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생각법 - 대세를 따르지 않는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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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남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려고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무리 지어 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인간은 철저하게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으며 타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모방 본능은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만약 상대방의 표정, 행동, 자세, 말투를 모방하지 않는다면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남들같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본능은 큰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조직이론에서 종종 사용되는 용어 중 집단사고(group-think)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집단의 의사 결정 상황에서 집단 구성원들이 집단의 응집력과 획일성을 강조하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여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왜곡된 의사결정 방식을 말한다. 폐쇄적인 집단이나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새로운 정보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게 되고, 다수의 결정에 대한 반대 의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우리가 옳다그들만의 신념은 거대한 오류를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다.

 

이를 막으려면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가 있어야 한다. 가톨릭에서 성인(聖人)을 추대할 때 해당 인물의 행적과 품성을 검증하기 위해 비판을 하도록 한 인물을 가리킨다. 선의와 확신, 만장일치가 결과의 성공이나 정의로움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건전한 공적 논의를 담보하기 위해 이런 의도적이고 의무적인 악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반대 의견은 다수 의견에 동조하는 군중에게는 성가시고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정의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 악마의 변호사로 자처하여 나서게 된다면 군중으로부터 트집쟁이’, ‘악마의 선동꾼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비난을 덜 받으면서 이상한 이야기를 잘 설명하는 방법이 있을까?

 

일본 사회 내에 확산되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경계하고 비판해온 우치다 타츠루(內田樹)대시민이 되자고 제안한다. 이번에 나온 그의 책 대세를 따르지 않는 시민들의 생각법2008년부터 6년간 연재한 900자 칼럼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우치다 타츠루의 대시민 강좌이다. ‘대시민1966NHK 방송국에서 방영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제목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평소 정치나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샐러리맨인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사회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다.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고 안정적인 삶을 선호하는 사람을 소시민이라고 한다면, 대시민은 사회 문제의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대시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시사 쟁점에 대해 자기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 /그녀는 다수 의견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사회의 위기 징후를 감지하고 군중의 각성을 촉구한다.

 

악마의 변호사대시민모두 사회나 집단에 향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인물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악마의 변호사는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서 고의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라면, 대시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사람이다. 우치다는 대시민을 설명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비록 나와 다른 생각을 드러내는 말이어도 그 말의 내용이 알차고 이해하기 쉽다면 경청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에요. 대시민이 되려면 말을 잘해야 되는군요.”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상대에게 전달하는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치다는 그것을 의사소통 능력의 부차적인 일부로 보고 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의사소통의 자리를 마련하는 능력이다. 우치다는 진정한 의사소통 능력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우리가 알면서도 자꾸 잊는 경청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의사소통 능력이란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자리를 마련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자신과 타자를 맺어주는 통신의 회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몇몇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이런 발화가 바로 그것이다. 또는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동안 귀를 기울일 만한 대목에 은근히 힘을 준 순간을 알아채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진정한 의사소통 능력중에서, 172)

 

 

성숙한 발신자는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말속에 들어있는 동기(動機)나 정서까지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의사소통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한다. 또는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간과하기도 한다. 말을 잘하든 못하든 간에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지금도 익명의 수신자들은 자기 생각을 밝히면서 인터넷 공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 남겨진 수많은 말들은 익명의 발신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수많은 수신자가 발신자가 되지 않는 한 인터넷 공간에 남겨진 말들은 공적 논의를 위한 자원으로 사용해보지 못한 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침전물로 남게 된다.

 

설명을 잘하는 대시민은 듣는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 우치다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능력을 대시민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로 보고 있지만, 나는 듣는 사람이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는 것은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상한 이야기에 귀담아 들어주는 자세를 의미한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시민이다.[]

 

 

      

[] 한국어판 서문의 8쪽에 있는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시민입니다.”라는 문장을 빌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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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4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4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달에 쓴 로드 던세이니(Lord Dunsany)의 작품에 관한 글을 정정한다. 글 제목은 리라젤과 운디네.

    

 

 

 

 

 

 

 

 

 

 

 

 

 

 

  

* [e-Book] 엘프랜드의 공주(페가나북스, 2019)

    

 

 

던세이니의 작품을 전자책으로 출간한 페가나북스공식 홈페이지에 보면 엘프랜드의 공주(The King of Elfland’s Daughter)던세이니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두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하면서 홈페이지에 있는 작품 소개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던세이니의 작품들을 번역한 엄진 씨의 반박 의견에 따르면 1922년에 던세이니가 발표한 초기 작품인 Don Rodriguez: Chronicles of Shadow Valley는 장편이 아니라 연작 단편집으로 분류된다. 그렇게 되면 1924년에 발표된 엘프랜드의 공주던세이니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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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없는 페미니즘 - 제주 예멘 난민과 페미니즘의 응답
김선혜 외 지음 / 와온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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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나 자연재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을 난민이라고 한다. 1951년에 체결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국제 협약은 난민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國籍國: 배나 비행기 따위의 국적이 등록되어 있는 나라)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

 

지난해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주도 난민수용 거부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은 약 17만 명의 동의를 받았으나 공개된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삭제됐다. 한번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은 작성자가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없으며 관리자의 삭제만 가능하다. 청와대 측에서 별다른 언급 없이 글을 삭제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는데 비슷한 내용의 청원이 계속 나왔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난민은 가짜 난민(難民)이고 미래의 난민(亂民)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난민이 늘어난다는 소식에 공포를 느낀 사람들은 난민이 무리 지어 다니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잠재적 범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난민을 둘러싼 가짜 뉴스까지 확산하면서 난민 문제에 대한 국내 여론은 미국과 유럽 등 서구권에서 불거진 이슬람 공포증(Islam phobia)과 이슬람 혐오를 그대로 따라갔다.

 

당시 사람들이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했던 가짜 뉴스는 이슬람은 여성을 혐오하는 최악의 종교다여성 차별과 여성 혐오 문화에 익숙한 무슬림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다라는 내용이다. 여성억압을 이슬람과 동일시하는 가짜 뉴스는 난민수용 반대 여론에 불을 지폈다. ‘무슬림 남성 난민이 한국 여성을 성폭행할 것이라는 주장도 퍼졌다.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사람 중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여성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무슬림이란 단어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남성과 그 피해자인 여성의 구도로 난민 문제를 바라봤다. 과연 여성 혐오는 이슬람만의 특징인가? 무슬림 남성이 가해자라면 무슬림 여성은 남성에게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인가? 그렇다면 예멘 난민은 잠재적 가해자인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난민(難民)난민(亂民)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은가? 1992년 세계 난민 협약에 가입한 이후로 난민 보호국이 된 우리나라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난민 수용 반대 여론과 가짜 뉴스가 이어지는 동안 한쪽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고민하는 페미니스트와 인권 운동가들이 모여 페이스북 페이지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만들었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인도 출신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의 동명 저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37명의 필자가 참여한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페이스북 페이지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 연재된 글과 언론에 게재된 칼럼을 포함해서 총 40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페미니즘의 난민 혐오 담론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여성학 연구자 김보명, 성과재생산포럼 소속 활동가 나영, 퀴어 활동가 나영정, 여성학자 정희진, 문화평론가 손희정,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등을 포함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그동안 남의 집 불구경 보듯 다뤘던 무슬림 혐오와 난민 혐오 담론이 우리의 문제임을 환기한다. 동시에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갇혀 있는 페미니즘을 경계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구 사회가 이슬람에 가진 오해와 편견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이슬람 혐오와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쓴 대학생 페미니스트는 실제로 무슬림을 만나면서 자신이 무슬림을 바라보는 눈이 지나치게 서구적이라는 사실을 지각한다. 그녀는 이슬람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여성 혐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페미니즘을 근거 없는 오만이라고 비판한다. 수상한 페미니스트 투사들은 여성 인권을 위한다는 핑계로 난민 반대를 외치는 수사를 비판한 글이다. 여성을 국민으로 소환해서 여성 인권을 앞세운 난민 반대 수사는 이방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재생산한다.

 

단지 한국 여성들만 위하려 한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축소된다. 난민 문제는 너무나 많은 형태(성차별, 인종 차별, 종교 차별, 성소수자 차별)의 억압의 교차 지점에 있다. 그러므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은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국적, 종교, 세대 등과 같은 다양한 정체성 범주들이 서로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위계적으로 얽혀 있는 현실을 해석하기 위해 등장했다. 여성혐오자 이슬람 난민을 추방하자고 외치는 당신에게-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여섯 가지 반론인종, 젠더, 교차적 페미니즘은 난민 문제를 무슬림 남성 대 한국 여성으로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를 제기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난민 인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같이 하면 힘들다고. 그리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페미니즘 운동에 매진할 거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지금 필요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권하고 싶다. 그러면 타자를 구분 짓고 배척하게 만드는 내 안의 경계(境界)를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로서 정말 경계(警戒)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이 타자를 절멸하고 부정하고 추방하는 혐오 담론의 근거로 변질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사회를 바꾸는 이론이자 주변화된 타자와 연대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가는 실천이지 적을 생산하는 혐오 담론을 합리화하는 폭력이 아니다.

 

 

진부하고 당연하며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교훈일 수 있지만, 다시 한번 말해 보려고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이 말하고 살아가는 시대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읽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의 이름으로 타자의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모순과 폭력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김보명, 젠더 폭력과 인종주의중에서, 67)

 

 

 

 

 

[] 전국지리교사연합회, 살아 있는 지리 교과서, 휴머니스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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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국내에 번역된 코난 도일(Conan Doyle)셜록 홈스(Sherlock Holmes)시리즈 번역본들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정말로 고된 글쓰기였다. 나는 번역 일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고, 영어를 능숙하게 쓰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나도 글을 쓰다 보면 크고 작은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지난달 마지막 날에 어느 분이 내가 쓴 셜록 홈스시리즈 번역본에 대한 글에 댓글을 남겼다. 나는 그 글에서 원문의 ‘three days’사흘이라고 번역한 문장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내용을 썼는데, 댓글 작성자는 사흘‘3과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라고 알려주셨다. 내 글에 있는 잘못된 내용은 삭제하지 않았다. 문장을 삭제하는 대신 취소선으로 그었다.

 

 

[셜록 홈즈의 회상/회고록번역본 비교 Part. 4] (2017628)

https://blog.aladin.co.kr/haesung/9422406

 

[셜록 홈즈의 회상/회고록번역본 비교 Part. 4]

(201774)

https://blog.aladin.co.kr/haesung/9435357

 

 

댓글 작성자가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나는 사흘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분의 말에 따르면 3일이 사흘이라면, 4일은 나흘이라고 쓴다.

 

 

1하루

2이틀

3사흘

4나흘

 

 

지금까지 살면서 사흘나흘이라는 단어를 써본 적이 없던 것 같다. 그래서 사흘‘4의 동의어로 착각했다. 사실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면 국어사전에 찾아봐야 하는데 그때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다. 국어사전에 있는 사흘의 의미를 알아봤더라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을 쓰다가 뜻이 애매모호한 낱말이 생각나면 국어사전을 이용한다. 그 낱말이 내가 써야 할 문장의 문맥에 어울리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얼른 글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국어사전을 참고하는 절차를 무시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고작 1분도 안 걸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뜻을 잘 모르는 낱말을 쓰기 전에 국어사전을 살펴보는 습관을 잊지 말아야겠다. 블로그에 남기는 글이라고 해도 아무나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 하는 게 내 글쓰기에 관한 지론이다. 그런 글이 될려면 내가 쓰려고 하는 낱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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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0-0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나도 동의어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란 말야?

cyrus 2019-10-02 17:27   좋아요 0 | URL
처음에 ‘사흘’의 ‘사’가 ‘넉 사(四)’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사흘’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었어요... ^^;;

2019-10-01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0-02 17:31   좋아요 0 | URL
저도요. 가끔 맞춤법 검사기가 서버 문제로 인해 작동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완성된 글을 맞춤법 검사하지 않고 블로그에 올려요. 이러면 찝찝해요. ^^;;
 
도둑맞은 손 - 살아있지만 인격의 일부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적인 어떤 것에 대한 법적 탐구
장 피에르 보 지음, 김현경 옮김 / 이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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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개그콘서트에 방영되었던 같기도()라는 코너를 기억하시는가. ‘같기도는 무술도 아니고, 춤도 아닌 뭐라고 부르기 애매모호한 퍼포먼스다. 이 코너에 김준호가 같기도를 연마한 사부로 출연했다. 김준호가 분한 캐릭터는 이건 A도 아니고, B도 아니여라는 말을 하면서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선보인다.

 

 

이건 내 몸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여.”

 

 

분명히 내 몸의 일부인데, 그게 물건으로 볼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 안 되지만, 우리는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내 몸이 물건이라는 주장 자체에 불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건으로 분류되는 인간의 몸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인간의 몸은 물건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종 이식이다. 질병이나 사고로 훼손된 장기를 타인에게서 받은 장기로 대체하는 시술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장기를 기증받아서 이식하는 것은 생체 이식이라고 한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상관없이 기증자의 장기가 수혜자(장기 이식을 받는 사람)에게 기증되면 기증자는 장기의 소유권이 사라진다. 기증자의 몸 밖으로 나온 장기는 물건이 되고, 이식 수술이 성공하면 장기의 소유권은 기증자에서 수혜자로 넘어간다.

 

1992년 프랑스에서 몸의 소유권에 대한 상식을 뒤흔드는 판결이 나왔다. A는 실수로 한쪽 손이 절단되는 사고를 겪는다. 충격을 받은 A는 기절하고, 그 사이에 A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B가 절단된 손을 가져간다. B는 절단된 손을 소각장에 버린다. 그렇다면 B는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 프랑스 법에 따르면 B무죄. 그 당시 프랑스 법은 몸을 인격(사람: person)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했다. 온전한 몸은 살아있는 인간이다. 물건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잘려 나간 몸의 일부는 인격과 동일시한 몸이 아니므로 주인 없는 물건(무주물)이 된다. A는 잘려 나간 손을 소유할 권리가 없으며 B가 잘려 나간 손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B는 절도죄도, 중상해죄도 아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도둑맞은 손인간(인격)을 동일시하게 생각하는 통념의 한계를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이고 궁극적 가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그 존재 가치가 있으며 그 인격을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몸은 물건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앞서 언급한 동종 이식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거래 대상이 될 수 있는 물건으로서의 몸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인간의 몸을 물건으로 간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한다.

 

저자는 몸과 인격을 동일시하는 입장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찾는다.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고대 로마법은 주체와 인격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노예제는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인간의 몸을 물건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법적 효력을 발휘했다. 기독교가 막강한 권위를 떨치고 있던 시대에 죽은 성인(聖人)의 시신은 성물(聖物)이 되었다. 죽은 성인은 인격이 사라졌어도 성스러움은 여전히 유지된다. 왜냐하면 죽은 성인의 시신은 말 그대로 성물, 성스러운 물건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사례는 몸을 사람으로부터 분리하여 물건의 범주 속에 넣으려는 시도이다.

 

 

 

 

 

이 책의 역자는 도둑맞은 손》을 기발하고 엉뚱하며 심오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내가 보기에 도둑맞은 손도발적인 책이다. 저자는 몸을 물건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물건으로 간주한 몸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보는 것을 경계한다. 각자에게 자신 신체를 소유하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함부로 사고팔 수 없다. 따라서 저자가 생각하는 몸은 인격 개념과 물건의 속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물건으로 보는 몸의 법적 지위에 더 관심이 많다. 도둑맞은 손을 읽고 나면 생각할 것이 많아져서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나는 온전한 몸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까 왜 이게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 , 혼란하다, 혼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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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8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0-01 17:30   좋아요 0 | URL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이 스승 유의태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극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설정이지만요. ^^;;

2019-09-30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0-01 17:32   좋아요 0 | URL
서양 법률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서 사실 저는 조금 지루했어요. 역자 서문만 읽어도 책 내용의 80%를 이해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