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0월의 세계 문학
아서 C. 클라크
김승욱 옮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황금가지
2017년
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저녁 8시~10시
장소: 인더가든
<10월의 세계 문학>을 만든 독자들

[북 큐레이터(도서 추천)]
김성현, 천성은, 최해성
[진행, 북클럽투르기, 윤색]
최해성
[사진]
천성은, 최해성
[참여]
조약돌, 김성현, 히시마, 천성은, 배러(첫 참석)
※ 북클럽투르기(bookclubturgy, bookclubtur+記)
독서 모임 후기 엮은이.
‘북클럽투르기’는 공연 제작을 위해 희곡과 연극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는
작업 또는 이러한 작업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드라마투르기(dramaturgy)’에서 따온 말입니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지 않았지만,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은 알고 있어요. 영화는 총 4막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1막에 ‘달을 감시하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원숭이 인간(원시 인류)이 등장합니다. 지능이 발달한 원숭이 인간들은 뼈로 만든 곤봉을 써서 동물을 사냥하고, 동족끼리 싸우기도 합니다.

‘달을 감시하는 자’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동물의 뼈를 뼈 곤봉으로 내리칩니다. 여기서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나옵니다. ‘달을 감시하는 자’는 뼈 곤봉을 공중으로 던집니다. 이때 공중에 뜬 곤봉은 우주를 나는 인공위성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됩니다. 이 장면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약칭 차라투스트라) 서곡이 장엄하게 흘러나옵니다. 서곡의 제목은 ‘해돋이(Sonnenaufgang)’입니다.
영화가 유명해지면서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는 대중에게 친숙한 클래식 음악이 되었어요. 2시간 이상의 영화를 본 적 없는 사람은 뼈 곤봉을 휘두르는 원숭이 인간이 나오는 장면만 기억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지 않는 사람은 2분도 채 안 되는 서곡만 익숙합니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총 9장으로 편성되어 있어요. 사실 저도 서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아카넷, 2025년)
* 프리드리히 니체,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년)
* 프리드리히 니체, 정희창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2004년)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대표작에 영감을 얻어 만든 곡입니다. 영화와 원작 소설의 줄거리가 조금은 달라요. 소설 후반부에 우주 탐사대의 유일한 생존자 데이비드 보먼(David Bowman)이 ‘별의 아이(Star Child)’로 변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원작 소설을 접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니체를 주목했습니다.
니체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별의 아이가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를 상징한다고 주장했어요. 차라투스트라는 도덕과 기독교 교리에 얽매여 노예처럼 살아가는 보통 인간들을 향해 위버멘쉬가 되라고 강조합니다. 위버멘쉬는 스스로 ‘힘에의 의지’를 발현해서 고통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창조적인 존재입니다.
소설 원작자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와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은 영화 각본을 함께 썼습니다. 두 사람은 니체 철학으로 감상하고 해석하는 관점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독자와 관객들의 자유로운 해석을 존중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니체가 따라다니는 작품 해석은 시들어졌어요. 특히 소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후속작 세 편이 나온 이후부터 독자들은 니체와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그들은 ‘별의 아이=초인’ 해석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설과 영화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철 지난 감상법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 [일시 품절]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2022년)
* 그레이엄 앨런, 송은영 옮김, 《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 (앨피, 2006년)
* [절판] 필립 소디, 권순만 옮김, 《롤랑 바르트》 (김영사, 2009년)
클라크와 큐브릭은 자신들의 작품에 의도적으로 철학적인 메시지를 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죽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우리 독자를 위해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저자가 죽어서 남긴 텍스트는 결국 독자가 차지합니다. 독자는 저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텍스트를 마음껏 해석할 수 있어요. 틀려도 좋아요. 우리는 완벽할 수 없어요. 텍스트를 오독오독 곱씹어 읽어도 오독할 수 있어요. 죽은 저자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오독에 쓴소리하지 못합니다. 다른 독자들의 오독을 비판하는 것은 원본 텍스트와 독자의 해석으로 재구성된 텍스트 모두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오독만 보면 깔보거나 비아냥거리는 독자들이 있어요. 우리는 못된 독자들을 만나면 죽여야 합니다.
* [개정 증보판] 블레즈 파스칼, 김화영 옮김, 《팡세-분류된 단장》 (IVP, 2023년)
* 블레즈 파스칼, 이환 옮김, 《팡세》 (민음사, 2003년)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종교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서 조금씩, 천천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지난달부터 읽기 시작한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팡세》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책입니다. ‘팡세(Pensées)’는 ‘생각들’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입니다. 이 책은 파스칼이 죽을 때까지 쓴 단상(짧은 글) 모음집이에요. 파스칼이 39세에 요절한 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어요.
과장된 해석 혹은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 있어요. 그래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읽으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생각과 종교관을 투사해 봤습니다. 제가 종교적 관점으로 재구성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본 독자들의 비판을 환영합니다.
소설에 묘사된 인류는 화성을 개척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 공학을 습득했고, 우주를 정복할 기세입니다. 소설의 화자는 아주 잠깐 파스칼을 언급합니다.
* 137쪽
모든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단순했던 시대에 파스칼은 우주에서 전파가 끊임없이 지직, 쉭쉭 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무한한 우주의 침묵’이라는 순진한 소리를 했다.
‘무한한 우주의 침묵’은 《팡세》 에 있는 구절입니다. 파스칼은 ‘무한한 우주의 침묵’에 직면한 상황을 가정합니다.
* 《팡세-분류된 단장》, 193쪽
이 무한한 공간들의 영원한 침묵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 《팡세》(민음사), 213쪽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화자는 무한하고 침묵하는 우주 앞에 두려움을 떠는 파스칼이 순진하다고 말합니다. 소설 속 미래 인류는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인공지능 컴퓨터 HAL 9000의 반란을 방어하고 혼자 살아남은 데이비드 보먼은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에 적응합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무한한 우주의 침묵’을 두려워하고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 279쪽
보먼은 자신의 행동 패턴이 약간 변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침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잠을 잘 때와 지구와 통신하고 있을 때를 빼면, 항상 우주선 음향 시스템의 소리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크게 올려놓았다.
보먼은 우주 속의 침묵과 고독을 잊으려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습니다. 파스칼은 무한한 공간에 혼자 있는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결국 고독에 영원히 갇히는 불행한 존재로 봤어요. 지루한 인간은 재미있는 것을 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오락(divertissement)’을 합니다. 오락을 하면 즐겁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파스칼은 오락마저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인간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외면하기 위해 ‘오락’에 탐닉한다고 본 것이죠. 그리고 오락에 중독된 인간은 자신이 행복을 느낀다고 착각합니다.
보먼은 미지의 우주를 무사히 통과하여 목성에 도착하는 데 성공합니다. 화자는 점점 더 생존력이 강해지는 보먼을 묘사할 때 ‘전지전능한 신’을 언급합니다.
* 325쪽
뒤쪽에서 불의 바다가 점점 더 커져 가는 순간, 보먼은 마땅히 두려움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벼운 불안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의 머리가 놀리다 못해 아예 마비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뭔가 거의 전능한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지금 상황을 통제하며 그를 보호해 주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누군가가 그를 살려 두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애쓴 것이 사실이라면, 아직 희망이 있었다.
보먼을 보호하는 ‘전지전능한 지적 존재’는 파스칼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숨은 신’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신이 숨어 있어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이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어도 신을 만날 수 없다고 봤어요. 숨은 신은 그로부터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만 볼 수 있어요. 파스칼의 유신론에 따르면 보먼은 ‘숨은 신’에게 선택받은 자입니다.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판단력 비판》 (아카넷, 2009년)
* 피오나 휴즈, 임성훈 옮김, 《칸트의 『미적 판단력 비판』 입문》 (서광사, 2020년)
파스칼과 다르게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는 무한한 공간 앞에 선 인간을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칸트는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두려움(또는 불쾌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면, 자연이 아름다워 보이고 경외감을 느낍니다(쾌감). 이렇듯 칸트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 감정의 변화 상태를 ‘숭고(역학적 숭고)’라고 명명했습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칸트의 숭고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 314쪽
그는 눈을 감아 자신을 둘러싼 이 진줏빛 무(無)의 공간을 차단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는 그런 충동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보먼은 무의 공간, 무한한 우주를 두려워하지만, 어떻게든 잘 적응해 나갑니다. 그가 두려운 감정에 압도당하는, 즉 파스칼이 상정한 비참한 인간이었다면 우주에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숭고를 인식한 인간은 미지의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숭고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칸트의 이성적 인간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는 자연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천성은 독자의 추천 도서]
* 장 자크 루소, 이재형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문예출판사, 2020년)
* [리커버판] 장 자크 루소, 고봉만 · 주경복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18년)
천성은 님은 ‘달을 탐사하는 자’가 나오는 소설의 초반부 장면(영화의 1막)에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투사했습니다.

루소의 견해에 따르면 문명이 발달하기 전인 ‘자연 상태의 인간’은 평등하게 살았습니다. 혼자 생활하던 인간은 하나둘씩 모여서 집단(공동체)을 형성하는데, 루소는 여기서부터 불평등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문명 속의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비교합니다. 친하게 지내고 있어도 자신이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자신보다 더 잘 사는 타인에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낍니다. 반면에 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한 단계 아래인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형성되고, 두 계층 간의 불화와 불평등은 더 커집니다. 루소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불평등 문제가 생겼고, 이에 따라 인간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주장합니다.

성은 님은 인류의 진화를 압축해서 보여준 소설 초반부를 ‘인간이 타락(불행)하기 시작한 장면’으로 해석했습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다양한 해석이 태어날 수 있는 소설입니다. 독자가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기려면 제일 먼저 늙은 니체를 죽여야 합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저자 행세하는 낡은 니체를 죽인 독자는 소설에 자신만의 생각을 덧붙여 씁니다.
독자 여러분, 저자의 눈치를 보지 마세요.
저자를 죽여서 ‘초인적인 독자’가 되어 주세요.
<파스칼, 칸트, 루소에 관한 ‘니체 빠’ cyrus의 주석>

[주1] 어린 시절 파스칼은 수학 신동이었다. 세무 공무원인 아버지를 위해 10대 소년 파스칼은 사칙연산이 가능한 수동식 계산기를 발명했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z)도 계산기를 만들었다. 파스칼과 라이프니츠 계산기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조상이다.
[참고 문헌]
* [절판] 더멋 튜링, 김의석 옮김, 《계산기는 어떻게 인공지능이 되었을까?: 주판에서 알파고까지 거의 모든 컴퓨팅의 역사》 (한빛미디어, 2019년)
[주2] 니체는 도덕이 인간의 본질적 생명력과 창조력을 억누르고, 자기 극복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강조한 루소와 칸트를 싫어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이동용 옮김, 《아침놀: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 (세창출판사, 2022년)
* [품절]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아침놀》 (책세상, 2004년)
니체는 《아침놀》에서 칸트를 ‘도덕의 유혹에 사로잡힌 철학자’로 평가했으며 루소를 ‘도덕의 독거미’로 비유했다. 니체는 ‘도덕의 독거미’ 루소에게 물린 칸트의 영혼 밑바닥에 도덕적 광신이 숨어 있다고 썼다.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우상의 황혼》 (아카넷, 2015년)
《우상의 황혼》에서는 루소가 평등하다고 가정한 자연에 반대하여 ‘더러운 자연’이라고 표현했다. 니체가 생각한 ‘더러운 자연’은 이미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된 불평등한 세계다. 그리고 루소가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기 위해 내세운 ‘만민 평등’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