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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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행동이다’라는 J. 네루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책의 종착역도 행동이다. 책은 사상의 집합체이며 인간 지식의 결정체다. 누가 뭐래도 인간의 호기심은 책을 통해 확인될 수밖에 없다. 책은 가장 은밀하고 수준 높은 영혼의 교류였으며 말없는 혁명가였다. 아무나 책을 쉽게 접할 수 없던 시대에 책은 지식이었고 권력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책을 따라 흘렀고 책을 통해 펼쳐졌으며 책을 통해 변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의 경우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책의 문화사를 정리할 만하다. 이민희의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은 기득권 세력이나 왕의 입장과 달랐기 때문에 화를 입었던 책이나 저자의 생각이 시대와 불화하여 일어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던 책 이야기를 적고 있다. 책은 어느 시대에나 불온하며 위험하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책의 운명들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을 이용한 정치와 기득권 세력과 왕의 장난이다.

  근대 이전의 시기였기 때문에 책의 의미와 역할은 더욱 컸다. 글을 알고 책을 읽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던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은 양반들의 이야기이고 정치의 이야기이며 권력의 이야기이다. 글 모르는 대다수 서민들은 이 책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끼어들 틈이 없다. 한글이 의사소통과 문자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는 18세기 이후에나 책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책의 역사는 슬픔과 고통의 역사다.

  방각본 소설이 나와 전기수가 활약했다는 것은 책이 그만큼 귀하고 글 아는 사람이 적었다는 반증이다. 누구나 쉽게 책을 살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시대는 긴 인류의 역사에서 정말 얼마 안 되는 시기의 이야기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발표로 책 판매량을 급증시켜주었듯 이제는 금지도서나 불온서적은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키고 호기심을 높여줄 뿐이다. 책 뿐만 아니라 여전히 노래 가사를 검열하고 영화를 심의하는 나라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자니 좀 우습기는 하다.

  조선시대의 책 이야기는 현재의 관점에서 흥미롭다. 책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조선의 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을 취한 이 책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책의 ‘문화사’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는 조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실록이나 다른 사료 등을 통해 드러나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역사의 갈피들 속에 씨줄과 날줄처럼 이야기들이 얽혀있고 교묘하게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 틈을 정확하게 읽어주고 있다.

  단순히 저자의 상상력이나 추측성 발언으로 흥미를 끌어내는 책은 아니다. ‘책’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맥락, 역사적 인물들이 보여준 태도 등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진 사건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는 평면이 아니고 입체적이다. 역사는 죽은 미라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다. 

  사실에 대한 재해석이 역사라면 책은 해석의 기준과 잣대로 훌륭한 역할을 한다. 한 권의 책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세계관이나 학문적 깊이 혹은 내용의 새로움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 가능한 것이 책이지만 그 책이 탄생하게 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전의 경우 그 책이 갖는 의미를 절반 밖에 읽어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책의 문화사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열 세가지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야기보다 더 흥미 있는 형식은 없다. 채수의 ‘설공찬전’이 사림의 훈구파 사냥으로 비화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책은 문을 연다. ‘조선책략’을 통해 구한말을 들여다보는 일은 답답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500여 년을 이어온 왕조에 대한 애틋함이 아니라 500년 동안 그 모순과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서민들의 삶이 원통함이 읽힌다.

  이 책을 덮으면서 책과 무관하게 이렇게 모진 역사를 지탱하고 견뎌낸 것은 기득권의 모략과 우국충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조차 읽을 수 없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민중들의 생각은 이 책들에서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읽고 싶어졌다.

  지식이 곧 권력이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식에 접근하는 경로조차 차단되고 비밀에 부쳐지던 역사를 견뎌온 21세기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한 재미로 그칠 일이 아니다. 아직도 상식 밖의 일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 현실의 길을 책에서 고민하는 것 뿐이다.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모든 지식을 전해주지만 어떤 길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길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쓰인 책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것을 고찰하는 일은 단순히 역사에서 교훈을 읽어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과정과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일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책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의미가 퇴색하고 세상이 달라졌지만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선인들의 삶까지 퇴색하지는 않았다. 푸르게 살아 숨 쉬는 정신들을 본받거나 되새기는 일이 중요하다. 한 권의 책을 둘러싼 무협영화 같은 주변 이야기는 흥미와 호기심을 위한 당의정일 뿐이다.
 
  각 이야기들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일곱 개의 ‘조선의 책이야기’는 책의 흥미와 여백을 훌륭하게 이어준다. 조선 시대 전체를 망라할 순 없지만 대표적인 책과 관련된 사건들을 통해 당시의 사상과 문화, 정치와 외교를 읽어내는 재미는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이다. 더구나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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