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역사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동안 시간 여행은 참으로 행복했다. 무릇 책은 온 영혼을 바쳐 써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독자가 몰입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다. 내용과 무관하게 저자의 내밀한 고백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이다. 가볍고 즐거운 방법이라도 그것이 독자의 내면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독자와 작가의 궁합도 필요하다. 독자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책이 선택되고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고 서로 소통하며 독서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일면식도 책꽂이에 좁은 책등을 내보인 채 일렬로 서 있는 책들을 볼 때마다 반추한다. 제목과 저자를 떠올리고 내용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흐린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소파에 앉아 책장을 훑어보는 일은 그래서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그것은 내가 지내온 시간의 역사이기도 하며 흘러온 과거의 추억이기도 하다.

  한 개인에게도 삶의 굴곡이 있고 결정적 순간이 있으며 변화의 시점이 존재한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는 말해 무엇 할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나의 사유 방식 그리고 나의 미래를 말해준다.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경태의 <역사>는 탁월하다. 수많은 역사책을 뒤적여보았지만 내게 필요한 책은 바로 이런 책이었다고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역사책이 아니다. 연대기적 서술이나 사실의 확인을 위한 역사책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시공간을 가로질러 웅장한 교향곡과 같이 연주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저자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이 아니라면 이런 책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역사 자체의 의미를 묻거나 역사의 관점에 대한 논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평가, 유사한 사건이나 개별적 인물들의 공통점 등 역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의 보고이며 확대 재생산이 가능한 학문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안목과 특별한 관점을 선보인다.

  스스로 ‘문외한’이라 칭한 저자의 겸손은 지나치다. 전문 역사가의 몫은 따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크로스오버나 퓨전을 전문으로 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는 돋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과 평가지만 이 책은 저자의 노력에 값하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6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작년에 구입하고 유일하게 읽지 못한 책이었다. 집중해서 시간을 들여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학>, <개념어사전>, <스토리철학18> 등을 통해 보여준 인문학적 지식과 활용 능력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저자를 믿고 구입하고 읽고 기대 이상을 충족한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 책의 면면을 살펴보자.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탄생은 역사가 시작된 단계와 문명 이전의 선사시대를 다루고 있다. 2부 성장에서는 제각각 걸어온 시기를 다룬다. 13세기 무렵까지의 역사가 되겠다. 가장 중요한 3부 만남과 섞임에서는 두 문명이 본격적으로 조우하는 과정을 그리고 문명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과정들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마지막 4부에서는 두 문명의 차이와 오늘날의 영향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잘 짜인 대하 역사 드라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해석이나 중요했던 순간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두 개의 문명 축을 중심으로 그 성격을 규명하고 차이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게다가 현실적 관점에서 그 연원을 밝히는 논평은 작가만의 시각을 개성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에 연표가 붙어 있다. 시기별로 연대별로 정리된 중요한 사건들을 훑어 볼 수 있으며 내용의 흐름에 따라 찾아 볼 수 있지만 개별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정확한 연대기가 필요하다면 잘 정리된 다른 책을 참고하면 될 듯싶다. 이 책은 역사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유목한다. 연대를 거슬러 유사한 사건과 인물들을 배치하기도 하고 동서양을 넘나들며 정치제도와 경제적 토대를 비교하기도 한다. 문화적 차이와 삶의 토대는 역사적 관점이 없다면 그 연원을 밝히기가 힘들다. 단순한 사건과 개별적 사실들이 한 데 어우러져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동양 문명의 중심은 중국의 중원이라는 땅 덩어리였지만, 그에 해당하는 서양 문명의 중심은 지중해하는 바다였다.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의 차이다. - P. 50

  분열과 분산을 본성으로 하는 유럽 문명에 최소한의 통합성을 부여한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로마제국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다. 그것들이 있기에 유럽의 중세 문명은 역사적․현실적 동질성과 함께 종교적․정신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P. 148


  동서양 문명의 차이는 물론 유럽 문명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한 마디로 짚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배경과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하게 밝혀내고 하나의 맥락으로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책은 맥락읽기가 가능한 책이다.

  문제는 독자의 입장에서 단순한 흥미와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저자의 관점에 동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오늘날 벌어지는 사회 경제적 문제들의 연원을 밝히는 데 그 연결고리를 제대로 이어져 있는지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책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본적인 태도와 관점의 유사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수레바퀴처럼 그 흔적들을 따라가고 있다. 전철을 밟는다는 표현은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에는 지름길이 있을 뿐 결코 비약은 없다. - P. 547

고 말한다.

개인의 의식적 행위가 역사적 무의식의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민간 부문의 활성화를 축으로 하는 서양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이 바로 서양 문명을 세계 문명으로 이끈 힘이다. - P. 285

  동양의 역사에서는 국가 체제가 아주 일찍부터 발달했으나 묘하게도 ‘국민’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다. ‘백성’은 언제나 있었어도 ‘국민’은 20세기의 산물이자 서양식 근대화의 결과다. 그 이유는 통치의 룰이 달랐기 때문이다. 동양의 지배자는 권위에 기반해 국가를 경영한 반면 서양의 지배자는 계약에 기반에 국가를 경영했다. - P. 328

  국가를 유기체처럼 여기고 개인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받드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점이다. 동양의 역사와 우리 역사에서는 늘 정치, 즉 나라의 경영이 모든 것보다 우선했고 일찍부터 관이 민을 지배하는 체제가 자리 잡았다. 공화국 전통 60년이 넘은 지금도 우리는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P. 638


  의도된 역사는 없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과거를 토대로 할 뿐이다. 저자는 그것을 무의식의 결과라고 표현했다. 서양의 문명은 물처럼 흘렀고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지만 동양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통제되었으며 하나로 수렴되었다. 얼마나 큰 차이가 벌어졌겠는가. 그 결과는 오늘 우리가 확인하는 그대로이다.

  시민혁명의 경험 - 그 소중한 경험이 우리에겐 없다. 백성과 국민은 있었지만 시민은 없었다.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생각할 때 가장 아쉽고 통탄할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겪어온 시간의 흔적이다. 가정법 없는 역사에서 안타까움을 찾아내기 보다는 미래를 위한 비전을 읽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와 사회,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저자의 평가를 부정할 수 없다. 역사는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를 거울에 비춰보는 행위이며 내일의 지표를 설정하는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에필로그가 더없이 뼈에 사무친다. 우리는 역사를 아직도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역사적 관점은 인문학적 관점이다.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현실의 문제는 누가 무엇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문제의 해법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는 대단히 유용하며, 보이지 않는 지름길을 찾는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인문학이 그에 마땅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풍토다. - P. 657

09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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