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과 매혹
레이첼 에드워즈, 키스 리더 지음, 이경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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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슬랭은 친구들과 브리지 게임을 하고 아내와 딸과 함께 사위의 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현관문은 굳게 잠긴 채 미친듯이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다. 더욱이 하녀들이 있는 다락방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다. 두 시간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경찰서에 가서 세 명의 경관과 함께 집 뒤쪽의 창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2층으로 가는 계단위에 극심하게 난타당한 채 허벅지와 다리가 처참하게 잘린 랑슬랭 부인과 딸 주느비에브 랑슬랭을 발견한다. 정말 끔찍한 일은 두 모녀의 숨이 붙어 있을 때 맨손으로 뽑아낸 안구가 계단 양탄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처참한 살해 현장을 확인한 경관과 랑슬랭 씨는 입주 가정부 크리스틴 파팽과 레아 파팽의 시신을 확인하게 위해 2층으로 향한다. 하녀들의 방은 굳게 잠겨 있고 열쇠 수리공을 불러 방문을 열자 파팽 자매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살아있었던 것이다. 바닥에는 두 모녀를 살해할 때 사용한 망치가 놓여 있었으며 두 자매가 바로 살인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순순히 살인을 인정했고 살인에 사용한 칼은 랑슬랭 부인의 시체 밑에서 또 다른 도구인 양철 물병은 계단에서 발견되었다.

  이 엽기적인 살인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위한 설정이 아니라 1933년 2월 2일 프랑스의 르 망 시 브뤼에르 가 6번지에 벌어진 세기적인 살인 현장의 모습이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은 경악했으며 냄비처럼 들끓었다. 훨씬 더 끔찍한 살인 사건과 연쇄 살인범과는 비교되지 않는 특수하고 대체 불가능한 힘을 부여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재생산되는 문화의 코드가 되고 있다.

  레이첼 워드워즈와 키스 리더가 공저한 <잔혹과 매혹>은 이렇게 단 하나의 살인 사건이 가져온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선 1장에서는 살인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사실fact에만 집중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라깡과 데리다, 들뢰즈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들의 관심과 저작을 중심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있다. 3장에서는 ‘매혹당한 작가들’이라는 부제로 해석과 분석을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마지막 4장에서는 영화 속의 자매 살인자의 모습들을 분석하며 수없이 많은 영화로 최근 2000년까지 재생산 되고 있는 두 자매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살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계급 간의 갈등, 즉 주인과 하녀라는 특수한 관계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두 자매는 근친상간의 동성애자였던 사실이 밝혀지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생활을 했던 유년시절 등이 알려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논란은 증폭되었다. 언니 크리스틴 파팽은 단두대 형을 언도 받았지만 대통령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1937년 정신병원에서 사망한다. 동생 레아 파팽은 10년 노역형을 치르고 최근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의 독특한 범죄행위가 주는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맨손으로 뽑아내고 한 집에 거주하던 여주인과 딸을 망치와 칼로 두 자매가 협력해서 살해한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르트르의 <벽>, 장주네의 <하녀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연륜의 힘> 등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로렌스 하비의 영화 <의식>, 니코 파파타키의 영화 <심연> 등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후 2000년에 제작된 <살인의 상처>, <파팽자매를 찾아서>에 이르기까지 두 자매에 관한 관심을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학문적 관점과 정신분석이나 예술적 관점에서 두 자매의 삶을 재해석하고 분석하는 것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왜, 도대체 왜 그런 방식으로 두 모녀를 살해했으며, 두 자매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라깡의 문구를 빌리자면 ‘샴 쌍둥이 영혼’을 지닌 인간에 대한 보고서인지도 모른다.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한 방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미스터리가 숨어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지나치게 간접적인 서술과 지금까지 출판된 책과 영화를 통해 2차적이고 종합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본질에서는 한발 물러선 느낌까지 전해준다.

  하지만 사건 자체가 주는 ‘잔혹’과 그 잔혹이 불러일으키는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많은 작가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계속된다. 21세기에도 사람湧?삶은 이어지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는 이어질 것이다. 20세기에 벌어진 처참한 살인 사건이 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증폭되는 의문들이 이 책이 내게 건네는 의미이다.

  하늘은 회색이어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되겠지만……


200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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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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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가정법을 사용하는 일이 가장 바보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상상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을 돌아보며 아쉬움과 후회를 남긴다. 결정적 시기와 사건에 대해 후회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인류 역사의 변혁 과정에서 그 가정법을 사용하는 일은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과거를 재생하고 현재화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지성이라 일컬을 만한 지식인 하워드 진의 역사 모노드라마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marx in soho>는 즐거운 상상력이 빚어놓은 재미있는 희곡이다. 실제로 공연이 되었다고 하지만 레제드라마lese drama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배우의 연기로 각인되기 보다는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와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며 읽기 위한 희곡으로 더 어울린다.

  뉴욕은 현재 지구상의 존재하는 모든 자본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 ․ 11테러로 더 잘 알려진 세계무역센터가 있는 도시 뉴욕에 마르크스가 시대를 뛰어넘어 나타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말들을 전해줄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다.

  엥겔스와 더불어 세계를 뒤흔든 선언으로 기억되는 ‘공산당선언(1848년)’을 발표한 마르크스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엥겔스는 그보다 두 살 어린 스물여덟이었다. 이후 유럽 파리와 벨기에를 거쳐 영국에 망명한 마르크스는 불세출의 걸작 ‘자본(Das Capital)'을 출간한다. 아내 예니와 세 딸들은 극도의 빈곤과 가난 속에서 엥겔스의 도움으로 겨우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의 생활을 영위했다. 평생 마르크스를 괴롭힌 엉덩이의 종기만큼 가난은 그에게 버릴 수 없는 생의 동반자였다.

  아내 예니와 막내딸 엘레아노르는 가족의 울타리를 그를 감쌌고 또한 사상의 동반자였다. 이 책에서 프루동과 바쿠닌을 등장시켜 관객을 즐겁게 한다. 특히 바쿠닌과의 신랄한 비판과 언쟁은 극적 재미를 더해준다. 엥겔스와의 관계가 오히려 마르크스의 입을 통해서만 제시되어 소홀하게 다루어진 면이 있다. 어떤가, 어차피 마르크스라는 인물을 통해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모노드라마라는 사실만으로도 재미있는데.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항변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반증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고했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철학자다. 우리 인류 역사에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면서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일정한 거리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워드 진은 그런 인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희곡이라는 형식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모노드라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인물을 대하게 된다. 물론 실존 인물에 대한 고증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겠지만, 상상력의 폭은 넓어지고 인물은 재창조된다. 살아있는 마르크스, 얼마나 흥미로운 주제인가.

  하워드 진은 그 인물을 영국의 소호가 아닌 뉴욕의 소호로 불러 냈으며 그에게 실컷 자신에 대해 항변하고 왜곡된 자신에 대해 사람들에게 속시원히 말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한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으로는 부족하다. 실제 공연에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희곡은 공연을 관람하는 것보다 읽는 것으로 만족스러울 듯 싶다.

  뉴욕이라는 상징적 도시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행보가 뚜렷한 인관관계를 형성하며 극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 정도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좀더 세밀하고 깊이있는 대사와 뉴욕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최대한 활용한 내용으로 극이 전개됐다면 하는 아쉬움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서울에 나타난 마르크스였다면 즐겁게 읽지 못하고 우울하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의 나라 불구경하듯 현실과 동떨어진 사실이 아님에도 한다리 건너편에 세워 놓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놓쳤을 테니까 말이다. 짧지만 즐거운 상상을 통해 마르크스와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20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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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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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박근혜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기고 싶다. 다소 과격한 표현인가? ‘유신 공주’ 박근혜의 정체성부터 묻고 싶어지는 발언들이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대중은 바보인가? 대한민국의 체제 수호와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파수꾼 박근혜는 어떻게 현실 정치의 중앙에서 행세하고 있는가. 부끄러운 우리의 정치 현실의 단면을 보고 있는듯 하다. 보수과 진보, 우익과 좌익을 논하기 이전에 창피하고 부끄러운 수준의 이념 공방을 보면 대한민국을 뜨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사상의 자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문명국가 한국은 아직도 야만의 정서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는 사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문명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용인된 사상의 자유가 없다. 한국의 정치적 군사적 특수성 때문이라는 위협은 이제 지나가던 개도 웃게 되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고 국가 보안법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헌법 19조, 20조에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명시하고 있지만 사상의 자유는 인정하지 않는다. 양심의 자유에 일부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헌법 37조 2항에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 한하여 벌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어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언제쯤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반공 이데올로기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914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 존 B. 베리(John Bagnell Bury, 1861-1927)의 <사상의 자유(A history of freedom of thought)>가 박홍규 교수에 의해 완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이 책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시대별로 사람의 생각을 가두고 억압했던 인류의 역사를 종교를 통한 사상 통제의 역사로 풀어내고 있다. 각 시대별로 사상의 자유를 위해 피흘렸던 선각자들의 이론과 저작을 통해 이성적 존재라고 믿었던 인간이 얼마나 긴 세월동안 야만의 시대를 겪어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중세를 암흑기라 했던 이유는 ‘교회의 영향력이 최고도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이성은 기독교가 쌓아올린 인간 정신의 감옥 안에 사슬로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는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독교와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종교의 배타성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이성을 억압해 왔으며 고통스런 역사속에서 어떤 식으로 그것을 극복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이다.

  베리가 종교를 중심으로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 나는 거의 전적으로 종교에서의 사상의 자유만을 고찰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사상의 자유를 측정하는 온도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본문 190페이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종교가 사상의 자유를 측정하는 온도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리의 우려대로 인류의 ‘사상의 자유’는 이데올로기라는 직격탄을 맞는다.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반공을 국시로 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지독한 사상 탄압과 맞물려 언론의 자유까지 유린되었다. 종교의 근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되었으며 아직도 양심적 병역거부와 사상의 자유가 없는 지구상의 특별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분당에 800억짜리 교회가 지어지고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개신교 세계 50대 교회중 44개가 대한민국에 있으며, 세계 10대 교회 중 7개가 대한민국에 있다. 규모와 신도수로 특정 종교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한 특정 종교의 배타성이 인류 역사에서 초래했던 불행과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결합되어 자행되었던 지난날은 이대로 묻혀 가는 것인가?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 존 밀턴(John Milton), 본문 120페이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에도 이와 동일한 항의가 등장했다. “관용이란 불관용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모조품이다. 그 둘 모두 독재이다. 하나는 양심의 자유를 억누를 권리가 있다고 자처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부여할 권리가 있다고 처한다.” - 본문 133페이지

  밀턴과 페인의 말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 혹은 관용과 불관용을 논하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베리는 100년전에 설파했고 대부분의 문명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끝나버린 논쟁들을 우리는 여전히 유효한 갈등 요소로 감싸고 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난해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학교를 상대로 외롭게 싸웠던 일,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로 매년 1천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히는 일, 지금 현재 동국대 강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 논란 등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의지했던 권위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호두껍질처럼 단단하게 나를 깜싸고 있던 암흑의 세월들을 난 이제 믿지 않는다. 그 첫 단추는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채워진다. 지금 우리의 초등 교육은 어떠한가? 베리의 걱정은 아직도 유효한가? “너의 부모를 믿지 말라”는 말은 곧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에서 삶은 시작되고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촉발된다. 전도유망함의 제 1계명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면 진정한 행복을 배울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모든 노력을 총동원하여 사상의 자유가 인류 진보의 원칙이라는 점을 젊은이들에게 각인시켜야만 하는데, 그러나 걱정스럽게도 이 일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초등교육 방식이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본문 274페이지

   “너의 부모를 믿지 말라”라는 말은 전도유망함의 제1계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들은 바를 권위에 의지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경우에 정당하고 어떤 경우에 정당하지 않은가를 아이들 - 이제 막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된 - 에게 설명해 주는 것은 반드시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 본문 275페이지

 
200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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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 반민주주의자에 대한 민주주의 재판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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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학교 다닐 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을 배웠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철학자가 한 말이므로 무조건 옳다고 믿었고, 그것이 독재 정권의 통치 수단에 교묘히 이용됐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1995년에야 교과서에서 그 말이 사라졌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처라는 이야기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화인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철학의 수호자로서 아테네인들에게 누명을 쓰고 죽은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철학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니 지금도 그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좀 더 공부하거나 좀 더 깊게 고민해 볼 일이다.

  하늘이 아니라 땅이 움직인다고 처음 주장하기 시작한 코페르니쿠스의 이야기를 듣는 심정은 어땠을까? 박홍규의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가 ‘이성’의 철학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철학의 아버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저자는 차근차근 조목조목 따져나가고 있다.

  최근 많은 교양인(?)들을 위해 백과사전 요약식의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바로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이다. 저자는 우선 이 책을 인용하며 슈바니츠가 유일하게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비판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대화법은 진정한 의미의 대화도 아니고 막가파식 대화법으로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추궁하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끊임없이 물어 늘어지는 대화법을 통해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 하나를 깨우쳐 줄 뿐이라는 것이다. 알든 모르든 이런 놈을 만나면 말을 하지 않거나 주먹질을 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소크라테스 철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물론 비판할 만한 철학도 없는 사상가가 소크라테스라고 말한다. 글 한줄, 책 한권 남기지 않은 철학자를 제자 플라톤의 저술에 의해서 되살려내고 그의 사상을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철인 정치를 주장한 반민주주의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한나 아렌트와 칼 포퍼에 의해 명확하게 구별된다. 그 문제는 두 사람의 저서를 통해 확인하면 될 문제고 이 책에서는 크세노폰의 <회상>, <변론>과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등이 주된 참고 문헌이 된다. 이외에도 그리스의 희곡들과 그리스 민주주의에 관한 투키디데스의 <전쟁사>, 헤로도토스의 <역사>등 충실한 자료 분석을 통해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과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의자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고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이다. 그의 철학과 죽음에 대한 오해가 2천 4백년이 지나도 바로 잡히지 않고 비민주적인 철학과 철학자들에 의해 추앙되어 온 사실을 비판한다. 그래서 저자는 직접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하고 소크라테스가 재판받은 장소를 확인하며 그리스의 하늘과 땅과 그 곳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한 인문주의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에 대한 바로 알기는 이렇게 시작되면서 그의 선언대로 소크라테스와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는 의미의 선언문으로 읽을 수 있다.

  모든 인물이나 사상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의 사회사와 연관지어 하나의 고리에서 바라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역시 그가 살았던 당시의 아테네 민주주의와 무관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소크라테스 재판이 마치 정치적인 희생양을 만든 재판인 양 다루어져 왔다. (본문 42페이지)

  이것을 밝히기 위해 저자는 소크라테스 재판의 의미를 면밀히 검토한 후 가장 많은 부분에 그리스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검증하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대한 분석과 부당함을 제시한 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그리스 민주주의의 파탄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책을 맺는다.

  책 전체의 논리성은 저자 나름의 방식임으로 문제 삼을 것이 없고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통념을 완전히 되엎을 만한 이러한 주장과 알지 못했던 사실들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들을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에 대한 저자 개인의 경험과 반감은 이 책과무관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법제도에서 드러나는 전문 재판관의 문제를 그리스의 민중재판 과정을 통해 보완할 수 있으며 - 이를테면 배심원 제도나 참심제도 -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방법론까지 폭넓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전체에 밑줄을 긋는다.

  비판이라는 말은 가치 중립어이다. 비난과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건전한 비판의식과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사상의 자유가 밑바탕이 된 사회에서 논의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이제 좀 더 폭넓은 시각과 주장들이 나와 줄 것을 믿는다. 어렵지 않게 소크라테스에게 한발 다가섰다가 그의 실체를 확인하고 두 발 물러서게 만든 재미있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박홍규의 교수의 한마디가 이 책을 정리할 수도 있을 것같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 주눅(?) 들었던 많은 사람들, 쓸데없는 존경심을 품었던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민주주의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언행을 한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적 행위는 응당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언행 때문에 그가 고발당하고 사형에 처해진 것은 분명 부당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국가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회의를 느끼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그리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최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횡세서 그나마 차선의 방법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용을 베푼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기에 여전히 믿음과 희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신념에서가 아니라 반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를 적대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런 민주주의는 옳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본문 80)


200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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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즐거움 - 문화적 교양인이 되기 위한 20가지 키워드
박홍규 외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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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 중 마지막 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자아실현의 욕망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인간을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육체적 공복감을 채우고 나면 정신적 공복을 채우기 위해 목말라 한다.

  인간이 살아온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면면을 이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통해 통시적 관점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면서 공시적 관점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철학과 예술이 걸어온 길들을 더듬고 나와의 관계를 확인 일, 그것이 교양이 아닐까?

  그러나 교양이 문화 일반에 대한 얄팍한 백과사전식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급 정보를 습득하고 폭넓은 사유를 통해 그것을 소화하여 내것으로 만드는 소화제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각 분야의 발전 속도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자고 일어나면 묵은 정보와 지식으로 가득한 현대인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로 지식과 정보에 목말라하며 속도에 대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이런 시대에 교양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북하우스에서 나온 <교양의 즐거움>은 현학 취미가 아닌 사람들에게 교양을 위한 작은 지침서 혹은 안내서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잡다한 정보의 지식의 나열을 위한 잡문들과는 종류가 조금 다르다. 한길사에서 2003년에 나온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이라는 책은 53명의 필자가 철학과 인문학, 사회학과 현대 사회의 쟁점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며 그 분야의 권위자들과 대표 저작들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무려 9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책으로 기가 질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칼날같은 시선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듯 하지만 그 많은 쟁점들을 기억하거나 다시 돌아보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교양의 즐거움>은 오히려 작은 책이다. 2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학, 철학, 미술, 사진, 만화, 사진, 건축, 음악, 영화,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만 혼란스럽거나 잡다하다는 느낌이 없다. 우리 나라 최고의 필력을 자랑한다는 필자들의 소개답게 주제별로 흥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월간 <신동아> 2003년 1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것을 새로 손보았다는 이 책은 편집장의 주문대로 ‘아카데믹’과 ‘저널리스틱’의 중간쯤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는 면에서 성공한듯 싶다. 아무데서나 접할 수 있는 흥미위주의 가벼운 내용은 넘어서면서도 지나치게 학문적인 용어와 접근을 배제하여 일반인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항목별로 그 분야의 역사와 기본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일반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적 상황이다. 외국의 번역서는 그야말로 교양으로 그칠 수 있겠으나 이 책은 현재 우리 상황에 접목되고 있는, 혹은 활발하게 논의되거나 진행되고 있는 문제들까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국내 학자들의 글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다.

  어떤 책이든 한 권의 분량에 20개의 주제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량의 문제는 감수할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내서와 참고서를 통해 각 분야의 길잡이 노릇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는 것은 이 책을 읽은 후에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잡다한 지식과 쓸데없는 정보로 머리를 가득채워 그 효용 가치를 논하는 일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다. 하나의 지식과 교양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현실 생황에 적용된다는 문제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교양은 실용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으나 사회를 보는 눈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필요 조건이 될 것이라는 정도로 교양을 정의하면 어떨까 싶다.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그 준비 단계나 가벼운 몸풀기 정도에 값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선한 야채로 에피타이저를 즐기듯이 읽기에 가장 적합한 책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선택과 집중은 물론 각자의 몫이지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는 일도 때로는 중요한 일이다. 고개를 너무 높이 들어 하늘만 쳐다보는 일도 문제지만.


20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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