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모색 -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장회익.최장집.도정일.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시대를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에서 어느 시대를 이야기하든 사람을 떠나서 불가능하다. 역사가 인물 중심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빚어내는 결과물이 우리들의 역사라는 말이다. 역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낸다. 그 결과물들이 시대정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법과 제도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시대를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인간의 지적 토대위에 미래를 설계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보편성과 일반성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특수한 계층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상황을 꼬집었다. 결국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은 이러한 자기 계급의 모순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실천적 지식인이 필요하고 그 지식과 실천의 방향이 누구를 향한 것이며 어디에 그 지식이 사용되어야 하는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늘 이 시대의 지식인이 아쉽다.

  존경할 만한 지식인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회의 축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회의 역량과 토대에서 길러지는 지식인의 수준은 단순한 주입식 교육이나 물적 토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다시 태어나는 새처럼, 비상하기 위해서는 젖은 날개를 파닥이며 잠을 깨어야 한다. 잠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또 절망적인가.

  모든 시대는 혁명을 배태하고 있으며 그 선택은 다수에게 있지 않았다. 전환을 모색하는 것은 소수였으며 그것을 추동할 수 있는 저력은 성찰과 신념으로부터 비롯된다. 통찰력은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 의식적인 노력과 고통이 필요하다. 희망을 이야기하려면 고통과 절망의 얼굴과 대면해야 하는 법이다.

  이 시대에 <전환의 모색>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모든 시대에 전환을 모색해 왔다.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방법과 태도가 아닐까.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전환은 시작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어불성설일 뿐이다. 아니, 이전시대로 전환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전환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기준 자체가 흔들린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전환은 전환이니 말이다.

  인권은 축소되고 기업가는 살만하며 부자는 세금을 돌려받는다. 생각의 전환은 사물을 보는 방향과 목적부터 달라지게 한다. 과연 우리 시대는 전환인 필요 하느냐는 질문부터 마땅히 시작되어야 하는건 아닌가 싶다. 대담집 <전환의 모색>은 전제부터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한심한 투정부터 나온다. 그들(?)의 눈에 전환이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도 궁금하다는 말이다.

  ‘온생명’ 사상을 주장하는 장회익, 민주주의는 곧 부패할 것이라고 말하는 최장집, 시장 유일주의에 대해 경고하는 도정일, 인간 실존의 구체성과 보편성을 탐구하는 김우창 등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 할 만한 분들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몰라서 실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방법론과 실천적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을 합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초등학교 때 이미 배운 것들에 대한 덧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학문적 관점에서 그들의 사상과 의식의 흐름들을 살펴보는 일은 즐겁다. 대담자로 나선 분들도 각 분야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충분한 학문적 성과를 일구어 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이 네 분을 이어갈 만한 지식인이라 불리워질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단순한 학력과 지식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통찰하는 눈과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힘, 실천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쉽지 않겠으나 이 시대는 영웅보다 작더라도 주변을 바꾸어나가는 리더가 많이 필요한 시대라고 본다.

현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그래서 보는 위치 곧 기준좌표의 전환에 따라 사룸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를 분명히 구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좌표변환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내게 보이는 것만 옳고 남이 다른 위치에서 달리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P. 59(장회익)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고 나는 좌표변환에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식 차원의 좌표변환만으로는 어림없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직 멀었다는 자괴감. 당연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이 좌표변환의 힘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오랜 버릇이 내 안에 있다.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그 기준과 가능성에 대해 한참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실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상황뿐만 아니라 이 사회와 정치,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사유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지식인은 이것을 쉬운 말로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책무이다. 권력과 지위를 얻고 개인적인 이익과 특수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식인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불러 마땅하다. 그 기준과 잣대를 분명히 하고, 실천적 지식인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태도가 정착된다면 함부로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권력의 부나비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정치와 지식인의 관계, 권력에 복종하는 지식인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가장 효율적인 현실 개혁의 방법으로 선택한 선한 의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개혁의 목적과 방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네 사람의 대담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육성을 듣는 효과와 대담 형식의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집중력이 흐려지고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지만 깊이 있게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다루지 못한다는 당연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회오리같은 대선 정국이었던 2007년에 이루어진 대담이라는 시기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전환을 모색했지만 현실은 눈뜨고 볼 수 없어진다.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부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리’를 ‘나’로 바꿔놓고 읽으니 막막하기만 하다. 걷고 있지만 저 멀리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은 이 시대에도 기묘하게 적용된다.

“답은 문제에서 나오기 때문에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 P. 293(김우창)

  답을 구하고 싶은 시대가 아니라 문제를 설정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제를 들고 뛰어나와 서로 다른 목소리로 외치고 있으며 그 목소리를 외면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우리의 모습은 쨍한 겨울 하늘처럼 차갑기만 하다. 대담은 대담으로 끝났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답을 구해 볼 밖에. 답을 구하기 전에 문제부터 만들어보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08121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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