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온 한국인의 역동적 생활철학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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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은 스스로 속한 양반 집단에 대해 객관적이었을까? 특히 조선 사회를 살아가는 선비로서 그게 가당키나 했을까? 가끔 드는 생각이다. 집단에 소속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이 문제라는 것은 단순하게 그 사람의 지적 능력이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잘못 됐다는 말은 아니다. 다양한 관점과 총체적인 시선은 훈련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대개 이런 능력을 철학적 관점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면 철학자들은 저절로 통찰하는 눈이 생기는 것일까?

  한국인을 국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평가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탁석산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지금-여기’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로서 우리들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매일 부대끼고 마주하는 사람들의 속성이나 특징들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는 일은 어색하기만 하다. 나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진 속의 모습이나 녹음된 목소리, 동영상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처럼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이런 논의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목울대가 꺼이꺼이 소리를 낸다. 아프고 상처받은 역사에서 조상들의 신산스런 삶은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해 보인다. 그 속에서 지금의 우리들을 만들어 낸 것은 한국인 고유의 특성들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추상적 작업은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특히, 한민족의 명명된 민족 국가 단위의 총체적 집단을 설명하는 일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개인들의 특성을 몇 가지로 드러낸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아무리 거칠게 특징들을 잡아낸다고 해도 정상분포 곡선에 나타나지 않는 블랙스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소수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맥락들을 대표하기도 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순된 말이지만 한 집단의 특성은 대다수의 모습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다수는 평범성을 특징으로 한다.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제각각이며 행동이나 말을 통해 대표성을 띨 수도 없다. 이렇게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탁석산의 ‘한국인’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나간다. 그 주장이 때로 지나친 면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면도 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제공하기에는 충분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대체로 최근 100여년에 맞춰져 있다. 구한말 이후, 그러니까 조선과 한국을 구별하고 있다는 말이다. 봉건적 전근대 사회와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들의 변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숱한 외침에 의해 이미 지배 세력에 대한 믿음이 상실되었고 민중들의 저항이 극에 달했지만 통치권력에 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타율적인 힘에 의해서였다. 시민혁명을 거쳐 스스로 권력을 창출한 경험이 없는 우리의 비참한 현대사는 지금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 사회적 변화 속에서 대중은 스스로 정중동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현실과 타협하며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탁석산은 그것을 투표에 의한 정치권력의 이양으로 표현했고 임지현의 ‘대중독재’를 비판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대다수 선거권을 가진 국민들에 의해 정권은 창출되지만 그 과정과 의식 속에 자리 잡은 파시즘에 대해 저자는 깊이 고민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성과 견고한 현실의 벽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생존-생활-행복-의미’의 시대를 살아왔다고 지난 100년을 회고하는 저자는 정치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쉽게 말하면 최근 100여 년간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근현대사의 절망과 희망들이 고스란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의미’를 찾고 있는 시대라는 말인데 과연 그런가? 자본에 종속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행복의 진정한 의미나 삶의 의미를 축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는 아닌가? 비판적 관점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관점과 논의는 건강한 사회와 현실의 모습을 돌아보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현세주의와 인생주의 그리고 허무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한국인을 분석하는 것은 적당한 기준과 관점이라는 평가보다 실용주의를 전제로 한다는 말이 흥미롭다. 현실 생활을 하는 동안 실용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느냐의 문제가 관건이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을 먼저 살펴보고 사상적 배경을 논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실용주의는 철저한 이기주의와 맞물려 있다. 그것은 배타적 가족주의의 위험성을 노출시키고 있으며 혈연과 지연과 학연으로 견고하게 맞물린다. 그것조차 한국인의 특성이겠지만 탄력적인이고 유연한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사라져야한다고 믿으면서 간절히 원하고 있는 이중적 기준과 시각은 극복해야 할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저자의 관점과 논의가 분명 재미있고 대단히 현실적이어서 시원스럽다. 점잖은 척 하거나 간접화법으로 돌려 말하지 않는 점은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저자 특유의 화법이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단숨에 읽힌다. 때로 한숨 쉬고, 때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는 한국인이다. 이 단순한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극(?).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실존적이고 철학적 삶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다. ‘지금-여기’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는 첫 번째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0901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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