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이성’을 내세워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 후 발전된 문명이 초래한 야만성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인간도 동물이다’라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했다.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킨 것이다. 하지만 동물도 인간이라는 이런 관점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여전히 인간을 동물보다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라 발언을 할 수 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 (민음사, 2016)

 

 

고대 인도의 승려 카필라는 ‘동물만도 못한 인간’의 원조다. 그는 부처의 제자 중에 가장 총명했으나 자신보다 영리하지 못한 동료들을 만나면 ‘원숭이 대가리’, ‘닭대가리’라고 놀려댔다. 카필라는 일찍 죽고 말았는데, 업보로 100개의 동물 대가리가 달린 물고기로 환생하게 됐다. 이 괴물에 달린 100개의 머리는 생전에 카필라가 동료들에게 놀렸을 때 언급했던 모든 동물 대가리였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제국주의의 광풍이 휩쓸던 유럽에서는 열등한 인종을 동물로 비하하는 학문이 유행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인간을 10개 종(種)으로 분류, 흑인을 가장 야만적인 종족으로 규정했다.

 

 

 

 

 

그는 흑인종이 원숭이에 가장 가깝다고 주장했다. 미개한 종족은 발달한 종족의 관리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의 견해는 나중에 나치주의자들의 인종차별 정책에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헤켈은 과학의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진화(evolution)와 진보(progress)를 손잡게 했다. 그의 인류기원설은 폐기되었지만, 진화와 진보의 불편한 동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탈리아 범죄학자 체사레 롬브로소(Cesare Lombroso)는 범죄자는 원숭이에 가까운 유전자를 지녔고, 동물의 모습과 비슷한 일명 범죄형 얼굴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범죄자의 해부학적 특성을 과거로 퇴화하는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심지어 선천적 범죄자의 안면 현상을 넙치나 가자미 같은 물고기 형상과 비교했다.[1]

 

 

 

 

 

 

 

 

 

 

 

 

 

 

 

* 루이스 캐럴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월의봄, 2015)

* 허버트 조지 웰즈 《타임머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진화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던 19세기 유럽인들은 ‘고등 계급’과 ‘하급 계급’이 있듯이 이와 비슷한 ‘고등 동물’과 ‘하등 동물’이 있다고 믿었다. 극단적인 이분법은 계급 차별의 기준이 되었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물고기와 개구리 머리를 한 두 명의 시종이 등장한다. 사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물고기와 개구리에 가깝다. 허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는 《타임머신》에서 지하에 사는 흉측한 종족 몰록을 ‘동굴에 사는 흰 물고기’처럼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다고 묘사했다.[2]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설에 등장하는 80만년 후의 미래 인류 엘로이와 몰록은 19세기 당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풍자한 것이다.

 

 

 

 

 

 

 

 

 

 

 

 

 

 

 

 

 

* 러브크래프트 《러브크래프트 전집 1》 (황금가지, 2009)

 

 

진화에 역행하는 현상, 즉 퇴행이라는 주제는 그 성격상 작가들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해왔다. 특히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인스머스의 그림자』(The Shadow Over Innsmouth)생물학적 퇴행의 공포감을 잘 표현한 수작이다.

 

 

 

 

 

이 작품의 배경 인스머스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가상의 마을이다. 과거에 인스머스는 번영한 항구 마을이었으나 ‘불길한 전염병’이 덮쳐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곳으로 변했고,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 작품에서 인스머스 주민들은 물고기 또는 양서류와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인으로 묘사된다. 러브크래프트는 인스머스 주민들을 ‘진화를 거스르는 열등한 존재’로 그렸는데, 그들에 대한 공포는 작가 개인이 체험한 공포가 반영되어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앵글로색슨 족이 가장 위대한 인종으로 추켜세웠고, 흑인과 아시아인은 악랄하고 미개한 인종이라고 생각했다.

 

동물을 보면 떠올리는 혐오감은 인간의 오랜 타성이며 그 동물의 부정적 면을 또 다른 인간의 약점에 비유하는 인식 역시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대한 맹렬한 욕구를 바탕 삼은 인류의 진보는 사회의 차별 ·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다윈은 진보로 둔갑한 진화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다윈의 추종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차별의 양상을 자연스러운 진화의 산물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친밀하지 못한 존재를 무섭거나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차별과 적개심은 다양성의 가치와 덕목을 거스르는 불순한 생각이다.

 

 

 

[1]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317쪽

[2] 허버트 조지 웰즈 《타임머신》 106쪽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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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 한 권으로 보는 인상주의 그림
제임스 H. 루빈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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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미술을 주제로 한 책이 새로 나왔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땐, 그저 흔한 미술책인 줄 알았다. 이 책의 절반이 내가 아는 내용으로 채워졌으면 속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확실히 이 책에는 기존에 나온 인상주의 미술 관련 서적과 차별화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책의 저자 제임스 H. 루빈(James H. Rubin)은 19세기 유럽 미술, 특히 인상주의 미술을 연구한 미술사학자이다.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된 루빈의 책이 《인상주의》(한길아트, 2001)였다.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2013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원제가 ‘How to read Impressionism : ways of looking’이다. 부제로 사용된 구절 ‘ways of looking’은 올해 1월에 타계한 존 버저(John Peter Berger, 국내에서는 ‘존 버거’로 알려진 유명한 작가)의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열화당, 2012)를 패러디한 것이다. 루빈은 그림을 바라보는 버저의 방식, 즉 ‘주의를 기울여 보는 방법(look)’을 빌려 인상주의 그림을 독창적으로 해석한다.

 

 

 

 

 

루빈이 주의를 기울여 본 대상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선호한 주제와 기법 들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눈에 비친 도시 풍경, 유흥 장소, 철도 교(橋), 공장 등 19세기 근대 파리의 생활상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소재들을 그렸다. 인상주의하면 보통 자연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풍경뿐 아니라 파리 근대생활의 단면을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소개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프랑스 인상주의와 미국 인상주의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메리 커샛(Mary Cassatt)은 미국에 인상주의를 전하고 특유의 사조로 잘 발전시켰던 여성 화가이다. 그녀는 주로 중상류층의 침실과 거실 같은 사적인 공간에 있는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비록 그림 1점만 소개됐지만, 미국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 차일드 해섬(Childe Hassam)도 주목해볼 만하다.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인상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양식뿐 아니라 화가 개개인이 가진 특징적인 화풍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루빈은 친절하게 비교 도판까지 수록하면서 독자들이 한층 깊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그림이 특이하게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작품이다. 폴록은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현대적인 화가의 작품이 왜 근대적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과 한자리에 배치되었는지 궁금하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라!

 

 

 

 

 

 

 

 

 

인상주의 미술이 정점을 찍었던 19세기는 그야말로 ‘이미지의 시대’였다. 이때부터 이미지를 포착하는 사진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진술에 매료된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진기처럼 언어만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많은 이미지를 묘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나와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다양한 색채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는 『파리 거리, 비 오는 날』에서 한가롭게 산책하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전했다.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은 산업화의 중심에 선 노동자들의 모습에 매료됐다. 이렇듯 우리는 인상주의 그림에서 그 시대가 낳은 눈과 마음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문명의 변화는 세상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또한 변화시킨다. 그 변화를 예전의 방식으로 담기 힘들다면, 미술은 새로운 방식을 탐색해 나가야 한다. 인상주의 그림에는 근대가 낳은 변화를 주의 깊게 바라본 화가들의 탐색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속에는 화가들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깊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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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22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고 여기서 잭슨 폴락의 그림을 만나게 될줄이야..ㅎㅎㅎㅎ
이 화가의 그림이 모티브가 되어 제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아놔~
1950년대에 현대추상주의 그림이 나온다는게 참 대단한 ~~~

그럼요..예술에서 안목을 기르는 방법 역시 책에서 부터 시작이죠..
어떤 작품이든지 간에 그 작품에 대한 심안이 필요하고 왜 그림이 나오게 된
뒷배경이 항상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그 배경과 시대상과 작가의 개인의 삶이 믹스된 것이 곧 작품의 해석으로
연결되거든요..좋은 책 만났네요.안목을 길러야 할 이유..충분합니다~

cyrus 2017-03-23 17:23   좋아요 2 | URL
그림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독서가 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어요. 미술과 사진 같은 분야를 이해하려면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

stella.K 2017-03-2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삼. 얼마 전 모처에서 이벤트 때 응모했다 미끄덩~ㅠ
책 표지가 맘에 들더군.ㅎ

cyrus 2017-03-23 17:24   좋아요 0 | URL
혹시 서평단 이벤트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 이벤트가 있는 줄 몰랐어요. 도서관에 이 책이 있기에 내용이 궁금해서 읽어봤습니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

Agalma 2017-03-22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리 커샛 그림 색감 정말 좋네요^^
왜 인상주의 책에 잭슨 폴록일까....
문득 외관을 지워버리고 색의 향연만 남았던 모네의 루앙 성당 연작 그림이 스쳐 갑니다. 빛의 달라짐을 홀린 듯이 따라갔던 그 멋진 작업이.
잭슨 폴록의 그림은 전체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의 색을 따라가며 그 움직임을 살필 때 이해가 더 넓어진다고 하죠. 그가 색채에 홀린듯이 따라갔던 길을 우리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느껴야 소통의 길이 넓어지겠죠.
제 인상평은 여기서 이만ㅎ

cyrus 2017-03-23 23:46   좋아요 1 | URL
Agalma님의 생각이 책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인상주의를 추상표현주의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화파로 해석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내용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어떤 책의 리뷰를 확인할 때 100자평을 거른다. 한줄 평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줄 평이든 100자평이든 짧은 리뷰 중에는 ‘평(評)’으로 보기 힘든 것이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책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100자평에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마티 루티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동녘사이언스, 2017)에 낮은 별점을 준 100자평은 실소를 자아낸다.

 

 

 

 

 

 

 

 

 

 

 

 

 

 

* 앨런 S. 밀러, 가나자와 사토시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

 

 

어떤 100자평 작성자는 책에 별점 한 개를 줬다. 그 사람은 아주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과학적 사실의 좋은 점은 당신이 동의하든 안 하든 사실이라는 점이다.’ 진화심리학 분야에서 나오는 연구 결과들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학자들이 진화심리학 분야의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입씨름하는 것은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일이다. 진화심리학 연구 결과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목적은 다양하다. 한 가지 콕 집어 말하자면 가설을 지지할만한 증거가 불충분하기 위해서 비판한다. 연구 결과는 어떤 현상을 탐구하면서 확인하게 된 관찰 결과일 뿐이다. 가설을 재검증하는 절차를 통해 최종적인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함부로 ‘사실’로 결론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화심리학자들도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신중해진다.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를 펴낸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책이 관찰 결과를 기술(記述) · 설명하고 있을 뿐이며 자신들은 관찰 결과로부터 어떤 결과나 결론도 끌어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학에는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1]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과학자이든 페미니스트이든 신뢰할만한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나오면, 진화심리학의 연구 결과도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가설을 동의하지 못해 거부할 수도 있다. 진화심리학이 가장 많이 받는 비판 거리 중 하나가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점이다. 진화심리학을 비판할 때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옹호한다고 해서 그들을 불순한 동기로 이론을 정당화하는 ‘나쁜 놈’으로 몰아세우지 말 것.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사회생물학을 정면으로 비판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의 공통점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 깊숙이 자리하는 인간 본성의 실체를 밝히는 분야이다. 굴드는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면서도 그를 차별을 유도하는 악의 세력으로 험담하지 않았다. 굴드가 사회생물학의 등장을 우려한 진짜 이유는 사회생물학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상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보수성이 강한 학자나 정치인이 진화심리학 가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기성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진화심리학 가설이 주는 불편함을 못 느낀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남자가 풍만한 가슴의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흡족할 만한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첫 번째 가설. 풍만하게 느껴지는 무거운 가슴은 작은 가슴에 비해 나이가 들수록 ‘처진 가슴’으로 변하기 쉽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눈으로 보고, 여자의 나이를 판별할 수 있다. 젊은 여성은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자는 가슴이 풍만한 젊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프랭크 말로위의 주장,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 참고)

 

 

 

 

 

 

 

 

 

 

 

 

 

 

 

 

* 플로렌스 윌리엄스 《가슴 이야기》 (Mid, 2014)

 

 

두 번째 가설. 남자는 젊고, 건강하고, 임신 가능성이 높은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한다. 그래서 남자는 가슴 형태를 건강한 배우자를 찾기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여성의 가슴은 남성에게 잠재적인 배우자임을 알려주는 정보를 제공하는 신호이다. 첫 번째 가설과 일맥상통하다. (바너비 딕슨과 앨런 딕슨의 주장, 《가슴 이야기》 참고)

 

 

 

 

 

 

 

 

 

 

 

 

 

 

 

 

* 데즈먼드 모리스 《털없는 원숭이》 (문예춘추사, 2011)

* 데즈먼드 모리스 《벌거벗은 여자》 (휴먼앤북스, 2004)

 

 

 

마지막 가설. 앞서 언급한 두 개의 가설에 비해 오래된 것이다. 올해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의 《털없는 원숭이》 출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차원으로 (또 한 번) 언급해본다. 여자의 가슴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성적 신호이다. 자신의 주장이 비판받게 되자 모리스는 2004년에 출간한 《벌거벗은 여자》에 여자의 가슴은 양육(모유 수유)과 성(性), 두 가지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 나탈리 앤지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

 

 

남자가 여성의 가슴을 선호하는 것에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이를 진화의 관점으로 남자들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젊은 여성이 큰 가슴을 가진다고 주장했고, 모리스는 가장 완벽한 반구 모양의 가슴이 완성되는 여성의 나이를 25세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통으로 여성이 점점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가슴 형태가 처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이 놓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임신기(姙娠期)와 수유 기간이 되면 원래 가슴 형태와 상관없이 무조건 가슴이 커진다. 임신한 작은 가슴의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작은 가슴의 여성이 남성의 배우자 선택에 불리하다고 볼 수 없다. 가슴 크기로 나이를 판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25세 여성 모두가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의 가설대로 여성의 가슴이 남자들을 위한 신체적 신호가 되어야 한다면, 가슴의 크기가 거의 같아야 한다. 나탈리 앤지어(Natalie Angier)는 처진 가슴을 나이 든 여성과 연관 짓는 주장에 반대한다. 젊은 나이에 가슴이 처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가설 모두 여성 가슴의 필요성을 오로지 남성의 기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가슴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진화한 신체 부위이다. 물론, 수유 목적으로 가슴이 발달했다는 주장 또한 가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세 가지 가설을 마치 설득력 있는 사실인 것처럼 믿는 경우이다. 이를 비판하면서 양육 기능으로서의 가슴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남성들은 그런 비판 입장을 페미니스트의 분노로 생각한다. 이렇다 보니 가설을 검증할 기회가 축소되고,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못하는 깊숙한 도그마(Dogma)의 함정에 빠져버린다.

 

이 글의 결론을 내리자면, 여성이 가슴이 생긴 이유와 남성이 풍만한 가슴을 선호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줄 이론은 없다. 앞에서 설명한 이론들은 ‘과학적 지식에 입각한 추측’, 즉 과학적 가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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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페미니즘 서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들 혹은 별점 테러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7-03-22 09:59 
    마티 루티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동녘사이언스, 2017)에 별점 테러 혹은 ‘100자평’ 테러를 저지르는 분들 논조를 보면 아주 단정적이고, 독단적이고, 훈계조이고, 혹은 꽤 전투적입니다. 아마도 제가 추측하기에 이들 과격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덕하 씨가 운영하는 《진화 심리학 카페》(http://cafe.naver.com/evopsy2014)에서 온 분들 같습니다. 이덕하 씨의 페미니즘에 대한 전투적이고 과격한 견해에 영향을
 
 
2017-03-21 23:06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2 11:36   좋아요 0 | URL
‘어엽다’가 ‘어렵다+귀엽다’가 합친 말입니까? ㅎㅎㅎ

마립간 2017-03-22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다시 꼼꼼히 읽고 숙고해야겠지만, 진화론에 대한 비판( 예를 들면 창조론)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다른지 얼른 납득이되지 않는군요.

cyrus 2017-03-22 11:39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은 제 글을 보고 특별한 생각을 하셨군요. 제가 이제 막 진화론을 공부하기 시작한 터라 계속 관련서적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7-03-22 19:10   좋아요 0 | URL
날카로운 지적이네요^^

마립간 2017-03-2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개의 문장을 제 페이퍼에 인용합니다.

cyrus 2017-03-22 11:40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다윈 이후 사이언스 클래식 14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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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인 광인은 적어도 재미있기라도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인간은 오직 가엾을 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1]

 

 

 

진화론인가, 창조론인가. 이 해묵은 주제는 잊을만하면 등장한다. 창조론은 성경의 기록에 근거해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고, 진화론은 처음 하등동물에서 시작해 점점 인간의 형상으로 됐다는 것이다. 19세기 전반만 해도 창조론이 대세였다. 창조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영국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는 동물의 눈을 시계에 비유하고 시계의 설계자가 있는 것처럼 눈의 설계자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설계자는 하느님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고도의 능력을 갖춘 어떤 존재, 즉 신의 설계 때문에 탄생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창조론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진화론을 내놓으면서 창조론은 흔들리게 된다. 이후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창조론자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인류의 기원을 화석이나 DNA 분석을 통해 추적하는 과학적 방법에 종교적 세계관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진화론자와 창조론자 간 대결에 주저 없이 나선 학자이다. 그는 창조론이 과학적 · 논리적 허구를 교묘히 감춘 주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2002년 굴드가 타계한 이후에도 창조론자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미국 일부 지역에선 성서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과학적 창조론자라고 부르는 그룹이 등장하면서 진화론에 대한 공세를 펼친다.

 

진화론과 창조론자들의 전투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국정 교과서 논란이 연일 화제가 되다 보니 일부 기독교단체가 생물 교과서에서 진화론 부분을 개정 · 삭제해 달라는 요구한 사실이 덜 알려졌다. 게다가 한 번도 아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요구해왔다. 굴드는 1940년대에 진화 이론의 핵심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봤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한참 멀었다. 생물 교과서가 진화 이론의 핵심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으면, 학생들이 진화 이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줄어든다. 이 틈을 타 ‘한국창조과학회’ 소속 종교인 및 학자들은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수록하도록 교과서 개정 운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의 양상은 여전히 창조론이 득세하던 1920~1930년대 상황과 유사하다.

 

역사뿐만 아니라 기초과학을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성공적인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의 낡은 사고를 깨치고 나아가는 용기 있는 결단과 도전이 필요하다. 굴드가 필력과 토론으로 창조론자들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낡은 사고방식에 얽매인 ‘희망적인 사고’를 경계했다. 일부 진화론자는 진화와 진보를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다. 그래서 인류의 진화가 희망적인 진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다. 하지만 굴드는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는 진화론자들을 비판한다. 진화는 인류를 지구상의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준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다윈도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발전을 설명하려는 열망이 강한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해석했다. 이게 바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내세운 사회진화론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은 ‘사회진화론’에 가깝다. 유럽 진보주의자들은 이 담론을 통해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로 변신했다. 《다윈 이후》는 온갖 오해와 핍박으로 곤욕을 치른 진화론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진화론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넘어 진화론의 세계관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도 일독할 가치가 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학문이다. 또 여러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수십 년 만에 혹은 수백 년 만에 새로운 이론이 탄생한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을 한 줄로 딱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진화론을 설명하더라도 라마르크(Lamarck)의 용불용설, 라이엘(Lyell)의 지질학 이론, 그리고 멘델(Mendel)의 유전 법칙 등을 언급해야 제대로 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결국 대중을 위한 과학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복잡한 내용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다윈 이후》는 이미 폐기되어버린 사소한 이론에서 출발해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해석은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 이타주의에 대한 다윈주의적 해석이 논란에 휩싸이는가 하면 진화를 ‘본성’으로 설명하려는 진화심리학이 주목받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진화론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이 빚어진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진화론을 허술한 이론으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진화론자들은 스스로 과학적인 검증을 주도하고 있다. 그만큼 진화론은 건강한 이론이다. 무조건적 믿음을 고수하는 창조론자들과 차원이 다르다. 이래도 진화론에 거부감이 느껴지는가? 굴드 사후 15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 서평 제목의 원문 :

“다윈 이후 100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1959년 미국의 저명한 유전학자 허먼 조지프 멀러가 볼멘소리를 했다. (《다윈 이후》 7쪽)

 

[1] 《다윈 이후》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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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1 12:26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1 17:50   좋아요 0 | URL
과학과 대립하는 종교를 비난하기보다는 종교가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비합리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3-2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 다윈의 <종의기원> 출판사 추천좀 부탁드립니다.^^

cyrus 2017-03-21 17:58   좋아요 1 | URL
예전에 <종의 기원>을 해설한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이라는 책을 쓴 박성관 씨는 시중에 나와 있는 <종의 기원> 번역본 중에 제대로 된 번역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펴낸 시기가 2010년이고, 그 이후로 한길사의 <종의 기원>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한길사 판본이 믿고 읽을 만한 책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종의 기원> 완역본 읽기에 도전하기보다는 <종의 기원>을 충실하게 해석한 관련 도서 몇 권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한길사 판본이 나오기 전에 ‘동서문화사’ 판본을 읽어봤어요. 솔직히 재미없었습니다. 한길사 판본으로 다시 도전해봤는데, 너무 지루해서 읽다가 포기했어요. 믿을만한 <종의 기원> 해설서가 몇 권 있습니다.

<How to read 다윈>, <종의 기원을 읽다>, <종의 기원 이펙트> 그리고 제가 앞서 언급한 박성관 씨의 책입니다. 정말 <종의 기원> 독서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면, 해설서 먼저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2017-03-21 13:34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1 17:59   좋아요 1 | URL
제가 무교라서 머릿속에 깊이 박힌 종교적 신념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학자들도 검증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창조론을 옹호할 정도면 종교 신념의 위력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Agalma 2017-03-21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법칙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를 갈릴레오가 깨기까지 2천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와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도 확률을 제기한 양자역학이 나오기까지 300년 동안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결정론적 세계관이 완벽히 깨졌느냐 아니잖아요. 과학자조차도 환원적이고 결정론적 세계관 믿는 사람들 많잖아요^^;
인류 역사에게 가장 오래된 이데올로기인 ‘신‘이 단 100년으로 깨질 수 있겠습니까ㅎ; 진화론은 역사를 통해 볼 때는 아직 어린 수준입니다. 비하가 아니라 그 역사적 기간으로 볼 때 사람들의 인지도와 신뢰도에서 아직까지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 안 믿겠다는 데 어쩔ㅎ;;
그렇다면 철저한 교육? 계몽?
<신의 입자>보면 리언 레더먼이 하버드를 졸업하는 학생들 강연에서 지구의 겨울과 여름의 차이가 왜 생기는지 물어보죠. 대부분 ˝태양이 가까워서?˝ 등으로 태양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말한 비율은 15% 남짓이었죠. 리언 레더먼은 무려 하버드가! 하면서 개탄ㅎㅎ 제가 이 일화를 가져온 건 교육, 관심, 노력 모든 게 총체적으로 맞물려가야 어떤 변화든 가능하다는 걸 말씀드리는 것.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죠.
유발 하라리가 그러더군요. 다윈의 진화론의 가장 뛰어난 점은 그 기원으로 신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 동감입니다.

cyrus 2017-03-21 18:06   좋아요 2 | URL
Agalma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죽고 나서도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ㅎ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시기가 1856년이니까 1940년대에 진화론이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어떻게 보면 행운일 수도 있겠어요.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처럼 종교 도그마에 대항할 수 있는 학자들이 많았었죠. 이들 덕분에 어느 정도 창조론의 위세가 약화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굴드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학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킨스도 이제 고령에 접어들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신’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점점 세계가 불안해질수록 종교에 의지하려는 심리가 생기니까요.

Agalma 2017-03-22 01:44   좋아요 2 | URL
그즈음 다윈이 진화론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진화론을 가지고 나왔을 겁니다. 즉 진화론은 반드시 나오고야 말 이론이었다는 거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힘이 커지면서 낙후된 체체주의(규율, 교리, 원죄론 기타 등등)로 변질된 종교는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의 성질상 멸절하진 않을 거고 이것도 하나의 수순인 거죠.
약화됐다 해도 신과 종교가 왜 지금까지 굳건하겠습니까. 인간은 진화론이라는 ‘사실‘보다 ‘의지‘할 게 더 필요한 나약한 존재입니다. 니체가 초인 얘길 멋부리려고 했겠습니까. 인간의 그런 점을 간파한 거죠. 합리론이니 경험론이니 인간이 왜 그런 지적 체계를 구축해겠습니까. 팩트 팩트 따지는 지금 세태 보세요. ‘사실‘ 또한 우리의 의지처이며, 우리의 속성입니다. 종교도 여러 ‘사실‘을 끌어와 ‘신‘으로 설명하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실을 들이댄들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신을 믿는 사람은 있을 겁니다. 종교의 ‘자유‘도 인권이잖아요. 암요.
문장이 좀 격앙되어 있는데 cyrus님께 따지는 건 아님^^; 제가 보기엔 그렇다라는 제 의견임.
 

 

 

매년 한 번쯤은 서평(Book review)의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이 문제는 하나의 답변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 또 서평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당연히 ‘정답’이 나올 수 없고, 내 의견이 옳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 이원석 《서평 쓰는 법》 (유유, 2016)

 

 

 

그래도 맞든 틀리든 독자는 책에 대한 해석을 명확히 밝힐 줄 알아야 한다. 《서평 쓰는 법》의 저자 이원석에 따르면 서평은 ‘해석’이다. 독자의 해석은 다른 독자에게 다시 읽기(review)를 권한다. 이는 독자에게 말 거는 행위에 가깝다. ‘저는 이 책을 좀 다른 관점으로 읽어봤어요. 제가 해석한 대로 읽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서평은 독자와 저자 사이뿐만 아니라 독자와 다른 독자 사이를 대화할 수 있게 한다. 독자는 책의 내용에 대해 자기 생각을 튼실하게 덧붙인다. 이것이 바로 ‘해석’을 기본 뼈대로 완성된 한 편의 서평이다. 그러므로 서평은 독자 생각과 작가의 생각을 비교 · 판단하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정리된 대화록이다. 독자들이 독서의 주체로서 책의 내용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반복할 때 적극적인 독자가 됨과 동시에 책에 대한 흥미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 독자의 경험과 관점에 따라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르다. 이것은 책을 통해 얻은 자신의 해석과 새로운 경험을 서평 쓰기 및 읽기를 통해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사고로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서평의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서평과 독후감을 구별하는 문제이다. 앞서 서평은 ‘저자와 다른 독자들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는 해석’이라고 했다. 독후감은 말 그대로 책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이다. 서평이 ‘저자와 독자 간의 대화를 정리한 글’이라면, 독후감은 ‘일기’와 유사하다. 독후감은 책과 관련된 자잘한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에 따라 기록하는 글이므로 논리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서평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그래서 독후감은 서평보다 쓰기 편하다. 책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다른 독자들에게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역할은 서평가가 해도 되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독자 중에는 서평과 독후감을 구별하는 일을 전문가(또는 서평가)의 역할로 생각한다. 또 자신의 글이 서평인지 독후감인지 스스로 구별하는 일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대부분 독자는 겸손하다. 자신의 글이 서평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데도 전문성과 거리가 먼 독후감으로 인식한다. 나는 서평과 독후감이 전문성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구별되는 것을 반대한다. 독자도 서평을 쓸 수 있다. 서평은 서평가 또는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애초에 서평이 전문가들이 쓰는 글이었다면, 《서평 쓰는 법》과 같은 책이 나올 이유가 없다.

 

서평과 독후감의 관계는 ‘가깝지만 먼 친척’에 가깝다. 그러니까 서평과 독후감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으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다. 궁극적으로 독서는 능동적인 글쓰기 활동으로 연결된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있으면 서평과 독후감을 쓸 수 있다. 결국, 서평과 독후감은 공통으로 자기 생각을 정립하는 글쓰기다. 서평은 독후감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글이 아니다. 독후감이 퇴고의 과정을 거친다면 서평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독후감은 서평의 원형, 즉 프로토타입(Prototype)이다. 혹시 내 비유에 대해 오해가 없길 바란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독후감이 퇴고의 진화를 거쳐 서평이라는 ‘완성형’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진화를 완벽한 최종 단계로 거듭 발전하기 위한 진보의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진화를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를 증명해주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으로 이해했다. 서평도 마찬가지다. 서평은 ‘하나의 해석’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완성형이 아니다. 한 권의 책에 딱 어울리는 완벽한 서평은 절대로 없다. 그 ‘완벽한 서평’이 잘 썼다고 말할 수 없다. 한 권의 책에는 여러 갈래의 다양한 해석으로 이루어진 서평이 많아야 한다. 서평 작성자는 다양한 해석을 만나면서 기존의 해석을 수정할 수 있다.

 

서평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서평에 드러나는 해석들이 거의 같다면, 너무 재미없다. 독자와 독자 간의 대화를 시도할 수 없다. 관계 지향적인 서평의 특성상 또 다른 독자의 해석, 즉 다른 서평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자신의 서평이 전체 공개되어 다른 독자들을 설득하고 싶으면, 당연히 다른 독자들의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독자의 비판적 시선은 서평 작성자가 보지 못한 또 다른 관점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러면 서평 작성자는 기존 해석의 문제점을 파악한다. 기존 해석이 올바르지 않다면 서평을 통해 수정하면 된다. 아니면 과감하게 전면 폐기할 수도 있다. 작가 장정일이 독서를 통해 공부한 이유가 곧 서평을 써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만 하고 자기 입장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사전 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또 공부는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입장만 가지게 되면 남과 소통할 수 없는 고집불통이나 도그마에 빠지게 될 겁니다. 공부해서 자기 입장을 만들고, 또 자기 입장을 깨기 위해 또 공부하고, 이런 것이 공부이고 그게 책 읽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서평 쓰는 법》 102쪽)

 

 

한 번 쓴 서평을 쓰고, 또 고치고 하는 일이 서평 작성자의 도리다. 이러한 자기 수양의 과정이 이루어지려면,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책을 여러 번 읽으면 그 책에 숨겨진 진가가 천천히 드러난다. 처음에 별로였던 책이 나중에 읽고 나서야 좋아 보이게 되고, 반대로 예전에 좋게 봤던 책이 다시 읽었을 때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독자의 해석이 이해되지 않거나 공감하기 어렵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자신의 서평에 향한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 그 독자는 고집불통이다.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지 않는다. 자신이 서평에서 시도한 설득이 실패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평 쓰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서평 읽는 일’이다. 여기 알라딘 서재에 ‘전제 공개’가 된 서평과 독후감은 누군가가 ‘읽기 위해’ 존재하는 글이다. 악의적인 비난이 아니라면, 해석을 비판할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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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욱 2017-03-2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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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1 11:54   좋아요 0 | URL
북플에서는 하트 표시가 뜨는데, 알라딘 서재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처음에 조승욱님 댓글이 제 메일에 왔을 때, 하트가 ‘?’로 되어 있었어요. 저는 처음에 조승욱님 댓글이 제 글을 조롱하는 의미인 줄 알았어요. 아무튼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stella.K 2017-03-20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평이 그 책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라면 일반 독자가 서평을 쓰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쓰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독후감이 아닐까?
그런데도 독후감은 좀 옛말 같고, 서평이나 리뷰는 뭔가 있어 보이는 것 같고.
그런 거 아니겠어?후후.
작년인가 제 작년에 이 비슷한 글 쓰지 않았나?

난 요즘 하루키를 다시 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키는 섹스 빼면 뭐 할 말 있나?
낫게 보았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물론 그의 작품 모두가 다 좋은 건 아니고
굵직하게 잘 알려진 책들은 읽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cyrus 2017-03-21 11:56   좋아요 0 | URL
제가 예전에 이와 비슷한 주제의 글을 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원석 씨의 주장에 공감했어요. 이 책은 진작 나왔어야 했습니다. ^^;;

박람강기 2017-03-20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록 하찮은 감상문이 될지라도 되도록이면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기록해 두려고 노력하는 저에게 힘이 되는 글이네요..^^ 아무 기록도 안 남기는 것 보다는 약간의 감상문이라도 남겨야 겠습니다..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3-21 11:57   좋아요 0 | URL
기록하는 것 자체가 제일 중요합니다. 독후감과 서평 구분은 ‘아,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사람들마다 구분하는 기준은 다르니까요. ^^

2017-03-20 21:22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1 11:59   좋아요 1 | URL
네, 그런 거 보면 기운이 확 빠집니다. 특히 책 속 사진만 잔뜩 올려놓고, 알라딘 책 소개 인용하는 것도 싫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