고 계시리라 여겨 지네요 전 제가 하고 싶기에 고시 중이지만 분명 원하시는 사회에서 자리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기 고시동네에는 20대의 수많은 청년들이 머물러 있습니다 바늘 구멍같은 합격을 위해 모든 걸 접고 들어와 있어요
어쩔 때는 강의를 듣기 위해 아침 7시부터 눈이 뻘건 채로 줄 서 있는 청년들을 보며 빨갛게 달궈진 쇠들 처럼 자신이 갈려고 하는 바에 대한 집중이 감탄 스럽더군요 ㅎㅎㅎ
남들은 왜 청춘을 고시에 바치냐는 비아냥을 할 수 있어도 뭐랄까 진지하게 시험에 도전하는 이 사람들을 보며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회에서 처절한 저항을 하는 자들 같아 경건해 집니다
저도 많이 느끼게 되구요 ㅎ
아무쪼록 진짜 힘든 취업의 시기 여태 읽으신 인문학적 재능으로 현명하게 뚫고 가시리라 여겨집니다
올 해는 우리의 승리의 한해로 만들어 가시자구요 ㅎ

cyrus 2015-01-18 19:14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우리 힘냅시다. 승자가 되어 서로 웃는 모습으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실제 일어났던 정략결혼을 배경으로 한 비극의 주인공은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프란체스카는 라벤나의 귀족 귀도 다 폴렌타의 딸이다. 그녀는 첫눈에 반한 말라테스타 가문의 차남 파올로를 연모하면서도 두 가문의 이익을 원하는 어른들의 속임수에 의해 리미니의 귀족 잔초토 말라텐스타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잔초토는 불구의 몸(추남인데다가 절름발이)이었고, 그래서 결혼식장에 동생 파올로를 내보냈는데 신부 프란체스카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앵그르 「파올로와 프란체스코」 1819년

 

 

형수와 시동생이 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오랜 시간 애써 숨기고 있었다. 키스 장면이 묘사된 책을 우연히 함께 읽다 자석처럼 이끌린 단 한 번의 키스로 사랑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잔초토에게 발각되어 두 사람은 죽음을 당하였다. 그 이후 간음한 죄로 비참하게 살해되어 애욕의 죄를 범한 영혼들이 형벌을 받는 지옥의 제2원(신곡 속의 지옥은 9층으로 나뉘어졌는데 각 층은 죄질에 따라 구별된다)의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떠돌게 된다.

 

 

 

 

 

아리 쉐퍼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파올로와 프란체스코의 영혼」 1855년

 

사랑은 우리를 하나의 죽음으로 이끌었지요.

(단테 『신곡』 지옥편 5곡, 민음사, 55쪽)

 

 

망령들의 애절한 사연을 들은 단테는 이 지극한 사랑에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끼며 절절하고 비길 데 없는 시구절로 기구한 연인들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문학, 음악, 회화 등의 소재가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키스」 1889년경 

 

 

그중에서도 조각가 로댕의 작품 ‘키스’는 긴 시간 지켜만 보던 연인들이 첫 키스를 통해 서로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 순간을, 대담한 움직임과 표현적인 감각을 통해 주변 공간마저 빛이 넘치듯 묘사했다. ‘영혼과 영혼은 연인의 입술 위에서 만난다’는 말을 이 이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진실이라고 수없이 다짐하는 말보다도 더 많은 마음을 보여주는 감추어진 표정 같은 이 낭만적인 로댕의 작품 ‘키스’는 우리가 지나온 청춘의 신기루 같았던 시간의 흔적 속, 아찔한 현기증 같았던 첫사랑, 첫 키스. 그 기억의 실체화이다.

 

히포크라테스가 ‘태어났다 커지고 괴롭히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 질병처럼 다루기 힘든 열병이었던 첫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때로는 지우지 못할 상흔으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돌이켜 보면 청춘은 사랑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 우리는 세상과 부딪히면서 그 강렬한 사랑의 울림들은 잠잠해진다. 프란체스코와 파올로의 사랑이 절절히 마음에 와 닿았던 시절은 가고 사랑의 이야기들은 이제 마치 다른 세상을 엿보는 것처럼 낯설며 영화나 문학이라는 오래된 코드를 통해서만이 말할 수 있는 비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시들하다.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고스란히 빈집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주받은 혼령이 되어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돌고 있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사랑은 슬픔이자 축복이며, 만나려는 갈망과 만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서로 입술을 맞대고 있는 로댕의 ‘키스’는 되돌려 받을 수 없다면 훔쳐보기라도 하고 싶은 우리들의 잃어버린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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