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 기사에 누군가 썼다. <은교>는 그렇고 그런 영화가 아니라고, 하다 하다 이제는 70대 노인네랑 10대 고딩하고까지 에로로 엮는, 그렇고 그런 상업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많은 좋은 영화가 그러하듯, <은교>에는 인생이 있다고, 동경과 질투와 사랑과 증오와...아무튼 그 모든 것이 인생이라면, 그게 있을 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아름답다고. 오독이 있었겠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글을 쓴 이의 감상은 이 정도, 그렇고 그런 영화로 오인받는 게 무지 속상했던 듯하다.
그럼 나는?
<은교>는 그렇고 그런 영화다. 소설을 먼저 읽어서 이러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렇고 그런 대목이 있다. 그런데 말이다, 역설적으로는, 그 '그렇고 그런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고, 그러니 <은교>에 인생이 있다고 한 그이의 말에는 또한 공감이 간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록 소설이라는 쟝르 안에서만 용인될 것 같다고 미뤄 짐작하여 싹둑싹둑 잘라내고 다른 잎을 붙인 가지들이 약간 거슬린다 해도, 영화 <은교>의 시각 역시,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게, 젊음이란 게, 늙음이란 게, 정말 '그렇고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영화에서처럼 우리는 모두 칠십 먹고도 십대와의 사랑을 꿈 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쯤에서 제목 그대로 '차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아마도 소설이나 영화나 공히 내가 흥미로워하는 어떤 인생의 지점에 대해 보여주기 때문일진대, 그거 보여주는 거, 말로는 이러쿵저러쿵 해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미리 말하건대) 분석하고자 이런 글을 끄적인다기보다는 작가와 감독의 예술행위에 대한 감사를 담아 잡설을 쓴다.
다른 요소들에 우선하여, 책 속에 그려지는 이적요(박해일 분)의 집이라는 공간은 무척 중요한데 영화를 보면서 그 집이 내가 상상한 딱 그 집이라서, 그리고 어설프게 세팅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그대로 어딘가 섭외를 해서 마련한 집으로 보여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케이, 시작은 좋고 ~
다음은 등장인물들.
1. 이적요
이적요를 소설에서보다 잘 그려내기란, 애당초 무리였지 싶다. 이적요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노인이고, 우리들 누구와도 비슷한 욕망 덩어리이면서 (멘탈로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서 쉬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분명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이런 인물을 제대로 그려내기란, 후 - 아무래도 어렵다. 박해일의 첫 발성에 풉 하고 웃음이 나버렸던 것도 그때문이고 말이다. 그리고 소설에서 이적요가 개탄하는 우리 문학계의 흉물스러운 본 모습은 또 어떠한가. 건드리기도 예민한 사안일 뿐만 아니라 2시간 짜리 영화 속에서 잘 표현하기도 부담스럽다. 감독은 그 부분을 걷어내버렸다. 그저, 시인이 조금쯤 괴팍하고 소신이 강해서 대중 앞에 서지 않는다, 그리고 국민 시인이란 호칭을 아주 싫어한다 정도로 갈무리.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적요가 지닌 내면의 젊음, 이것은 여러 면에서 부족했다. 이 영화의 소재 - 즉, 노인과 십대의 사랑, 이라는 자극적 설정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하니까, 어려워도 꾹 참고 많은 부분을 할애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책에는 있지도 않았던 <은교>라는 단편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장면은 젊은 이적요의 마음을 피상적으로만 보여주었고, '마음만 젊어서는' 도저히 이 사회에서 욕망을 표출하기 어려운 늙은이일 뿐이라는, 그 아프고 당연한 깨달음을 얻는 사건 - 은교의 남친이라 사칭한 젊은 남자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듣는 부분을 빼버린 것은 더욱 아쉽다.
기실, 소설에서의 이적요는 자기 글을 훔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서지우에게 아무런 질투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멍청하다고 생각할 뿐, 이런 정서가 캐릭터 상 잘 어울리건만, 영화에서는 앞서 말한 젊은 남자로부터의 모욕을 빼버리고 서지우가 이상문학상을 탄다는 설정을 넣어버려서 마치 이적요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모욕 때문에 서지우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오인된다. (아니, 오인이 아니라 감독은 이 편이 더 관객에게 설득력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만) 이러한 오인이 야기하는, 모짜르트 대 살리에르 구도가 나는 식상하고, 소설 속에서 '비록 사소하지만 한 사람의 전부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예의 젊은 남자 모욕 건과 은교와 데이트하러 간 카페에서 내쫓기듯 나오게 되는 사건이 훨씬 현실적으로 설득력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카페에서 내쫓기기는커녕 젊은이와 어우러지며 '헐'에 대한 담소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젊은 박해일을 노인인 이적요로 분하게 하기, 이 부분은 뭐, 당연하다 싶다. 보수적인 관객 층까지 이 사랑에 관용적 태도를 지니고 보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2. 은교
위 이적요라는 인물보다는 훨씬 영화에서 그리기 좋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소설에서 이미, 은교는 제 3자일 뿐, 순전히 이적요의 젊음에 대한 욕망의 상징으로 그려진 경우가 더 많았기에 막상 은교 자신이 어떤 감정으로 이적요와 서지우를 바라보는지는 거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소설에서 그러한 선택은 당연했다. 나이 든 남성 작가라는 정체성을 이왕 가지고 있는데도 마치 십대 여자 사람인 은교의 심리를 잘 아는 것처럼 쓰려했다면, 오, 그것 역시 아무래도 무리였을 듯.
그러나 감독 정지우는 아무래도 소설에서 은교의 심리 묘사가 너무 적었다고 판단한 듯하다. 고교생이 할아버지라고 호칭되는 인물에게 관심을 갖고, 아저씨 뻘인 남자와 과감하게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을 그리려면, 관객들이 자연히 묻게 되는 '왜'에 대한 답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소설에서보다 훨씬, 은교는 단순하고 평범하게 그려진다. 동시에, 자신만의 욕망, 즉 시 쓰는 멋진 남성에 대한 동경이 유독 강한 아이로 나온다. 나 자신, 역시 은교의 심리가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했으므로 이런 식으로나마 은교에게 집중해준 영화가 싫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쯤은 더 신비함을 부여했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3. 서지우
소설과 큰 차이 없게 그려진 인물. 제 주제도 모르고 멍청하게, 그러니 또 찌질하게 파멸로 이르는 인물은 수도 없으니 뭐, 더 바꿀 만한 부분도 없다. 이무열이던가, 김무열이던가, 이 분의 얼굴은 죄송하게도 그런 인물에 잘 어울렸고. (진중권도 닮은 듯? ㅋ)
그런데, 한 가지 내내 불편했던 부분은, 영화 속에서 서지우의 문학적 감수성 부족 원인을 모두 '공대생'인 탓으로 돌린다는 점. 으아, 물론 나는 공대생 출신 아니지만서도, 이건 정말 억울할 것 같은데. 공대생이라고 문학을 모르거나, 문학을 못 하거나, 사람 사이의 오묘한 감정도 모른단 말인가! 대체 이 무슨 어거지? 하지만 이조차도 너그러워지는 건, 역시나 영화라서, 그것도 2시간 짜리라서 그랬겠지 싶어서다. 어떻게든 서지우가 그 모양인 이유를 설명은 해야 하는데, 소설에는 그 이유 같은 건 안 나오니까.
4. Q 변호사
소설에는 화자의 존재로 꽤 여러 면에 걸쳐 나오지만 영화에선 싹 뺐다. 어차피 문학 판에 대한 비판을 쏙 뺀 데다가 미스테리한 느낌을 주는 (소설에서는 변호사가 이적요에게서 받은 노트의 상황을 역 추적하고 은교를 만나고 하는 추리소설 적인 묘사가 들어가 있다) 부분도 쏙 뺐으니, 이 인물이 영화에 굳이 등장해서 어지럽힐 필요는 없다. 다만, 만약 이 인물이 들어갔다면, 누가 했을까, 욕심 있는 조연 배우라면 아무도 안 했을 만큼 밋밋하다 싶다. 흠, 그러고 보니 그래서 뺐나? ㅋ
아무튼 볼 생각조차 안했던 <은교>에 책으로도 영화로도 흠뻑 뺘져 본 요 며칠, 나로서는 늙는 일에 대해 고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적요와 달리, 사회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이룬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는 늙는다고 뭐 그리 서러울까 싶기도 한데, 흠, 두고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