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권은 연초에 읽은건데 갑자기 생각나서.

 졸업장을 받고, 학사모를 쓴 지가 언젠데 개론서를 샀냐고 묻는다면, 04년 버전의 개론을 업데이트 하고 싶었달까, 요즘 후배들은 어떤 흐름으로 배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달까. 개정3판이 될 때까지의 시간이 무색하다. 나는 현장에서 그래도 발바닥 하나 정도는 비비고 있는데. 목차를 보아하니 개론서라기엔 초판본에 비해 서지학쪽이 많이 부실하다. 게다가 정보학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다. [도서관의 가치와 사서직의 의미]는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한다. 정보의 환영을 쫓느라 도서관을 멀리하는 교육계의 현실에 대해서. 정확히는 도서관 현장을 너무 모르는 학계를 비판하고 있다. 직업을 말하면서 가치니 의미니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서관 현장에 있어보면 생각보다 수많은 가치 판단에 직면한다. 식상하지만 전자책과 종이책 담론에서부터, 도서관을 공부방의 개념으로만 활용하는 이용자들을 어떻게 독서의 세계로 끌어들일 것인지, 아주 기본적으로는 어떤 책을 수서할 것인지도 그 기준적 타당성이 검열인 것인지 아닌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가치판단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어떤 사상에서 시작하고 철학에서 시작하지만 아쉽게도 문헌정보학이, 더구나 한국 교육계에서 다루어 온 문헌정보학이 구축해 온 학문적 철학이 빈약하다. 그 이유는 문헌정보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기술적 성질이 강하기 때문이다. 문헌정보학의 교육은 "훈련"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학문의 분과 자체가 인문대학의 소속일 수도 있고 사회과학대학의 소속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기술"이라는 것은 도서관 실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다. 입수, 정리, 배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수작업이고 사람이 한다. 한 권의 책을 고심해서 고르고, 서지사항을 입력하고, 청구기호가 찍힌 라벨지를 출력해 책에 붙이고, 검색이 가능하게 해서 실물자료를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서의 실무 중 가장 많이 하는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서들이 이러한 "편목"작업을, 졸업할 때까지 깜깜하게 모르고 현장에 투입된다는 것이 도서관계의 현실이다. 물론 MARC도 배우고, 실습도 한다. 그러나 실습 현장에서 과연 예비사서에게 서지데이터의 정교함을 건드리게 할까? 그건 인턴 의사가 당장 수술해야 할 환자에게 무턱대고 메스를 드는 일과 다름 없다. 실습현장에서는 대체로 도서관의 개괄적인 업무를 체험하는 식으로 한 학기면 끝이 난다. 편목의 실제는 당연히 한 학기의 실습으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자료의 형태는 책이 될 수도 있고, 기사색인이나 논문이 될 수도 있으며 전자저널이 될 수도 있고 비도서자료가 될 수도 있는데, 이것에 따른 MARC의 적용, 목록규칙의 적용이 그렇게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보사서들은 대체로 정리실에서 서지데이터 작업을 할 때 제일 고생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정보의 데이터화도 그 데이터는 "아직은" 사람이 구축하는 일이므로 학계는 정보화니, 메타데이터니 하는 추상적인 개념 이전에 실무 중심의 교육을 해야한다. 개정된 문헌정보학 개론서에는 마이클 고먼이 지적한 학계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문헌정보학은 배워서 활용하고 현장에 투입되는 학문이다. 물론 그것은 책의 역사나 인류문화사와 같은 인문학과 함께 가야하며, 교수들은 교재를 만들 때 현장 사서의 목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분류, 목록, 자료조직의 굵직한 문헌정보학 실무의 큰 줄기를 예비사서들이 현장에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잘 훈련시켜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개론서에는 도서관의 사상을 실질적으로 다뤄야한다. 이것은 곧 현장에서 겪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자료의 접근성에 대한 공평성(대외비 자료를 다루는 도서관도 있다) 문제, 관리자 정신과 정보 중계자로서의 위치는 실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실질적 사상들이다. 이러한 철학이 빈약하면 사서가 필요한 타탕성을 잃게 된다.


 이러쿵 저러쿵 두서가 없는데, 결론은 학계가 현장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 아쉬움. 정보니 뭐니 하는 것도 좋지만 주로 관공서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사서공무원들의 아날로그식 수작업 실무도 무시하지 말아주기를. RFID도 결국은 사서가 목록규칙을 기반으로 한 MARC를 입력하고, 그것이 RFID 칩에 입력되어서 리더기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니까. 챗GPT가 인기여도 딱히 우와 스럽지 않은 것은, 아직 인간 수작업의 정교함이 AI보다 뛰어나고 그것이 도서관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걸 너무 잘 아는 "현장" 사서이기에 그러하다. 인쇄소에서 책이 라인 작업으로 만들어지듯, 먼 미래에는 수서도 편목도 AI가 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르지만. 그걸 생각하기엔 사서들은 대체로 "공무원"이므로 정말 "먼" 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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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사람들도 '바로 우리처럼'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예배당의 천장화, 바흐가 작곡한 [마태수난곡]을 현대적 의미의 예술작품인 양 대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다. 이런 생각은 대중용 개설서나 문집으로 인해 흔히 더 강해지기 일쑤다. 그러나 다음 몇 장에 대해서는 이런 관행이 얼마나 오해에 찬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나는 현대화를 옹호하는 서사와 표현들이 숨기고 있는 편견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그 서사와 표현들이 지닌 진실한 측면은 공정하게 다루고자 한다. 진실한 측면이란 순수예술이라는 현대의 이상 및 관행과 유사한 것들을 과거에서도 사실 드문드문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친숙한 측면들 때문에 마음이 풀어져 엄청난 차이를 보지 못하고 현대적 예술 관념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환상을 품는 것은 잘못이다. 분명히 현재는 과거부터 이어진 수많은 작은 발걸음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진적인 변화들이 마침내 뭉쳐 몇 세대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지점들이 있는 법이다. 플라톤의 논평이나 도나텔로의 제스처에서 현대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쟁점이 아니다. 쟁점은 이상과 관행과 제도가 통합된 하나의 복합체였던 고대의 예술/수공예 체계가 '순수예술 대 수공예'라는 새로운 체계로 언제, 어떻게 대체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퀼트가 작품으로 인정받고 전시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바느질의 전통적, 사회적 개념은 여성의 전유물이었고, 수공예였으며, '의복'이라는 유용성의 일환으로 지극히 "생활적"인 것이었다. 예술을 대하는 요즘의 개념처럼 예술을 관조하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행위는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의 개념적 변화(수공예 같은 일상적인 것과 미적인 것의 구분이 모호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분리된 관념론)가 현대적 개념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미학 이론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를 반영하는 측면의 '모방예술', 세계를 창조하는 측면의 '재현예술'을 간과할 수 없고, 모방과 재현이라는 것 자체가 자연과 인간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예술"이라는 용어의 확장성과 제한성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필자의 쟁점이며 논지이다.


 내가 이런 책에 끌리는 이유는 음악이든 문학이든 미술이든 공연이든, 그것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어떤 "감정"을 논리적으로 확인하고 싶어서다. 철학의 한 분과가 미학이고, 이 범주 안에 논리학과 수사학도 포함되어 있으니 가능할 것 같지만 쉽지 않다. 표현되는 것과 느끼는 것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다음의 책들도 읽어보고자 한다.
















철학에 꽂혀서는, 종종 이런 책들을 책장에 두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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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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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읽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내가 언젠가 이러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만나고 나서 정서적 안정감과 함께 물리적 에너지를 얻는 관계가 있고, 만나고 나면 가지고 있던 하루 분량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배터리 충전하듯이 육체와 정신을 쉬게 해야만 다음 날을 살아갈 수 있는 관계도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좋고 어느 쪽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의 활기는 내게 더하기가 될 수도 있고, 빼기가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만날 때의 날씨나 상황", "만나기로 한 약속 진행의 순조로움", "만났을 당시의 대화의 순조로움", "서로에 대한 이해관계의 조화로움", 그리고 특히 "그 날의 내 컨디션이나 상대방의 컨디션이 어떠하냐" 등의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가. 기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나를 도와야지 않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나는 기질적으로 활기가 샘솟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가진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노력해서", "한껏" 끌어올리려고 힘써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톤이 낮고 색채가 옅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보다 톤이 높고 색채가 화려한 사람보다 내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대로의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활기가 넘치는 사람의 에너지에 끌려 파도에 휩쓸리듯 집어 삼켜지고 싶지는 않다. 파도에 휩쓸렸던 때가 있었다. 그 파도에 휩쓸리면 높이 오를 때는 신이 나지만 파도가 끝나고 물 속에 내팽개쳐졌을 때는 염도 높은 소금물을 잔뜩 먹게 되니 말이다. 관계의 바람과 파도를 잘 타기에 나는 아직 왕초보 서퍼임이 틀림 없다.



 우정이건 사랑이건 개인과 개인의 연대는 쉽지 않다. 한 개인의 역사는 먼 우주로부터 온다. 그래서 더 애써야 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은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일 뿐이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우주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어려운가. 인간을 이해하고 보듬는다는 것은. 그것은 필시 자기 자신일지라도 도저히 수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우정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다. 전자는 함께할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지만, 후자는 일정 중에 빈 자릴 찾는다.
전에는 이런 구분을 일대일 관계의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요즘은 그렇다기보다 기질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내 말은. 기질적으로 활기가 샘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게 일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활기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표출하고 싶어 안달이지만, 그런 게 일인 사람은 쉽게 울적해진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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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지지부진하기도, 때로는 고속열차에 탄 것 같기도 한 삶에서,

특히 우울함과 부정적 감정의 수렁에 빠져 있을 때에도 


말과 언어는 힘이 세다.


내면 세계라는 것이 언제나 유동적이고 불완전하며 명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되어 있어서, 

누군가는 이것을 고결하고 단정하고 마음에 파동이 일도록 단어와 문장을 잘 벼려서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그것을 프로페셔널하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소설가이며 시인이며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파스칼 키냐르와 파스칼 메르시어는 그것을 하고 있다. 두 파스칼들이 세상에 내놓은 문장들을, 

나는 보고 먹고 생각하며 살아가는(혹은 살아내는) 힘을 얻는다.



문장은 살아갈 힘을 준다.

그 안에 나보다 현명한 누군가의 삶이 고농도로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상은 대체로 다른 누군가의 농축된 자아상을 끌어들이고 흡수하면서 형성되었다. 

나와 다르지만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았지만 알고 보니 나와는 너무나 달랐던 작가와 철학자들 사이에서 잉태되고, 

그들의 단어와 문장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이러한 책들에 이끌린다. 언어의 기원, 언어의 만듦새와 쓰임새, 그것들의 활용과 삶 자체로 녹아든 언어까지. 수사학이라는 학문 역시 고대로부터 집적되어 현재는 철학의 한 분과로 

자리 잡았으니 내가 이 책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고보니 또 책을 샀다.

소비가 소비로서 소비 되고야 마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문장을 꼭꼭 씹어 잘 삼킬 것이다.

삶의 연료이며, 구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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