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시 삼백수 : 7언절구 편 우리 한시 삼백수
정민 엮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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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시비성(是非聲)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최북 「계류도(溪流圖)」 연대 미상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최북은 이 시의 후반부를 첫 글자 ‘상(常)’만 ‘각(却)’으로 바꿔,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그린 「계류도(溪流圖)」의 화제(畵題)로 삼았다.

 

 

미친 물결 쌓인 돌 묏부리를 울리니

지척서도 사람 말 분간하기 어렵구나.

올타글타 하는 소리 내 귀에 들릴까봐

흐르는 물 부러 시켜 산을 온통 감싼게지.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 題伽倻山讀書堂 / 가야산의 독서당에 쓰다, 14쪽)

 

 

최치원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의 재능이 좋았고, 그의 고독이 좋았고, 그의 시가 좋았다. 망해가는 신라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가야산에 은거한 그의 삶이 좋았다. 시비(是非)하는 소리가 싫어 바위 사이를 울리며 흐르는 물로 차단해버리고 그 고독 속에 파묻힌 그의 결정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흘러 다닌다. 내가 내뱉은 언어, 내가 듣는 언어, 내가 주울 수 있는 언어, 내가 버린 언어. 세상은 바야흐로 언어의 천국이다. 내가 내뱉은 언어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내가 듣는 언어로 인해 내가 아프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가능하면 모든 언어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 언어가 시(是)하는 것이든, 비(非)하는 것이든 그 모두를 내 속에 받아들인다. 지난 시간과는 달리 내 속에 들어온 시비성(是非聲,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투는 소리)은 아주 자유롭게 내 속을 흘러 다닌다. 흐르는 물소리로 시비성을 막아버린다고 시비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是)’가 반드시 ‘시(是)’인 것도 아니고, ‘비(非)’가 반드시 ‘비(非)’인 것도 아니다. ‘시(是)’가 ‘비(非)’로 변하기도 하고, ‘비(非)’가 ‘시(是)’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시비’ 모두가 상대적이라고 결정해버린다면 삶은 미궁으로 빠진다. 삶은 끊임없는 ‘시비’의 판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치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면 무엇으로 ‘시비’를 결정할 수 있을까? 상대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가치판단이다. 개인을 넘어 집단을 대상으로 할 때 거기에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생긴다.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도덕이고 법일 것이다. 우리가 도덕이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비성’이 들린다고 흐르는 물소리로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소리와 만나야 한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Scene #2  아름다워 슬픈 여강,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는 그림

 

 

천지는 가이없고 인생은 덧없거늘

호연히 돌아갈 뜻 어디로 가려 하나.

여강 한 굽이 산은 마치 그림 같아

반쯤은 그림인 듯 반쯤인 시인 듯.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廬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

 

(이색, 麗江迷懷 여강에 마음이 심란하여, 108쪽)

 

 

 

여강(남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여주 땅의 아름다움을 이만큼 잘 나타낸 시가 또 있을까.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목은 이색은 자신의 고향인 여주를 이렇게 노래했다. 여주에서 그림 같고 시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강의 풍경이다. 한반도의 중앙을 흐르는 남한강이 여주를 감고 돌면서 비로소 여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충청, 강원은 물론 영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실어 나르고, 한양으로 가는 길손들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런 강줄기를 여주 사람들은 ‘여강 백리길’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언제나 사람과 풍성한 물자로 흥청거렸던 이곳도 철도와 고속도로의 등장에 잊힌 강이 되어버렸다.

 

4년 전에 여강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핵심 구간이 되면서 찬반 세력이 첨예하게 맞선 곳이었다. 강 생태계 파괴로 환경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며 환경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공사로 파괴되는 현장을 직접 보려는 시민순례단의 답사 발길이 이어졌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공사는 진행되었다. 지금쯤이면 여강의 그림은 반쯤은 콘크리트이고, 반쯤은 식당일 것이다.

 

여강길은 철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물수제비를 뜰 수 있고 동물발자국과 희귀식물도 찾을 수 있으며 강을 울리는 메아리도 들어볼 수 있다. 자갈길과 모랫길, 억새길, 늪지길이 번갈아 나오는 그 길을 걸으면 이야기가 있고 유적도 있다. 그리고 눈물도 난다.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심란하다.

 

 

 

 Scene #3  연밥 던지고 임도 보고

 

 

 

문혜정 「연곷 이야기 1」 2008년

 

 

가을날 맑은 호수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두고.

임 만나 물 저편에 연밥을 던지고는

행여 남이 봤을까 봐 한참 부끄러웠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허난설헌, 採蓮曲 / 연밥 따는 노래, 324쪽)

 

 

 

가장 더운 여름날 새벽에 피어나서 밤이면 꽃잎이 닫히기를 3~4 일간 계속 되는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가장 깨끗하게 피어난다. 흔히 연꽃을 한 꽃 받침에서 두 송이가 핀다 해서 부부간의 금슬을, 연밥에는 씨가 많아 다산을, 연밥의 씨는 수백 년 동안 생명을 유지해서 장수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군자를 의미하고 절개를 뜻하는 연꽃도 한편으로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꽃이 심어져 있어 연밥을 따는 연못은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나 사랑이 무르익는 장소였으며 ‘연밥도 따고 임도 본다’는 대표적인 꽃이다. 연밥(蓮子)을 던져주는 것은 사랑 고백을 의미한다. 정민 교수의 해석대로 ‘연자’(蓮子)의 동음이의어 ‘憐子’로 읽으면 ‘그대를 사랑해요!’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부끄럽지만 임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구절이 뛰어나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을 사랑으로 갈망하고 꿈꾸었지만 단 한 번도 연인을 가져보지 못했고, 지아비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난설헌의 문학적인 성취의 뒤편에는 더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삶이 자리 잡고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다, 기생집을 전전하던 남편, 그리고 재주를 질시하던 시어머니와의 끝없는 불화, 그리고 두 자녀의 죽음. 그녀의 삶은 질곡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한(恨)을 난설헌은 시로 옮겼다. 아름다운 연꽃잎은 기억할까, 여인의 눈물을. 진흙 속에 활짝 피는 연꽃잎을 만나면 시대와 불화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과 못다 핀 사랑을 기억해야겠다.

 

 

 

 Scene #4 종소리보다 묵직하게 울리는 독립의 의지

 

 

사방 산 감옥 에워 눈은 바다 같은데

찬 이불 쇠와 같고 꿈길은 재와 같네.

철창조차 가두지 못하는 것 있나니

밤중의 종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四山圍獄雪如海

衾寒如鐵夢如灰

鐵窓猶有鎖不得

夜聞鐘聲何處來

 

(한용운, 雪夜 / 종소리, 612쪽)

 

 

 

김광균의 ‘설야’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귀를 열게 하지만, 한용운의 설야는 몇 겹으로 갇힌 감옥 속에서 듣는 종소리로 귀를 당긴다. 안 그래도 감옥인데, 사방에 눈이 하염없이 쌓여, 갇힌 마음을 다시 섬으로 가뒀다. 외롭고 슬픈 마음에 이불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싸늘하고 꿈마저 으스스하다. 그런 가운데 문득, 가둔 울타리 모두 풀고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있다. 저 종소리의 놀라움. 철창도 가두지 못하는 게 있다. 종소리를 가두지 못한다면, 마음인들 어찌 가둘 수 있으랴.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만해 한용운 선생은 변호사를 대지 말고,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주변에 당부했다고 한다. 그가 수감 중 지은 시 '설야(雪夜)'는 꿈마저 재가 될 정도로 혹독한 감옥에서 한 밤 종소리를 들으며 느낀 비감한 심사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몸은 가둘 수 있어도 자유와 독립의 의지를 가두지는 못한다는 그 기개가 미명의 종소리보다 묵직하게 울려온다.

 

돌아온 봄에 꽃은 피고, 회복한 땅엔 새살이 돋았다. 아픔은 사라졌고, 흉터는 남았다. 남은 역사의 흉터가 부끄럽다고 외면하거나 거짓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 더욱 혹독한 아픔을 다시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옥중에서 뽑아 올린 이 시가 아무리 드높은 예술로 승화된 절창(絶唱)이라 할지라도, 이런 절창은 결코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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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문외한이라 해도 피카소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다 누리면서도 장수까지 한 그였지만 그 역시 무명화가로서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이 시기를 ‘청색 시대’(1901~1904)라고 부른다.

 

1901년 당시 20세의 피카소는 가난했다. 돈을 벌지 못해 차가운 빵으로 연명했고 얼음장 같은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다. 가까운 친구 카사헤마스가 죽자 피카소는 자신도 제대로 먹지 못해 눈이 멀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파블로 피카소 「인생」 1903년

 

 

‘청색 시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생」은 젊은 예술가의 차갑고도 깊은 절망감이 느껴진다. 벽에 그린, 마치 웅크리고 앉은 인물은 고독과 절망, 아이를 어르는 어머니는 탄생과 모성, 연인(남자의 얼굴은 죽은 친구 카사헤마스)은 육체적 사랑을 상징한다. 사랑, 결혼 그리고 생명의 탄생. 인생의 황금 같은 순간들이 실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색 시대로 세상을 보면 인생은 하나도 아름다울 것이 없고 절망과 불행의 연속으로만 느껴지게 돼 있다. 청춘의 고통과 우울함, 복병처럼 찾아든 가난과 향수병, 미래의 불안으로 영혼과 캔버스를 온통 어두운 청색으로만 염색했다. 그야말로 무기력했던 청춘의 ‘청색 시대’였다.

 

그러나 인생에서 그 궁극적 과제가 생존이고 생존은 고통과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다.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은 어쩌면 우울한 시대에 자라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피카소도 그랬다. 1905년에 자신의 그림이 인정을 받고,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피카소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그의 그림에선 푸른색이 사라지고 화려한 붉은색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라고 부른다.

 

 

 

 

 

 

 

 

 

 

 

 

 

 

 

인생의 무게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이들의 어깨를 공평하게 짓누른다. 하지만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젊은 날이 삶 가운데 특별히 빛나는 시간이라는 미신도 설득력을 얻는다.

 

 

 

 

라이언 맥긴리 「Somewhere Place」 2011년

 

 

누가 청춘을 반짝 빛나는 순간이라고 했던가. 맥긴리의 「Somewhere Place」에서 청춘은 영원하다. 피카소의 「인생」의 연인은 공허한 초점으로 예정된 인생의 고통을 기다린다면, 맥긴리의 연인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딘가에 있을 인생의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내일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사진 속 비춰 내려오는 따사로운 장밋빛이 있어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아마 우리가 나아가는 길도 그렇지 않을까. 인생을 살다 보면 청색 시대를 겪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 절망하지 않고 노력하며 내일은 더 나은 날이 온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만이 장밋빛 시대를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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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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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판타스마고리아의 산책자

 

휴식 삼아 천천히 거니는 일을 산책이라 한다. 어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혼자 등하교할 무렵이 아마도 누구에게나 처음 세상 밖으로 산책하는 경험일 것이다. 입학식을 하고 일주일 정도 부모의 손을 잡고 다니다가, 드디어 혼자 큰길로 나가서 학교까지 오가는 길은 두려우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 이때 세상은 새삼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고, 내가 모르던 질서가 길 위에 무섭게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그동안 읽어내지 못하던 책 안에 깊숙이 박혀 있던 진리를 깨우치는 것처럼, 혼자 걷는다는 것은 행간을 읽게 되는 것이고 ‘세상 속 존재’로서 자신을 깨우는 순간이기도 하다.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진전에 발맞춰 휘황찬란하게 돌아가는 도시를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요술환등)’라고 비유한 바 있다. 당시 그가 관찰했던 도시는 프랑스 파리였다. ‘산책자’는 그 도시의 불편한 징후를 읽어내는 예민한 관찰자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도시가 불러일으키는 끝없는 욕망의 포화상태, 그 속에서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을 예견하는 존재인 셈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시인 보들레르야말로 당대의 산책자였다. 보들레르에게 산책은 존재의 조건과 같은 것이었고, 벤야민에게 산책자라는 유형을 만든 것은 파리라는 도시였다.

 

근대화된 도시 공간 속에서 산책하는 일은 풍경 속에서 거닐며 사색하던 철학자들의 산책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뚜렷한 목적 없이 군중 틈에서 배회하며 거리의 풍경을 관조하는 산책자는 자신이 본 대도시의 충격을 회상하고 성찰하면서 묘사하는 동시에 이러한 충격이 주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현실과 대조적인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도시의 산책자, 그들은 걷는 자들이며 방랑하는 자들이다. 걷는다는 것은 도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의 형태다. 그들이 도시의 공간을 이용하여 움직이면서 어떤 구속이나 장소의 확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동안 도시라는 ‘텍스트’가 완성되어 간다.

 

 

 

 Scene #2 구보와 벤야민, 2014년 서울을 거닐다 

 

구보는 스물여섯 살인데도 장가를 가지 않았다. 직업도 딱히 없고 버는 돈도 시원찮지만, ‘가지 못했다’보다 '가지 않았다' 쪽이다. 어머니에게는 능력이 있는 자식이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긴 하지만 말이다. 그 아들은 낮에 집을 나서 늦은 밤이 돼서나 들어온다.

 

그의 산책은 물속에 뜬 꽃가루의 브라운 운동처럼 목적이 없다. 구보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새벽에 지하철이 끊겨 집에 도착해 피곤한 몸을 눕히기 곤란하다.

 

경성 시내를 주유했던 구보 씨를 2014년 지금의 서울로 소환해 서울의 일상을 미시적으로 탐사한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발표된 지) 80년 만에 구보 씨는 서집을 나와 서울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서관 속에 파묻히다시피 살고 있는 벤야민을 만난다. 80년 만에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고’(『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구보 씨는 소설, 시, 회화, 조각 등의 문화 텍스트를 종횡으로 인용하면서 벤야민식 도시 읽기를 시도했다. 무엇보다 산책자 페르소나를 에세이처럼 창조한 것이 매력적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꿈을 꾸던 어린 자본주의는 20세기를 거치며 나치즘, 전체주의라는 추한 어른으로 성장하고 말았다. 다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거친 어른 자본주의가 전지구를 휩쓸고 있는 시점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마르크스의 『자본』을 넘어선 텍스트로 자리할 수 있다는 전망은 과장이 아니다.

 

 

 

 Scene #3 서울 곳곳에 숨겨진 물신 찾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외국계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멀티플렉스 상영관, 대형서점 등은 별다른 화젯거리가 없는 커플, 시험 끝난 중·고생, 금쪽같은 점심시간을 맞이한 직장인들의 성스러운 순례지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현대는 ‘쇼핑하는 세계’다. 현대인은 마트를 돌며 카트에 물건을 담듯이 심리상담, 외국어 회화 수강, 철학 강좌 모두를 ‘쇼핑하며’ 다닌다. 맞다. 우리는 그 맛에 산다. 쇼핑으로 얻은 활력 덕분에 지긋지긋한 일상으로 되돌아가 버티는 것이다. 일상은 수레바퀴처럼 반복되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매번 업그레이드되는 아이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월간 패션지를 통해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고 느낀다.

 

그러나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그런 현대인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뭐? 너희들의 목표가 새로운 것이라고? “새로운 것은 (…) 패션이 지칠 줄 모르고 대변하려는 허위의식의 정수이다. 이 새로운 것의 가상은 마치 한 거울이 다른 거울에 비치듯이 영원히 동일한 것의 가상으로 비쳐진다. 이러한 가상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문화사’라는 환(등)상으로, 이 속에서 부르주아지는 허위의식을 만끽한다.”

 

판타스마고리아. 그것은 자본주의 도시공간을 방랑하는 현대인들의 집단적 꿈이 넘실거리는 베일이다. 도시인은 그 베일을 진보라고 믿지만, 벤야민이 보기에 이 모든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적 새로움이란 새로움의 탈을 쓴 반복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오직 하나밖에 모른다. ‘화폐’라는 가치 척도와 그것의 ‘증식’이라는 목표밖에!

 

그러나 상품은 고도의 화장술을 지니고 있기에 소비자는 결코 자본주의의 ‘쌩얼’을 볼 수 없다. 소비를 강요하는 사회, 빚을 권하는 사회에서 소비자들은 내가 주인이라고, 선택권은 내게 있다고, 그 선택으로 하루하루 고귀해진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소비와 소유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마르크스의 ‘물신(物神)’ 개념을 벤야민은 그런 식으로 구체화했다. 그리고 2014년 구보는 오직 두 다리만으로 서울 곳곳에서 자본주의 소비 욕망이 꿈틀거리는 채 숨어있는 물신을 찾아낸다. 어떤 도시를 방문한다는 것은 그 도시의 영혼과, 그 도시 사람들의 영혼과 교감한다는 뜻”(고종석 『도시의 기억』)이라는 말처럼, 구보는 사사로운 기억과 도시의 역사, 문화, 예술, 언어, 인종을 인용된 텍스트의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도시의 영혼을 탐색한다.

 

 

“날아간 비둘기를 쫓아 소공동으로 길을 건넌 구보는 을지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롯데호텔 로비로 들어가 지하 아케이드로 내려가면서 벤야민이 말한 아케이드의 특성을 상기했다. ‘아케이드는 교통수단의 위험뿐만 아니라 변덕스러운 비바람도 차단하여 궂은 날씨에도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거나 안락한 기분 속에서 진열된 상품을 구경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확보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유리 지붕만 없을 뿐이지 롯데호텔 지하 아케이드는 지상의 아케이드와 마찬가지로 산책자 구보가 무의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아케이드의 통로는 실내이면서 거리였다.”

 

(‘롯데호텔 아케이드’, 99쪽)

 

 

19세기 파리의 상가 아케이드를 관찰했던 벤야민의 통찰처럼 서울의 도시 공간은 내용물을 대중의 환상과 꿈으로 포장한다. 서울은 생존과 효용 가치에 목매단 이 시대 대한민국을 포장한 아케이드다. 박물관이다.

 

구보가 서울을 산책하는 목적은 ‘오늘, 우리의 삶을 둘러싼 대도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인 셈이다. 구보는 자본의 이익에 따른 공간의 불평등한 재분배, 철학의 부재 속에서 공간을 다만 정치구호로 전락시키는 현실을 문제 삼고 있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서울’이라는 구호 속에 숨어있는 음모와 허구를 밝히겠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서울이 진짜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을 던지겠다는 뜻이다. 관찰과 탐구 그리고 인용된 텍스트를 모아 구보는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아 만든다. 그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Scene #4 구보의 산책은 아직 많이 남았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경성역은 구보가 본 건물이 현대화한 서울역의 한 켠에 있다. 그러나 80년 후에 가본 눈앞의 경성역 아니 서울역은 이제 ‘마땅히 인생’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오늘날 서울역은 소설가 구보 씨가 낭만적인 여행의 출발점으로 동경하던 경성역과는 너무 다르게 진화했다. 출발과 도착이라는 정거장의 역할 이외에 부차적인 기능이 너무 많이 입점했다. 소설가 구보 씨가 느꼈을 여행의 행복을 맛보기에는 역사가 너무 상업화됐다. 추억을 담기에는 역사가 너무 자동화됐다. (중략) 지하철과 버스와 택시에서 내린 사람들이 역사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채울 수 없었던 신기루 같은 욕망을 환멸하는 듯 보였다”

 

(‘서울역’, 61~62쪽)

 

 

판타스마고리아의 산책자 구보는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인 아름다운 서울’(패티김 ‘서울의 찬가’)이라는 판타지에 빠진 도시인들에게 말한다.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1934년, 1964년 그리고 오늘 2014년, ‘서울역의 풍경은 많이 변했을지 몰라도 서울역의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류신『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서울역’, 62쪽)

 

구보는 벤야민처럼 19세기 말의 아케이드에서 같은 걸 서울에서 목도했다. 도시를 수놓은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과 그 안에 들어선 휘황찬란한 백화점을 어슬렁거리는 군중. 철골이 보이는 투명한 지붕 아래 길게 이어진 상점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 축소된 하나의 세계”였다. 순식간에 아케이드는 “상품들의 신전”이 되었고, 아케이드가 점점 증식되어 비대해진 서울은 “영혼 없는 군중이 사는 고립된 섬’이 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화려한 신전들에서 넋을 잃었다.

 

물신의 유행은 낡은 옛것이 새것으로 둔갑해 회귀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나를 새롭게 할 수 없다. 자기계발서도, 아이폰으로 접속하는 다량의 정보도, 쇼핑하듯 골라 듣는 강의도 마찬가지다.

 

가끔 우리는 기억상실을 극복하려 애쓰는 소설을 만난다. 주인공이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킬 수 없어서 자신의 몸에다 기억해야 할 일을 문자로 새겨 넣는 영화 <메멘토>처럼, 그런 소설의 글귀는 도시의 육체에 새겨 넣는 문신과 비슷하다. 도시의 기억을 보존하려고 하는 소설의 안간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그 산책자 구보의 안간힘을 좇아갈 수 있다. 서울을 그린 소설로 걷기 코스를 만들어서 실제로 그 문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어머니와 도시인들에게는 백수로 보이지만 구보의 산책은 나름 투철한 ‘직업정신’과 그를 향한 연마의 자세가 있다.

 

구보의 산책은 아직 많이 남았다. 그가 자신을 새롭게 만든 길은, 이제 막 만개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도시 안에서 모든 게 낯설다는 듯 질문하고 관찰하고 답하는 행위 자체였다. 그럼으로써 구보는 동시대인들이 갇혀 있는 매트릭스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맴도는 기괴한 환상들을 정지시킬 힘을 얻었다. 기존의 세상이 정지되는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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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음사입니다.

2014년 새해, 민음사에서 우리나라 독자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로 손꼽히는

오쿠다 히데오 신작 소설을 들고 왔습니다. 

 

첫 장의 예측이 무엇이건마지막 장에 배신당한다

중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실족사했다.

 

사고인가사건인가그렇지 않으면……? 

 

아사히 신문 연재 당시부터 큰 반향을 부른

충격적인 문제작과연 거리에 가득한 침묵은

 

                                 누구의 입을 통해 깨질 것인가.

「공중그네」, 「남쪽으로 튀어」, 「인더풀」등의 작품으로 재미와 유쾌한 반전을 선사했던

오쿠다 히데오의 변신, 짜릿하지만 가슴 저미는 스릴러!

민음사가 YES24 블로그 회원분들께 드리는 2014년 새해 선물!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침묵의 거리에서」를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 서평단 모집 신청

서둘러주세요!

▶줄거리_ 


시험을 앞두고 야근을 하던 교사에게 학생의 집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온다. 한 번도 8시를 넘겨 귀가한 적 없는 아들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학부형의 겁먹은 목소리에 교사는 당직이 아님에도 교내를 순찰해 보기로 한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어두운 학교에 사람 그림자는 없었으나, 마지막으로 없어진 학생이 속해 있던 테니스부의 부실을 찾은 교사는 끔찍한 장면의 첫번째 목격자가 된다.

 

나구라 유이치. 중학교 2학년생. 소년은 부실 옥상에서 뛰어내려 콘크리트에 부딪친 충격으로 이미 죽어 있었다. 작은 마을에 경찰 특별수사 본부가 세워지고, 매스미디어의 총력 취재가 이어지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된다.

 

한편, 옥상에는 죽은 소년을 포함한 다섯 명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고 취조와 취재가 거듭된다. 그 과정에서 그간 아무도 몰랐던 소년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간 이지메를 당해온 것.

 

사건은 점점 ‘이지메에 의한 살인’이라는 방향으로 굳어지게 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관리 소홀 책임을 인정하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고자 하는 유족의 뜻을 존중하여 학생들에게 죽은 친구에 대한 작문을 제출하게 한다.

 

이처럼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지만 학생들의 낌새가 심상치가 않다. 뭔가 공동의 비밀이 있는 것처럼 연대적으로 함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기자, 경찰, 교사, 유족, 그리고 옥상에 족적이 남은 용의자의 부모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어른들의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 이지메를 주도했다고 진술한 두 명의 소년에게 혐의가 전부 몰리게 되는데….

 

▶서평단 모집 상세내용_

★ 응모 방법 :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 완료.
★ 응모 기간: 2014.02.14 ~2014.02.24 (10일간)
★ 추첨 인원: 30명
★ 서평단 발표: 2014.02.25 (월) 오후
★ 서평 기간: 2014.02.27~2014.03.02 (10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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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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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35]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Scene #1 초콜릿처럼 펄펄 끓는 이야기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날이었다. 거리의 제과점 앞에는 온갖 장식으로 포장된 초콜릿 선물이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창 사랑의 꽃을 피우는 청춘 남녀들에겐 더없이 행복하고 달콤 쌉싸름한 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같은 특별한 날에 읽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초콜릿이 끊는 물’과 같은 감동을 전하는 책이다. 제목만으로는 뭔가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겠지만 초콜릿 맛처럼 오묘하게, 사랑, 음식, 페미니즘, 역사가 한 통 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이야기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요리를 한다. 어설픈 칼질에 손을 벨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매운 양파의 향에 방울방울 눈물을 짓게 되더라도. 각기 다른 성향의 재료가 모여 조화로운 맛을 이룬다는 건, 마치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사랑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조리 과정 또한 사랑의 감정과 비슷한 맥을 가지므로 우리는 볶고, 끓이고, 은근한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

 

 

 Scene #2 티타의 러브 레시피

 

 

 

이 소설에서 초콜릿은 9월의 음식이다. 당시 초콜릿은 마시는 음료인데 물의 양과 끓이는 시간에 따라 달콤하고 쌉싸름한 정도가 달라진다. 작가는 초콜릿 만드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초콜릿을 타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서툴게 타면 최상급의 초콜릿도 맛없어질 수 있다. 덜 끓이거나 너무 오래 끓이면 걸쭉해지거나 탄 맛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84쪽)

 

소설에서 묘사하는 요리는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은유다. 이들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초콜릿 맛과 닮았다. 티타에게는 요리를 하는 부엌이야말로 자신의 세계이고 미래다. 그녀가 마음을 담아 요리하는 마법 같은 음식은 때로는 눈물을 일으키고, 때로는 최음제가 되며, 때로는 향수와 추억의 매개가 된다.

 

티타는 막내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야한다는 가문의 전통 아래 사랑을 잃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욕망하기에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만든다. 불에 닿은 옥수수 반죽은 토르티야가 되고, 불에 닿은 쌀은 밥이 된다. 토르티야가 다시 반죽으로 돌아갈 수 없고, 밥이 도로 생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불에 닿은 티타의 가슴을 돌려놓을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을 꼽자면 페드로가 선물한 장미를 가지고 티타가 요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바로 장미 꽃잎 소스를 곁들인 메추리 요리다.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과 욕망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사실 자체로 한 권의 요리책이다. 달마다 바뀌는 요리는 낯선 재료들의 향연, 시끌벅적한 남미의 파티 분위기를 양념으로 끼얹으며 읽는 이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첫 번째 요리는 ‘1월 크리스마스 파이’. 파이는 달콤하거나, 기껏 상상력을 펼쳐봐야 고기가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1월 크리스마스 파이의 재료는 정어리 통조림, 초리소, 양파, 오레가노, 세라노 칠레고추 통조림, 페이스트리 반죽이 재료다. 어른어른 알 듯 말 듯한 맛이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한다. 읽을 때마다 이전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맛이 미뢰를 휘감는다.

 

 

 

 Scene #3 내 안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중략) 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124~125쪽)

 

 

우리 모두가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상상해보자. 그 성냥불은 혼자 지필 수 없으며 불을 댕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하면 영혼의 양식인 불꽃이 사그라져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뜨거워야 할 우리 마음속에 매캐한 연기만 올라온다면 우리는 사랑을 꿈꿀 수 없다. 뜨거운 사랑이 한순간이라도 식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 안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성냥갑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성냥개비에 불을 일으킬 수 있는 날은 많겠지만,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은 특별하다. 카사노바가 최음제로 썼다는 초콜릿은 사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음식이었다. 사랑의 감정을 지속하고 상대가 활기찬 성욕을 유지하도록 돕고 싶을 때 초콜릿을 선물하곤 한다.

 

사람들은 밸런타인데이가 상업적이라고 욕하면서도 때가 되면 초콜릿과 선물을 산다. 기업의 뻔한 상술이지만, 그 상술이 얼어붙은 지갑을 열게 하고 식어버린 마음을 따스하게 데운다면 굳이 욕할 일 만은 아니다. 하루쯤 낭만을 부려도 좋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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