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문화사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 돌베개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 해가 지고 완전한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의 시간. 그 푸른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이며 낮과 밤의 고비를 넘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파스텔톤 여명의 그림자 때문이다. 어둠이 사라지고 파란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보다 고즈넉한 해질녘이 훨씬 편안하고 여유롭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휴식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밤을 맞이하는 것을 누가 반기지 않겠는가. 밤은 그렇게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선사한다.

  낮이 노동과 의무의 시간이라면 밤은 휴식과 자유의 시간이다. 사회적 관계로 얽매인 시간이 낮이라면 개인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밤이다. 밤은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모호함과 마술의 시간이다. 현대인에게도 밤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진부한 말이 아니어도 개인이든 사회든 밤은 낮보다 대담하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감성의 시간이다.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낮의 시간보다 모든 것을 신비로움 속에 감추어 두는 밤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닮았다. 밤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였으며 어떤 역할을 했고 인류 역사에서 두려움의 존재로만 인식되었을까? 도대체 밤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렇게 인류 역사의 반쪽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해 보인다. 로저 에커치는 밤의 역사를 기막힌 솜씨로 풀어 정리했다. <밤의 문화사>는 근래 보기 드문 재밌는 책이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물론 정보와 재미를 선사한다. 인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전해준다.

  역사적인 사건과 영웅 중심의 거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참 재미있는 일이 많다. 생활사 혹은 미시사로 명명되는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진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이런 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저자는 20여 년간 준비해온 자료와 연구를 통해 근대 이전의 ‘밤’이 어떠했는지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어진다. 이 책의 진가는 읽는 동안 한 마디, 한 장면이 풍부한 상상력과 철저한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산업혁명 이전 서양 사회로 한정되어 있더라도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아니다. 다른 지역의 밤에 대한 역사가 쓰여진다면 그 또한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기대해 본다.

  이 책은 공포로부터 시작된다. 1부의 ‘죽음의 그림자’는 밤의 위험에 대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가로등도 없고 통금이 있던 시절 치안은 어떻게 유지되었을까. 야경꾼과 도둑 사이의 흥미진진한 관계는 한 편의 영화처럼 아득하다. 경찰이 만들어져 시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보다 도둑맞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현대사회가 반증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약탈, 폭력, 방화로 대표되는 밤의 그림자는 죽음과 맞닿아 있었지만 말이다.

  ‘자연의 법칙’은 교회와 국가로 대표되는 공적인 기관에서 밤을 대하는 태도와 민간에서 밤을 맞이하는 방법은 조금 달랐다. 당국은 나약했고 가정은 요새가 되었다. 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처럼 가로등도 없고 불빛도 없는 거리를 생각해 보면 과거의 밤은 지금과 밤과 많이 달랐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양초로 대표되는 불빛은 이제 인간의 노동시간 연장을 의미하기 시작한다. ‘밤의 영토’는 점점 넓어지며 모든 사람에게 사교와 성과 고독을 선사한다. 평민들에게도 밤의 시간이 주어지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여유와 휴식의 시간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방종과 쾌락에 빠지기도 하며 영주와 귀족에게는 그들만의 리그가 열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완전한 ‘사적인 세계’로 밤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잠을 두 번에 나누어 잤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하다. 첫 잠을 깬 후 담배를 피우고 대화를 나누고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과거의 밤이다. 지금과는 삶의 리듬이 달랐고 인공 조명의 피해가 훨씬 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세말기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밤의 역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로부터 점차 밝은 빛의 세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과연 낮의 연장이 완전히 실현된 24시간 체제의 현대가 그때보다 발전되거나 진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둠이 줄어들면서 사생활과 친밀감과 자아 성찰의 기회도 훨씬 드물어질 것이다. 기어이 그 밝은 날이 오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는 소중한 우리 인간성의 절대 요소를 잃게 될 것이다. 이는 어두운 밤의 심연에서 지친 영혼이 숙고해봐야 할 절박한 전망이다. - P. 436

  밤은 여전히 우리에게 휴식과 안정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직업과 상황에 따라 밤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오랜 습성을 인공조명으로 바꾸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고 즐거운 일도 아니다. 삶의 시간이 연장된다는 측면에서 밤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밤이라는 특별한 시간에 벌어지는 온갖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이제는 당연하기만 하다.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개의치 않는 것은 자본과 욕망뿐이다.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명상에 잠기는 밤은 매우 사적인 시간이다. <밤의 문화사>는 인류가 걸어온 한 시대의 밤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며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밤’에 대한 오래된 기억들이다.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밤에 무엇을 했으며 하루 일을 마치고 어떻게 지냈을 지 궁금하다.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꼼꼼한 자료와 꾸준한 연구를 통해 생생하게 살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양의 밤이라고 해서 무어 그리 특별했을까마는 문화의 차이만큼은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인 것만은 틀림없다. 여전히.

0811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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