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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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보다 하늘을 사랑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세상 혹은 사람들과의 유리벽을 절감하면서부터였을까? 나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혹시, 그때부터 책이 내게로 온 것은 아닐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은 왜 먹어야만 살 수 있는거지? 난 왜 사는 걸까?

  아마도 이 많은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한 건 사춘기가 겪는 자연스런 변화가 아니라 책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알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책을 읽지 않았어도 생겼을 의문들이지만 답을 찾을 방법을 알지 못했지도 모른다.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책을 통해 찾아낸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막연한 의문과 불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게 책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었다.

  단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답을 찾으려 한 적도 없었지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종횡무진 영역을 넘나들며 길을 찾아 헤매고 절망하고 때로 공감하며 마음을 빼앗겼다.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가장 정확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 숨은 진실 찾기 게임은 나에게 주어진 몫이었지만 결코 두렵거나 힘겹지 않았다. 즐길만한 고통이었고 절망이었으며 현실에서 찾아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살아가면서 경험으로 익힌 것은 작은 세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진짜 중요한 것들은 선생님에게 배울 수 없었고 깨달음의 즐거움은 책을 통해서 가능했다. 개인적인 불행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그러했다. 책은 내게 참 스승이었고 무엇보다 숭고한 대상이었다. 그런 책도 어쩌면 하나의 세계에 불과할 것이고 책들이 모여 이룩한 거대한 왕국도 허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인식의 수단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만한 즐거움을 주는 일도 아직 찾지 못했다.

  책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에 목숨을 거는지. 도대체 책의 매력은 무엇인지.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앎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집착에 가까운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내게 도대체 책은 무엇인가. 왜 읽는가, 무엇을 얻었는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김열규의 <독서>는 책을 통해 쓰여진 자서전이다. 열혈 독서가들의 모임에서 우수 회원이 될 법한 그의 삶을 독서의 이력으로 풀어냈다. 70이 넘은 노교수의 이야기는 어깨에 힘을 쫙 뺀 상태에서 바람이 나부끼듯 펜을 휘두른 느낌이다. 억지스러움이 없고 편안한 문장으로 책을 이야기 한다. 유년시절 할머니와 어머니의 듣기에서 출발한 그의 생은 문화 자본 자체가 풍부했다. 자연스럽게 말과 글에 눈을 뜨고 낭독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몰입의 즐거움을 일찌감치 경험한 소년은 책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얻는다.

  신체적으로 허약해서 놀림감이 되고 책 속에서 고독과 깨달음을 얻는 <토니오 크뢰거>를 자화상으로 삼는 저자는 병적으로 책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유년과 성장 과정에서 그 열등감은 책을 통해 자신감의 세계를 구축한다. 듣기에서 노년의 책 읽기까지 한 생애를 정리한 저자는 본격적으로 읽기의 방법론을 이야기한다.

  꼼꼼하게 읽기, 클로즈 리딩, 속독과 숙독, 삼단뛰기와 장애물 경주 등의 비유를 통해 다양한 읽기 방법을 소개한다. 필요와 목적에 따라, 글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 읽는 방법과 태도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과정과 방법들을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거침없고 막힘이 없다. 힘주어 강조하거나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없다. 적당한 강약으로 편안하게 독서를 이야기한다.

  방법 뿐만 아니라 내용에 따라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요령도 적고 있다. 게임을 하듯이, 물고기를 잡듯이, 이를 잡듯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사금을 캐듯이. 비유는 어떤 이론보다 쉽게 스며든다. 특별한 법칙을 세우거나 번호를 붙이거나 단계를 말하지 않고 편안하게 풀어간다는 말은 상대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시와 소설 그리고 논설문을 읽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영향을 미친 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저자의 독서 이력을 수필처럼 편안하게 펼쳐놓은 1부와 책읽는 방법을 풀어쓰고 있는 2부로 나누어져 있다. 인생의 황혼녘에 자신의 독서 이력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있고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의 문제는 독자에게 있는 듯하다. 강요하거나 설득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쉽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건네듯이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독서에 관한 읽을 만한 책 목록에 올려도 좋을 만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저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일은 새롭기만 하다. 책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야 어디 한 둘일까마는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독서>가 취미가 되고 일이 되고 삶이 되는 과정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지독한 책벌레들과 함께 해 온 인류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하지만 책을 던져 버리고 총을 든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될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삶이 달라진다. 사회와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진보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더딘 발걸음이더라도 말이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연말이지만,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지만, 정치와 역사는 거꾸로 가고 있지만 손놓고 앉아 망연자실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war of position)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은 개인적인 판단이다. 책을 통해 현실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황당할 수 있겠으나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하고 행동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책의 역할이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타령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도 있으나 저자의 이런 종류의 책들은 일단 사람들을 <독서>의 세계까지 끌어들이는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나치게 주관적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풍찬노숙을 견디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안온한 온실 속의 평화가 아니라 혹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강철같은 정신을 단련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론 힘겹고 고통스럽겠지만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야 작은 길을 만들고 물줄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책의 역할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버릴 수가 없다.


08122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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