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시나요, 2010 가을 이라는 오른쪽 끝의 글씨.
지독하다 싶게 더운 날들이라 멍 하니 시체처럼 누워서 선풍기 바람을 쐬다가, 문득 책을 집어들고 조금 읽다보면 그예 눅지근한 잠에 빠지기 일쑤, 무려 날씨로 인한 난독증이 내게도 오는구나, 그런 생각에 이르게 한 여름이에요. (네, 아직 과거형은 무리)
그런데 어제 이 책을 받고 저 두꺼운 '가을'이라는 두 글자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날씨 핑계로 미룬 독서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새삼 들끓어서 반가왔습니다. 우선 목차가 모두 마음에 꼭 들었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관심이 지극한 사안들만, 누가 창비에 알려주고 딱딱 목차로 올려준 듯한 느낌. 역설적으로 저 같은 사람이 이 시대에 많다는 소리니, 한 편으로는 씁쓸한 일입니다.
모범생처럼 맨 처음 것부터 읽으려 하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 이 책 외에 읽고 있는 또 다른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서 정성일씨는 '책을 맨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은 적이 거의 없으며 좋은 책은 언제 어느때고 아무 챕터나 열고 들여다봐도 좋아야 좋은 책'이라고 하셨기도 하고 하물며 이런 책이야말로 그러라고 각 챕터를 주제별로 나눈 것 아닌가 싶어서 - 소설난으로 직행했습니다.
공선옥의 <꽃 같은 시절>은 이번이 연재 3회 째이고,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2회 째인데, 우선은 공선옥의 작품만 읽었어요.(지난 번에는 김애란을 먼저 읽었는데, 이번엔 공선옥을 먼저 읽게 되었다는 건, 아무래도 회가 거듭될 수록 이 쪽이 더 재미날 것 같다는 기대를 유발한다는 것, 공선옥 WIN입니다, 제 맘대로 투표에서. ㅎ) 이 분의 다른 장편소설을 예전에 읽고 약간 실망한 듯한 어투로 리뷰했던 기억이 나는데, 연재물에서는 원래 있던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 같아요. 이 시대에는 소위 운동권 민주 투사가 아니었어도, 평범한 서민이라 해도, 그냥 지나칠 수 만은 없는 수많은 '사태'들이 쏟아져나오는데, 그걸 한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시작하여 두루두루 다 건드리면서도 전혀 산만하지 않게,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뚜렷하게, 나오는 인물이 내용에 충분히 녹아들게끔, 그야말로 읽는 맛 제대로 나게 써주십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의 그 장편에서는 예의 '너무 뚜렷한 메시지'만 부각되어서 제가 괜스레 거부감을 느꼈던 모양이고요.
짧은 연재물 하나를 읽고 저녁을 먹자니, 신나게 퍼붓던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선선한 바람이 창가에 휘휘 감돌아요. 이제 그만 가을을 데리고 오겠노라고, 씨익 웃는 것 같은 바람.
이 가을에는 조금 더 자진해서 늙을랍니다. 빨빨대고 돌아다니기 보다는, 창가의 바람만 조금조금 받아주면서 방 안에서 조용히, 오래오래 책을 읽고 싶습니다. 여름내 펄떡거려야 했던 숨을, 노인처럼 천천히 - 아주 천천히 쉬면서 가다듬고 싶어서 그런가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