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12년 12월 31일이다.

 

선물로 화장품을 사려 매장에 들렀는데 나이에 전혀 맞지 않는 화장과 옷차림을 과하게 한 할머니가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은 어쩐지 좀 슬퍼 보였다. 어떻게든 젊음을 붙들어 매려는 모습은 수더분해 보이지 않는다. 순간 나도 내 나이를 제대로 인식하며 늙어갈 수 있을까 싶었다. 여전히 나는 어린 여자애들의 옷이 걸려 있는 매장에서 옷을 구경한다. 어제 꽈배기 목도리를 사면서 어쩌면 나도 나이를 먹고 있는데 옷을 보고 화장을 하는 스타일은 계속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나도 늙어가는 것일까. 이제 어떻게 화장을 하고 어느 정도 스커트 길이를 유지하고 어느 정도의 유행을 따라야 하는 지가 정말 애매한 나이로 진입하게 된다. 솔직히 좀 서글프다. 너무 나이에 연연하며 겉늙어 가는 것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도 어쩌면 어려서 다 용서가 되었던 시점은 여전히 하나의 그리움으로 남는 것인 지도. 나이듦에 시선의 관용은 부족한 것 같다.

 

올해 책은 많이 읽고 리뷰는 적게 썼다. 참, 하반기에는 피아노 체르니 100번을 마쳤다. 30번에 들어갔는데 아이 방학으로 중지 상태다. 아이는 상반기에 많이 아팠지만 이제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 좋은 엄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항상 반성은 하려고 한다. 독선적인 부모는 되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와 함께 수학 동아리를 만들고 만지고 주무르고 볼 수 있는 생활 속의 수학을 실현하는 이야기다. 반이나마 읽지도 못했다. 어떻게 아이에게 현실에서 수학적 사고를 유도해낼 수 있는지 실례가 있어 바로 응용이 가능하다. 수학 때문에 진로 수정까지 해야 했던 나로서는 참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책이다. 다만 아무래도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더디다. 다 읽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선다. a>b>c에서 a>c를 유도해 가는 질문을 고대로 아이에게 해 보니 얼추 재미있어 하기는 하더라. 하늘에서 눈은 펑펑 내렸고 나는 이 책 덕에 꽤나 학구적이고 교육적인 엄마인 척 할 수 있었다.

나는 수학을 참 싫어했고 못했고 급기야 해답지를 외우면서 거꾸로 접근하는 공부법까지 시도하며 머리털을 쥐어뜯곤 했다. 수학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학문인데 나에게는 가장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먼나라 얘기였다.

 

 

 

 

어느 집에나 유달리 넘치는 물건이 있다. 우리 집은 펜이 그렇다. 나도 아이도 많이 사 날랐고 선물도 받고 남편도 그렇고. 어느새 그 펜을 볼 때마다 방송에서 펜이 없어 쩔쩔매던 아프리카 아이들이 떠올라 죄책감마저 들었었다. 알라딘 서재분의 때맞춘 좋은 페이퍼 덕에 그 펜이 갈 곳을 찾아 너무 기뻤다. 종이를 펴 놓고 잘 나오는지 테스트를 마친 펜들은 이제 갈 곳을 찾아 날아가게 될 터이다. 이 펜을 쓰는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게 인간이니까. 2013년에는 제대로 나이들고 싶다. 적어도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마저 무색할 정도의 절망적인 일들이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진부하지만 공감과 연대와 그리고 내일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나날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12-31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커다란 박스 하나 그리고 작은 박스 하나로 노트를 가득 넣었어요. 연필은 40자루쯤 넣은것 같아요. 좀 전에 택배기사님이 오셔서 가져가셨어요. 저는 자꾸만 노트를 쌓아두었는데 그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blanca 2012-12-31 14:16   좋아요 0 | URL
우아, 다락방님도 하셨군요! 저도 왕뿌듯하더라고요. 저포함 가족들이 문구 욕심이 많아서 한아름 지고 있었어요. 이제 이게 진정 필요한 곳으로 가니 좋아요.

Arch 2012-12-31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화장품 가게 갔어요. 제가 오기 전에 와 있던 손님은 유달리 수다스러웠어요. 모든걸 다 테스트 해본 다음 간단한 것만 사는 얌체같은 손님. 손님인데 그래도 되는걸까, 나도 그러지 않았나, 종업원은 참 대단하다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나이에 맞는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건 저도 어려워요. 젊어보이고 싶은게 아니라 자꾸 아줌마 소리를 듣고 앉았어서...흑

blanca 2012-12-31 14:19   좋아요 0 | URL
아, 아이들이 저기서부터 뛰어와서 아줌마래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아, 저는 그 어감에 괜시리 우울해져요. 저도 판매업종에 계신 분들한테 진상 부리는 사람들 볼 때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저도 나이에 맞는다는 게 참 어느 정도 선인지 항상 의식하는 것도 피곤하고 잘 모르겠어요. 치마 레깅스도 작년까지 잘 입고 다녔는데 이게 올해부터는 좀 민망하더라고요.

프레이야 2012-12-31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을 이야기하기가 두렵지 않은 세상이면 좋겠어요.
블랑카님 체르니 100 성공 축하해요^^ 한 해동안 표나게 이루신 게 있네요.ㅎㅎ
30번도 새해엔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나이듦에 대해 스스로에게부터 너른 마음을 가져야겠어요.
이제 한살씩 먹어가는 걸 의식 못하고 있다가도 문득 변해가는 얼굴이나 몸매 같은 데서 의식하게 되거든요.
흑흑.. 인정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연습도 필요할 것 같아요.^^

blanca 2012-12-31 14:19   좋아요 0 | URL
저는 올해부터 살이 스멀스멀 찌더라고요. 운동을 하지 않으면 바로. 지금은 손놓고 불러가는 배를 ㅋㅋ 방치하고 있지만요. 건강하고 곱게 늙어갔으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2-12-3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형수술로 부자연스럽게 팽팽한 얼굴을 한 나이든 아줌마나 할머니들을 보면 참 서글프기도 하거니와 보기도 싫더군요.돈 자랑의 일종인지...

blanca 2012-12-31 14:21   좋아요 0 | URL
노자님 ㅋㅋㅋ 근데 여자랑 남자는 거울 보면서 느끼는 노화에 대한 느낌이 확연히 다른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이 이해 안 갔는데 자기가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흔들리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거창하게 갈 것도 없이 저도 나이 들면 안 그런다고 보장 못하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2-12-3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새해에도 희망 자체보다 더 희망적이고,
때론 절망보다 더 절망을 어루만지는
블랑카님의 손맛 어린 글맛 기다리겠습니다.
건강하시길^^*

blanca 2013-01-01 10:34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감사합니다. 팜므느와르님 가정에도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우아, 새해첫날부터 눈이에요!

Jeanne_Hebuterne 2012-12-3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이 시간을 지배하곤 해요. 그래서 시간이 빠르거나 더디게 가는 듯 합니다. 블랑카님의 2013년은 올해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주제넘은 에언을 해봅니다.

나이드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없고 관용없는 사회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읽었습니다. 아차, 타인의 시선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어찌되었거나 예쁘면 장땡 아닌가! 하는 생각, 넥 크림을 가지고 이걸 어찌 하나, 과연 효과가 있을까, 글을 쓰던 노라 에프런도 떠올리게 하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블랑카님 서재에 올 때 마다 대문의 글귀를 되새기곤 해요.)

blanca 2013-01-01 10:37   좋아요 0 | URL
쥬드님, 그죠. 이 사회가 나이듦에 참 가차없는 시선을 보이는 것 같아요. 아, 그 예언 너무 감사해요. 2011년의 힘듦이 조금씩 풀어져 나가는 중이에요. 쥬드님도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이렇게 계속 행복해지시기를 바라요. 저는 행복한 청춘보다 행복한 노년이 더욱 값지다고 생각해요.

2013-01-01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1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2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1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2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3-01-01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들면 좀 더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질 수도 있어요. 남들의 시선으로부터요. ㅎㅎ
저도 지난주에 사무실에서 버려질 처지에 있던 해묵은 다이어리와 수첩을 잔뜩 챙겨왔답니다. 책장에도 무수히 많은 다이어리와 수첩과 노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뿔싸 몇 년 전 느닷없는 대청소때 그만 사라지고 만 것 같아 너무 안타깝더군요. 새해엔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을 상상하며 즐거운 일만 가득하길 빌어요~

blanca 2013-01-02 20:22   좋아요 0 | URL
oren님 말씀을 들으니 위안이 됩니다. 저보다 먼저 그 길을 가보신 선배님 말씀들에는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어 새겨 들으려 합니다.^^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transient-guest 2013-01-03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보다 조금 젊게 입고 살면 되는 것 아닐까요? 예를 들어 40대 남자가 아이돌처럼 짝 붙는 옷을 입고 엘프남처럼 하늘하늘 걸어다니면 좀 무섭겠지만, 적당히 유행에 맞춘 최근의 옷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40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_-:). blanca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위의 걱정이 필요없을만큼 보다 더 젊은 한해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blanca 2013-01-03 18:09   좋아요 0 | URL
transient-guest님 고맙습니다. 나이 들어가며 세상을 보는 시선도 무언가 더 성숙해 가는 면이 있는 것 같아 고마운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가끔식 멈추어 서서 주변도 둘러보고 싶은데 이런 여유도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transient-guest님의 한국문학 기행도 새해에 가열차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꿈꾸는섬 2013-01-08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랜만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친숙하고 좋아요. 체르니100번 축하해요. 저도 피아노는 배우고 싶었는데 시간을 그냥 다 허비해버렸네요. 분홍공주님이랑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blanca 2013-01-08 21:40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너무 오래간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새해에는 서재에 자주 자주 와 주세요.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사람이 결핍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타인의 빈곤, 고통, 애환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또 지나치게 결핍에 시달려도 닻을 내리고 정착할 곳이 없어 타인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공감과 연대는 구호로 만들어야 할 만큼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가치다. 절로 우러나오기엔 우리의 시야가 너무 좁고 세계가 너무 바쁘고 걍팍하게 돌아간다.

 

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걸레질 하는 여자. 그 여자가 어디 한 구석이라도 먼지를 놓치지 않을까 감시하며 물 한잔을 권하지 않는 여자. 이 풍경은 주인과 노예로 계급신분제가 있었던 머나먼 과거 속의 것이 아니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 자본주의의 축배를 들었던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두 개의 극단은 더욱 자주 서로를 비껴간다.

 

 

 

 

이 책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발칙한 발상을 한다. 그녀는 백인이고 중상류층에 속해 있는 저널리스트다. 그녀에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워킹 푸어들의 생활상은 주변 세계에서 풍경으로라도 자주 떠오르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다. 고급 음식점에서 잡지의 기사 꼭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그녀가 직접 워킹푸어들의 세계로 입수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녀가 철저한 실험과체험을 중시하는 과학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엉뚱하고 가당찮게 느껴지는 출발이었다. 인위적으로 빈곤해지기로 인위적으로 피곤해지기로 결심하는 모습은 또 하나의 오만이자 독선으로 비쳐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여하튼 따라가 보자. 그녀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이것은 감정적인 동정이나 박애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정말 그렇게 일정 자본금 없이 노동시장에서 몸으로 벌어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가능성 타진이다. 날로 높아가는 집세, 물가, 생각보다 비탄력적인 임금, 미국의 복지정책 개정으로 인한 일정 기간 보조금 수급 후 의무 취업 정책하에서, 산다는 것은 가능할까?

 

그녀의 저임금노동자 체험 생활 그 자체는 점차 진정성을 얻어 가는 것 같다. 식당의 웨이트리스, 호텔 청소부, 청소 용역 업체의 가정집 청소부, 요양 병원의 영양 보조원, 월마트의 판매원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취업 이력은 점차 다양한 굴곡을 그려간다. 시간당 6달러에서 7달러를 벌어 그 수입의 50프로 이상을 집세로 지불하면서도 모텔의 장기투숙 등 주거는 안정되지 못하고 식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사먹는 정크 푸드들로 점차 채워진다. 벌어서 먹고 근근히 살아나가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취업 때마다 통과해야 하는 번거로운 약물검사 절차, 일터에서의 고용주들의 대리인들의 숨막히는 감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은 하나의 잠재적인 범주자로 간주되는 일이었다. 청소 용역 업체에서 파견나간 으리으리한 대저책에서 핏빛 같은 녹물로 더러워진 샤워실의 대리석 벽의 이음새를 말끔히 청소해 달라는 주인 앞에서 그녀가 차마 할 수 없었던 되뇌었던 이야기는 가슴으로 와 닿는다.

 

"당신의 대리석 벽이 피를 흘리는 게 아닙니다. 저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 즉 대리석을 캐 나른 노동자들, 당신이 아끼는 페르시아산 카펫을 눈이 멀 때까지 짠 사람들, 당신이 가을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 놓은 식탁 위의 사과를 수확한 사람들, 쇠못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제련한 사람들, 트럭을 운전한 사람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청소하려고 허리를 쪼그리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입니다." 

-p.129

 

이 르포르타주는 70년 전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세계를 취재한 조지 오웰의 것과 만난다. 두 개의 풍경은 시간과 장소의 격차를 무색케 할 정도로 닮아 있다. 가진 자들의 호화로운 세계, 중산층의 그럴 듯한 생활을 지탱하기 위하여 그 아래에서 허우적 대는 빈곤층들의 고난과 처절한 생활상은 외피만 조금씩 갈아 입을 뿐 끈질기게 반복된다.

 

 

 

현대적인 대도시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뜨거운 지하굴 안에서 접시를 닦으며 보내야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중략> 그의 일은 노예적이고 기술이 없다. 그는 딱 살아 있을 만큼을 보수로 받는다. 그의 유일한 휴일은 해고다.
-p.152

 

 

이 불결하고 작은 식기실을 둘러보면서 우리들과 저 식당 사이에 양날개 문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재미있었다. 식당에는 깨끗한 식탁보, 꽃병, 거울, 금박 처마 장식, 아기 천사 그림 등 온갖 화려함을 누리는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자 떨어진 이 곳에서 우리는 혐오스럽도록 불결했다.
-p.88

 

 

'앎'이라는 것은 때로 대안이 없는 공허함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이 둘은, 그리고 이 둘이 알게 된 사실을 읽게 된 우리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죄책감. 부책감.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하여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방치해야 하고 남의 음식을 서빙하고 남이 사고자 하는 쇼핑 품목을 배치하게 위하여 정작 자신들의 욕구는 돌보지 못해 아예 마비되어 버린 사람들. <노동의 배신>의 바버라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나의 선택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고 화려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거리는 더 까마득하게 멀어져버린 것만 같은 지금의 무력감 속에서 어떤 결론도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에 잠이 깨면 도무지 쉽게 다시 잠들지 못한다. 친구 카카오톡의 대문에서 "나이가 들었나, 새벽에 깬다"라는  메시지를 읽고 난 후였다. 새벽에 밀려오는 생각들은 대체로 다 시리다. 온갖 불가능, 온갖 모호함, 온갖 상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어쩌면 아침이 밝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루에 나와 눈을 비비니 고작 새벽 네 시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 새벽에 아침을 하는 것도 티비를 보는 것도 왠지 다 어울리지 않는다. <위대한 유산>의 얼마 안 남은 부분을 읽기로 한다. 얼마 안 남았던 마지막 장. 다 읽어도 시계는 삼십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위대한 유산> 덕이다.

 

 

 

 

 

 

 

 

 

 

 

 

 

 

 

 

 

소년 핍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대신 스무 살이나 많은 누나와 대장장이 매부 조가 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마치 이성과 신앙과 도덕이 명령하는 것을 거역한 채,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강력히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태어나기를 고집한 죄인인 것처럼 누나에게 취급당했다. -p.45

 

찰스 디킨스의 해학은 마치 스티븐 킹의 <스탠 바이 미>의 그 소년들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의 눈높이는 우리가 이미 잊어버렸던 유년의 그 한없이 순수하고 굴절된 시선까지 정확히 내려간다. 핍의 내면에서 오가는 모든 생각들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누나에게 '따끔이'로 체벌을 당하고 온갖 악담과 비난의 세례를 한 몸에 받아야 했던 핍. 아이의 세계는 너무나 작고 너무나 연약하다.

 

하지만 핍은 "그가 나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도록 허락해줬기 때문에" 매부 조만은 사랑했다.  매부 조는 소년 핍을 언제나 보호하고 지켜주려 한다.

 

인생에서 어느 하루가 빠져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인생의 진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그대 독자여,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라. 철과 금, 가시와 꽃으로 된 현재의 그 긴 쇠사슬이 당신에게 결코 묶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잊지 못할 중대한 날에 그 첫고리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p.135

 

핍에게 그 어느 하루는 교회 묘지에서 우연히 감옥선에서 탈출한 어느 죄수를 만나 그의 위협에 겁을 먹고 누나 몰래 먹을 것과 매부 조의 줄칼을 가져다 준 날이었다. 음울한 저택에서 홀로 은둔 생활을 하는 노파 미스 해비셤의 대저택에서 아름다운 소녀 에스텔라를 만나 사랑에 빠진 날이었다. 핍에게 에스텔라에 대한 연정은 자신의 초라한 현실에 대한 자각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은 어디에선가 갑자기 로또에라도 당첨이 되듯 익명의 자산가가 그에게 막대한 유산 상속을 약속하며 신사 수업을 받도록 하는 반전에서 더 뼈아픈 것이 된다. 신실하고 언제나 다정했던 매부 조는 갑자기 핍에게 숨기고 싶고 피하고 싶은 하나의 업보처럼 보인다. 거짓말 같은 기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확천금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주입된 환상이다. 핍이 늪지대의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입성하여 세속적인 열망, 물질욕, 낭비로 오염되며 전락하는 모습은 불길한 복선이다. 뻔한 도식이라고 하여도 찰스 디킨스의 손을 빌리면 한 소년의 성장기는 아름다운 리얼리즘을 획득하며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소년기에서 청년기로의 진입로에는 숱한 왜곡과 오해와 환상의 관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생채기를 입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성장'은 뼈아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자신만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다. 조가 업보처럼 여기며 외면했던 아버지 같았던 매부 조가 나에게는 할머니였던 것 같다. 핍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행운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주변인들은 해학적이고 정겹다. 매부의 삼촌, 탐욕스럽고 거만한 펌블추크 캐릭터도 ,핍의 상속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 재거스, 그의 사무원 월릭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가진 조연들이다.

 

새벽 네 시, 내가 읽은 대목은 핍이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하나의 지향처럼 사랑했던 소녀(하지만 이제 그녀는 늙고 몰락했다) ,에스텔러와 미스 해비셤의 정원에서 다시 재회하는 장면이었다. 아름답고 눈물겨운 정경. 찰스 디킨스는 소설이 이야기의 사슬을 풀고 인간의 삶으로 흘러들어오는 물꼬를 튼다. 거기에서 나는 가슴이 저릿했다. 그 말고 다른 어떤 작가가 이런 말을 아름답고 도도했던 소녀기를 지나 남편의 학대와 폭력으로 고통받아 시들어가는 여인의 입에서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시련이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더 강력한 교훈을 주어서, 그 시련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네 심정이 한때 어떠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지금 이순간에는 말이야. 그동안 나는 휘어지고 부서졌어. 하지만 희망컨대 좀 더 나은 모양으로 휘어지고 부서졌다고 생각해.

-p.426

 

'성장'은 '위대한 유산'은 "좀 더 나은 모양으로 휘어지고 부서지는 것"이리라. 아, 왜 어린 시절 아무도 소년, 소녀들에게 이러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았던 걸까. 가르침은 말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꼭 몸소 부서지고 휘어지며 울면서 체득되는 것인가 보다. 사람도, 삶도 그래서 언제나 조금씩은 서러운 것인가 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12-15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다 읽으셨군요. 전 핍이 죽어가는자 앞에서 죽기전에 자신이 아는 비밀을-그러나 그가 정말 알고싶었을- 말해주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 제자리를 찾아가고 그에 맞게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blanca 2012-12-17 10:42   좋아요 1 | URL
이 책도 다락방님 페이퍼 보고 읽게 되었어요. 언젠가 읽으려고 했지만 결국 읽게 된 것은 님 덕분입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특히 다락방님 언급하신 대목도 뭉클했고. 찰스 디킨스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요.

잘잘라 2012-12-16 0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든 책이든, ... 아니 아니 책 책 책! 책으로 꼭, 읽어봐야겠요. 그러고 싶어집니다. 블랑카님 글 읽으면요.

blanca 2012-12-17 10:43   좋아요 2 | URL
메리포핀스님, 꼭 읽어보세요. 무엇보다 참 재미있더라고요. 오히려 영화는 줄거리가 거의 기억이 안 나고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모습들만 어렴풋이 생각나요.
 

"너 같은 딸을 낳아라."

"싫어. 그럼 엄마도 나 같았겠네. 엄마가 나를 낳았잖아."

 

아... 내가 이런 진부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고작 여섯 살짜리를 붙잡고 하게 될 줄 몰랐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라는 그 당연한 명제를 가슴에 품으려고 애쓰건만

그건 머리로나 가능한 일인지

점점 아이와 입씨름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도 당연히 유치해지고 비논리적이고 되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때로 든다.

 

 

 

육아는 이론으로 타인의 사례로 조언으로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아이가 기고 아장 아장 걷고 혀짧은 소리로 세상의 사물들을 명명하고 자신의 느낌을 서툴게 표현했을 때

몸은 힘들었지만 아이와 의사 소통이 되면서부터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읽은 책의 제목만으로도

당시 나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때로는 모성이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하고

아이 때문에 나의 감정을 절제할 수 없어 미칠 것도 같았고 이러한 양육 방식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고. 가끔은 썩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하며 자족하기도 하고. 꽂혀 있는 책들만 보면 육아박사가 되어 있을 터인데.

나에게는 저 만큼의 허전함과 결핍이 있었던 것같다.

 

육아에서 아이에게 공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이로 내려가 자신의 심리 상태를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의 기억도 여섯 살 근처에서 시작되는 것같다. 세상은 엄청나게 크고 나는 엄청나게 작았다. 엄마의 팔은 나의 세상 전부를 덮는 커다란 우산이었다. 무서운 것도 많았고 못 견딜 것도 많았다. 예쁜 연년생 동생 옆에서 몸이 움츠러들었고 심술도 많이 부렸다. 나는 착하고 귀여운 아이가 아니라 심술맞고 당돌한 것으로 어른들의 관심을 받아보려 했던 것 같다.

키우기 힘든 아이였다. 엄마는 무뚝뚝했지만 나의 화와 짜증을 엄하게 다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세상에서 받은 그 숱한 좌절과 실망, 불만도 안전하게 풀어낼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 되어야 한다.

 

 

 

 

 

 

 

 

 

 

 

 

 

 

 

 

 

기네스 펠트로가 한창 예뻤을 때, 그리고  에단 호크가 아직은 대머리 징조가 안 보였을 때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녀가 분수대 근처에서 키스하던 장면이 이들이 아이였을 때 했던 서툴게 했던 키스와 오버랩되던 장면. 원작은 찰스 디킨스의 동명의 성장소설이었다. 사실 큰 재미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이의 심리 상태에 대한 섬세하고 적나라한 묘사가 절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작은 눈 앞에서 굴절된 세계는 어떻게든 희극적이다. 아주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아이였을 때 잊었던 그 숱한 두려움과 착각, 기대들에 대한 충실한 복기로 시작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떤 상황을 온전히 이성적으로 제대로 세계화하지 못하고(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두려움과 절실함이 만들어 낸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양육자(주인공 핍한테는 누나)가 가지는 그 어마어마한 무게에 대한 고찰. 여기에는 각종 희극적인 어른들이 등장한다. 무기력한 매형도 누나가 초대하는 그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지역의 유지들도. 핍한테는 그저 한심하고 때로 무시무시한 비정상적인 캐릭터로 재창조된다. 그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어른들은 가르치려 들며 또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저만치 밀어내고 만다. 그러니 아이들과 어른은 영원히 소통할 수 없다. 그 격차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묘사. 그 안 어디쯤엔가 찰스 디킨스는 있다.

 

아이한테 나라는 엄마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내가 주문한 자그마한 트리가 아이한테는 불만이다. 이것저것 각종 장식 용품까지 아이가 좋아할 모습을 기대하고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서 주문했건만. 아이의 반응은 나를 유치하게 만들었다. 내가 보는 트리와 아이가 기대한 트리의 간극. 그것은 내가 강요로 메울 수 없는 공간이다. 다시금 제대로 다짐해야겠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12-0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요 블랑카님. 블랑카님이 보는 트리가 아이가 기대하는 트리와 다르다고 해도, 거기에 간극이 있다고 해도, 저는 괜찮다고 느껴져요. 물론 그 간극이 없다면 최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다를수도 있구나' 하는것도 저절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음, 이건 제가 여섯살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걸까요?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저 역시 기대 이상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활짝 웃는걸 보고싶고, 행복해하는 눈빛을 보고싶고.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으면서 저도 블랑카님과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찰스 디킨스가 마구 좋아졌어요. 이렇게 아이의 눈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정말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핍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집에서 먹을 것을 싸가고 하는 그 두려움들이 아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지잖아요. 아, 나라면 울음을 터뜨렸을거야, 하면서 읽었었어요.

blanca 2012-12-08 15:2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페이퍼 읽고 아, 맞아, 읽어야지, 했던 거예요. 그래서 고마워요^^ 아, 너무 재미나요. 아껴 읽는 중이에요. <호밀밭의 파수꾼> 저리 가라더라고요.

다크아이즈 2012-12-0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보니 아이 키우던 그 때가 새록새록.
자식은 엄마 뜻대로, 엄마 성향 대로 커주는 게 아니라 오롯이 '지 뜻'대로 커가더군요.
그게 때론 서운할 때도 있지만 신기하기도 해요.
저랑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딸아들을 키우면서(키웠다기 보다 지대로 컸군요.ㅠ)얻은 결론
자식 곁을 맴도는 엄마보다, 자식을 지켜보는 엄마가 자식 교육에는 훨씬 낫더라는...
밀착형 엄마의 회한기보다 방임형 엄마의 자책감이 조금 나아 보이는 요즘.

블랑카님은 현명하니 잘 키우실 것 같아요. 따님 한 명인가요?

blanca 2012-12-08 15:28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제가 요새 느껴요. 저희 엄마가 좀 방임형 스타일이셨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도 내공이 필요해서 저는 잘 되지도 않고 혼란스러워요. 예, 딸 하나랍니다. 동생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지요--;; 자녀분이 얼마나 큰지 궁금해요.^^;;

노이에자이트 2012-12-0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도 예전에는 어린이였을텐데 정작 어린이를 대할 때는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하거든요.그게 어른의 특권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디킨스 소설 중에서 요즘은 <위대한 유산>의 인기가 최고더군요.저는 <올리버 트위스트>도 참 재밌게 읽었어요.완역본은 상당히 두툼하더군요.

blanca 2012-12-08 15:26   좋아요 0 | URL
아,<올리버 트위스트>요! 저도 기회가 되면 읽어볼게요. 다른 분 페이퍼에서 <미들마치> 번역이 진행되고 있다고 노자님이 댓글 다신 것 본 것 같아요. 너무 반가워서 기다리는 중인데 제 기억이 맞는지요?

노이에자이트 2012-12-08 20:32   좋아요 0 | URL
올리버 트위스트는 정말 추리소설 같아서 재밌어요.

미들마치 이야기 맞습니다.금성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이미 번역되었으니 도서관 중에서는 비치한 곳이 있을 겁니다.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봤어요.

프레이야 2012-12-07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는 엄마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욕구를 조절하는 법도 자연히 익히게 되어요.
엄마가 좀 모자라면 오히려 자율성도 생기구요. (저에 대한 변명 같아요.^^)
엄마가 앞서는 것보다 반 발 정도 물러나 따라가는 것처럼 뒤에서 지켜보는 게 좋다고 들었어요.
저도 집에 크지 않은 트리가 있어요.
아이들 어릴 때 쓴 건데 이젠 폐물이 되어 베란다방 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그때 울딸들 그닥 내켜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ㅋㅋ 저 혼자 좋아라 했어요. 작은 만족 같은 것이었는데
아이들의 요구와는 간극이 있었겠지요.^^

blanca 2012-12-08 15:2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벌써 사춘기가 걱정됩니다. 아이가 엄마가 좀 모자라도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훌륭한 책을 읽는 경험은 첫 키스와 같다. 나는 진심으로 이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댈러웨이 부인>은 내게 첫 키스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읽은 어떤 책보다 농밀하고 내밀하게 다가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

 

 

 

이제 2012년도 채 한달이 남지 않았다. 거울을 본다.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온 날만큼 더 살면 나는 완연한 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주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또 몇몇의 지인도 내 곁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꾸준하게도 뚜벅뚜벅 제 갈길을 간다. 한파는 시간의 흐름과 마무리를 응축한 은유 같아서 더 시리다. 눈이 와도 이제 강아지처럼 뛰어다닐 일은 없으리라. 아이의 성장은 나의 또다른 시계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처음이다. 그녀는 나에게 완고하고 성마른 인상이었다. '의식의 흐름기법' 들어는 봤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같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를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준다. 그에게 이 책은 첫 키스를 회고하는 첫사랑 같은 글이라 한다. 이미 열다섯 살에 그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첫 키스는 뒤늦게도 찾아온다. 이 책은 생각만큼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의식의 흐름'이란 거창한 어구 아래 그저 내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모호한 생각, 느낌 들이 그녀의 명료한 언어로 분출된 듯한 느낌. 정말 농밀한 책. 구십 년도 더 전의 그녀는 어쩌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무단 침입한 듯하다. 표현할 수 없었던, 말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그녀의 언어에 빚진다. 소설의 한계의 철책은 그녀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구나.

 

 

런던이다. 찬란한 6월의 아침. 오십 대의 클라리사는  파티에 필요한 꽃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리고 하루. 파티가 열린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서사는 그것이 전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런던의 풍경, 그녀를 둘러싼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성공한 사람들, 때로는 그렇지 못한 채 소외된 사람들의 정경.

 

그녀는 빅토리아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인간이 너무나 어리석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p.9

 

수많은 아침을 밀어넣은 지극히 농밀한 이 하나의 아침. 이 순간. 젊은 시절의 어리석은 사랑도 오늘의 어리석은 세속적인 욕심도 함께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무리 불행해도 인생은 포기 못할 그 어떤 마지막 꿀을 숨기고 있다. 무모하고 비겁하고 "낭만적인 해적 같은 남자"인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랑, 피터 속에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

 

늙는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바로 이거야. 열정은 여전하지만 지난날의 경험을 천천히 불빛 아래 돌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최상의 향기를 더해주는 힘이지. <중략> 쉰세 살이 되고 보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필요치 않았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순간순간, 그것의 방울방울, 여기, 이 순간, 지금 이 햇빛 속에, 리젠트 공원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p.115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추억의 귀환. 끊임없이 테잎은 되감기고 의미는 가공된다. 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했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이제는 무의미하다. 내 인생에 삶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의 무게의 추는 숙명적으로 내 삶의 닻이다.  단하나의 무의미함도 어떤 하나의 사소함도 걸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댈러웨이 부인>을 읽아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속의 '사자' 거기에도 파티가 있었다. 그 파티에 참석했다 우연히 죽어버린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아내 옆에서 삶을 조망하는 남자가 있었다. 묘하게 닮아 있는 이야기.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 p.291

 

노이모 자매의 파티에 참석한 조카 가브리엘은 아내 레이첼의 추억을 버지니아 울프의 피터처럼 불빛 아래 천천히 돌려보게 된다. 역설적으로 추억의 귀환은 죽음에 대한 명료한 의식으로 연결되고 현재의 순간에 대한 농밀함으로 통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조우하는 부분이다. 두 작가의 생몰 연대를 보니, 놀랍게도 같다. (1882~1941)  버지니아 울프의 약력을 보니 그녀의 죽음이 제임스 조이스의 죽음에서 온 우울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친분이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밀착되어 있던 관계였던 것같다. 파티라는 생의 축제에서 갑자기 다가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삶의 본질적 유한성에 대한 두 작가의 공통적인 통찰에서 유려하게 빚어낸 깨달음이다. 클라리사도 가브리엘도 어쩌면 작가들 자신의 투영인지 모르겠다. 파티를 개최하고 파티에서 시를 읽고. 각기 다른 의미에서 파티에서의 주인공 역할을 했던 그들도 그들이 걸었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거리도 이제는 없다. 그리고 그 둘은 그럴 것을 이미 안다. 내일 죽을 것을 이미 아는 것은 머리로 가능한 명제이지, 가슴으로 간직하는 깨달음은 아니다. 모든 것의 유의미성도 무의함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지금 하는 사랑은, 지금 하는 일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게 되기도 한다. 삶 앞에서 어리석어지는 것은 이 단순한 명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클라리사의 말처럼 그것은 의회의 법령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뛰어들고 싶어했을 정도로 화창했던 유월의 아침. 그 순간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반복된다.

 

눈이 온단다. 사박사박 그 눈을 밟으면 2012년 12월 5일은 또 허공으로 스러질 것이다. 그 경계를 딛고 나는 또 나아가고. 무작정 스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댈러웨이 부인>은. 

 

P.S.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다. 각기 다른 세 시대, 세 여인의 접점은 <댈러웨이 부인>이다. 심지어 한 명은 댈러웨이 부인의 클라리사라는 이름과 같다. <디 아워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작품을 <댈러웨이 부인>과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5) 먼댓글(1)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그 사랑의 시작
    from A Month in the Country 2012-12-06 23:17 
    서재 이웃분이 한 번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소설을 쓰게 된다면 누구처럼 쓰고 싶은지. 소설이나 글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 나는 누구를 표준모델로 골라야할까 고민을 좀 했었다. 일전 한 페이퍼에서도 썼었는데, 내게 '글'이란 정연(井然)과 정연(整然)이 만나서 이뤄내는 무겁거나 깊은 어떤 것,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의 밖에 머무는 어떤 것이다. 지금처럼 소소한 상념들을 블로그에서 끄적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학소녀 시절을 벗어난 이후 '소설'이든 '
 
 
댈러웨이 2012-12-0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저는 <출항>을 끝냈고, 울프의 다른 책들이 오는 동안 <등대로>를 다시 읽었고, <제이콥의 방>을 읽고 있어요. 반가워요. 버닝햄의 책도 함께.

댈러웨이 2012-12-05 21:35   좋아요 0 | URL
마이클 커닝햄이에요. 뭘 버닝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 블랑카님, 저 먼댓글 달고 싶어지는데요? ^^

blanca 2012-12-06 09:31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이 떠올랐어요. 왜 댈러웨이라고 이름 붙이셨는지 설명 안 하셔도 느낌으로 다가올 만큼 너무 좋은 책이더라고요. 저도 커팅햄이라고--;; 수정했답니다. 참, 댈러웨이님! 저 울프의 다음 책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으로(아, 너무 지난한 표현이지만) 한 권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크아이즈 2012-12-0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커팅햄의 <첫 키스> 비유가 왜 <댈러웨이 부인>에 가서 걸리는지 아직 이해가 안 되는 일인.
억지로 읽어보려 했는데도 그냥 덜 읽고 반납하고 만 기억이 있네요.
어쩌면 번역상의 문제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삼아봅니다.
291쪽 옮긴 글(깔끔한 번역 같지 않아요.)보다 저는 블랑카님의 해설이 더 좋은 걸 어쩌라구요?^^

blanca 2012-12-06 09:33   좋아요 0 | URL
아, 팜므느와르님, 댓글 읽고 커닝햄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추신으로 덧붙였습니다.^^ 아, 번역이요! 그러실 수도 있어요. 제가 읽은 이태동님의 번역은 참 좋았어요. 일단 표지가 이뻐서 낙찰했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