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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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장애인 비하와 서울 중심적 표현을 써서 지적받고 사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p.140)



몇해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으로 정희진을 처음 만났었다.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사실 그 책의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지금 이 책, 《정희진처럼 읽기》를 읽기 시작하면서, 아 그녀가 이렇게 '센' 글을 썼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거부감이 들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을 때는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은데, 왜이렇게 거부감이 들까. 정작 본문이 시작되고 나서는 거부감이 사라졌지만, 서문에서의 거부감은 정말 컸다. 나는 그녀처럼 읽지도 쓰지도 않을 것이라고, 나는 계속 내 식대로 할 거라고 욱, 하는 마음에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본문을 읽으면서 그런 거부감은 어쩌면 '내가 행동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 에서 초래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위에 인용한 문장, 저 문장을 보면서 빳빳한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얼마나 많은 말실수를 하고 행동의 실수를 할까, 안그러려고 하고, 그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은연중에 내게 잠재해있던 차별과 편견 그리고 학대는 얼마나 많이, 빈번하게 입 밖으로 터져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사로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희진조차, 이 무지한 나조차도 차별을 공부하는 이름으로 알고있는 정희진조차, 여전히 지적받고 사과를 한다는 게 아닌가. 아, 인간은 이토록 불완전한 존재인가. 이렇게 지적받으면서 그리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이 해야할 일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반드시 읽어야할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고 달라질지는 모르겠다. 특별히 저격하자면, 홍준표가 그렇다. 내가 지금은 홍준표를 저격하지만 그건 이 책의 인용문이 홍준표를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고,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예외가 될 순 없겠다. 뿌리 깊은 사고는 책 한 권으로 달라지지 않겠지? 그래도 뭔가 자꾸자꾸 권하고 싶다. 밑에 인용한 283페이지에서도 나오는데, 그들에게 이해를 권하고 싶다. '이해의 영어 표현(under/standing)이 좋다. 이해햐려는 대상 아래 서 있으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자세다.' 라는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까닭이다.




홍준표 경남지사에게 공공 의료는 '좌파 정책'이다. '우파 민중'은 안 아픈가? 공공 의료는 국가의 기본 역할인데? 그는 아나키스트인가? 내가 분노하자 주변에서는 '뭘 기대하냐'는 반응이다. 일부 지도층의 이런 발상에 대한 현저한 면역 결핍이 내 지병이다.

질병은 삶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다. 의료는 복지 이슈가 아니다. 쌀 수급을 복지 정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질병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용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홍 지사의 사고는 철학의 문제, 그것도 '국정 철학'의 오류다. 그는 '좌파의 국가관'을 의심하기 전에 자신의 공동체관부터 검증받아야 한다. (p.270)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내용의 호오가 본질이 아니다. 어머니 숭배와 `창녀`혐오는 모두 남성 사회의 판타지다.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여성을 이분하여 시민권 박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아버지와 남창`, `곰과 여우`로 구분되지 않는다. (p.70)

성 판매는 당연히 노동이다. 그것도 위험한 중노동이다. 그러나 나는 `성 노동`에 반대한다. 노동이되 `어떤 노동`인가, 수천 년간 왜 `여성 직종`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너무 오래된 노동을 두고 `노동이다 vs 아니다`를 논하는 이 사회의 지성이 민망하다. (p.71)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내내 흐르는 1940년대 영화, <밀회(Brief Encounter)>의 우리말 제목은 교양이 없다. `몰래 만난다`는 시선부터 한심하다. 조우(遭遇), 정도가 맞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생면부지의 남녀는 기차역에서 몇 시간 만나고 헤어지지만 평생 두근거릴 가슴을 얻는다. (p.76)

인맥 관리, `밀당`, 포커페이스‥‥‥몸 사리고 계산해봤자다. 남김없이 준다고 해서 바닥나는 마음은 없다. 인간이 바닥을 드러낼 때는 따로 있다. 그러니, 목숨처럼 해 다오. (p.77)

사랑한다는 것은 약점이다. 사랑이 내 몸에 거주하는 것은 축복이지만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지옥이다. 이 마음 자체가 `을`인데 만일 성별, 나이, 계급, 외모 같은 자원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그 괴로움,그 부끄러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p.80)

상대방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젼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They do because they can.)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p.95)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 개념은 근대화 시각에서 발전주의(progress)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p.122)

여성 상위?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이 아니라 역할(노동량)이 많아진 것이다. 100퍼센트 주부로만 사는 전업주부도 없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이들도 재테크부터 인형에 단추 달기까지 부업을 하거나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남성의 가사 노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여성의 취업은 평등이 아니라 이중 노동이다. (p.142)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대가 오랜 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지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유명한 글귀의 출처가 바로 이 책(선악을 넘어서-프리드리히 니체)이다. (p.214)

우리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다. 원래 남녀 차이보다 여성과 여성의 차이, 남성과 남성 간의 차이가 더 큰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러한 법칙을 왜곡하여 인간을 남녀로 분류한 제도가 가부장제다. (p.247)

자신이 누군지 모를 수밖에 없는 남성들에게 이 책(남성성/들-R.W. 코넬)의 일독을 권한다. 여자는 자기를 잘 아냐고? 인종 차별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p.248)

술, 담배, 도박, 초콜릿, 관계, 섹스, 쇼핑, 미디어(스마트폰), 게임‥‥‥. 사람들은 다양한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되지 않은 몸은 드물다.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긍정적 중독(일, 운동, 공부‥‥‥)인 경우 문제가 덜 될 뿐이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중독자의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없이는 못 살아.") 그러니 지나친 수치심이나 굴욕감,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 (p.255-256)

확실성의 볼모가 된다는 것. <기차는 슬프다>가 바로 그것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더 슬픈 게 있을까?/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내 시간이 멈췄다. 행복할 때, 정지했으면 하는 그 시간이 실현되었다. 우리는 기차역에 함께 앉아 있었다.
목적이 분명한 기차가 정시에 출발한다는 확실성. 기차역(삶)에 끌려온 사람들은 살아 있는 죽음을 산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시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를 이해하는 만큼 기차가 오기 전에 죽는 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될까. (p.275)

이해(理解)는 읽는 이의 이해(利害)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이해의 영어 표현(under/standing)이 좋다. 이해햐려는 대상 아래 서 있으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자세다.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p.283)

몇 해 전에 성별을 기준으로 하여 10대에서 70대까지 열네 개 그룹으로 나누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연령과 성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내 대답 역시 그렇다. 여기서 `공부`는 10대를 억압하는 입시 공부가 아닌 뭔가 `의미 있는 인생`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 무엇인가를 추구했다는 것,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 등으로 다양할 것이다.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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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3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23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5-03-2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강연을 듣고 짧은 시간에 참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평생 존경할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락방 2015-03-24 11:09   좋아요 0 | URL
네, 존경할만한 분이고 이런 분이 계셔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세상이 조금 더 살기 좋아진다면 아마도 이런분들 덕일테고요. 그렇지만..전 감히 이렇게 될 순 없을 것 같아요. 휴..

아무개 2015-03-23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우리가 이런책좀 읽었으면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책을 안읽겠지요?
누가 그러더라구요, 공부 잘하는 수재들이 정치하면 홍준표 처럼 된다구요.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2.이 책의 문제점이랄까, 아니 읽고 난후의 문제점은,
안그래도 삐딱한 관점이 더 삐딱해져서 완전 획~ 돌아가버린거 같다는거...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흠....이건 백인남성들에게만 해당되는거 잖아
이러고 있어요... ㅡ..ㅡ:::::::::::::::::::


다락방 2015-03-24 11:11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차피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은 그동안 이런 생각을 해왔던 사람일 거라고. 갑자기 생뚱맞게 위에 언급한 사람들이 읽고 아, 삶은 그렇게 살아야하는구나! 하고 깨닫는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해요. 하아.

전 이 책을 읽고 더 삐딱해지진 않았어요. 제 자신을 좀 더 단단히 매야 겠다고 생각을 했죠. 조금더 신경써서 말하고 조금더 신경써서 행동하자고요.

푸른알밤 2015-03-2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의 도전 읽고 무심결에 표현하는 편견을 반성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다 잊고 있었네요. 이 책 한 번 봐야겠습니다..

다락방 2015-03-24 11:11   좋아요 0 | URL
네, 푸른알밤님. 읽으면서 뭔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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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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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엄청나게 좋아할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가 담배를 피운다고 해도 싫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푸쉬업을 한 손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가 푸쉬업을 하지 못했어도 그를 똑같이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웃음소리가 좋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웃지 않았어도 그를 많이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공부를 잘했던 게 좋다, 그러나 그가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그에게 실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게 좋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해도 좋아했....을까? 뭐, 아마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좋아했으므로 그에게서 아주 여러 개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 눈에는 그의 모든 것들이 장점으로 보였지만, 그가 또한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렇게 머리를 자르지 말고, 그런 옷을 입지 말고, 그렇게 운전하지 말고, 그렇게 먹지 말고, 그렇게 웃지 말고, 그렇게 하지말고, 하지말고, 하지말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이 가해질 수 있는지를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산다. 분명 폭력적인 말과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사랑해서 그래'라고 하면 그런가, 하고 갸웃해서 그대로 따르게 된다. 나중에, 자신이 아예 망가지고 부숴지고나서야 '그때 그게 사랑이 아니었구나, 그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이었어'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내 안에 커다란 상처가 자리잡고난 후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사랑이란 그 말 하나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것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사랑한다니까, 그게 사랑이라니까 견디고 참고 지탱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많은 사항들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다. 그래서 반짝거리는 섀도우를 사고 싶고, 핑크빛 볼터치를 사고 싶다. 목에 두를 예쁜 스카프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예쁜 원피스도 여러벌 장만하고 싶다. 구두도 샌들도 다 새로 사고 싶고, 더 예뻐지고 싶다. 이건 상대가 내게 요구한 게 아니다. 섀도우를 사라고, 원피스를 사라는 말을 들은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 잘 보이고 싶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나를 가꾸고 싶은 것이다. 나는 최상의 사람의 되고 싶고 이것이 내가 그를 좋아하는 데서 나오는 당연한 현상이다. 최상의 나는 그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자 나의 의지의 발현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이 '그의 요구'여서는 안된다. 그의 요구로 인해 내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폭력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이 책의 '오사'는 대학에 들어가 남자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는 학교내 모두에게 인기가 많고 잘생겼다. 이런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사한 남자다. 그러므로 오사도 그에게 푹 빠진다. 그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녀는 그에게서 이상한 점들을 보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할 때는 눈을 꼭 뜨라고 말한다. 감고서 니가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떻게 아냐며. 또한 다른 남자들이 옆에 지나갈 때 본인에게 애정 표시를 하지 말라 말한다. 니가 저 남자를 원해서 나에게 애정을 표현하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이 모든 질투들을 단순히 사랑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거라 여겨 그녀는 그냥 넘긴다. 때로는 너무 심한 말들도 그녀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는 그녀에게 모든 친구들을 끊을 것을 요구한다. 그녀의 친구들은 최소한 남자 다섯명하고는 자봤을텐데 그런 여자들은 창녀라면서. 그녀에게도 화장하지 말고 다니라고 하고 그런 옷차림으로 다니지 말라고 한다. 창녀같다고. 문신도 지우라고 말한다, 창녀같다고. 그녀는 자신이 그간 사귀었던 남자들을 세어보며 잠들기 전, 나는 창녀인가 아닌가를 고민한다. 그녀의 방에 있는 모든 그림 액자들은 치워져야 했다. 불결해서 못오겠다고 그가 말했으므로. 그가 요구하면, 그녀는 가족과 통화를 하다가도 전화를 끊어야 했고, 그녀의 방에는 그가 아닌 다른 누구도 와서는 안되었다. 여자 친구일지라도.


그러다 그녀는 급기야 '맞는다'. 그가 무릎으로 그녀의 배를 때리고, 그녀는 '맞는다'는 데서 온 충격에 휩싸인다. 그녀의 머릿속에도 맞는 순간 그에게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녀는 체념한다. 그녀에겐 이제 친구도 아무도 없고 그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한 번 시작된 폭력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녀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로 그에게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고, 운전하는 차 안에서 그로부터 험한 말들과 주먹을 받아내야 한다. 그는 그녀를 혼내줄 장소로 차 안을 선택했다. 그는 운전하지 못하므로 운전은 그녀의 몫이고, 차 안에서 운전중인 그녀의 반항력은 힘을 잃고, 차 안에서 그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다 최종적으로 그는 차 안에서 그녀의 손가락 살점을 물어 뜯는다. 살점을 물어 뜯긴 그녀는 그로부터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멀리 떨어져있던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 일을 말하고, 학교의 여자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말한다. 


아버지와 교수는 그녀를 돕는다. 교수는 그녀에게 재차 병원에 꼭 가라고 권고했으며, 그녀는 병원에 가서 말하지 못할 줄 알았지만 울음을 터뜨리며 의사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얘기한다. 이 일로 남자는 벌을 받게 되었고, 그녀는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힘이 세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아름답다고 말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한심하다고 하면,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한심한 사람이 되어 절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예전에 읽은 책,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에서는 '울면서 잠들게 하는 사람을 친구라 할 수 있을까?' 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나는 한심하고 찌질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그 안에 있을 때, 사랑-이라 생각하는 바로 그 감정-의 중심에 있을 때는 들지 않는다. 다만 상대의 말만이 아주 강하게 나를 후려칠 뿐이다. 이 책 속의 여자도 창녀가 되었고 값싼 여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서. 머리 색을 바꾸고 화장을 안하고 옷을 전혀 다르게 잆어야 했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잃었다. 


사람은 힘을 가질 수 있고, 그 힘은 제대로 발휘 되어야 한다. 그의 말이 내게 아주 강한 것이 되고 나의 말이 그에게 아주 강한 것이 되는데, 거기에 대고 상대를 깔아뭉개는 발언을 함으로써 상대의 인격을 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든다면, 그건 힘을 가진 자의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면, 우리는 그 감정 혹은 그 관계로 인해서 더 나은 방향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외로워지고 힘들어지고 내가 한심해진다면, 그것은 사랑이 만든 것이 아니다. 폭력이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체념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주변에 아무도 없고 그에게 길들여졌어, 이게 어쩌면 사랑일지도 몰라,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별 수 있겠어?, 그는 때때로 잘해주기도 하잖아, 등으로 내가 나 자신을 이 폭력의 상태에 두어서는 안된다.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가슴 속에 의혹이 자라난다면, 주의 깊게 그와 나를 들여다봐야 할 일이다. 또한 맞기 시작했다면,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반드시 돌이켜보자. '때리는 남자는 절대 안된다'고 분명히 생각해왔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한번 뿐' 이라든가 '실수겠지' 라는 말로 이 사건을 덮어둬서는 안된다. 힘들고 아프고 두려움이 찾아오겠지만, 사랑이란 감정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행복은 나의 최면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나의 강요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저절로 우러나는 감정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더 어떤 말을 보태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 속의 여자가 그 상황에서 뛰쳐나왔고, 그걸 이렇게 책으로 써낼 수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을거라고 내가 막연히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 헤인스'의 데이트 폭력을 다룬 소설, 《어두운 기억속으로》에서도 여자를 사랑하는 완벽한(줄로만 알았던) 남자는, 여자를 친구들로부터 고립시켰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그는 그녀의 친구들마저 통제한다. 그녀를 고립시키는 것이 자신의 힘을 그녀에게 더 잘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일텐데, 그렇다는 건, 남자 역시 그들의 그런 성향을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된다는 걸 이미 자각하고 있다는 뜻일테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이 책속의 작가는 결국 해냈지만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다른 사람들이 혹여라도 연애를 하면서 어떻게 '그런 남자'인지 알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겟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세상과 격리시키면서부터. 그녀의 옆에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폭력의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녀로 하여금 대화를 하고 웃고 의지하게 되는 사람이 '나 하나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데이트 폭력의 시발점이 아닐까. 그래야 온전히 자신의 힘을 그녀에게 쏟을 수 있을테니. 그러므로 의혹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 데이트를 시작하게 된 남자가 차츰차츰 내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면, 온전히 자신에게만 의지하기를 원한다면, 그때부터 나는 그를 경계하기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줄 수 있는게 뭔지, 무엇을 줘야하는지를 자주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이 감정이 나를 결국은 행복하게 하고 웃게 하는지. 사랑이란 단어를 듣는 데 흥분이 되는 게 아니라 무섭고 외롭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관계속에 있다면, 그 관계 역시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사랑은,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니고, 아프게 하는게 아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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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5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6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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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7-58)



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육체와 영혼이 따로 분리되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 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처럼, 영혼이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머물며 그 사람을 지켜주고 자신의 못다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전전긍긍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한줄기 의심 같은 것은 있다. 그것은 사실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더 가깝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먼저 죽는다면 그들 곁으로 살포시 다가가 내가 여기에 있고, 나는 아주 잘 있으니, 이제는 나를 잊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나가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영혼이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은, 이 소설속의 저 인용문처럼, 누군가를 향해 복수하고 싶을 때 하기도 한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줬지? 그리고,


왜 나를 죽였지?



소년이 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라니, 세상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은가. 그러나 누군가 맨 윗대가리에서, '죽여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 밑에 사람들 또 그 밑에 사람들은 그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결과, 아무런 죄도 없이, 명분도 없이, 어리고 혹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갔던 일이, 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그 명분 없는, 어이 없는, 원통한 죽음은, 그 당시에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것이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된 것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며, 그 일이 사실은 어른들이, 언론이 우리에게 말해준 것처럼, '그런'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아주 나중의 일이다. 억울함을 억울하다고 제대로 전하지도 못한채, 그렇게 가슴 아프게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묻은채, 그렇게 '지독하다'는 지역감정의 누명을 뒤집어 쓴채,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한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늘, 죄책감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이 있으므로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하게 굴러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함께 헤쳐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우디 앨런'의 영화 《매치 포인트》는, 우디 앨런이 언제나 그랬듯이 꽤 현실적인데, 사랑했던 가난한 여자를 죽인 후 부자 여자와 결혼해 문제 없이 사는 남자가 나온다. 그러나 겉에서 보기에 문제 없어 보이는 그의 삶이, 그렇다고 정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의 살인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그러므로 누군가를 죽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도 않았지만, 부자 여자와 결혼해 전망 좋은 집에서 살지만, 그의 밤 꿈속에는 그가 죽인 여자가 등장한다. 그의 꿈에 자신이 죽인 여자가 나타나는 것. 이것은 그의 '죄책감'이 작용한 탓이 아닐까. 또한 '영혼'이란 게 있다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의 영혼이, '왜 나에게 그랬니' 라고 찾아간 것일 수도 있고.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는 신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믿는 것은 힘이고, 보려고 한다면 보인다고도 역시 생각한다. 신을 믿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살다보면 간혹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간혹 생기는 거니까. 그럴 때 이것은 어쩌면 신의 힘이 아닐까, 이것은 기적이잖아, 라고 하는 일들이 생기니, 어쩌면 신은 존재할지도 모르고, 신이 존재한다면 억울한 영혼이 차마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해 사람들 곁을 머무는 귀신도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나는 귀신의 존재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죄책감이 인간을 인간이게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것이 모든 인간이 저마다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그 죄책감이 한없이 작고 작은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고 혹은, 없애 버렸을런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죄책감을 없애버린 사람에게 그 사람의 잘못을 알려주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쓸 수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법으로 그에게 잘못을 벌하기에도 마땅치 않을 때. 그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그를 두어야할까,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저 모두가 원망하는 채로, 그 원망만 받아가며 살라고, 그렇게 두어야 할까. 나는 귀신의 존재를 바란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그대로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고통을 호수할 수 있기를 원한다. 더불어 그 고통을 가한 가해자에게 우리만큼 너도 충분히 괴로워해야 한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위의 인용문을 읽으면서 바랐다. 당신들이 하고 싶은 말, 혼으로 남아 하고 싶은 그 말을, 혼으로 남아 하라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라고, 매일 밤, 여러분 모두가 찾아가서 그의 꿈속에 나타나라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라고. 우리가 다 못풀어준 그 억울함을, 세상의 어떤 곳에서 저마다 소리내고는 있지만 미처 그를 벌하기에 충분치 않으니, 당신들도 말하라고.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7-58)



그 말을 해도해도 부족하지 않을테니, 계속해서 외치라고 하고 싶다. 당신들을 쏘아 죽인 사람을 편안히 잠들게 하지 말라고, 매일밤 꿈에 나타나라고 간절히 바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직 살아서 당당히 경호를 요청하고 있는 그 사람의 안위가, 나는,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아왔으니까. 때로 용서는, 필요치 않을런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거니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p.117)



나는 명령에 따른 수많은 군인들이 모두가 자신의 의지로 그 일에 가담했다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명백하게 피해자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명백하게 가해자를 만들기도 했다. 가해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해자로 만듦으로써 그는, 자신의 죄의 크기를 더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현장에서 자신이 당한 것에, 자신이 본 것에, 자신이 가한 것에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러므로 그는, 편안히 남은 생을 살아서는 안된다.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쳐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는 것, 누군가의 괴로움을 바라는 것이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을 물론 나는 안다. 그러나 '아는대로'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말도 안되는 것을 바라는 것, 그것 밖에 할 수 없어서 스스로가 못나게 느껴진다.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할 권한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p.117)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비서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되었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만에 하나 도청이 함락되지 않을 경우 전투기를 보내 도시를 폭격하는 수순을 검토하고 있었다. 집단발포 직전인 5월 21일 오전, 군용 헬기를 타고 와 그 도시의 땅을 밟는 그의 영상을 보았다. 젊은 장군의 태연한 얼굴. 성큼성큼 헬기를 등지고 걸어와, 마중 나온 장교와 힘차게 악수를 나눈다. (p.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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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마 2015-01-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죠?
한강이 써야만 했던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한강이

˝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 ˝(P. 132)

라고 한다면 대꾸할 말 없지만.

다락방 2015-01-22 10:06   좋아요 0 | URL
아니, 아시마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이제 자주자주 오시는 겁니까? 네? ㅎㅎ 자주 봬요.

음, 저는 `너무 좋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음..좀 부족하게 느껴졌는데요, 한강은 기존의 소설, [희랍어 사전]인가, 거기에서도 느꼈지만, 문장은 참 좋은데 `이야기`보다 문장 위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어서요. 잡히는 감정들이 `정확`하질 않고 좀 `모호`하게 느껴진달까요. 그래서 이 책도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쓰여졌다면 우리 엄마한테도 권했을텐데, 싶으면서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어요.

단발머리 2015-01-2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러 번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 생각했지만 사실 아직도 용기가 안 나요.
작가가 자신의 이 소설만큼은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도 말이지요.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힘든 글을 써낸 사람도 있고,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의미있는 페이퍼를 쓰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지요.
아..... 읽어야하겠지요?

다락방 2015-01-22 17:52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읽는 동안 힘드실 거에요.
정신 단단히 붙잡고, 마음 단단히 붙잡고 읽으세요.
읽으면서 계속 한숨을 쉬게 됩니다.
힘들지만, 읽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레와 2015-01-2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읽어야겠군..


다락방 2015-01-22 17:52   좋아요 0 | URL
네, 레와님. 도전해봐요. 읽다가 자꾸 빡치겠지만.. ㅠㅠ

2015-01-22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2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인생. 2015-01-22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소설은 제주가는 비행기안에서 읽다가 숨이 막힐것 같아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나요 다락방님.
다락방님 한강의 시는 읽으셨나요? 다락방님이 읽으신 한강의 시는 어떨지 궁금해요!!
이곳에 많은 책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한강의 시집은 챙겨왔어요. 한번씩 들춰보려구요.
저는 [내여자의 열매] [아기부처] [몽고반점] [검은사슴]의 한강을 잊을수 없어요
여전히 제게 한강은 그때로 머물러 있는것 같아요.

다락방 2015-01-23 11:36   좋아요 0 | URL
춤인생님, 아직 한강의 시는 읽어보지 않았어요. 한번씩 들춰볼만큼 좋은가요, 춤인생님? 예전부터 한 번 볼까 싶긴 했었는데 제가 시를 잘 모르고 감상할줄도 모르는 것 같아서요. 시가 제게 오면 제 가치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시무룩..)
저도 몽고반점 좋아했어요. 아기부처랑요. 아기부처는 진짜 독특했어요.

singri 2015-01-23 11: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때의 한강 작품들을 촤륵 들으니 갑자기 맘이 설이레네요. 산문집까지도 참 좋아했어요~

다락방 2015-01-23 11:53   좋아요 1 | URL
산문집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산문집도 괜찮은가 보군요.
한강의 시도 산문도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아기부처 좋아했어요. 좋다기보다 꽤 강한 작품이었어요, 제게는.
:)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아버지가 당뇨 판정을 받으시고 나서 급격히 우울해지셨다. 당신은 술도 안하고 담배도 안하며 자주 등산으로 운동도 해주는 데 왜 대체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거냐며. 식구들 모두 같이 우울해했고, 또한 우울해하는 아버지를 어떻게든 달래주려 애썼다. 그러나 병원에 가 약을 받아오며 음식 조절까지 하시게 된 아버지는 기분이 나아지질 않으셨다. 여전히 예민하고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리셨다. 이제 맛있는 걸 더이상 먹지 못하고 계속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하니, 이것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말씀도 곧잘 하신다. 마치 인생이 끝나버린 것 같은 기분도 더러 드시는 모양이다. 장염이라든가 감기등 금방 낫는 질병에도 사람은 쉬이 우울해지는데, 계속해서 치료를 요하고 관심을 요하는 병에 걸린다면 얼마나 더 우울할까. 안타까울 따름이다. 뭐, 그에 대한 옆에서 보는 가족 혹은 '나'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어느날, 식도암 판정을 받는다. 게다가 이미 전이가 많이 된 상태라 항암치료를 하는데도 몸이 나아지질 않는다. 그는 이제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토록 몸이 아프고 괴롭고 또 당신은 곧 죽을겁니다, 라는 선언을 마주한 뒤에 히친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어떠한 위로에도 마음이 나아지질 않는 것. 줄리언 반스가 아내의 죽음 앞에 다른 사람들의 모든 반응들을 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했듯, 히친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히친스는, 자신이 가졌던 신념이나 사고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꼿꼿하다. 나는 히친스를 이 책,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처음 만나봤고, 그의 이름은 지나가다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그는 종교 혹은 신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거다. 



자신의 병 앞에, 줄어드는 삶 앞에 그가 어떤 감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여전히 위트와 지성이 넘치는 글을 써낸다. 고통이 극심한날에는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그이지만, 이토록이나 날카롭고 유머 있는 글을 써내는 그라면, 그간 그가 어떤 이야기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를 이렇게 늦게 알게 된 것이 안타깝다.



그가 기독교 혹은 신에 대해 어디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말이나 글이 종교인들에게 커다란 빡침을 주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는 식도암을 판정받고 살아가던 어는 날, '신자들의 사이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말기 목구멍 암[throat cancer, 원문의 오류를 그대로 적음]에 걸린 것을 두고, 그가 목소리를 이용해서 신을 모독한 것에 대한 신의 복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 누구일까? 무신론자들은 사실을 즐겨 무시한다. 그들은 마치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행동한다. 정말로 그런가?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몸의 여러 부위 중에서도 특히 신성모독을 할 때 사용했던 부위에 암이 생긴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그래, 계속 그렇게 믿어라, 무신론자들이여. 히친스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하찮은 존재로 시들어가다가 끔찍하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 뒤에 진짜 재미가 찾아온다. 그가 지옥불로 보내져 영원히 불에 타며 고통받을 테니 말이다. (p.32-33)



일단, 히친스와 별개로 내가 이 글을 읽고 생각한 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의 선고를 듣고 어떻게 악담을 퍼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욕할지언정 그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싫어했던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것을 '잘됐다'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의 마음엔 이미 '악'이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히친스는 이런 게시물의 글을 읽고 이렇게 써낸다. 



경전과 종교의 가르침에는 수백 년 동안 이렇게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심보를 주류 신앙으로 만들어버린 구절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와 관계된 일이 되기 훨씬 전부터 나는 이런 주장의 뚜렷한 문제점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첫째, 고작 영장류인 주제에 신의 마음을 안다고 어찌 그리 확신할 수 있는가? 둘재, 위의 글을 쓴 익명의 필자는 아무 잘못도 없는 내 아이들이 자신의 글을 읽기를 바랄까? 아이들 역시 같은 신 때문에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말이다. 셋째, 이 글의 대상에게 벼락을 내리거나, 하여튼 그것과 비슷하게 경외감을 일으키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떤가? 복수심에 찬 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고작해야 내 나이와 예전의 '생활방식'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암을 내려주는 것이라면 그의 무기고는 슬플 정도로 비어 있음이 분명하다. 넷째, 애당초 왜 암인가? 나이를 많이 먹으면 거의 모든 남자가 전립선암에 걸린다. 품위 있는 병은 아니어도 성자든 되인이든, 신자든 비신자든 상당히 공평하게 걸리는 병이기도 한다. 신이 각자에게 걸맞은 암을 내린다고 주장할 생각이라면, 백혈병에 걸리는 많은 아기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독실한 신자들도 젊은 나이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반면 버트런드 러셀과 볼테르는 마지막까지 팔팔했다. 많은 사이코패스 범죄자와 독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신벌은 끔찍할 정도로 임의적인 듯하다. 위에 인용한 글의 기독교인 필자에게 서둘러 장담하건대, 아직 암에 걸리지 않은 나의 목구멍은 내가 신성모독에 사용한 유일한 기관이 아니다. 그리고 설사 목숨보다 목소리를 먼저 잃는다 해도, 나는 적어도 어둠과 맞닥뜨려 '안녕'하고 인사를 건넬 때까지는 종교적 망상에 맞서 논박하는 글을 계속 쓸 것이다. (p.33-34)



물론 모든 종교인들이 그의 고통을 바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그의 쾌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한 지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웃었던 이런 부분도 있다.



세속주의자 또는 무신론자인 수많은 친구들이 내게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이걸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네야." "자네 같은 사람 앞에서 암은 상대도 안 돼." "자네는 틀림없이 극복할 수 있어."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은 물론 좋은 날에도 이런 간곡한 말들은 살짝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 모든 동지들을 실망시키는 꼴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또다른 세속적인 문제가 생각난다. 만약 내가 병을 이겨낸 뒤에 신앙인들 쪽에서 흡족한 표정으로 자기네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어쩌지? 그것도 왠지 짜증스러울 것이다. (p.39-40)




나는 히친스를 좋아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에게서 러셀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러셀이 제일 멋진 줄 알았더니 이렇게 히친스 아저씨가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네.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믿는 건 아니다. 대체적으로 나는 그게 뭐든, 믿는 사람에게는 보인다, 라고 믿는 쪽이다. 그러나 러셀과 히친스처럼 무신로에 대한 글을 읽을 때 내가 더 많이 설득됨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더 많은 타당함을 본다. '신이 없는' 혹은 있다면 그건 내가 생각하는 신적인 존재와는 그다지 없는 쪽이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진달까. 



앰브로즈 비어스(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옮긴이)가 《악마의 사전Devil's Dictionary》에서 내놓은 '기도'의 정의와 정신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잘 알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지극히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도:스스로 무가치하다고 고백하는 탄원자가 자신을 위해 자연의 법칙을 정지시켜달라고 탄원하는 것. (p.43-44)


여기에 대해 히친스는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타당성을 더한다.



첫째, 기독교의 신은 전지전능하다. 둘째, 신도들은 그 신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필사적으로 필요로 한다. 기초적인 구절을 하나 인용하자면,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되어 있다. <신명기>32장 4절은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라"라고 선언한다. <이사야> 64장 8절은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하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의존을 고집스레 요구해놓고, 그다음에는 진한 찬사와 감사를 바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기도를 이용해서 세상이 바로잡히기를 기원하거나 신에게 은총을 내려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사실상 심각한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는 것과 같다. 아니, 적어도 신을 한심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일개 인간이 신에게 충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애석하게도 종교에 부패라는 혐의를 추가로 덧붙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기도가 신자들에게 만족을 안겨주려고 의도딘 것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기도의 대가로 헌금을 받을 때마다 사실은 믿음에 대한 심각한 부정否定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그들의 믿음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달라는 신자들의 요구가 아니라 신자들의 수동적인 수용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여러 분파들이 격렬한 싸움을 벌인 끝에 교회는 결국 '면죄부 판매'같은 악명 높은 행위들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런 지독한 신성모독이 그토록 화려하게 이윤을 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많은 훌륭한 바실리카와 예배당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p.46-47)



히친스는 저명한 인사답게 아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암에 대한 치료방법, 그에 해당하는 격려와 응원을 받게 된다. 알려지지 않은 약초와 치료법등이 그에게 마구 쏟아져들어오는 가운데-그 제안들 가운데는 '냉동인간'이 되는 방법도 있었다-, 그는 쓸만한 방법을 제안한 사람도 있음을 밝힌다.



이런 조언들과는 대조적으로, 샤이엔 족과 아라파호 족 인디언의 피가 섞인 내 친구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 부족의 치료법에 의지했던 사람들이 모두 거의 순식간에 죽어버렸다면서 혹시 누가 미국 인디언 식 치료법을 제안하거든 "반대방향을 향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움직어야"한다고 친절한 조언을 해주었다. 개중에는 정말로 받아들여서 실천할 수 있는 조언도 있는 법이다. (p.51-52)



유머감각이 똑똑한 사람의 전유물인건 아니지만, 똑똑한 사람일수록 유머감각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히친스를 보며 생각했다. 그는 날카롭고 지성적이며 유머스럽다. 또한, 느껴야 할 것을 제대로 느낄 수도 있는 사람이다. 생각과 느낌이 골고루 섞였을 때 사람은 최대한의 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의학문헌에서 성대 vocal cord 는 단순한 '주름'에 불과하다. 연골 한 조각이 제 쌍둥이를 향해 열심히 손을 내밀어서 마침내 닿는 것에 성공하면 음향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chord'(화음-옮긴이)라는 단어와 틀림없이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음악을 만들어내고, 사랑을 이끌어내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군중을 연민으로 이끌거나 폭도들을 열정으로 이끄는, 공명의 떨림. 과거에 우리가 자랑하던 것처럼,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우리만은 아니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전히 즐거움과 오락을 위해 목소리를 통한 의사소통을 이용하고, 여기에 우리의 또다른 자랑거리인 이성과 유머를 결합시켜 고등한 혼합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동물은 우리뿐이다. 이 능력을 잃는 것은 곧 많은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고, 분명히 말하건대 작지 않은 죽음이다. (p.82-83)



시간이 흘렀고, 그는 점점 더 쇠약해졌다. 그리고 병실에 누워, 이제 요구사항을 말로 하는 대신 글로 적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아내에게 이런 메모를 전한다.



'니체, 멩켄, 체스터턴의 책. 그리고 아무 종이나...아마 낡은 여행가방에 있을 거야. 서랍도 봐! 협탁 등등. 위층과 아래층.' (p.137)



그는 결국 생을 다했고, 그의 아내는 그의 남편을 그리워하며 이 책을 마친다. 



남편의 완벽한 목소리가 그립다. 밤이든 낮이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남편이 잠에서 깼을 때 기쁜 듯이 가볍게 떨리던 목소리가 그립다. 신문에서 화가 나거나 즐거운 기사들을 내게 읽어주던, 그 나직한 '아침 목소리'. 그가 기사를 읽는 도중에 내가 끼어들면 그는 기쁘거나 짜증스러운(짜증을 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목소리를 냈다. 점심식사를 준비하면서 부엌에 있는 전화기를 통해 라디오방송에 출연할 때 재즈의 악절 같던 그 '전화 목소리'. 학교에서 돌아온 딸을 맞이하던, 높은 새소리 같은 목소리. 그리고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달래듯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목소리. (p.139-140)



우리는 죽음 앞에 숙연해지지만, 누군가 함께 했던 기억을 안고 사는 그 그리움 앞에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목소리가 아주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한 사람에 대해, 그가 가진 목소리는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지만,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의 기분과 상태, 감정 같은 것들. 실제로 얼마전에도 나는 '그렇지 않은 척' 전화를 받으려고 했지만 상대로부터 '왜 심란하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니'라고 해봤자 다 들키고 말았다. 목소리는 내가 내 상태를 말로 꺼내기 전부터 내 상태를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남편의 완벽한 목소리가 그립다, 라는 문장에서 '완벽하'다는 것은 그의 목소리가 정말 '완벽'에 가까운 목소리여서가 아니다. 그가 그였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완벽했던 것.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는 문장 자체로 그의 죽음이 확 느껴진다. 그것이 현실이 된다. 그 그리움 앞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함께 살았고, 숱한 목소리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고 들었으며, 거기에는 수많은 상황들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 민낯을 마주하듯,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잠에 취한 목소리를 그들은 서로에게 들려주고 들었을 것이다. 잠들기 전에 귓가에 속삭이던 나지막한 목소리 같은 것들도,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 음의 고저로, '우리만이' 알 수 있는 톤으로 들려주고 들었을 것이다. 이제 한 쪽이 생을 다했고, 그러므로 아직 생을 살고 있는 이쪽은 그 목소리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단, 죽음만이 둘을 갈라놓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세상에 둘 다 발 붙이고 굳건히 살아있다해도, 내가 당신의 목소리를 또 당신이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날이 언젠가 올런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내내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에 대한 많은 것을 그리워할 것이고, 특히 목소리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레이든 카터'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이 책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올봄 로스앤젤레스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에밀 허시라는 젊은 배우가 잔뜩 흥분해서 다가왔다. 내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히친스의 자서전 《히치-22Hitch-22》를 읽었고, 그가 쓴 키신저 책에 푹 빠져 있다면서 히친스의 글처럼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글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p.7)



나는 '에밀 허시'라는 배우에 대해 처음 들어보는 바, 당장 스맛폰으로 그를 검색해보았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보니 내가 본 영화가 없더라. 그러나 보지도 않은 채, 나는 이 에밀 허시라는 배우를 아주 높이 사기로 했다. 히친스를 읽고 히친스의 글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배우라니. 이 얼마나 근사한가! 나는 이제야 고작 히친스의 책을 한 권 읽었을 뿐이지만, 히친스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 책 한권을 읽고, 나는 고작 이만큼만 읽고, 히친스를 그리워한다. 그의 신랄한 비판과 유머감각에 즐겁게 책을 읽어가다 결국 숙연해지고 말게 한 히친스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의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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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신나지?
    from 마지막 키스 2016-02-02 16:01 
    아하하하. 이 책 재미있다. 처음부터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내가 성경을 이미 읽어본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지만, 어릴적에 교회 다니면서 잠깐 들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다. 또한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도 이미 아는 이야기들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유명한 성경속 이야기들에 대해 주제 사라마구는 '깐다'. 성경과 여호와에 대한 이 신랄한 비판에 어쩐지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랄까.'도킨스'의 책, [만들어
 
 
레와 2014-12-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읽어볼게요!

다락방 2014-12-19 08:42   좋아요 0 | URL
네, 러셀만큼 좋더라고요.

2014-12-18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9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4-12-18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이 글을 읽으니, 저도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좋아할 수 밖에 없네요!
앞서 글을 쓸 당시 다락방님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책, 좋은 작가를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4-12-19 08:44   좋아요 1 | URL
그치요, 감은빛님? 저 지성과 위트 덕에 저는 히친스 아저씨에게 푹 빠졌습니다.
다른 책들도 찾아서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분명 러셀 만큼이나 근사한 아저씨입니다.
감은빛님도 얼른 읽어보시고 리뷰 적어주세요! 히히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2-18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로운 글을 쓰는 작가네요. 덕분에 저도 한 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죽음 앞에서 위트를 잃지 않는 사람이라니. 그런 면에선 진정한 신앙인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ㅎㅎ
전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히친스의 글에 동의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신앙이 종교가 될 때 그 역시 틀에 박힌 제도가 되어 버리니까요.

다락방 2014-12-19 08:47   좋아요 0 | URL
네, 그간 모르고 살았던 게 속상할 만큼 흥미로운 글을 쓰는 분이시더라고요. 저 분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저는 어릴적에 교회를 아주 성실히 다니는 아이었는데, 제가 신앙으로 다닌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래야 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주변 어른들이 다 절실한 신앙인들 이었거든요). 굉장히 열심히 다니고 전도를 하고 했는데, 그때의 기억으로 제가 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 된 건 아닌가 싶어요. 그 일들이 제게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뭐, 이제와 어쩔 수는 없지만요. 전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많아서요. 좋은 기억이라곤 일절 없어서 그 시절을 쑥 내 인생에서 빼내고 싶은데, 그러나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된 거겠죠.

수이 2014-12-19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겠습니다. 다락방님 블로그 오면 이것도 읽고싶고 저것도 읽고싶고_ 아주 난처해져요. 제 독서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말이죠;;

다락방 2014-12-23 14:2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얇아서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야나님. 한 번 읽어보세요. 히친스 아저씨 정말 근사해요!
>.<

moonnight 2014-12-19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책에 대한 소개를 읽고 솔깃했었어요. 무신론자로서. ^^ 보관함에 잠들어 있는 책을 이제는 깨워야 할 때가 온 듯 싶네요. 다락방님 덕분입니다. 고마워요. ^^

다락방 2014-12-23 14:29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읽고 또 글 써주세요. 문나잇님 글 읽고 싶어요!!
 
스웨덴 라이프 - 스웨덴에서 여섯 번의 계절을 보내다
고지연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1. 자기 글에 자기가 색깔 입혀 강조 좀 안했으면 좋겠다. (이건 전적으로 내 취향이니 뭐 저자를 탓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자기 글 속의 자기 문장에 색깔 입히는 게 참 싫더라. (왜그럴까? 왜 싫을까, 나는?)


2. 사진마다 사진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본문만으로도 대충 알긴 하겠는데 그래도 각 사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면 좀 더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스웨덴은 살기 좋은 나라인 것 같다. 밑줄들이 생생한 증거.




스웨덴에서 '교육'은 철저하게 공공서비스다. 국민이 공부를 하고자 할 때 금전적인 문제로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보장해준다. 우리나라 헌법 역시 모든 국민이 능력에 따라 균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실상은 경제적 능력에 따라 교육의 기회가 제한된다. 안타깝게도 형식적 평등이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부모의 소득과 상관없이 누구나 정부의 지원금을 받으며 대학에 다닐 수 있다. 스웨덴 교육 철학의 근간이 '평등'과 '기회의 균등'이기 때문이다.

"재정적 지원의 목적은 학생들이 학업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보다 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재정적 지원을 통해 개인과 집단 사이의 차이를 없애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이게 스웨덴 정부가 학생들에게 다양한 재정적 혜택을 제공하는 이유다. (p.220-221)



크- 우리나라는 애들 밥도 안 먹이려고 하는데...





스웨덴에는 진료비 연간 상한선이라는 게 있다. 연간 상한선은 20만 원이 채 되지 않고, 일년 이내에 진료비가 연간 상한선을 넘어가면 그 이상의 금액은 모두 정부가 부담한다. 거의 모든 주에서 20세 미만 환자의 진료비가 무료이며, 치과 진료 역시 무료로 받을 수 있다. (p.101)

이 곳의 아빠들은 최소 두 달에서부터 길게는 일 년까지 유급으로 육아휴직을 가졌다. 법적으로 부모에게 보장된 유급 육아휴직 기간은 아이 한 명당 480일. 이 기간은 부부가 나눠 사용할 수도 있는데, 이 중 60일은 반드시 아빠가 사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엄마가 240일을 먼저 사용하고 직장에 복귀하면 뒤이어 아빠가 240일을 사용한다. 내가 아는 커플도 이렇게 반씩 나눠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부부가 절반씩 육아휴직을 사용하면 세금 감면 혜택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480일 유급 육아휴직은 법적으로 보장된 최소 기간이기 때문에 최근 많은 회사들이 직원들에게 더 긴 유급 육아휴직을 제공한다. 480일의 육아휴직은 출산을 한 경우뿐만 아니라 입양을 한 경우에도 적용된다. 한 부모 가정의 경우에는 엄마 혹은 아빠 혼자 480일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출산 휴가와 육아휴직 기간이 끝나면 아빠와 엄마 모두가 자연스레 직장에 복귀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시내 중심가의 카페에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 혹은 아빠들이 가득했던 것이다.(p.192-194)

특히 유모차를 끄는 부모와 유모차에 탄 아이는 무료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버스 내에도 유모차 전용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부모들은 편리하게 유모차를 끌고 외출이 가능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아이를 키우는 것이 덜 힘들어 보였다. 육아의 책임을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과 사회가 공동으로 부담하고 있었으니까. (p.19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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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12-05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존재한다는 거죠.
큰 아이 낳고 3개월 휴가 쓸 때, 친구가 제게 ˝너 좋은 회사 다닌다˝고 했었죠.
제가 막 웃으면서, 좋은 회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이 정도는 되어줘야되는데, 아이당 480일이면. 엄마가 8개월, 아빠가 8개월쓰면,
아, 엄마도 아기도 행복하겠어요. 우리도, 그런 날이 올까요?

치과 진료 무료? 아하하하하하핳.....................

다락방 2014-12-07 20:14   좋아요 0 | URL
네,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런 나라가 존재하네요, 단발머리님.
스톡홀름에 가보고 싶어졌어요.

저희 회사 공장중 한 곳은 고작 2개월의 출산 휴가를 주면서 그마저도 다 채우기 전에 좀 나와달라고 전화하기도 했답니다. 엿같은 일이죠. 아 싫어...

치과 진료 무료..우린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은데 씁쓸하네요. 후..

보물선 2014-12-05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울까봐 안읽습니다.

다락방 2014-12-07 20:14   좋아요 0 | URL
네 부러워요. 우린 뭔가..하고 말이지요. 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