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류의 소설은 처음이다. 낯설고 난감하고 경이로웠다.

 

 

 

 

 

 

 

 

 

 

 

 

 

 

 

 

분권된 소설은 섣불리 시작하기 힘들다. 일단 1권이 별로라 할지라도 2권이 노려보고 있다. 읽지 않은 책 목록에서 이런 긴 분량의 이야기는 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말 신중한 시작이어야 한다. 작품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지루한 이야기라면 곤란하다. 독자는 좋은 책의 기준 안에 반드시 읽는 즐거움을 포함시킨다. 그것은 문학상 심사위원들이나 문학평론가들과 반드시 만나는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캐나다의 여류 작가의 이 책을 시작하는 데에 망설였드랬다. 나에게 필요한 리뷰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보장성이 담긴 것이었다. 재미없는 책을 향하여 발휘하였던 인내심들은 이제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괴이쩍은 재미를 가지고 있다. 보기 힘든 구성이다. 일단 화자는 노년의 아이리스다. 아이리스는 현재에서 자신의 유년과 젋음을 회고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눈먼 암살자'라는 액자 형식의 다른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삽입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도피중인 '그'와 목마른 재회를 나누며 '그'가 해 주는 공상 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니까 삼중의 액자 형식이다. 노년의 아이리스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전쟁이 끝난 지 열흘째 되던 날, 하나 뿐인 여동생 로라가 스물 다섯 살의 나이로 차를 몰고 다리 위에서 추락하는 장면이다. 단추공장의 상속자였던 아버지가 전쟁에서 불구가 되어 돌아오고 어머니마저 병으로 잃은 자매는 하녀 리니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만 공장의 몰락, 아버지의 파멸과 더불어 탐욕스러운 실업가 리차드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이 슬픈 이야기의 단초를 얻는다. 언니를 따라 형부의 보호 아래 있게 된 로라는 때로는 구제불능인 것처럼 심지어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아이리스와 격리되어 자매는 서로의 진심을 알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다. 너무나 슬픈 이야기. 소녀 시절 아이리스, 로라가 함께 숨겨주었던 공산주의자 청년 토마스를 사랑했던 그녀들은 이제 이 '눈먼 암살자'라는 이야기가 동생 로라가 남긴 유작이 아니라 어쩌면 아이리스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암시를 곳곳에 숨기게 된다. 사랑없는 결혼으로 이용당하는 여자는 항상 도망다녀야 하는 남자와 비밀리에 만나며 그가 해 주는 자이크론이라는 행성의 '사키얼 논'이라는 도시에서 카페트를 짜며 시력을 잃은 소년들이 암살단으로 사주를 받고 제물로 바쳐지게 되는 혀가 잘려진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에 다다른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남녀가 이 비극의 서사의 열린 결말에 함께 참여하는 모습은 오싹하면서도 서글프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러한 슬픈 서사의 실타래를 다 늙어버린 아이리스의 손가락에 맡긴다.

 

낙원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곳에는 여로가 없기 때문이다. 상실과 후회와 비참함과 열망이 굴곡진 길을 따라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2권 p.393

 

작가의 기본적인 서사에 대한 시선은 이런 곳에 닿아있다. '이야기'는 상실과 후회와 비참함과 열망 사이에서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처럼. 여동생 로라가 남겼다고 표방되는 이야기는 결말부에서 드디어 언니 아이리스의 것으로 겹쳐진다. 한 남자를 사랑했던 자매는 그 사랑이 용인되지 않았던 시대에서 서로를 철저히 오해한 채 허무한 작별을 맞는다.

 

할머니 아이리스의 고독하고 무기력한 삶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의 변화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조로 또하나의 절절한 서사를 구축한다. 이를테면 이러한 구절은 계절의 변화마다 따른다. 아무래도 작가의 시인으로서의 경험이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의 직조에 한몫을 담당했을 테다.

 

야생 기러기가 고장 난 경첩처럼 끽끽 울며 남쪽으로 날아갔다. 강변을 따라 옻나무 초가 흐릿한 붉은 색으로 타고 있다. 지금은 10월 첫주다. 좀약 사이에서 끄집어낸 양모 옷의 계절. 밤안개와 이슬과 미끄러운 현관, 그리고 늦은 전성기를 맞이한 민달팽이의 계절.

-1권 p.331

 

시간와 물질과 야망이 모두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남는 그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 아이리스가 이제 펜을 놓고 손녀와의 재회를 꿈꿀 때 그래도 삶은 생명은 어떤 순수, 진리에 대한 열망과 사랑의 추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갑고 눅진하고 서슬 같은 소설. 이야기는 이렇게나 위대해질 수 있구나. 진실은 실재는 죽음으로 화석화되어 현재완료형이 되어 심지어 역사라는 틀에 담겨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그 단순한 명제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철저히 서로들을 오해하며 그렇게 오늘도 삶을 산다. 나이가 들어 나의 삶을 다시 그 초입부터 매만져도 그것은 또다른 형태로 가공되기 마련이다. 그 삶속을 들락날락했던 수많은 만남들도 그렇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반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연한 외면했던 것들에 대한 직시와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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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3-02-04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눈먼 암살자>를 읽고 싶은 열망이 들끓습니다. blanca님 글의 힘이군요. ^^ 사놓고 못 읽은 수많은 -_- 책들 중 하나인데요. 말씀처럼 분권이라 그런지 선뜻 손이 가지 않네요. 이참에 힘을 내봐야겠어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3-02-04 16:59   좋아요 0 | URL
달밤님! 꼭 읽으세요. 정말 괜찮아요. 일단 추리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요. 조금만 참으시면 별세계가 펼쳐집니다.

Jeanne_Hebuterne 2013-02-05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이국적이고 아름다우며 사람들은 늘 다른 식으로 행동하는 곳,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존재. 과거와 그 속의 자신을 만나는 이야기이기도 했군요.

blanca 2013-02-05 11:33   좋아요 0 | URL
쥬드님, 맞아요. 쥬드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정말 이국적이고 몽환적이고 아름다웠어요.

Jeanne_Hebuterne 2013-02-05 11:56   좋아요 0 | URL
이리 말씀하시면 아니 읽을 수가 없지요! 좋은 책을 일러주셔서 고마워요, 블랑카님!

테레사 2013-02-05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어,블랑카님, 무섭진 않나요? 공포나..뭐...저도 읽어 보고 싶은데..암살자라고 하는 단어가 주는 선험적인 두려움? 이라고 할까요? 좀...

blanca 2013-02-05 11:34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저 엄청난 겁쟁이거든요. 미야베 미유키 여사 책 읽고는 밤에 잠도 못자고 --;; '그것이 알고 싶다' 보고 악몽 꾸고 그러는 수준인데. 이 책은 안 무서워요^^;; 암살자,라는 게 사실 거의 은유에 가까운 이야기더라고요,

테레사 2013-02-06 09:4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렇다면 읽겠어요!!!(불끈) 블랑카님 덕이에요, 다~^^

후애(厚愛) 2013-02-09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좋은일만 가득가득하셔용~~~~^^

blanca 2013-02-11 11:45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요! 감사합니다.

순오기 2013-02-1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서재마실이 뜸해서 블랑카님 서재에도 오랫만에 들려요.
명절은 잘 보내셨지요?
이제 곧 새봄 맞으려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분홍공주도 새봄엔 더 파릇파릇해지겠지요.^^

blanca 2013-02-14 17:25   좋아요 0 | URL
예, 저도 명절 잘 보냈습니다. 한창 바쁘시죠? 오늘 바깥에서 봄냄새가 나더라고요. 순오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순오기 2013-02-17 11:12   좋아요 0 | URL
들려요~ 들어요,로 돼 있어서 오타 수정했더니
님 답글보다 늦은 날짜로 잡히네요.ㅋㅋ

2013-02-17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새 책을 좀 안 읽었다. 그러니 자꾸 스마트폰만 붙들고 스마트폰의 그 단문들과 이미지들에 익숙해지다 보니 더 책을 안 읽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하철을 타도 주변을 둘러봐도 내가 아무리 재미있는 책들로 책꽂이를 채워도 나에게 책에 대하여 묻는 사람도 같은 책을 읽는 사람도 참 보기 힘든 요즘이다. 참, 책을 안 읽는 시대다. 책을 읽어도 안 읽어도 더이상 '책'에 대하여 신나게 떠드는 게 익숙한 풍경이 되기는 힘든 시대. 다시 책으로 돌아와 그 흑백의 언어들과 현란한 이미지의 경쟁이 얼마나 때로 승산없는 것이 될 수 있는지 잠깐 동안의 외유에서 돌아와 편혜영의 단편집에 집중하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언어의 틈새에서 일렁이는 그 순전한 파고를 즐길 수 있는데 그 '조금만'이 어려워진 시대다. 눈에 보여지는 게 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에서 문자 텍스트 앞에서 발휘해야 하는 인내심은 비싼 희생이다. 언어들만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의지하여 나만의 이야기를 다시 재창조하여야 하는 독서는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십 년이 지나고 삼십 년이 지나면. 어쩌면 종이 위의 문자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무리들은 점점 더 화석 같은 풍경이 되어갈 지 모른다. 그래서 책을 사고 책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이 공간이 소중하다. 이 공간에 둥지를 틀고 나면 이 공간에서의 논란에서도 슬며시 주인의 손에 이끌리게 된다. 명분, 합리성, 정직, 신뢰. 이러한 가치를 지향하며 철저히 이성적이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가장 합리적인 의견을 표방하는 주체가 내가 되기는 힘들다. 도서정가제에 대하여 제대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틈새의 수많은 숨겨진 이야기들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나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싶지만 나는 언제나 나의 미숙한 판단이 두렵다. 나는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도 않으니까. 온라인 서점에서의 할인과 마일리지가 동네서점 고사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동네서점의 부활에 일조를 담당하리라는 낙관은 들지 않는다.

 

편혜영의 화자는 대부분 '그'이다. 참 신기하다. 남자 작가가 여성화자를, 여자 작가가 남성 화자를 택할 때의 그 일말의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중간도 못 왔지만 색깔이 아주 명확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초적인 척 하는 나약한 중년의 사내들의 이야기. 한 편을 읽고 나니 나머지는 쉽게 읽힌다.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제대로 할 많은 작가들이 있어 다행이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것도 절절하게 묘사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쉽게만 이야기하지 않으면 된다. 쉽게 이야기하려는 순간 그것의 진정성은 바랜다. 언어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 좋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나는 실패했다. 그 수많은 은유, 무언가 더 있는 것 같은 머뭇거림에 이제는 참고 다 읽어내는 인내력에 후달리는 나로서는 그 심오함을 제대로 못 따라가겠다. 참지 않고 조금 있다 덮었다.--;;  너무 무거운 무언가를 품고 있을 거라는 부담감도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것같다. 구입한 책을 읽지 못할 때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아이에게 이 시리즈를 다섯 권 사서 읽어주고 있다. 그림이 다소 흐릿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읽어주다 보면 그냥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글밥이 많아서 아이는 후반부에 가면 꼭 딴짓을 하고 나는 목이 아프다. 그래도 옆에 앉혀 두 권이나 읽어주었다.

 

나는 어렸을 때 책을 너무 좋아해서 한글을 떼지도 못하면서 책만 붙들고 있었다. 발달이 늦어 그랬는지 그렇게 책을 많이 봐도 한글을 다 알지 못하고 학교에 갔다. 아이도 책을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벌써 이것도 하나의 채근이 된다. 즐겁게 젖어들어야 할 텐데. 벌써 영상물과 이미지의 급변에 익숙해진 스마트폰 세대의 아이들은 느린 활자가 주는 즐거움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무엇을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편혜영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먼 암살자>를 읽을테고 그 다음에는 정말 그 다중지능이론의 가드너(전공에서 유일하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가 썼다는 신간을 구입하게 될 것같다. 올해는 살이 찌고 있고 무기력해져 가고 늙고 있고 머리가 다시 곱슬로 자라고 있다. 그리고 눈밑의 주근깨는 점차 기미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늘 아침 뜬금없이 나의 엄마가 살아서 나와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게 기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뒤늦게 철이 들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없는 것같다. 세월의 힘도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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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3-01-2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어낚시는 저도;; 이게 왜?! 이런 기분이었죠.

blanca 2013-01-30 09:43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저도--;; 정말 그랬어요. 저는 그리고 은유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었을 텐데 이제는 그런 인내심 자체가 없어졌어요.

icaru 2013-01-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송어낚시는 실패요. 중간에 놓아 버리고, 찝찝함을 느꼈는데 그게 아마 죄책감이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하네요~
서든 에이지 이후 라는 책을 읽으면서,,, 제 노화의 징후를 굳이 애써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저보다는 서넛 어리신 것 같은 블랑카 님께 마흔 즈음에 일독을 권해 드려요!

blanca 2013-01-30 09:45   좋아요 0 | URL
서든 에이지 이후! 꼭 읽어 볼게요. 미리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산 책은 웬만하면 다 읽자, 주의인데 못 읽으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도 읽다 말다 하다가 마침내 끝까지 읽고 마지막의 감동이 참 강렬하더라고요. <송어낚시>도 그럴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지만 이제 책장이 잘 안 넘어가는 책은 다 못 읽겠더라고요.

꿈꾸는섬 2013-01-30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이 잘 안 읽히는 걸 스마트폰 탓으로 돌려야겠어요.ㅎㅎ
편혜영, 저녁의 구애, 저도 찾아봐야겠어요.^^

blanca 2013-01-30 09:46   좋아요 0 | URL
꿈섬님, 이 책 정말 재미있네요. 또 한 명의 작가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애(厚愛) 2013-02-0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피터래빗 이야기'에 관심이 가네요.^^
오랜만이지요? 잘 지내셨어요?
감기조심하시고, 좋은 주말 되세요~ *^^*

blanca 2013-02-02 16:41   좋아요 0 | URL
예, 후애님. 후애님도요^^
 
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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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기대치를 항상 충족시키기란 쉽지 않다. <<이상문학상 작품집>> 같은 경우가 그렇다.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오고 들을 이야기는 넘쳐서 그랫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그 흡인력, 뭉클함 같은 것이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다 오다 단편 한 두편 정도로 알아 왔던 김애란의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를 펴든 순간 우리 나라 소설계는 여전히 성장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여타 우수상 수상작들도 꼭 상을 받아서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단편만이 가질 수 있는 농축의 미가 돋보였다. 재미있었고 허무하지 않아 좋았다.

 

 

김애란 <침묵의 미래>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루어진 영이다. 나는 거대한 눈이자 입.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낱낱의 입자로도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중략>-p.13~14

 

소설 같지 않은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자기 정의. 이건 흡사 철학책의 한 장을 할애한 것 같다. 여기에서 화자는 사라져 가는 '말'의 정령이다.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특별구역으로  사라져 가는 언어를 구사하는 소수의 화자들이 보존되는 곳. <소수언어박물관>의 정경. 여기에 김애란이 자주 그렸던 활달하고 젊은 88만원 세대의 구체적인 실체는 없다. 이제 김애란은 자신이 어루만지고 구사했던 언어의 본질적 모습에 가 닿는다. 그것은 '말'을 사용하여 인간의 삶을 다루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언어는 삶의 한계이자 철책이면서 해방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도 아니고 우리의 삶도 아니다. 그저 우리의 오해와 바람과 눈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할런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죽고 우리의 삶은 언어로 축소된다. 언어로 이야기되는 것은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그에게 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고 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p.30

 

진지한 이야기가 꼭 지루함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딛고 서는 이 발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의 경계는 확장된다. 이제 김애란에게 서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에 더이상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된 것 같다. 우리가 하고 싶었지만 듣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 화자가 되어 답답함을 풀어준다. 그녀는 분명 아주 잘 크고 있는 것 같다. 작가의 부모님의 소개팅이 이루어졌던 시골의 잡화점 같은 '송방'에서의 이야기는 부록 이상이다. 거기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화투놀이의 일종인 '뽕을 쳤다'고 한다. 소개팅에서 가게 점방 같은 곳에서 놀이를 하고 바로 벌칙으로 엿과 삶은 달걀을 사고 사랑에 빠진 그녀의 부모님의 이야기는 당돌한 이야기꾼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녀의 익살도 재기도 시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러한 부모님의 익살과 재기를 잘 담아내어 조금씩 더 무거워지려 한다. 그녀의 수상소감처럼 그녀의 무게가 길 위에 '방향'을 만들 것이다. 독자들은 그녀가 만든 지도의 발자국에 살짝 자신의 발을 넣어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지는 꿈을 꾼다.

 

 

편혜영 <밤의 마침>

 

오퍼상에서 비밀 사서함을 관리하다 자신의 내밀한 과거에 대한 암시를 발견하는 중년의 사내. 누구나 실수는 하고 누구나 환한 대낮에 크게 얘기할 수 없는 은밀한 공모를 간직하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몹시 떨리는 이야기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다. 아내에게 용서를 받을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여자아이'를 추행한 일은 무고로 결론지어지고 그의 아내는 그의 결백함을 깔끔하게 수용해 주지는 않는다. 아내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이야기는 귀가 하나 빠진 퍼즐로 독자를 유인한다. 바로 속으면 안 된다. 절대.

 

 

그는 자신이 선량하고 성실하며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고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도 명확한 신념과 원칙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일로 그런 게 전혀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인간이란 신념이 흔들릴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인데, 자신에게는 애당초 흔들릴 신념조차 없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에게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만이 있다. 그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순간적인 위기에 대처 능력이 뛰어나나 그게 가진 능력의 전부이다. 그가 자부하던 건전한 양심과 신념, 사회적 위상과 도덕에의 의지, 원칙이나 선의 같은 것들은 그간 주머니에 비축된 먼지의 양보다 적다. 그는 그저 상황과 위기에 걸맞게 신념과 가치라는 걸 조작해온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을 착각했고 과신했다.

-p.198

 

이러한 '그'에 대한 설명은 '그'가 누구일 지라도 얼마간은 아니 상당 부분이 맞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일관성 있고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불확실하고 가변적이고 모호하고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도 보일 수 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어떠한 상황에서 예외의 모습을 보였을 때 그는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대쪽같은 신념과 일관성은 생동하는 삶과 합치되기 어려운 과제다. 물론 지향이 될 수는 있겠지만. 편혜영이라는 작가는 그러한 지점을 비범하게 포착했다. 흘러내리는 단발머리 속에서 예쁘게 미소짓는 그녀의 흑백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다.

 

손홍규의 <배우가 된 노인>도 김이설의 <흉몽>도 우리의 삶의 이면, 그 비의에 대한 적나라한 고찰이다. <배우가 된 노인>이 딸을 위하여 연기하는 삶도 모텔을 청소하며 남편의 범죄를 방조하는 그녀의 그 비루한 일상도 결국 생존에 끄달리게 되었을 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그 나락에서의 모습에 대한 성실한 고찰이다.

 

이야기는 죽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에 닿으면 그 골목은 갑자기 그 빈곤한 언어들 앞에서 겸손하게 문을 만든다. 책도 그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사는 삶도 언제까지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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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상 받는 사람은 항상 우수상만 받는군요... 편혜영, 손홍규, 윤성희 등이요.
언젠가 그네들도 이상문학상 대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더라면 좋겠어요.
김애란의 수상에 영 내키지 않았는데, 블랑카님께서 인용해주신 부분과 글을 읽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요.

blanca 2013-01-26 15:4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도 사실 김애란 취향은 아닙니다. 몇 몇 단편이 소재나 주제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장편은 못 읽어 봤어요.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 작가가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어요. 안주하는 작가가 아니라요.

꿈꾸는섬 2013-01-30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애란 팬인데...아직 이상문학상수상집은 못 읽어봤네요.
요새 워낙 책이랑 멀리 지내서, 가깝게 지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blanca 2013-01-30 09:46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그러다가 또 책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재작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결혼기념일을 잊어 버렸다. 지나고 나서야 둘 다 "맞다!" 했다. 한 술 더 떠 우리가 과연 4월 16일날 결혼을 했는지 19일날 했는지에 대한 헷갈림까지. 누구 한 명이 잊고 누구 한 명이 헷갈렸다면 우린 슬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이 동시에 더이상 기념일에 의의를 두지 않고 그런 지나침에 큰 서글픔을 동반하지 않게 된 것은 일순 달달한 연애와는 다른 삶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다독여 주기로, 이제는 그러한 사이클에 우리가 서서히 진입하게 된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에 대한 수긍이기도 했다.(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스물 세 살과 스물 여섯이 만나 스물 여덟과 서른 하나로 결혼하기까지 왜 많은 사연들이 없었을까. 남녀가 소개팅으로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고 갑자기 세상 전체에 둘만 손을 잡고 걷는 듯한 그 두둥실한 판타지에서 점점 대화가 줄어들고 털 하나도 얄미운 순간도 있었을 테고 그러다 또 갑자기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느껴져 마침내 하나의 공동체로 들어서기까지. 그러나 어쨌든 해피엔딩은 언제나 많은 기억들을, 많은 고난들을 저만치 밀어내고 현재가 마치 태곳적 과거였던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아, 나도 이런 책을 읽었다. 너무 늦게.

 

 

연애소설. 참 오랜만이다. 이미 다 읽어버린 듯한 착각에 이제는 읽지 않게 된 장르. 첫장부터 큰 기대 없었다. 그냥, 한번쯤은 이런 책도 읽어보고 싶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결혼 적령기의 남녀. 각자의 너무나 다른 유년기가 복기된다. 남자는 가난하고 얼마쯤 비참하다. 여자는 중산층에서 자란 유별나지 않은 캐릭터. 정이현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남녀의 배경차. 둘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디테일이 참 예쁘다. 정이현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 그래, 경청. 남녀 관계를 이러한 구도로 설명하는 시선은 참 신선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누구나 들어주는 사람에 고프다.

 

어떤 관계에서든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연인들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굿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굿 리스너가 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들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받을 것인가.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p.114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경청하게 된다.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이야기도 그 나름으로 멋진 서사다. 그것이 과장이나 망상일지라도. 그 언어들이 구성하는 세계에서 상대는 독보적인 존재다.  내가 가미한 멋대로의 환상과 겹쳐져 우리는 어쩌면 가장 비현실적인 '너'를 내 나름으로 재구성해서 껴안고자 하는 헛된 시도를 '사랑'이라 명명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아주 담담하다. 남녀가 만나 불타오르다 식는 그 파고가 롤러코스터의 그것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아주 당연하게 얌전하게 납득할 수 있게 현실과 환상이 만나 어떻게 그 환상이 사그라드는지 지극히 현실적으로 읊조린다. 남녀는 권태를 느끼고 결혼 앞에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다 원거리에서 주춤 주춤 이별을 준비한다. 연애 소설의 독자인 나로서는 다시 재결합했으면 하는, 지극히 당연한 소망 앞에서 움찔했지만 그렇게 쉽게 해피엔딩이 아닌 기만을 던져 주지는 않는다. 똑똑한 이야기. 우리가 지척에서 당면했던 정말 그럴 법했던 이야기.

 

아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사랑을 지속하는 데에 실패했으나 어쨌거나 이별을 위한 연착륙에는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했다. 비행기 동체도 부서지지 않았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다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대도 충분히 의미 있는 비행이었다는 것도.

-p.208

 

이별의 연착륙. 울며 불며 매달리고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절규하지 않아도 싫증나서 겸연쩍은 이별을 했다고 해도 이 지구에서 타인을 만나 잠시 온기를 쬐었다는 것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회고해도 역시나 근사한 의미 있는 일이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p.209

 

이 대목에서 소설가 김연수가 떠올랐다. 그의 화법과 그의 시선과 묘하게 겹친다.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 모든 만남은 그것이 스쳐갔던 것일지라도 하나의 기적이다. 잘 만나고 잘 헤어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섭섭하기도 하고 공감가기도 하고. 아, 이런 결말의 연애는 남의 것일지라도 언제 들어도 가슴 한 켠이 뻥 뚫리는 것같다. 아줌마는 언제나 아가씨가 아줌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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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1-2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기념일을 두분 다 잊다니요? 게다가 날짜가 헛갈리다니 ㅜㅜ
너무 우울해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끔 서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끼던 그때를 생각하면 사는 일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올 해는 특별한 결혼기념일을 계획해보시면 어떨까요? ㅎㅎ

blanca 2013-01-22 11:07   좋아요 0 | URL
ㅋㅋ 안 그래도 저희 너무하다 했어요. 그래서 그 작년에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표시해 놓고 나름 즐겁게 보냈답니다. 올해도 또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네요. 꿈섬님 말씀처럼 올해는 더 특별하게 보낼 이벤트를 찾아 봐야겠습니다.66
 

어떨 땐 정말 우리 말로 된, 그러니까 번역을 거치지 않은,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진다. 그럴 때에는 사실 참으로 난감하다. 이런 추상적인 소망을 제대로 충족시켜 줄 딱 바로 그 책을 어디에선가 골라야만 하는 것이다. 대체 어떤 책이 그러한 난감함을 무마시켜 줄 수 있을까.

 

난삽한 검색에 들어간다. 그냥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알라딘 동네를 떠돌다 우연히 만난 책. 그냥, 제목이 좋았다. 이 작가는 처음이다. 나는 그 유명한 그의 <19세>를 읽지 않았다.

 

 

'수색'은 실제 은평구 수색동의 지명과 겹친다. 정말 이 수색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장마만 되면 한강 하류에 위치해 물이 이곳까지 차오르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이 지명은 이 소설 전체를 견인한다. 소설 속의 '나'는 직장생활과 소설 창작을 병행하다 전업 작가가 되는 모양새로 실제 작가 이순원의 이력과도 겹친다. 자전적이라는 용단은 위험하지만 군데군데 이것이 소설인지, 정말 작가의 내밀한 고백인 것인지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 그 모호함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이건 정말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닐지도 몰라, 를 의식하며 읽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그만큼 핍진하고 뭉클하다. 거짓부렁인지 알면서도 화자의 이야기가 어디에선가 실제 일어났던, 일어나는, 일어날 이야기라고 믿는 것은 청자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인 포기할 수 없는 기만이다.

 

'나'는 아내와 엄격하지 않은, 그러니까 언제든 다시 합칠 용의가 있는 별거를 하게 된다. 아니, '용의'는 없었다. 심한 갈등의 골로 벌어진 사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 정도의 간극. 신사동에 새로운 아파트를 분양받아 들어가는 시점에 부부는 한 명은 작업실로 한 명은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가는 비현실적인 별거에 착수하게 된다. 계기는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진 부부. 그 거리 어느 지점엔가 '나'의 '엄마'가 있다. 나를 낳지도 온전히 키우지도 못하고 떠난 두 번째 엄마. 생모는 아버지의 외도로 들어오게 된 시앗에게 '나'를 지목하여 '나'의 엄마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무언의 압력이었다. 아이를 갖지도 이곳에 정착하지도 말라는. 수호는 그러나 그 엄마를 잊지 못한다. 여기까지 왔을 때 언젠가 어디에선가 티비에서 두번이나 본 그 드라마가 생각났다. 젊은 엄마. 눈이 땡글하게 큰 조은숙의 연기였다. 그 등에 업힌 아이. 그러한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걷는 길에서 나온다. 이순원의 또다른 작품 <아들과 함께 걷는 길>과 이 작품이 한데 섞인 그러한 드라마였던 것같다.

 

 

 

'업힌다'는 행위는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모든 그리움과 아련함과 유년의 애착을 한데 그러모으고 남는다. 나를 자주 업어 주었던 나의 꼬부랑 할머니는 나를 업고 정육점 앞에서 처음으로 내가 손으로 '고. 고'하며 고기를 가리키던 시간을 잊지 못하셨다. 나는 이렇게나 젊은데 나의 작은 아이를 조금만 업어도 숨이 턱하니 막힌다. 업어주는 데에 인색하다. 나는 아이를 업어준 엄마로는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아기띠로 안고 고 작은 다리를 달랑거리며 사방팔방을 다녔다. 버스도 지하철도 계단도 지나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의 달랑거리는 오종종한 다리를 때로 양해를 얻고 만져보며 좋아들 했다. 그 정도의 추억이다. 그 아기띠를 뒤로 돌려 업고 무릎을 꿇고 시장통에서 국수를 먹은 기억은 있다. 아이를 누일 곳도 앉힐 곳도 없는 그런 협소한 곳. 국수맛은 일품이었다.

 

'나'는 수색으로 가면 그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번이나 그 '어머니'의 무늬를 직접 찾아 더듬을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피한다.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끌리듯 수색은 '나'의 뒷덜미를 잡는다. 진짜 어머니가 아닌데, 정말 나의 가족도 아니었는데 누구나 한 명쯤은 자신의 유년을 통째로 저당잡은 하나의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의 복기는 본능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만날 듯 만날 듯 만나지 못하고 잡을 듯 잡힐 듯 하면서도 끝내 놓치고 마는 그러한 것. 삶은 그러한 것들의 점철일런지도 모른다.

 

'성장'에는 눈물이 스며든다. 그 안에 담긴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떠오는 길에 이 '수색'이 있다. 마지막 장면. '나'의 자전적 작품이 발표되고 말없이 계속 걸려오는 그 전화. 자동응답기에 '안녕하세요. 이수홉니다. 저는 지금 수색에 가 있습니다'는 말을 녹음해 둔 '나'. 너무나 아름답고 아련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메시지는 잃어버린 그 '어머니' 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색의 그 어머니는 마침내 수호의 그 메시지를 받았다. 작가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었던 그 물빛 무늬는 이제 읽는 이들을 향하여 점점이 번져 온다. 파문처럼.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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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11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은숙, 그런 드라마가 있었군요. 블랑카님의 아련한 유년의 기억도 작품의 이야기만큼이나 물빛 같아요. 수색ᆢ물빛. 늘 마음이 깨끗하게 벅차오르는 페이퍼 고마워요.^^

blanca 2013-01-13 21:0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맙습니다. 이 책 참 좋더라고요. 오랜만에 재미있고 뭉클한 한국 소설을 만나 참 반가웠어요^^

Jeanne_Hebuterne 2013-01-15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를 추천합니다. 이 사람의 가난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무엇보다도 블랑카님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읽으실 듯 해서요.

blanca 2013-01-16 17:59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쥬드님, 찾아 볼게요^^

blanca 2013-01-16 18:02   좋아요 0 | URL
품절이네요. 도서관에서 한번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3-01-18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순원 작가라...오늘 처음 알았네요. 저도 다음에 기회되면 찾아봐야겠어요.^^

2013-01-18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1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3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