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층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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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엄청나게 좋아할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가 담배를 피운다고 해도 싫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푸쉬업을 한 손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가 푸쉬업을 하지 못했어도 그를 똑같이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웃음소리가 좋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웃지 않았어도 그를 많이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공부를 잘했던 게 좋다, 그러나 그가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그에게 실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게 좋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해도 좋아했....을까? 뭐, 아마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좋아했으므로 그에게서 아주 여러 개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 눈에는 그의 모든 것들이 장점으로 보였지만, 그가 또한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렇게 머리를 자르지 말고, 그런 옷을 입지 말고, 그렇게 운전하지 말고, 그렇게 먹지 말고, 그렇게 웃지 말고, 그렇게 하지말고, 하지말고, 하지말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이 가해질 수 있는지를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산다. 분명 폭력적인 말과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사랑해서 그래'라고 하면 그런가, 하고 갸웃해서 그대로 따르게 된다. 나중에, 자신이 아예 망가지고 부숴지고나서야 '그때 그게 사랑이 아니었구나, 그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이었어'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내 안에 커다란 상처가 자리잡고난 후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사랑이란 그 말 하나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것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사랑한다니까, 그게 사랑이라니까 견디고 참고 지탱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많은 사항들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다. 그래서 반짝거리는 섀도우를 사고 싶고, 핑크빛 볼터치를 사고 싶다. 목에 두를 예쁜 스카프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예쁜 원피스도 여러벌 장만하고 싶다. 구두도 샌들도 다 새로 사고 싶고, 더 예뻐지고 싶다. 이건 상대가 내게 요구한 게 아니다. 섀도우를 사라고, 원피스를 사라는 말을 들은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 잘 보이고 싶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나를 가꾸고 싶은 것이다. 나는 최상의 사람의 되고 싶고 이것이 내가 그를 좋아하는 데서 나오는 당연한 현상이다. 최상의 나는 그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자 나의 의지의 발현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이 '그의 요구'여서는 안된다. 그의 요구로 인해 내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폭력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이 책의 '오사'는 대학에 들어가 남자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는 학교내 모두에게 인기가 많고 잘생겼다. 이런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사한 남자다. 그러므로 오사도 그에게 푹 빠진다. 그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녀는 그에게서 이상한 점들을 보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할 때는 눈을 꼭 뜨라고 말한다. 감고서 니가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떻게 아냐며. 또한 다른 남자들이 옆에 지나갈 때 본인에게 애정 표시를 하지 말라 말한다. 니가 저 남자를 원해서 나에게 애정을 표현하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이 모든 질투들을 단순히 사랑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거라 여겨 그녀는 그냥 넘긴다. 때로는 너무 심한 말들도 그녀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는 그녀에게 모든 친구들을 끊을 것을 요구한다. 그녀의 친구들은 최소한 남자 다섯명하고는 자봤을텐데 그런 여자들은 창녀라면서. 그녀에게도 화장하지 말고 다니라고 하고 그런 옷차림으로 다니지 말라고 한다. 창녀같다고. 문신도 지우라고 말한다, 창녀같다고. 그녀는 자신이 그간 사귀었던 남자들을 세어보며 잠들기 전, 나는 창녀인가 아닌가를 고민한다. 그녀의 방에 있는 모든 그림 액자들은 치워져야 했다. 불결해서 못오겠다고 그가 말했으므로. 그가 요구하면, 그녀는 가족과 통화를 하다가도 전화를 끊어야 했고, 그녀의 방에는 그가 아닌 다른 누구도 와서는 안되었다. 여자 친구일지라도.


그러다 그녀는 급기야 '맞는다'. 그가 무릎으로 그녀의 배를 때리고, 그녀는 '맞는다'는 데서 온 충격에 휩싸인다. 그녀의 머릿속에도 맞는 순간 그에게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녀는 체념한다. 그녀에겐 이제 친구도 아무도 없고 그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한 번 시작된 폭력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녀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로 그에게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고, 운전하는 차 안에서 그로부터 험한 말들과 주먹을 받아내야 한다. 그는 그녀를 혼내줄 장소로 차 안을 선택했다. 그는 운전하지 못하므로 운전은 그녀의 몫이고, 차 안에서 운전중인 그녀의 반항력은 힘을 잃고, 차 안에서 그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다 최종적으로 그는 차 안에서 그녀의 손가락 살점을 물어 뜯는다. 살점을 물어 뜯긴 그녀는 그로부터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멀리 떨어져있던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 일을 말하고, 학교의 여자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말한다. 


아버지와 교수는 그녀를 돕는다. 교수는 그녀에게 재차 병원에 꼭 가라고 권고했으며, 그녀는 병원에 가서 말하지 못할 줄 알았지만 울음을 터뜨리며 의사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얘기한다. 이 일로 남자는 벌을 받게 되었고, 그녀는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힘이 세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아름답다고 말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한심하다고 하면,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한심한 사람이 되어 절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예전에 읽은 책,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에서는 '울면서 잠들게 하는 사람을 친구라 할 수 있을까?' 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나는 한심하고 찌질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그 안에 있을 때, 사랑-이라 생각하는 바로 그 감정-의 중심에 있을 때는 들지 않는다. 다만 상대의 말만이 아주 강하게 나를 후려칠 뿐이다. 이 책 속의 여자도 창녀가 되었고 값싼 여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서. 머리 색을 바꾸고 화장을 안하고 옷을 전혀 다르게 잆어야 했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잃었다. 


사람은 힘을 가질 수 있고, 그 힘은 제대로 발휘 되어야 한다. 그의 말이 내게 아주 강한 것이 되고 나의 말이 그에게 아주 강한 것이 되는데, 거기에 대고 상대를 깔아뭉개는 발언을 함으로써 상대의 인격을 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든다면, 그건 힘을 가진 자의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면, 우리는 그 감정 혹은 그 관계로 인해서 더 나은 방향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외로워지고 힘들어지고 내가 한심해진다면, 그것은 사랑이 만든 것이 아니다. 폭력이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체념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주변에 아무도 없고 그에게 길들여졌어, 이게 어쩌면 사랑일지도 몰라,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별 수 있겠어?, 그는 때때로 잘해주기도 하잖아, 등으로 내가 나 자신을 이 폭력의 상태에 두어서는 안된다.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가슴 속에 의혹이 자라난다면, 주의 깊게 그와 나를 들여다봐야 할 일이다. 또한 맞기 시작했다면,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반드시 돌이켜보자. '때리는 남자는 절대 안된다'고 분명히 생각해왔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한번 뿐' 이라든가 '실수겠지' 라는 말로 이 사건을 덮어둬서는 안된다. 힘들고 아프고 두려움이 찾아오겠지만, 사랑이란 감정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행복은 나의 최면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나의 강요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저절로 우러나는 감정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더 어떤 말을 보태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 속의 여자가 그 상황에서 뛰쳐나왔고, 그걸 이렇게 책으로 써낼 수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을거라고 내가 막연히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 헤인스'의 데이트 폭력을 다룬 소설, 《어두운 기억속으로》에서도 여자를 사랑하는 완벽한(줄로만 알았던) 남자는, 여자를 친구들로부터 고립시켰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그는 그녀의 친구들마저 통제한다. 그녀를 고립시키는 것이 자신의 힘을 그녀에게 더 잘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일텐데, 그렇다는 건, 남자 역시 그들의 그런 성향을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된다는 걸 이미 자각하고 있다는 뜻일테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이 책속의 작가는 결국 해냈지만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다른 사람들이 혹여라도 연애를 하면서 어떻게 '그런 남자'인지 알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겟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세상과 격리시키면서부터. 그녀의 옆에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폭력의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녀로 하여금 대화를 하고 웃고 의지하게 되는 사람이 '나 하나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데이트 폭력의 시발점이 아닐까. 그래야 온전히 자신의 힘을 그녀에게 쏟을 수 있을테니. 그러므로 의혹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 데이트를 시작하게 된 남자가 차츰차츰 내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면, 온전히 자신에게만 의지하기를 원한다면, 그때부터 나는 그를 경계하기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줄 수 있는게 뭔지, 무엇을 줘야하는지를 자주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이 감정이 나를 결국은 행복하게 하고 웃게 하는지. 사랑이란 단어를 듣는 데 흥분이 되는 게 아니라 무섭고 외롭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관계속에 있다면, 그 관계 역시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사랑은,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니고, 아프게 하는게 아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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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5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6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