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구판 표지 찾기

 

 

 

 

 

아직 아옌데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조선인님이 묘사한 책 표지가 어떤 건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옛날에 나온 책 표지 디자인은 요즘 나오는 책에 비하면 다소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것도 있습니다. 책방에 가면 그런 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중에 나오는 책의 구판이라도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사는 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온라인 중고서점 위주로 조선인이 찾으려는 『영혼의 집』을 찾아봤습니다. 북아일랜드와 북코아 그리고 알라딘 중고샵(온라인)을 참고했습니다. 검색해본 결과, 총 다섯 권이 나왔습니다. (민음사판 제외) 이 다섯 권 이외에도 아옌데의 소설이 다른 출판사 또는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집』 설영환 역 / 삼진기획 (1985년)
『영혼의 집』 최승자 역 / 둥지 (1991년)
『영혼의 집』 박영조 역 / 창현문화사 (1993년)
『영혼의 집』 이경욱 역 / 상원 (1993년)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김소영 역 / 지리산 (1993년)

 

 

 

1. 『마음의 집』 설영환 역 / 삼진기획 (1985년)

 

 

 

 

 

 

 

 

2. 『영혼의 집』 최승자 역 / 둥지 (1991년)

 

 

 

 

 

 

 

 

3. 『영혼의 집』 박영조 역 / 창현문화사 (1993년)

 

 

 

 

 

 

 

 

 

 

 

 

4.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김소영 역 / 지리산 (1993년)

 

 

 

 

 

일단 검색하면 책 제목은 나옵니다. 출판사와 역자 이름까지 확인할 수 있어요. 이제부터 여기서 조금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표지를 확인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책 표지를 공개하지 않은 판매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지 하나 찾는 데 검색하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온라인 중고샵이나 책방 사이트의 단점은 바로 이겁니다. 구매자가 원하는 책 표지를 직접 눈으로 100%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죠. 심지어 구매자가 올린 책 표지 사진도 100% 신뢰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진을 믿고 책을 사다가는 전혀 다른 표지의 책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애서가 여러분들, 서점이나 책방을 자주 애용해주세요!)

 

결국, 이 다섯 권의 책 중에 딱 한 권만 빼도 표지를 확인했습니다. 유일하게 표지를 확인하지 못한 책이 1993년에 상원이라는 이름의 출판사에서 나온 『영혼의 집』입니다. 혹시 조선인님이 찾고 싶은 미지의 『영혼의 집』이 상원에서 나온 책이 아닐까 추측을 해봅니다.

 

비록 비오리아 고서당의 시오리카 씨처럼 책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지만, 나중에 책방에 가게 되면 조선인님이 언급하신 『영혼의 집』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만약에 찾게 되면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조선인 2014-12-23 11:08   댓글달기 | URL
와, 감사합니다. 알라딘의 시오리카씨. 그 책 표지를 못 찾아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

2014-12-23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12-23 12:58   댓글달기 | URL
햐~!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언제 영화화된 적이 있었나 보군.
왜 난 못 봤지?
비오리아 고서당이 그런 내용이었나?ㅎㅎ
한번 읽어보고 싶군.^^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브누아트 그루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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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프랑스혁명의 와중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올랭프 드 구주. 여성인권선언문을 작성한 그녀는 ‘미친 사람’으로 비난받았다. 시민혁명과 공화정의 나라 프랑스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얻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지 155년 만이다.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은 단지 ‘남성권’의 선언이었고, 박애의 이념은 자매를 제외한 형제애였던가. 혁명에 큰 영향을 미친 루소조차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정치는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에겐 문턱이 높았다. 민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성참정권의 역사는 겨우 100년을 헤아린다. 스위스 여성들은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1971년까지 기다렸다. 여성의 한 표는 거저 쥐어지지 않았다. ‘피의 투쟁’을 거쳤다. 어쩌면 인종과 신분의 벽보다 더 험하고 거친 차별의 강을 건너야 했다.

 

무리를 이룬 펭귄 가운데 두려워하지 않고 제일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첫 번째 펭귄처럼 구주는 인권에서 제외된 여성 중에 제일 먼저 차별의 강을 건너 넘으려고 앞장섰다. 왕정과 공화정의 극단적 대립 상황에서 구주는 자신을 포함한 여성들도 마땅히 혁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녀의 희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구주의 눈에는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은 여자들을 쏙 뺀 반쪽짜리 내용에 불과했다. 그녀는 남자들의 세상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고 있는 여성들의 생각을 깨우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과 여성 시민의 인권 선언’은 성적 평등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위대한 팸플릿이었다. 여기에 포함되는 ‘여성’은 국민이라 할 수 있는 어머니, 딸, 누이들이었다. 여성의 이혼권을 옹호하고, 딸도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제안했다. 또 미혼모들이 경제적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그녀의 제안과 주장은 당시 시대를 앞서가는 전위적인 내용이다. 그녀의 인권선언에 나오는 제안은 1975년에 법으로 제정되었다. 재미있게도 1970년대 프랑스는 여성 해방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1971년에 프랑스 여성 지식인 343명은 낙태를 했음을 선언하는 일명 ‘343선언’에 참여했다. 이때만 해도 낙태만 해도 징역형을 받았다. 미혼모도, 성폭행으로 임신한 여성들도 낙태하면 죗값을 치러야 했다. 343선언에 동참했던 여성 지식인 중에 보부아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등의 익숙한 이름도 있다. 결국, 여성의 낙태권 주장은 법에 수용되어 1975년부터 시행된다. 여성 해방 운동의 거센 물결 덕분에 구주의 제안은 180여 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에 의한 먼지를 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 해방 운동론자들 중 그 누구도 구주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들은 잊힌 조상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보부아르마저도. 소외된 여성의 권익을 대중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낸 ‘페미니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보부아르가 고스란히 받았다. 20세기의 역사는 또 한 번 구주의 이름을 외면했다.

 

구주는 보부아르보다 가장 먼저 페미니즘의 초석을 다지는 데 이바지했다. 보부아르가 쓴 『제2의 성』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대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보부아르의 페미니즘에서 인식하는 여성은 ‘백인 중산층 여성’에 한정된다. 이러한 서구 중심적 페미니즘은 인종이나 계급의 교차점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 이르지 못한다. 반면 구주는 여성의 문제를 좀 더 포괄적인 접근으로 바라본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흑인 노예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노인이나 노동자의 자녀를 위한 보호시설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다른 사회 운동과 더불어 주장의 폭을 넓혀가는 구주의 페미니즘은 사회적 계급과 인종에 기반을 둔 한계를 극복하려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조류와 유사하다.

 

프로이트의 비유를 빌리자면 구주는 다들 깊이 잠든 이른 시간에 깨어난 여성이다. 남성들이 만든 차별의 울타리 속에 갇힌 여성들은 오랫동안 깊은 수면에 빠져야만 했다. 구주는 여성들을 몽매하게 만드는 잠에서 깨어나는데 성공했지만, 울타리 밖에 남성들이 득실한 세상에 홀로 발을 내딛는 과정은 순탄치가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나 16살에 결혼을 하지만, 아들 하나 낳고 과부가 된다. 그 후로 파리 사교계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세간의 관심과 남성들의 구애를 한몸에 받게 되지만, 구주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과부로 산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혼하는 순간, 또다시 ‘부인’과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남성들의 사회적 울타리 안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구주는 사방이 꽉 막힌 그곳에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 차별의 울타리를 부수어 잠든 여성들을 깨우는 일이 사회적 평등을 위한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 여성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문맹이 많았다. 구주도 글을 쓸 수 없었지만, 문맹은 그녀의 뜨거운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자기 생각을 비서에게 받아 적게 했다. 

 

구주는 자신의 과감한 생각이 사회에 실현하기 위해서 단두대에 오를 위험을 감수했다. 불평등한 구조와 억압을 깨트리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하고 필요한 것이 여성의 삶 속으로 정치를 가져오고 정치 속으로 여성이 들어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구주는 정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불평등한 삶을 바꾸고 싶었다. 자유, 평등, 우애를 주장한 남성들은 그녀의 떳떳한 목소리가 거북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이어서 구주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구주의 정의감은 구시대적인 남성들에 의해 영원히 눈을 감았다. 구주의 죽음은 곧 남성들의 승리였다. 차별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여성들은 여성참정권을 가지는 데 무려 100년 동안 잠들어야만 했다.

 

남성들의 역사(History)에 의해 잠든 여성 운동가 올랭프 드 구주. 최근에 그녀의 존재가 재평가받게 되면서 드디어 구주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전반적인 사상을 알 수 있는 책이 이제야 나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우리나라 페미니즘도 구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동참하고, 그녀의 실천적 페미니즘을 본받아야 한다. 여성의 권리 회복을 주장한답시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해 보이는 옹졸한 페미니스트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 이제 잠에서 깬 구주다. 적어도 구주의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

 

 

 

※ 글 마지막 세 줄의 문장은 구주의 여성 인권선언서 일부 문장을 차용했음.
원문 :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 달라. (64쪽)

 

 


 



 
 
ANDANTE 2014-12-22 23:27   댓글달기 | URL
글 제목이 정말 기발하네요 ㅋ

바람돌이 2014-12-22 23:50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담아갑니다. 저도 모르던 인물이네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

감은빛 2014-12-23 02:36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인물을 알게 되어 기쁘네요.
보관함에 담고 갑니다.
 
칼데콧 컬렉션
랜돌프 칼데콧 지음, 이종욱 옮김 / 아일랜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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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의 쓸데없는 궁금증 하나. 부모는 자녀를 위한 그림책을 어떤 기준으로 고를까? 그림만으로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러운 책? 아니면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책? 그림도 좋지만, 교훈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감동으로 다가오는 책을 고를 수도 있다. 요즘 아빠와 엄마도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외국 작가의 그림책이 많아졌다. 내가 어렸을 때 외국 작가의 그림책을 읽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고작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외국 그림책이라면 디즈니 만화뿐이다. 미키 마우스, 아기사슴 밤비, 곰돌이 푸, 신데렐라 등 디즈니가 만든 고전만화의 일부 장면을 그림책으로 옮겨 만든 것이다.

 

그림책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이유가 또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책의 재미에 푹 빠졌다. 그러자 글자 대신 그림만 있는 책만 읽었다. 어머니는 한글을 완전히 뗀 아들이 그림책만 읽는 것이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 싶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글자가 많은 아동 문고나 위인전을 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사준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처음에 그림이 없는 책을 읽는 것이 힘들었다. 그림만 보는 독서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어머니는 반강제적으로 글자로 된 책을 읽게 했다. 어머니가 강요하는 독서 때문에 잠시 독서의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림에 집착하는 습관을 잊지 못해 엉뚱하게 오락실의 게임에 빠졌다. 거의 밤늦게까지 오락실에 친구들과 게임을 했다. 거대한 화면에 가득 채운 역동적인 그림과 눈을 자극하는 색채는 책의 존재를 완전히 잊게 해줄 정도로 나를 유혹했다.

 

요즘 아이들의 눈은 책보다 기계 속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많아졌다. 내가 어렸을 때 독서를 방해했던 것이 TV, 오락, 비디오뿐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성능이 좋은 기기들이 하나씩 우리 일상에 파고들기 시작했는데 가장 친숙한 것이 스마트폰이다. TV를 많이 보는 아이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스마트폰만 온종일 보는 아이다. 고사리 같은 조그만 손보다 큰 스마트폰을 꼭 쥐면서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카톡을 한다. 아이들은 집에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간다고 아이들을 집에 혼자 놔두고 갈 수 있다. 예전 아이들이라면 집에 혼자 있다는 공포감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혼자 집에서 놀 수 있다. 오히려 집에 어머니가 없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한편으로 그림책을 읽어야 할 아이들이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수록 순수한 동심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그림책 몇 권만 읽어도 전혀 무섭지 않고,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림책으로 집에서 혼자 노는 재미를 알고 있을라나.

 

만약에 내가 부모라면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자식이 책을 좋아하도록 어떻게 가르칠까? 정답이 없겠지만, 우선 그림책을 읽도록 권할 것이다.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걸로. 그리고 아이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더 좋을 것 같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의 행동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부모처럼 똑같이 따라 한다.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아이 앞에서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제일 좋은 방법이 부모와 자식이 한 권의 책을 같이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부모와 자식 간의 친밀감이 더욱 향상되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독서의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내가 미래의 자식과 함께 읽게 될 그림책을 장만하게 된다면 『칼데콧 컬렉션』을 꼭 살 것이다. 랜돌프 칼데콧은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활동한 그림책 삽화가이다. 칼데콧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한해 동안 뛰어난 그림책 작가에게 ‘칼데콧 상’을 수여하고 있다. 칼데콧의 그림책은 ‘글 없는 그림책’의 모범이다. 그림 한 컷에 달랑 글자 한 두 줄만 있거나 아예 글자가 없는 것도 있다. 글자가 없는 책이라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칼데콧은 오직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칼데콧의 그림은 누구나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려고 그림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묘사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자칫 단순하게 느껴지는 선 하나만으로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케치를 많이 했던 경험 덕분에 선으로 그려진 그림을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었다. 칼데콧 상을 받았고, ‘그림책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모리스 센닥은 칼데콧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책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칼데콧의 그림책이 “글이 없는 곳에서는 그림이 말하고, 그림이 없는 곳에서는 글이 말한다. 마치 튀어 오르는 공과 같다”고 평가했다.

 

 

 

 

 

 

 

칼데콧의 그림책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더 읽고 싶어진다. 그림 한 장 한 장 읽을수록 다음 장면에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무척 궁금하게 만든다. 예스러운 그림 속에 세련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칼데콧이 묘사한 동물과 인물의 표정은 생생하다. 그림책을 펼치는 순간, 그 속에 있는 동물과 인물은 독자 앞에서 살아서 숨을 쉰다. 한 편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 위협하는 개가 무서워서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운 채 겁에 질린 고양이의 표정을 보라. 이런 재미있는 묘사는 그림책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눈웃음 짓는 강아지의 표정만 봐도 강아지의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칼데콧은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드는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아이가 읽을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의 눈에 최대한 맞추도록 했다. 글자에 익숙하지 않아 그림이 편한 아이부터 글자를 전혀 모르는 아이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영국에 자란 아이들의 귀에 익숙한 전래동요, 구전민요, 동시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짧고 반복되는 문장이 많은 편이다. 단순한 이야기와 단순한 그림의 만남. 이런 단순한 조합은 그림책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빽빽한 활자로 이루어진 책만 읽어서 색다른 독서를 원하는 독자라면 칼데콧의 그림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이 무겁고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애서가라면 이런 책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이다. 심심할 때 가끔 읽어 볼 수 있다. 아니면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같이 읽어도 좋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에 익숙한 아이들의 눈에는 이런 그림책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영국 전래동요를 낯설게 느껴진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지만, 너무나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이 요즘 아이들의 취향에 맞을지 의문이다. 유명한 외국 그림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것만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폴 아잘은 “어린 시절에 처음 읽은 책과 처음 본 그림에 의해서 자기 나라의 지난 역사와 전통의 훌륭함을 알고 강한 조국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책과 그림의 추억은 가슴 깊은 곳에 차고 들어 일생 동안 간직하게 된다”고 말했다. 외국 그림책이 넘쳐나고, 아이들이 접하는 그림책이 외국 작품이 훨씬 많은 현실에서 한 번쯤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아이와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른도 그림책을 읽어야 한다. 아직도 다 큰 어른이 그림책을 읽는 모습이 수준 낮게 보이는가. 가끔 어른도 그림책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속에 소중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부모와 아이가 그림책을 같이 읽으면 그 추억이 공유된다.    

 

 

 



 
 
야나 2014-12-21 07:42   댓글달기 | URL
그대는 분명 멋진 아빠가 될 거야~
우리집에는 칼데콧 그림책 딱 한권인데 찔린다;; 근데 지민이가 많이 좋아해. 요 시리즈 장바구니에 쏘옥 담아놔야지. :)

cyrus 2014-12-21 10:29   URL
누나도 이 그림책을 만족스러워 할거예요. ^^

바람돌이 2014-12-21 21:56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모든 종류의 그림책들을 다같이 읽었는데 어른이 좋아하는 그림책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 딱히 일치하진 않더군요. 그리고 딸랑 둘뿐인 녀석들 역시 그림책 취향이 전혀 다르더이다. ^^

cyrus 2014-12-22 20:46   URL
역시 경험자의 말씀은 유익합니다. 아이의 취향이 부모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는데도 무조건 부모 취향이 따른 책을 아이에게 권한다면, 아이들이 책을 멀리할 것 같습니다. ^^


happybook7 2014-12-21 22:51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며 대단한 내공이 느껴지신다 했더니 역시그랬네요 ^^ 저는 동화책을 고를때 그림의 조화로움 과 색채를 주로 보는거 같아요. 조금 날카롭거나 어두운 색깔보다는 밝고 화사한 그림책을 선호하는데 아이들에게 읽어줄때도 시각적 효과가 있고 집중력이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덕분에 이런 동화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들과 복사해서 색칠놀이도 하고 이야기도 만들고 해도 좋을거 같네요^^ 더불어 야나님 말씀처럼 좋은 부모님이 되실거 같다는데 공감합니다^^

cyrus 2014-12-22 20:50   URL
그저 책을 좋아하지 알고 보면 헛똑똑인데요. 내공이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늘 독서를 통해서 많이 생각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서재 이웃분들의 건전한 비판과 의견도 귀 기울이려고 합니다. 해피북님 말씀도 잘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저는 아직 미혼이라서 그림책을 고르는 부모의 심정이 무척 궁금했어요. 사실 이런 궁금증을 가진 미혼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

 

 

 

 

기행문을 읽는다는 것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기행문의 글쓴이는 여행에서 얻는, 길 위에서 사유하는 이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우리는 여행에서 우리가 사는 땅과 다른 구조와 느낌들을 받는다. 그리고 그 안을 여행하며 우리와 다른 부분을 인식하고 사유한다.

 

 

 

 

 

 

 

 

 

 

 

 

 

 

 

 

법정 스님의 『인도 기행』(샘터, 2006년)은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에 가서 석가모니의 행적을 따라 유적지를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깨달은 바를 적고 있다. 스님이 직접 찍은 사진과 글 속에 꾸밈없는 매력으로 이루어진 인도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 사진만으로 인도의 맨얼굴을 본다고 할 수 없다. 책 속의 사진들은 25년 전의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책은 개정 3판까지 나왔다. 초판이 1991년에 나왔는데 스님은 1989년 11월부터 3개월 동안 인도를 여행했다. 2003년에 나온 개정 2판은 사진작가 김홍희가 찍은 사진이 실렸다. 그러다가 개정 3판을 통해 스님이 1989년 인도에서 찍은 사진들이 부활했다.

 

 

 

 

스님은 인도의 4대 성지 룸비니, 부다가야, 녹야원, 쿠시나가를 순례한다. 또 불교 포교의 중심지였던 왕사성, 최초의 불교 사원 죽림정사 등에도 발을 디딘다. 스님의 여정을 눈으로 따라 가다보면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에의 반성과 성찰이 가슴깊이 다가온다.

 

 

 

 

개정 3판 『인도 기행』은 10쇄를 끝으로 절판되었다. 스님의 49재가 끝나는 날인 2010년 4월 28일까지만 새로운 인지를 발급했고, 7월 30일까지만 스님의 책들이 서점에 보급되었다. 이듬해 1월 1일부터 스님의 책들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쓴 모든 책을 절판하라는 스님의 유지를 받아들인 것이다. 며칠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운이 좋게 산 『인도 기행』은 마지막 쇄로 나온 책 중 한 권이다.

 

스님의 책들이 모두 절판 결정이 되자마자 책을 사재기하는 독자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심지어 중고책 시장에 정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스님의 유언은 우리 중생들을 시험하게 만드는 어려운 화두로 남아 있다. 나처럼 스님의 뜻을 알고 싶은 독자라면 책방이나 중고서점에 스님의 책을 발견하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알라딘 온라인 중고샵에 검색하면 법정 스님의 책이 거래되고 있다. 4년이 지난 지금, 중고가격은 안정되었지만, 『무소유』나 불교 관련 책들은 여전히 높은 가격으로 책정된 상태다.

 

최근에 『무소유』와 스님이 쓴 다른 책을 묶어서 고가로 파는 방식도 보인다. 『인도 기행』은 『무소유』에 비하면 중고책 시장에 쉽게 볼 수 있는 책이라서 금액에 대한 경제적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다. 4년 전보다 스님의 책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있는 만큼, 판매자는 어떻게든 책을 팔아 보려고 희귀상품인 『무소유』를 끼워 팔기 시작한 것이다. 흡사 허니버터칩을 다른 과자 또는 농산물, 술에 끼워 파는 인질마케팅이 생각난다. 『무소유』를 사기 위해 스님의 또 다른 책도 사야 한다. 비록 정가를 넘는 가격이지만, 『무소유』한 권가격에 비하면 적다. 너무나 비싼 ‘1+1’ 상품이다. 과연 당신이 『무소유』를 꼭 사고 싶다면, 기꺼이 구매할 의향이 있는가. 무척 쉽지 않은 결정이다. 아니, 그런 가격으로 책을 산다는 것은 구매자 입장에서는 손해다. 『무소유』에 딸려 파는 스님의 책을 이미 구입한 독자라면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똑같은 책을 또 사게 되는 어리석은 구매를 하지 않을 것이다.

    

스님의 유지를 어기면서 스님의 책을 눈에 쌍심지 켜듯 찾는 속물적인 내가 중고시장의 상황을 비판한다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가 나무라는 꼴이다. 나는 김홍희 사진작가의 사진이 있는 『인도 기행』 개정 2판이 책방이나 중고서점에 발견된다면 살 생각이다. 이제는 세상에 나오지 않는 물적 대상을 자꾸 가지려고 하는, 이 못된 소유욕을 쉽게 버리지 못하겠다. 스님의 말씀이 잊히지 않기 위해서 부족한 필력으로 알리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책을 읽고, 기록을 남겨본다. 그런데 글만 쓰면 뭐 하나. 진드기같이 내 몸에 달라붙은 탐욕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떼어내지 못해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happybook7 2014-12-21 22:55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좋은 말씀이시네요. 그리고 절판된다는 이야기에 다소 놀랐습니다. 스님의 유지가 있었다니..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14-12-22 20:52   URL
네, 꼭 읽어보셔요. ^^
 
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 외 옮김 / 북인더갭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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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야생의 하층 계급

 

“나는 저 기계를 타고...” 시간 여행자는 램프를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시간을 탐험할 작정입니다.” 시간 여행자는 타임머신을 개발하고 인류의 미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길을 떠난다. 그는 이미 802701년의 세계를 간 적이 있었다. 낙원과도 같은 원시적인 자연 속에서 사는 인류의 후손을 조우한다. 하지만 80만 년 뒤의 미래는 시간 여행자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암울했다. 알고 보니 인류의 후손은 두 개의 종으로 따로 진화했다. 인류는 퇴화한 두 종족 엘로이와 몰록으로 나누어져 있다. 엘로이는 지상에 사는 아름다운 종족이지만, 몰록은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사는 잔인한 종족이다. 그들은 엘로이를 잡아먹을 정도로 공격적이다. 몰록의 습격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원래 세계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 여행자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인류에게서 희망을 찾기 위해 시간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에 그가 간 곳은 201X년의 영국. 시간 여행자는 상당히 문명화된 영국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하늘 위에 솟은 건물들과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 그리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다니면서 걷는 사람들. 지적인 능력이 상실된 802701년의 세계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이곳이 바로 시간 여행자가 찾고 싶었던 안락한 진보 문명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간 여행자의 기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201X의 세상을 좀 더 알아보고 싶어서 신문을 읽게 되었는데 충격적인 기사 내용을 발견한다. “이 나라의 가장 깜깜하고 어둑한 구석에 존재하는 인간 이하의 계층”, “야생의 하층 계급” 기자들이 비난하는 하층 계급은 누구일까. 이런 화려한 세상에 어둑한 지하 세계에서만 사는 야생의 몰록이 여전히 존재한단 말인가.

 

시간 여행자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물어본다. “이보시오, 여기 이 신문에서 말하는 하층 계급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오?” 그러자 행인은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음. 하층 계급 말이오? 그들은 사회를 좀먹는 가난한 사람들이오. 그런 놈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구제불능의 쓰레기들이오.”  자신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 시간 여행자의 표정에 행인은 말을 계속한다. “당신 혹시 웰스의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을 읽어봤소? 그 내용에 지하 세계에 살면서 엘로이를 잡아먹는 몰록이라는 흉측한 종족이 나오잖소. 지금 영국에 있는 하층계급을 몰록이라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Scene #2  “차브를 그냥 걷어차버리세요.”

 

2011년, 영국의 정치 평론가 오언 존스는 웰스의 소설에 나오는 몰록을 조명한다. 21세기의 몰록은 엘로이의 살을 뜯어 먹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악마 혹은 괴물로 취급한다. 21세기의 몰록은 바로 하층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차브(Chavs)’이다. 그러나 차브는 소설 속 몰록처럼 공격적인 존재가 아닌데도 영국 사회는 차브를 혐오한다.

 

차브를 싫어하는 이들은 넉넉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과 집을 가진 중간계급이다. “우리는 이제 모두 중간계급”(We're all middle class now)라는 정부의 주문을 믿는다. 정부의 복지예산을 축내는 차브들을 미워한다.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복지예산에 자신들이 낸 세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피땀 같은 재산이 야금야금 그들에게 뺏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끔 차브들은 금전을 노리는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몰록이 엘로이를 습격하는 것처럼. 차브를 싫어하는 중간계급은 21세기의 엘로이다. 엘로이의 우두머리가 속한 보수당과 우익 언론들은 중간계급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계급전사’를 자저한다. 몰록과 향해 언제든지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차브들을 그냥 걷아차버리세요.”

 

차브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한때 평범한 직업을 가진 인간이었다. 2005년에 ‘차브’가 처음으로 콜린스 영어사전에 등재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캐주얼 스포츠 복장을 한 젊은 노동계급’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의미 속에는 차브를 비하하는 중간계급의 시선이 숨어 있다. 캐추얼 스포츠 옷을 직접 사 입을 수 없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무능함을 조롱하는 것이다.

 

차브가 비천한 하층 계급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9년. 이때 집권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는 과도한 복지예산 문제로 병든 영국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시장경제라는 처방 약을 내밀었다. 대처는 시장경제 중심의 경제개혁을 단행하기 위해서 영국을 병들게 한 세균으로 노동계급을 지목했다. 본격적으로 노동계급을 향한 대처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사회악이 되어버린 노동계급은 노동을 회피하면서 과도한 임금과 복지예산에 집착하는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대처리즘은 성공적이었다. 정부의 임금 삭감에 맞서서 파업을 일으킬 수 있는 막강한 위력을 가진 노조 세력은 와해하였다. 광산업과 제조업이 붕괴하여 그들의 일자리마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급작스런 시장경제 체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빈곤한 하층계급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노동당의 입지를 줄이는 데 성공한 보수당은 더욱 기세가 등등했다. 노동계급이 더 이상 중간계급으로 오를 수 없도록 계급상승의 사다리마저 부수었다. 노동계급은 낙후된 슬럼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의 골칫덩어리로 멸시받았다.

 

 


 Scene #3  누가 진짜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여행자 아니 웰스는 계층 갈등이 심화한 암울한 미래상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엘로이와 몰록. 그들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갈려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였다. 80만 년 뒤에 등장하게 될 엘로이와 몰록의 직계 조상은 오늘날 영국의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중간계급의 세상에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사회적 결계는 반사회적 악마가 되어버린 노동계급의 접근을 차단한다. ‘중간계급 대 차브’라는 양극 구도의 전쟁은 좀처럼 종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 번 차브로 낙인찍힌 노동계급은 영원한 차브로 살아야 한다. 차브는 곧 ‘인생 실패자’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이것은 시장경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미생’을 향한 ‘완생’의 조롱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계급이 게으르고, 폭력적이고, 무능한 것은 아니다.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사회적 약자를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비난하는 사회적 인식이 더해지면 21세기의 몰록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계층 간 이동이 희박해지고, 계층 갈등이 커질수록 사회적 연대감은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계층 전쟁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대처의 등장으로 부활한 보수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는 차브라는 이름의 희생양을 만들었다. 동시에 희생양을 노리는 국민은 자신들이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부르주아의 울타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웰스의 소설에서 묘사된 80만 년의 세계에서 엘로이는 몰록에게 공격을 당하지만, 2014년 지금의 엘로이는 몰록을 공격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계급을 인간 이하의 괴물로 몰아붙이는 엘로이야말로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괴물이다. 과연 누가 진짜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도 영국의 현실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로 장담할 수 없다. 복지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은 심화하고, 사회복지망에서 벗어난 사회적 약자들의 가난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우익의 왜곡된 시선이 점점 많아진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나온, 이제는 진부한 명대사를 곱씹어 본다. 사람 되는 것은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부르주아의 괴물이 선량한 타인마저 괴물로 둔갑시키는 세상. 정부의 허황한 주문에 세뇌당한 중간계급의 눈에는 힘없는 노동계급이 ‘차브’라는 괴물로 보일 뿐이다.  

 

 

 

※ 글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열린책들)에서 인용, 28쪽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2-18 22:52   댓글달기 | URL
<타임머신>을 상당히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게 더 잘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왜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는 점점 더 많아지는걸까요. 말씀대로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싶습니다. 사실은 정말 `사람`이 되어야죠. 그래야 그나마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곳도 좀 살만한 곳이 되겠지요?^^

cyrus 2014-12-19 23:00   URL
모순덩어리 세상에 찌들인 제가 현맘님처럼 부모가 돼서 자식들을 제대로 ‘사람’처럼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 세대가 나라를 짊어져야 하고, 자녀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줘야 하니까요.

qualia 2014-12-19 01:11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도 영국의 현실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로 장담할 수 없다.”

→ 제 생각엔 영국보다 한국이 더 비관적인 상황에 이미 빠져 있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은 영국과는 달리 계층/계급간 대립의 형태보다는 지역/부족간 대립의 형태로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죠.

제 판단엔 경상부족과 전라부족의 반목/대립/대결은 점점 회복불능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남한국과 북한국이라는 더 큰 단위의 부족 대결이 덧씌워져 있죠. 이 비굴하고 무능한 민족/부족들은 결코 통합/통일을 이룰 수 없으리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멸망의 길을 갈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 판단엔 1차적으로 신라가 3국(3부족)을 통일하면서 한민족의 역사는 꼬이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때부터 에미와 아비를 죽인 반역자를 친아버지로 섬기는 기구한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기구한 역사가 2014년 박근혜 정권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동족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동족포식종족은 동족살육의 기구한 역사를 쓰며 계속 연명해나가거나 멸종의 길로 가거나 두 가지 생존법밖에 없습니다. 바로 한민족이라는 종족의 길이죠.

경상부족과 전라부족을 모두 멸족시키고 남한국과 북한국을 멸망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한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cyrus 2014-12-19 23:04   URL
qualia님. 저의 생각에 대한 의견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qualia님처럼 우리나라는 이미 비관적인 상황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분단국가라는 지역의 특수성에 여전히 이념 대립의 불씨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