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냥 즐거우니까 읽는다. 이렇게 대답해도 이해하지 못하면, 독서는 일종의 덕질이라고 한다. 누구는 피겨(figure)를 모으는 일에, 어떤 사람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것과 같다. 책을 읽고, 내가 미처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인간은 외로움을 잊기 위해 허전한 시간을 어떻게 메우려는 본능이 있다. 외로움은 지루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신체 건강이나 뇌의 인지, 판단력 같은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외로움은 사회적 유대가 끊어졌을 때 이를 회복하라고 몸이 보내는 특별한 신호다. 그런데 이 정신적 신호를 내버려 두면 자신이 사회에서 고립됐다고 느끼는 상태가 지속한다. 외로움이 느껴질 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잊힌 관계를 복구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형성된다.

 

 

 

 

 

 

 

 

 

 

 

 

 

 

 

 

 

 

 

사회적 유대감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좋은 감정이다. 그러나 사회적 유대감을 무너뜨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을 이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만 누리려는 이기주의는 참으로 몹쓸 짓이다. 정이현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 살고 있다. 정 작가의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말투는 상냥하지만, 성격이 이기적인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8년 동안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 독서로 위안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독서를 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겪은 인물을 찾았다. (참고 : ['가장 외로운 직업 중 하나 美 대통령'…오바마 "독서가 힘"] 뉴스원, 2017년 1월 17일)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친밀한 인간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을 인간관계 속에서 해소하면 할수록 더 힘들어질 수 있다. 그래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인간관계에 연연하게 되고, 여기저기 연락하고 소모적인 만남이라도 하려고 애쓴다. 외로움을 슬기롭게 견딜 줄 아는 것이야말로 주체적 삶이다. 김정운 교수는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주체적으로 행복을 찾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외로움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라고 마음이 보내는 자기 단련의 신호다.

 

사실 TV와 인터넷은 책보다 재미있다. 둘 다 안 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그런데 하릴없이 TV와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면 두뇌는 정신적 자극에 둔감한 멍한 상태가 된다. 오래전에 TV를 시청하고 있는 동안 인간의 두뇌 상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험한 결과가 있다. 우리는 TV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 박라임씨가 어떤 상태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믿고 싶지 않지만, 박라임 씨는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지식을 쌓는 독서를 한 탓인지 주변 상황을 능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심지어 자신이 지금까지 저지른 행동들이 국가 전체 기강을 뒤흔들 정도로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박라임씨는 언제부터 이렇게 둔해졌나. 아마도 젊은 시절의 독서가 그녀의 마음에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녀는 독서만으로도 부모님의 빈자리로부터 비롯된 외로운 마음을 견디기가 부족했던가 보다. 그녀가 최순실과 더욱 가까이 지낼수록 책을 멀리하게 됐고, 외로울 때마다 드라마를 챙겨봤을 것이다.

 

 

 

 

 

 

 

 

 

 

 

 

 

 

 

 

 

 

 

 

C.S. 루이스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했다. 아주 좋은 말이다. 아무리 독서가 쓸모없다고 해도 우리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독서의 장점을 열거하면 한둘이 아니다.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라는 말보다는 책이 한 사람의 감정을 바꾼다라는 말이 더 좋다. 나는 책이 단순히 지적 갈증의 해소라는 측면을 넘어 한 사람의 외로운 감정을 극복시키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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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7-01-18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속도를 읽는 사람의 감정에 맞춰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나란히 걸어가주는 친구와 같은 느낌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외롭지 않게 해주고, 때론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수 있는 친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묵묵히 지켜봐주는 그런 친구요.^^
 
독도강치 멸종사 - 오키 견문록 : 종 멸종에 관한 반문명사적 기록 라메르(La Mer) 총서
주강현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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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끊임없이 논쟁이 되는 독도 영유권 문제는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한다. 독도는 조선 전기부터 우산도 또는 삼봉도로 불리며 강원 울진현에 속해 있었다. 17세기 한일 간에 울릉도 영유권 문제가 야기되자 안용복 일행의 외교활동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인정받았다. 사절단도, 중앙관리도 아닌 평범한 어민에 불과했지만,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인 것을 일본 막부가 자인하도록 활약한 민간 외교가이다.

 

“독도가 왜 우리 땅이냐?”고 물어보면 대다수 국민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의 답변에 머문다. 역사에 관심 있으면 “신라가 우산국(울릉도)을 편입했다는 옛 문헌이 있다”거나 “안용복이 독도에 잠입해 있던 일본 어부들을 쫓아냈었다”는 말이 나온다. “다케시마는 우리 땅”이라고 생각할 일본인에게 독도가 대한민국 땅인 이유를 설명해 줄 확실한 논리는 있어야 한다. 일본 시마네 현에 만들어진 독도 관련 홍보 자료에는 독도가 ‘에도시대부터 일본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한 곳’이라든가, ‘러일전쟁 이후 국제법상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등 독도 영유권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있다.

 

시마네 현은 1905년 2월에 독도를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찬탈했던 그해이다. 시마네 현이 독도를 노리는 것은 독도 주변의 어장 때문이다. 시마네 현은 1890년대부터 강치 조업을 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에는 강치가 많이 서식했다. 강치 모피에 쏠린 인간, 아니 일본인들의 욕심만 아니었다면 강치는 대를 이어 독도의 바위를 덮었을 것이다. 역사는 독도 강치가 1940년대에 멸종했다고 적고 있다. 안용복의 등장 이후로 한발 물러선 일본의 울릉도 침탈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대외팽창 흐름을 타고 재개됐다. 집요하게 반복된 일본인의 울릉도 연안 불법어로와 울릉도 불법 정착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로 사실상 합법화됐다. 오키(隱岐) 섬과 울릉도를 수시로 오간 일본인들은 강치의 모피와 기름을 원했다. 나카이 요자부로라는 어업 종사자는 강치 남획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일본 내무성을 통해 조선으로부터 독도를 임대하려고 했다. 당시 일본은 군사상 필요하면 조선의 어떤 지역도 수시로 수용할 수 있었고 일본이 추천한 재정, 외교 고문이 대내외 정책을 좌지우지하여 조선의 주권은 허울뿐이었다. 독도의 군사적 중요성에 눈뜬 일본 정부의 속내를 읽은 그는 ‘독도 영토 편입 및 차용 청원’을 제출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은 일관되게 다케시마 영토론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서 과거의 주장만 되풀이한다. 특히 오키 섬의 어민들이 강치잡이를 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워 다케시마가 국제법상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다. 독도 역사 및 강치 생태사를 추적한 주강현 박사는 우리나라 자료 및 일본 측 자료를 통해 다케시마 영토론에 요목조목 반박한다. 그리고 강치를 멸종시킨 과거 행적을 뻔뻔하게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삼는 일본의 태도를 비판한다.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자연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멸종 위기에 몰린 고래를 보호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에도 일본은 다시 포경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도한 포획으로 인해 머잖아 강치처럼 우리 바다에 대형 고래들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강치는 독도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독도와 강치. 오랫동안 일본의 침략 근성에 시달렸다. 이제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만들려고 자신들이 멸종시킨 강치마저 왜곡된 역사에 편입한다. 심지어 뻔뻔스럽게도 강치 멸종의 책임을 우리나라에 떠넘기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 역사를 아는 대한민국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독도에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군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된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당시 독도 주변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사망했고, 독도 주변에 집단 서식하던 강치들도 모두 사라졌다. 동도 해안 한쪽 구석에는 그때의 상처를 간직한 초라한 위령비가 서 있다.

 

독도 문제로 일장기를 불태우는 감정적 대응은 한계가 있다. 오히려 독도 문제를 국제적 분쟁으로 몰고 가려는 일본의 책략에 말려드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정부는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처음은 아닐뿐더러 매번 소극적인 대응만 반복한다. 부산 소녀상 설치 관련 문제에 거세게 항의하는 일본 정부에 제대로 힘도 못 쓰는 외교부의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소녀상 설치뿐만 아니라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을 한일 간의 외교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로 인식한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이럴수록 목청만 높일 게 아니라 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모두가 곰곰이 고민해야 한다. 거시적인 틀에서 독도 논쟁을 바라볼 수 있는 책이 바로 《독도강치 멸종사》다.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는 박제된 강치가 시마네 현 박물관에 외롭게 갇혀 있다. 독도 강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강치가 독도 주변 푸르른 바닷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 독도는 ‘주인 없는 섬’이 아니다. 강치의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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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탄생 -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의 비밀
톰 밴더빌트 지음, 박준형 옮김 / 토네이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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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좋아요’가 많은 게시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된다.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더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글과 사진 또는 동영상을 올린다. 이제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타인에게 일상을 과시 · 자랑하며 주변의 공감을 얻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행위가 보편화했다.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접속해서 하는 일은 무척 단순하다. 누군가 글, 사진, 동영상을 공유한다. 우리는 그 게시물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거나 댓글을 단다. ‘알라딘 서재/북플’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페이스북이다. 사실 ‘페이스북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이스북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를 얻기 위해서 실명과 프로필 사진을 공개한다. 반면 북플은 실명을 공개하지 않아도 책과 리뷰를 통해 여러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친구 신청(팔로워, 즐겨찾기)’으로 연대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친목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친분 활동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상대방을 배려해가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이것이 소셜미디어의 의례다.

 

넉넉한 마음으로 공감과 호응을 보내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나는 ‘좋아요’를 신중하게 누르는 편이다. ‘좋아요’가 글에 드러난 상황에 따라 이상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묻고 싶다. 독감에 걸려 며칠 동안 아팠다는 상대방에게 ‘좋아요’는 진심의 위로일까, 아니면 아픈 환자를 놀리기 위해 누른 걸까. 나는 이런 글을 보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쾌유를 비는 인사말을 남겼다. ‘좋아요’가 격려의 인사를 의미하는 기호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보면 무례한 행동이다. 실제로 독감 환자를 만나면 빨리 나으라고 인사를 하지, ‘당신이 독감에 걸려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좋아요. 엄지 척!’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내가 하나도 모르는 소재나 분야의 글에 누른 ‘좋아요’는 정말로 글이 훌륭하다는 의미일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좋아요’를 누른 사람의 심리를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다. 글을 보지 않고 단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이 상황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소셜미디어의 의례’와 관련 있다.

 

‘좋아요’는 사람을 연결해주고 보통 사람들의 소통창구를 확대해준 긍정적인 혁신의 산물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소셜미디어의 의례’에 치중하면, 손쉽게 ‘좋아요’를 누른다. 과시욕으로 포장된 게시물의 ‘좋아요’ 수에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비판과 토론의 기회가 줄어든다. 인간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비판과 검증 없이 ‘좋아요’ 수를 많이 받은 게시물을 신뢰한다.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사람은 대세를 따르지 않는 고집 많고 괴팍한 존재로 취급받기도 한다.

 

‘좋아요’로 소통하는 ‘소셜미디어의 의례’는 우리의 취향을 변하게 한다. 우리는 원하는 정보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특정의 기호집단을 구성할 수 있다. 취향이 공유되는 하부문화가 형성되고, 우리는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파악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취향은 죽을 때까지 평생 유지되지 못한다. 인간은 모방 심리와 자기주장을 펼치려는 심리, 이 두 가지 심리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 하면서도 개인의 자유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의 취향이 모두 하나로 동일화될 일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성을 추구하고, 기존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특한 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공유하는 취향과 자신의 특별한 개성 사이에 고민하는 반응을 ‘수용주의자들의 성격’이라고 한다.[1] 수용주의자들을 흔히들 표현하는 말로 풀어내면, 개성이 강한 사람 또는 무리 중에 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다. 《취향의 탄생》의 저자 톰 밴더빌트는 남과 같아지고 싶을 때 취향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남과 달라질 때도 취향이 변화한다고 말한다.[2]

 

나는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취향을 속이거나 충분한 공감 없이 억지로 남의 취향을 따르면서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소셜미디어의 부작용을 키우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 글이 ‘좋아요’ 수가 많고, 댓글 수가 많이 달린다고 해서 그 글 내용이 훌륭할까? 절대로 아니다. ‘(북플) 친구’가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았다고 해서 내 글을 챙겨 보는 믿을 만한 사람인가? 절대로 아니다. 내가 추천한 책이 ‘(북플) 친구’가 읽고 싶다고 밝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독서 취향을 따르는 걸까? 절대로 아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질문에 ‘그렇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착각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착각에 취약하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상대방이 내 생각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착각에 빠져 산다. 이와 같은 인간의 속성이 바로 ‘허위 합의 효과(False consensus effect)’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일반적 상황이다.[3] 결국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은 모두 같을 수 없고, 외부적 영향에 의해 자주 바뀐다. ‘좋아요’ 수만 가지고 취향을 공유하는 행동이 진정성 있게 이루어졌는지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소셜미디어의 의례’에 조금 어긋나도 된다. 내가 선호하지 않는 상대방의 취향이 모든 이들이 따른다고 해서 여기에 억지로 따를 필요가 없다. 혹시 지금도 내 글을 보는 분들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내 글이 여러분들 개인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안 봐도 된다. 보기 싫은 글에 억지로 ‘좋아요’ 받고 싶지 않다. 친구 관계를 해제해도 된다. 절대로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여러분들의 취향이 존중되길 원하는 필자의 간곡한 부탁이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되, 내가 진짜 취향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취향이 무조건 하나여야만 하고, 고정적인 특성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히면 취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이러면 자신의 취향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취향과 비교까지 한다. 이건 정말 무의미한 생각이다.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즐길 줄 아는 사람, 즉 ‘덕후’는 자신의 취향을 먼저 존중할 줄 안다.

 

 

[1] 톰 밴더빌트 《취향의 탄생》 262~263쪽

[2] 같은 책, 267쪽

[3] 같은 책,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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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베베 2017-01-16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인이 글을 올리면 좋아요만 먼저 누른 제 자신에대해 진실성을 갖자고 말하고싶어지네요.. 또한 평소 제 글에 좋아요만 누르고 댓글을 달지않은 사람들을 보면 의아 하기도했는데.. 이런 심리였던가보네요. 저도 읽어보고싶네요~~

cyrus 2017-01-16 21:31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 활동을 한 분이라면 누구나 베베님과 같은 생각 한 번쯤 해봤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정답은 없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까 궁금증이 해소되고, 마음이 편해졌어요. 상대방 기분이나 감정에 너무 맞추면 원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친분 활동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집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것이 뭔지 알고, 그걸 자연스럽게 표출하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서재 활동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7-01-17 01:09   좋아요 1 |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7 11:20   좋아요 0 | URL
저는 하루에 글 두 편을 오전과 오후 시간대로 나누어 정해서 올리거나 아니면 일부러 2~3시간 간격으로 띄워서 올립니다. 하루에 두 편 이상 글을 올리는 것에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간대에 올린 여러 편의 글을 다 보지 않습니다. 한 편 한 편 대충 읽어도 다른 분들의 글을 보지 못합니다. ***님 말씀처럼 글쓴이는 상대방이 자신의 글을 여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비종 2017-01-17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요‘를 신중하게 누릅니다. 그리고 ‘좋아요‘를 누른 글에는 댓글을 달려고 노력합니다. 그 글의 어떤 점에 공감했는가, 그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가 밝히는 것이 글을 쓴 분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의 폭을 넓혀주셨으니까요.
위로가 필요한 글에 대한 ‘좋아요‘는 대부분 위로의 마음일텐데,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겠죠. 카스처럼 버튼이 다양하면 ‘힘내요, 슬퍼요‘등을 누를 텐데 말이죠. 아님 차라리 ‘좋아요‘가 ‘공감해요‘정도였으면 나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좋아요‘가 많은 글 중에는 꽤 괜찮은 글들도 있지만, cyrus 님의 말씀대로 허탈한 내용에 실망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나의 취향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몇 번 읽으며 오래 머물게 되는 글입니다.^^

cyrus 2017-01-17 11:25   좋아요 1 | URL
댓글을 다는 일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댓글 다는 일보다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게 편하고, 효율적인 일입니다. 분명 읽어봐도 좋은 글인데도 댓글을 달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글에 대한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 읽었습니다. 글이 좋습니다’라고 댓글을 달기가 민망해서, ‘좋아요’만 누릅니다. 서재 활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글을 쓰는 서재를 방문하거나 친하게 지내면 됩니다. ^^

블랑코 2017-01-17 0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공감하는 글에 좋아요는 누르지만 정말 하고픈 말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댓글을 달지 않아요. 친구맺기라고 표현되지만 제 경우 편하게 뉴스피드에서 받아 보기 위해 구독 개념으로 팔로잉하는 거거든요. 뉴스는 매일봐도 독자편지는 자주 보내지 않는 것처럼요. ^^

전 페이스북을 안 하는게 예전에는 진짜 아는 지인들 소식만 주고받았는데 점점 좋아요 수가 많은 뉴스기사, 광고, 지인이 좋아요 누른 모르는 사람 소식까지... 넘쳐나더라고요. 그래서 끊었습니다. 북플은 지인들의 책소식, 파워(!) 독서가들의 서재를 보려고 가입한 건데 차츰 친구가 늘면서 뉴스피드에 책소식 아닌 글도 넘쳐서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이웃관계를 끊을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사이러스 님 글을 보니 미안해하지 말고 내 취향을 존중해야겠어요. ^^

cyrus 2017-01-17 11:32   좋아요 0 | URL
하루에 제 이메일 함에 페이스북 게시물 알림 메일이 두 세 개 이상 옵니다. 심지어 페이스북 친구의 생일날짜가 알려주는 메일도 와요. 이 메일 때문에 페이스북 접속하기가 싫어져요.

예전에 어느 알라디너가 자신이 친구 관계를 해제하는 것에 사죄의 마음을 드러낸 공개 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그분이 상대방을 배려할 정도로 마음씨가 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조용히 친구 해제를 해도 모르는 분도 있고, 친구 해제 했다고 욕할 사람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날 수 있는 북플 시스템상 친구 해제에 관한 일은 금방 잊기 쉽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7-01-17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누르다가 잠깐 멈칫 했습니다ㅎㅎ 이거 누르지 말아야하나? 하고요 ㅎㅎㅎ (농담입니다)
sns상의 좋아요도 일종의 인정욕구라고 하더군요. 인간은 기본욕구라고요. 현대에 오면서 강해진 욕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받는 것도 예전보다는 조심스럽게 누르고는 있는데... 그래도 고민스러울 때가 있었는데 이제 그 고민도 안 해야겠습니다.
윗분의견 처럼 좋아요가 아니라 공감합니다 가 더 좋을듯 하긴해요.

취존은 당연한겁니다^^

cyrus 2017-01-17 11:35   좋아요 0 | URL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기분이 좋은 건 사실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지만, ‘좋아요’를 누르는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도 웬만하면 시간을 내서라도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내가 몰랐거나 잘못된 생각을 알려주는 분들을 만나면 더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

달걀부인 2017-01-17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친구로 맺어진 사람들 (특히 제가 먼저 친구 신청을 한 분들과는) 거의 독서취향이 비슷한것 같아요. 오지에 있는 저에겐 그나마 소중한 정보 역할을 해 주고요. ^^ 소중한 정보든, 즐거운 글이든,감동이든 뭐든 밀려오는게 있으면.. 엄지 척... 그 정도까지만 정직할래요.

cyrus 2017-01-17 11:39   좋아요 1 | URL
다양한 취향을 접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상대방 기분 맞추려고 예전 취향을 포기하면서까지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만의 확고한 취향을 즐기되, 다른 취향을 천천히 접하고 받아들이는 서재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

Theodora 2017-01-17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첨에는 좋아요만 있다가...이거저거 생긴 게 좀 웃겨요. 감정이 그거밖에 없나 사지선답 주입식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편하긴 해요 ^^

cyrus 2017-01-17 11:41   좋아요 1 | URL
온라인 공간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이 무조건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집단으로 공유되는 감정을 억지로 따라가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

잠자냥 2017-01-17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통 정성들여 잘 쓴 글이나, 제가 몰랐던 정보를 담고 있을 경우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 같습니다. 긴 글이 아니더라도 제 기준에 괜찮은 책을 읽고싶은 책으로 등록해놨을 경우에도, 그 책 좋다는 의미에서 좋아요를 누른 적도 몇 번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저는 좋아요를 생각없이 남발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저는 좋아요를 매번 달아주는 이웃보다는, 좋아요를 달지 않아도 제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는 분이 더 고마울 것 같더라고요. (이건 확인이 불가능하지요. 하하하)

cyrus 2017-01-17 11:44   좋아요 0 | URL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군요. 잠자냥님은 ‘좋아요’를 받을 만한 글을 쓰시는 분들 중 한 분입니다. ^^

2017-01-17 12:40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7 13:12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희망 2017-01-1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은 정말 좋습니다.
전 좋은 글을 읽었지만 불쑥 댓글을 달기가 쑥스러울 땐 살포시 좋아요만 누르고 갈 때가 있거든요
뭐라고 표현할 수없이 좋거나 혼자 오래오래 음미하고싶거나 혹은 수줍어서요~~

cyrus 2017-01-17 15:4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알라딘 서재 활동했을 때 푸른희망님처럼 수줍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의 서재를 방문해서 댓글을 남기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수줍음을 잊고 자연스럽게(?) 하니까 그 이후부터는 적극적으로 서재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저에게 친구 신청을 하면, 제가 그 분 서재에 댓글을 먼저 남깁니다. ^^

stella.K 2017-01-17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다양한 문항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나서 더 이상 진전이 없네.

알라딘은 얼마 전부터 더 많은 좋아요를 유도하기 위해 누가 좋아요를 눌렀나
명단을 공개하고 있잖아. 그것도 좀 신경 쓰이는 부분이기도 해.
예를들어 친한 알라디너가 누른 것이 확인되면
기분이 좋긴 한데 없으면 아쉽고.
또 굳이 좋아요를 누를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안 누르면
괜히 오해 받는 것 같아 찜찜하고,
예전 같으면 좋아요 없이 댓글만 쓰는 것이 용이했는데
지금은 좋아요가 없으면 댓글도 못 쓰겠더군.
차라리 안 읽은 척 하는 게 낫지 댓글은 쓰면서 왜 좋아요는 없나
오해 받기는 싫거든.
이걸 내 페이퍼에 써 볼까 하다가 귀찮아 안 썼는데
여기에 댓글로 쓰게 되네.
내 말이 뭔 말인지 알겠거든 나중에 네가 페이퍼로 써 주면 안 될까?
그럼 좋아요 눌러 줄 용의 있는데.ㅋㅋ

cyrus 2017-01-17 20:34   좋아요 0 | URL
서재 활동을 하면서 알라디너분들의 장단점을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장점 : 착하다, 단점 : 착하다

대부분 알라디너분들은 예의가 아주 바릅니다. 그런데 상대방 감정과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싫어하는 점, 불편한 점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꾹 참으면 서재 활동하는데 스트레스 받을 겁니다.

서재에 대해서 쓴소리 한 마디하려면 비판을 감수해야하고, 알라디너 몇 명이 알아서 친구 해제하는 상황을 각오해야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갈등이 없는 집단 분위기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없어요.

진지하게 댓글을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져버렸군요.. ㅎㅎㅎ

누님. 그런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누르고 싶으면 누르고, 댓글 달고 싶으면 달면 됩니다. 그리고 별로 친하지 않은 알라디너가 있으면 ‘친구 해제(즐겨찾는 서재)‘하면 됩니다.
 

 

 

 

 

 

 

사흘 전에 곰곰생각하는발님의 글에 달린 흥미로운 내용의 댓글을 접했다. 그 댓글을 작성한 분은 수다맨님이다. 수다맨님의 설명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는 13년 넘게 사형집행관을 맡았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형 방식은 참수형이다. 즉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의 직업은 우리말로 하면 ‘망나니’다. 온갖 잡다한 지식이 정리된 ‘나무위키’에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에 대한 짤막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 언급될 내용은 나무위키에 참고한 것이다.

 

무함마드가 십 년 넘게 망나니를 하는 이유가 그의 일을 대신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형집행관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보수를 넉넉하게 받는 직업이다. 무함마드는 죄인 한 사람씩 목을 자를 때마다 오랫동안 피땀 흘리면서 번 돈보다 더 많이 받는다. 그런데 그는 현지 인터뷰에서 자기 일이 알라가 용서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도 사람인지라 사람을 한 번에 죽이는 일에 죄책감을 느꼈다.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때문에 이슬람이 살상이 허용된 위험한 종교로 오해받는다. 그런데 이슬람은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살인의 경우를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특히 명분 없는 살인을 하지 말라고 밝히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꾸란의 구절을 마음대로 인용, 해석하여 자신들의 테러 행위를 정당화한다.

 

 

 

 

 

참수형에 사용된 도구는 장검과 도끼다. 초기의 참수형은 지체 높은 사람들, 즉 왕족이나 귀족들이 받는 형벌이었다. 강도, 절도, 간통 등 단순 범죄자들은 교수형을 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참수형의 권위적인 의미가 잃기 시작했고, 왕족이 아닌 사람도 참수형을 받았다.

 

 

 

 

 

 

 

 

 

 

 

 

 

 

 

 

 

 

참수형이 기계화로 발전된 것이 바로 단두대, 즉 ‘기요틴(guillotine)’이다. 단두대는 프랑스 혁명사를 논할 때 절대로 빠져선 안 되는 필수 요소다. 프랑스 혁명 말기 자코뱅당이 주도한 공포정치 시대를 ‘단두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포정치 시대는 단두대로 시작해서(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단두대로 끝났다(로베스피에르 처형). 단두대의 이름으로 남게 된 기요틴 박사는 흔히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단두대를 새로운 사형 방식으로 도입하자고 국민의회에 제안했다. 기요틴 박사는 고통 없이 ‘인간답게’ 목을 치는 인도적인 사형 방법을 원했다. 기요틴의 등장으로 사형집행자는 사형수의 목을 향해 검과 도끼를 내려치지 않아도 되었고, 사형수는 목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런데 취지는 그럴 듯했지만 진행 상황은 그리 인간적이지 않았다. 단두대에서 공개 사형이 진행되는 날에는 인간 본성과 거리가 먼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군중들은 참수된 인간의 피가 불치병을 낫게 해준다는 미신을 믿었다. 사형이 집행된 후에 군중들이 단두대 주변으로 몰려왔다. 사형집행관의 조수들은 잘려나간 머리나 목 없는 시신에 흘러나오는 피를 컵에 받거나 손수건에 적셔서 군중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집행관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망나니’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에는 ‘망나니’는 성직이 포악한 사람을 비난할 때 쓰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 사형집행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망나니에 가까운 인성을 가지지 않았다.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는 자기 일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날까 봐 걱정했다. 그리고 자식들이 자신처럼 사형집행관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최고의 사형집행관이었던 샤를 앙리 상송이라면 무함마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주고 남았을 것이다. 상송은 루이 16세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목을 잘랐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사형집행인으로 활동한 집안이었다. 상송 가문의 증조부가 사형집행인의 딸을 만나 결혼하지 않았으면 상송 가문은 훌륭한 귀족 집안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나 하기 힘든 직업이 으레 그러하듯, 상송 가문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았다. 그래서 상송은 자신의 회고록에 사형제가 폐지되기를 밝혔다.

 

 

 

 

 

 

 

 

 

 

 

 

 

 

 

 

 

 

 

과거의 공개 사형은 군중을 겁주고 일벌백계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시작됐다. 그렇지만 잔혹한 처벌의식의 잔인성은 군중을 길들여 놓았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은 축제 분위기다. 공개 사형은 황홀한 구경거리다. 권력자가 단두대에 오르면 군중은 일상에서는 맞설 수 없었던 권력에 대해 조롱을 하거나 돌팔매질까지 한다. 그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인간의 역사를 보면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에게 조롱하는 군중이 자주 등장한다. 미셸 푸코의 분석대로, 누군가를 하나의 속죄양으로 삼고 타자화함으로써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개인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여러 문제가 중첩돼 벌어진 사건을 한 개인에게 향한 분노로 표출된다면,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비극적인 과정을 보지 못한다. 사형이 또 하나의 살인인가 아니면 마땅한 정의의 실현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의 하나다. 사형집행인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사형집행인조차 호기심 어린 구경거리의 일부로 보고, 그를 비하하는 태도는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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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1-16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인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그런데 군중의 화풀이용으로 사용되어질텐데요..문제는 그 화풀이의 대상이 자신이 되어졌을 때는 빽 돌아갈 일이죠...

cyrus 2017-01-16 15:55   좋아요 1 | URL
정말 억울하고, 통탄할 노릇이죠. 억울한 희생자의 가족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stella.K 2017-01-1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수다맨님 그 댓글 봤어.
좀 놀랐지. 그런 직업이 아직도 있다는 게.
우리 여자들은 환호했을 거야.
가끔 누가 성폭력 했다고 그러면 저런 놈들은
광화문 광장에 매달아 놓고 총살을 시켜야 한다.
거길 거세해야 한다 막 그러거든.
사람은 조용히 말로해서 못 알아 듣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기요틴 하니까 옛날에 보았던 <길로틴 트래지디> 영화 생각났어.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암튼 수작이었지. 그것도 19세기 사형을 다룬 영화거든.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올레 tv는 없는 것 같기도하고...

cyrus 2017-01-16 18:55   좋아요 0 | URL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인간이길 스스로 거부하는 범죄자들은 가혹하게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인권이라는 이유로 범죄자들이 법적 보호의 그늘 속에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2017-01-16 16:21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6 18:57   좋아요 0 | URL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끝까지 변명하는 최순실이 80년대식 고문을 당해봐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6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페이퍼 재미있네요. 전 이상하게 이런 잡학에 흥미롭더군요.
역사도 거시보다는 미시학에 관심이 높고 말이죠..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1-16 19:00   좋아요 0 | URL
수다맨님과 곰발님 덕분에 저도 흥미로운 내용을 알았습니다.

나무위키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정말 다양한 잡식이 많습니다. 다만 잘못된 정보도 있긴 합니다만 가끔 심심할 때 들어가서 보면 재미있어요. ^^

겨울호랑이 2017-01-16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럽에서 청조말 중국에서 사형수들의 살점이 돈으로 거래된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했다고 하던데, cyrus님 글을 읽으니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네요

cyrus 2017-01-16 19:04   좋아요 1 | URL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인종 학살은 정당한 행위로 주장하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인을 야만인으로 규정합니다. 내로남불이죠.. ^^;;

북프리쿠키 2017-01-1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나니는 현재로 치면 공무원이네요^^;

cyrus 2017-01-16 19: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형집행관은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한 특수 직업입니다. ^^

블랑코 2017-01-16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존재하는 직업인지 몰랐어요. 저도 이런 잡학 좋아하는데요. ^^

장르 소설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꽤 자세하게 중세 사형집행인의 이야기가 나와요. 후손이 자기 조상의 직업과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쓴 소설인데 장르적 재미가 뛰어나진 않지만 당시 생활상을 알게 되는 재미가 아주 커요.

cyrus 2017-01-16 19:07   좋아요 1 | URL
문예출판사에서 펴낸 소설을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그 책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사실 사형을 주제로 한 책이 그리 많지 않아요. 관련 도서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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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머싯 몸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계량할 수없는 불가해한 존재인가를 그려내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의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과학적 객관성에 입각해 인간의 정신을 해부하는 데 전 생애를 보낸 그였지만, 몸은 자서전에서 “나는 여전히 인간을 모르겠다”고 썼다.

 

인간을 이해하는 공부는 그만큼 어렵다.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모든 사회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학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비합리적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경제학 이론의 출발점이다. 남보다 더 잘살아 보겠다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은 경제학을 지탱해주는 두 개의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연구를 통해 대부분 이론이 실제 현실과는 많은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들이 밝혀졌으며 이와 관련 최근 들어서는 완전하게 합리적일 때보다는 약간은 비합리적일 때가 더욱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논리가 제기되었다.

 

우리는 기상예보가 틀리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지만, 기상통보관은 적어도 현재 기상상태에 대해서는 80%의 정확도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 경제학자들은 경기예측은 차치하고 현재의 경제 상태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한다. 새해가 다가오면 각종 경제 관련 연구소들이 앞다투어 경제전망치를 내놓는다. 물론 예측의 어려움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전망치와 실적치가 몇 배씩 차이가 벌어진다면 아무래도 전망치들이 틀렸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 선택을 잘못하면 현세대에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도 고통이 전달된다. 잘못된 정책의 선택은 두고두고 말썽이 된다. 그래서 장하준은 경제학이 ‘심각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1]

 

경제학자들 가운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보통 극단적인 예측과 독설로 주위의 관심을 끈다. 반대로 밋밋하거나 방향성 없는 예측을 하는 경제학자는 인기가 없다. 기상예측은 틀리면 난리지만 경제예측은 맞으면 오히려 난리다. 우리 사회가 경제예측의 오류에 더 관대한 덕분에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틀려도 별문제 없이 살아간다. 여기서 경제예측을 실패한 경제학자들 자체를 비판할 의도는 없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데도 ‘심각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경제학자들이 문제다. 한 가지 슬픈 것은 잘못된 예측을 되풀이하는 경제학자들이 여전히 각종 미디어에 얼굴을 내밀며 또 다른 엉터리 예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신봉하는 경제이론을 근거로 경제를 예측한다. 거듭된 오판에도 여전히 자신의 경제학이 과학이라며 떠들고 다닌다. 이들은 어쩌다 우연히 홀인원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위기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점점 더 알 수 없는 블랙홀로 빠져든다.

 

경제이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가정과 추상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론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다. 문제는 이론과 현실 간의 간격 자체가 아니라 이론의 현실 설명력이다. 과거에 잘 맞던 이론이 지금은 아닐 수 있고, 특정 시대에서 잘 통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은 늘 변하며 그것을 느낀 다음에야 기존 이론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학의 잣대로 문제에 접근할 때 반드시 다양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다양성을 고려하면 경제학이라는 일반적 원칙이 적용되더라도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전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경제학은 ‘자기충족의 학문’이 아니다. 경제학은 다양성을 수용하고, 그 다양성 속의 혼성(Hybrid)을 축복하는 지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장하준은 서로 다른 학파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을 '이종 교배'라고 표현했다) 재벌로부터 기금을 두둑이 받아 설립한 자유경제원은 좌익을 ‘시장경제의 적’으로 설정하여 한국사회를 국정 파탄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장이냐 분배냐, 시장이냐 정부냐 등의 기존 좌우 담론은 모두 철 지난 유행가에 불과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게 여전히 이념이란 믿음은 시대착오적이다. 기득권 세력이 대항세력을 좌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대항세력이 기득권 세력을 극우 반동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똑같이 무의미한 도발이요 치우친 시각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고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는 존재다. 기존 이론을 수정하고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려는 경제학자들의 꾸준한 노력 없이 현실 경제가 발전할 수는 없다. 충분한 해답은 아니더라도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경제이론이다.

 

경제학자와 정치인들이 손잡아 이익집단 간의 상충한 이해관계를 정당이나 개인의 권력 확장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경제학의 지적 토양을 피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비효율을 초래하여 국가경쟁력을 약화하고, 우리 국민 모두의 삶의 수준이 저하된다. 이러한 과대망상증 경제 선동가 · 정치꾼들 때문에 중요한 경제문제들이 정치적 이슈의 홍수 속에 잠겨 정책 시행의 타이밍을 놓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런 경제 선동가를 비판하지 못하고 정치꾼들을 계속 선출해 준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래, 다 좋은 얘기 같기는 한데,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야?”[2]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경제학이 전문적 권위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학자들은 비아냥거리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에 점점 더 무관심해졌다. 예전에는 위대한 한 개인의 노력이 그 시대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한 경제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제현상에 대한 기본 지식은 이 시대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우리 개인은 잘해야 ‘제한적 합리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를 공부할 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되도록 많이 만나는 게 좋다. 토론과 비판은 기본이다. 그래야 엉터리 경제학자나 ‘블랙 스완(black swan)‘을 만나더라도 덜 충격 받는다.

 

 

 

 

[1]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25쪽

[2] 같은 책, 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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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7-01-1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경련·자유경제원이 좀 그랬지요. 우측으로 너무 함몰된... 전 이 책이 상당히 균형(?)잡힌 서술이었다고 생각한답니다...^^

cyrus 2017-01-16 00:13   좋아요 0 | URL
자유경제원은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학파를 적 또는 무용한 것으로 설정하여 까내립니다. 자유경제원 소속 사람들의 페북 계정을 봤는데, 지적 우월감에 빠져 있어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상대하고 싶지 않게 만듭니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이 책에 문제점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

2017-01-16 00:05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6 00:15   좋아요 1 | URL
어제(15일)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리뷰 이벤트 응모 마감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이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썼습니다. ^^;;

yureka01 2017-01-16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학자인지 경제이론중에 경제이론의 가정부터가 틀렸다고 지적하더군요..인간은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경제활동을 한다고 전제 했던 기존의 입장과 달리,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경제활동도 자주 하고 뻔한 오류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얼추 이해 되더군요..대구 경북지역에 조희팔의 사기에 4조씩이나 떨려서 당하는거 보면요....경제적 이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인데도 말이죠. 과욕과 탐욕이 이성과 논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 이유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7-01-16 15:04   좋아요 0 | URL
인간은 오래 살아봤자 죽으면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죽을 때까지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실수를 하고 생각이 틀립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당연한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1-16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경제학 전공자로서 아직 21세기자본도 읽기 버거워 이러고 있네요
싸이러스님의 다양한 독서에
박수를 보냅니다!!

cyrus 2017-01-16 15:05   좋아요 1 | URL
저는 피케티의 책을 안 읽어봤습니다. 경제학 원론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원론 그 이상의 내용의 경제학 책은 일부러 피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꼬마요정 2017-01-16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계효용의 법칙도 사실 불완전하죠.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니까요. 이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7-01-16 15:07   좋아요 0 | URL
패러다임이 바꾸려면 일단 자유경제원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부터 싹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면 자유경제원을 해체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나와같다면 2017-01-16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가 생각하는 걸 나도 생각한다고
그가 생각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은 최고의 이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는 균형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쉬 교수가 생각나네요..

그 분의 업적보다도 정신분열증을 극복해내는 의지가 존경스러워요..

cyrus 2017-01-16 15:09   좋아요 1 | URL
존 내쉬의 명언이 좋군요. 박근혜를 좋아하는 자유경제원 소속 사람들은 자신들만 옳게 생각한다고 믿지,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간단하게 종북주의자로 몰아세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